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德溪先生年譜
덕계집 연보 제1권 / 연보〔年譜〕
무종(武宗) 정덕(正德) 16년(1521) 중종대왕 16년 신사
4월 2일 계미 - 진시이다. - 에 선생은 산음현(山陰縣) 덕천리(德川里) 집에서 태어났다. - 선생의 5대조 직장공(直長公)은 거창현에서 산음현 서쪽 석답촌으로 이사하였는데, 증조부 교수공(敎授公)에 이르러 또 덕천리로 옮겼다. -
세종(世宗) 가정(嘉靖) 1년(1522, 중종17) 임오 선생 2세
2년(1523) 계미 선생 3세
3년(1524) 갑신 선생 4세
4년(1525) 을유 선생 5세
5년(1526) 병술 선생 6세
○ 이해에 부친 참봉공(參奉公)이 글자를 가르쳤는데, 과정(課程)을 정해 주거나 독려하지 않아도 외고 익히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문장의 뜻이 의심나거나 모르는 곳이 있으면 반드시 충분히 묻고 세밀하게 탐구하였다. 여러 아이들이 장난치며 노는 때에도 따라 노는 적이 없어서 보는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6년(1527, 중종22) 정해 선생 7세
7년(1528) 무자 선생 8세
8년(1529, 중종24) 기축 선생 9세
《대학》, 《논어》 등의 책을 읽었다.
9년(1530) 경인 선생 10세
10년(1531) 신묘 선생 11세
참봉공이 세상을 떠났다. - 참봉공이 병석에 누운 채 선생의 등을 어루만지며 “나는 죽으면 그만이지만 너는 누구에게 배워서 사람이 되겠느냐?”라고 하자 선생이 울면서 받아들였다. 병세가 위독해지자 마당에 꿇어앉아 하늘을 향해 두 번 절하고 목 놓아 울면서 기도하였는데, 이렇게 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 상을 당하자 예를 집행하는 것이 어른 같았다. -
11년(1532, 중종27) 임진 선생 12세
12년(1533) 계사 선생 13세
탈상했다.
13년(1534) 갑오 선생 14세
조모 정씨의 상을 당했다. - 선생은 참봉공이 임종할 때 등을 어루만지면서 했던 말을 기억하고, 뜻을 가다듬어 독서하였는데, 《중용》에 더욱 힘을 쏟았다. 침잠하고 사색하며 천 번을 외워서 처음부터 끝까지 완숙하게 꿰뚫어 이해하였는데, 이 방법을 다른 책에도 적용하여 칼로 대나무를 가르듯 막힘이 없이 이해하였다. 외숙 도양필(都良弼) 공에게 《주역》을 배웠는데, 이후로 여러 경(經)과 자(子)와 사(史)를 모두 스스로 연구하여 묵묵히 이해하였다. -
14년(1535) 을미 선생 15세
15년(1536) 병신 선생 16세
조부 교수공(敎授公)의 상을 당했다.
16년(1537, 중종32) 정유 선생 17세
17년(1538) 무술 선생 18세
탈상했다. - 정수암(淨水菴)에 들어가 독서하였다. 전후 10여 년 동안 문을 닫아걸고 단정히 앉아 외고 읽기를 그치지 않았으며, 절에 있는 승려와 한 마디도 나눈 적이 없었다. ○ 매일 밤 《중용》을 두 번 외웠다. 비록 다른 책을 읽거나 경황이 없을 때에도 이와 같이 하였다. -
18년(1539) 기해 선생 19세
○ 선생은 자신의 학문이 궁벽한 고을에서 스스로 터득한 공부인지라 잘못된 곳으로 귀결되는 결과를 면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구졸재(九拙齋) 양희(梁喜)를 좇아 경전의 가르침에서 의심나는 뜻을 논하였다. 나아가 먼 곳으로 가서 널리 묻고, 다시 이를 학문을 넓히는 바탕으로 삼았다.
19년(1540) 경자 선생 20세
20년(1541, 중종36) 신축 선생 21세
○ 옥계(玉溪) 노진(盧禛)이 선생께서 벗들과 떨어져 홀로 지내며 경전을 궁구한다는 소문을 듣고 만나 보고자 하였는데, 한 번 만나자 오랜 친구처럼 가까워져 마침내 흉금을 터놓기에 이르렀으며, 아주 오래도록 논변을 주고받았으니 서로 발전하는 이로움이 있었다.
21년(1542) 임인 선생 22세
22년(1543) 계묘 선생 23세
23년(1544) 갑진 선생 24세
모친 도씨(都氏)의 상을 당했다. - 삼 년 동안 죽을 먹고 여막을 지키며 슬피 울었는데, 잠시도 여막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 당시 선생은 아직 장가를 들지 않았던 터라 형제자매들이 집안 살림을 맡아 어려운 일이 많았는데, 선생은 말투와 낯빛에 조금도 기미를 나타내지 않았다. 우애가 더욱 돈독해졌으며 시종 사이가 벌어진 적이 없었다. 향리에서 그 효성과 우애를 칭송하면서 정려를 내려 포상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자 선생은 부끄러워하며 피해 버렸다. -
24년(1545, 인종대왕 1년) 을사 선생 25세
계조모(繼祖母) 석씨(石氏)의 상을 당했다. - 전후 10여 년 동안 다섯 번 상복을 입었는데 한결같이 예의와 제도를 따랐으며 시종일관 게을리하지 않았다. -
25년(1546, 명종대왕 1년) 병오 선생 26세
26년(1547, 명종2) 정미 선생 27세
탈상했다.
27년(1548) 무신 선생 28세
부인 이씨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 진사 이광(李光)의 딸이다. 이공이 일찍이 “이 아이는 어질어서 틀림없이 어진 선비에게 시집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당시 유공작(柳公綽) 공이 산음 현감(山陰縣監)으로 있었는데 이공과는 내외종 간이었다. 어느 날 이공의 집에 들러서, “선비 가운데 어진 사람을 얻고자 한다면 오모(吳某)만 한 사람이 없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그 고을에 있어서 그의 사람 됨됨이를 잘 아는데, 덕행과 문예가 보통 무리들과 다릅니다.”라고 하니, 이공이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
28년(1549, 명종4) 기유 선생 29세
29년(1550) 경술 선생 30세
30년(1551) 신해 선생 31세
가을에 진사시 초시에 합격하였다. ○ 덕산(德山)으로 가서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을 배알하였다. - 당시 남명 선생은 진주 덕산동에 은거하며 수양하고 있었다. 선생이 그를 따라 배웠는데 흥기된 바가 많았다. -
31년(1552) 임자 선생 32세
봄에 진사시 회시(會試)에 2등으로 합격하였다.
32년(1553, 명종8) 계축 선생 33세
33년(1554) 갑인 선생 34세
34년(1555) 을묘 선생 35세
35년(1556) 병진 선생 36세
성균관에서 공부하였다. - 사대부로서 경술(經術)에 뛰어난 이들과 서로 강론하였는데 그들에게 매우 인정을 받았다. -
36년(1557) 정사 선생 37세
37년(1558) 무오 선생 38세
10월. 문과 시험에 급제하였다. - 남명 선생이 일찍이 도를 행할 사람으로 선생을 인정하면서, “나는 자강(子强)에게 매우 기대를 건다.……”라고 하였다. -
38년(1559) 기미 선생 39세
1월. 권지 성균관 학유가 되었다가 성주 훈도(星州訓導)에 제수되었다. - 선생은 후학을 힘써 가르치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여기고, 유생을 가려 뽑아 네 등급으로 나누어 가르쳤다.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어릴 때부터 선생에게 배웠는데, 시종일관해서 학업을 마쳤다. -
39년(1560, 명종15) 경신 선생 40세
성주 훈도로 재직하였다. -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이 성주 목사로 있었다. 선생은 뜻을 같이하여 호응하면서 서로 주자서(朱子書)를 강론하였는데 추위나 더위 때문에 그만두지 않았다. ○ 퇴계 선생이 금계에게 보내는 답서에서 “오 교관(吳敎官)과 주자서를 익히며 궁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네. 바쁜 가운데서도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 더욱 하기 힘든 일인지라 깊이 탄복하면서 장려한다네.”라고 하였다. 또 “일찍이 들으니 오자강(吳子强)이 나를 방문할 뜻이 있다고 하니, 목마르게 기다려진다네. 그 사람이 스스로 발분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실로 한 번 만나서 나의 몽매와 부끄러움을 터놓고 싶은데, 언제쯤 이 소원을 이룰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네.”라고 하였다. -
40년(1561) 신유 선생 41세
성주 훈도로 재직하였다.
41년(1562, 명종17) 임술 선생 42세
여름. 성주 훈도로 있다가 병으로 사직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 금계 황준량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심경》과 《역학계몽(易學啓蒙)》의 의심스런 뜻에 대해 질문하였다. -
42년(1563) 계해 선생 43세
도산(陶山)으로 가서 퇴계(退溪) 이 선생(李先生)을 배알하였다. - 주자서를 배우고 《심경》과 《근사록》에 대해서 질문하였다. 이 선생은 사람들에게, “자강(子强)은 타고난 성품이 순박하고 성실하며 이 학문에 힘을 쏟는 것이 매우 간절하고 독실하니 진실로 유익한 벗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씀하기를 “《중용》과 《대학》에 대한 자강의 공부는 극도로 정밀하고 심오하다. 이는 짧은 시간에 얻은 것이 아니다. 고요한 가운데서 분명하게 체득하여 오랫동안 궁구하고 축적한 공부가 아니라면 쉽게 이런 경지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연평답문(延平答問)》에 관한 질의가 있었다. - 선생이 돌아가려 하자, 퇴계 선생은 시를 지어 주면서 “주자가 남긴 글은 백대의 스승이라, 하늘에 닿고 땅에 서려 정밀한 데까지 들어갔네. 나귀에 책 상자 싣고 와 바로잡으려고 한 것에 감동했나니, 부끄럽구나, 나는 늙어서도 궁장(宮牆)을 엿보지 못했는데.”라고 하였다. 9월에 금계 황준량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 제문이 있다. -
43년(1564, 명종19) 갑자 선생 44세
5월. 성균관 학유에 제수되었다. ○ 7월. 남명 선생을 모시고 덕산사(德山寺)에 모였다. - 조 선생이 편지를 보내 초청하였다. 하항(河沆)ㆍ유사명(柳思明)도 와서 모였다. - 10월에 정자(正字) 도희령(都希齡)과 한양으로 갈 것을 약속했다. - 도공은 자가 자수(子壽), 호는 양성헌(養性軒)이며, 벼슬은 저작(著作)이다. 선생이 일찍이 도 선생을 칭찬한 것으로 보아 도의로 인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 11월. 저작 도 선생과 함께 한양으로 가서 소격서동(昭格署洞)에 머물렀다.
44년(1565) 을축 선생 45세
1월. 성균관 학록(學錄)에 제수되어 중학(中學)을 관장하였다. - 제생을 모아 《중용장구》와 《대학장구》를 가르치면서 심오한 이치를 열어 보였는데 조금도 게을리 한 적이 없자 한양의 명류(名流)들이 날마다 와서 질문하였다. 초당(草堂) 허엽(許曄)이 당시 성균관 대사성이었는데, 《대학》을 강론하면서 “우리들 가운데에서는 그와 견줄 만한 사람이 없다.”라며 선생을 칭찬하였다. ○ 도 저작과 함께 집구시(集句詩)를 읊었다. - 저작(著作) 정탁(鄭琢)이 방문하였다. ○ 4월에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선생의 옛집을 방문하였다. - 그때 이런 시를 지었다. “화담은 일찍이 연비어약(鳶飛魚躍)의 이치를 깨달았으니, 그때 그와 가까이 살지 않은 것이 한스럽네. 공연히 부러진 비석 보니 생각이 끝이 없는데, 저물녘 돌아가는 길에 홀로 머뭇거리네.” -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승하하였다. ○ 남명 선생의 서신이 이르렀다. - 선생은 일기(日記)에서 “남명 선생이 서신을 보내 가르쳐 주셨는데, 혼미함과 나태함에 대한 경계가 지극하였다. 비록 천리 밖에 계시지만, 가을 서리와 이글거리는 태양을 대하는 것 같아 흠칫하여 머리털이 서는 듯하니, 나약한 정신을 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라고 하였다. - 정랑(正郞) 기대승(奇大升)을 방문하였다. ○ 7월에 아들 장(長)이 태어났다. ○ 8월. 도 저작에게 시를 지어 주었다. - 시는 다음과 같다. “돌아가고 싶어 하는 먼 길 떠난 나그네 또 가을을 맞아, 내 집과 산하는 무고한지 물어보네. 달빛 비친 갈대꽃은 천 점의 눈송인데, 그대와 함께 어느 때나 강가 누각에 올라볼까.” 도공이 화답한 시는 다음과 같다. “한양의 가을에 기러기 행렬 높이 떠가는데, 저 기러기 함양(咸陽)과 강성(江城)을 지나갈까. 천 리 먼 길 나그네는 돌아가지 못하고, 겨우 편지 한 장 해운루(海雲樓)에 부친다네.” -
사관(四館)이 창경궁(昌慶宮)에서 일회(一會)를 열 때 참석했다. - 요승(妖僧) 보우(普雨)를 목 베라고 청하였는데 선생이 소를 지었다. - 9월. 병가(病暇)를 내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 떠나려 할 때 박사(博士) 정탁(鄭琢)과 여러 사우(士友)들이 와서 전별하였다. 도자수(都子壽 도희령)가 시 절구 한 수를 읊어서 “이 몸은 먼 길 떠나는 벗과 영원히 함께하니, 고향의 국화를 아직 즐길 수 없네. 귀뚜라미 침상까지 다가와 가을이 저물려 하는데, 돌아가고픈 간절한 마음 밤이 깊을수록 새록새록.”이라고 하였다. 선생이 화답하기를 “맑은 술 다 비었고 놀던 친구도 흩어졌는데, 홀로 밝은 창에 기대 잠을 이루지 못하네. 천리 길 나서는 밤 달은 밝은데, 그대와 함께 어디에서 새벽을 기다리랴.”라고 하였다. 박사 정탁이 지어 준 시에 “이별의 글을 지어 전별하려 하니, 이별의 글에 도리어 마음을 남긴다네. 가을의 정회는 원래 괴로운데, 쓸쓸한 경치가 다시 가슴속에 들어오네. 객관 주위 산들도 저물고, 풀벌레는 사방에서 울어대네. 하늘은 높고 물은 아득한데, 어디에서 다시 또 소식을 통할까.”라고 하자, 선생이 화답하여 “너른 물결 이는 곳에서 이별하려 하니, 멀리 떠나는 나그네 심정 견디기 어렵네. 강이 맑으니 시는 더욱 좋고, 정이 긴밀하니 말이 서로 파고드네. 달을 대한 것은 어젯밤의 정취요, 함께 배를 타고 이 밤에 노래하네. 이별의 정회는 아직 그대로라, 설렁설렁 젓는 노는 멋대로 노래를 재촉하는 듯.”이라고 하였다. 또 부사(府使) 정현(鄭礥), 저작 도희령과 함께 서로 시를 주고받았다. -
함양에 도착했다. 진사 강익(姜翼), 정자(正字) 임희무(林希茂)가 마중을 나왔다. - 오준(吳俊)과 두 아우도 마중을 나왔다. - 옥계(玉溪) 노진(盧禛)을 현의 객관에서 만났다. ○ 환아정(換鵝亭)에서 놀았다. - 김보(金輔)ㆍ이삼택(李三宅)ㆍ이삼정(李三正)이 따랐다. ‘김보’는 ‘김보(金寶)’라고도 하는데, 호는 술고재(述古齋)이다. ‘고(孤)’ 자를 운자로 하여 시 한 수를 지었는데 “덕을 이웃으로 삼아 스스로 외롭지 않으니, 이 밤에 어찌 한마디 말이 없겠는가. 이 정자에서 맑은 의미를 헤아리니, 경호강 가을 달이 맑고 깨끗하게 비추네.”라고 하였다. - 선조의 묘소에 성묘하였다. ○ 매촌(梅村) 정복현(鄭復顯)이 새로 지은 집을 가서 보았다. - 매촌이 집을 새로 지었는데, 산수가 아름다웠다. - 생원 조종도(趙宗道)가 방문하였다. ○ 도 저작ㆍ정매촌(鄭梅村)과 함께 지곡사(智谷寺)에서 남명 선생을 기다렸다. - 남명 선생이 이날 약속을 했으나 도착하지 않자 주무숙(周茂叔)의 ‘정(亭)’ 자 운을 써서 우러러 기다리는 뜻을 담아 “한 해가 저물 적에 훌륭한 분 기다리나니, 찬비가 선생님의 옷을 적실까 도리어 걱정되네. 구름 깊은 돌길에 이끼가 미끄러워 늦으실까, 그래도 도천(桃川)을 향해 사립문에 기대섰네.”라고 읊었다. 남명 선생의 서신을 받았다. 오준(吳俊)ㆍ오현(吳俔)ㆍ오탁(吳倬)ㆍ우치적(禹致績)이 편지를 가지고 왔는데, 병환으로 약속에 맞춰 오지 못했다고 사과하셨다. - 남명 선생이 오셨다. 도 저작ㆍ정매촌과 함께 선생을 모시고 며칠을 지냈다. ○ 입재(立齋) 노흠(盧欽)이 방문하였다. 효렴재(孝廉齋) 이경주(李擎柱)와 최유형(崔有亨) 공을 뵈었다. - 이ㆍ최 두 분은 연세가 곧 90이 될 터인지라, 고을 사람들이 부곡사(釜谷寺)에서 위안잔치를 마련하였다. 선생이 시를 지어 “흰머리에 쇠한 얼굴 술동이를 마주하니, 영광스런 빛이 산골 마을을 비추는 것 사랑스럽네. 꼭 두 노인이 정승처럼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 고을에 달존(達尊)이 있음을 자랑하네.”라고 하였다. -
11월에 옥계 노진과 함양 남계서원(灆溪書院)에서 만났다. - 당시 이계(伊溪) 김우홍(金宇弘)이 부모님을 봉양하기 위해 이 고을에 수령으로 내려와 있었는데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의 형제들이 모두 관아에서 부모님을 받들었다. 선생은 남계서원에서 옥계 노진을 만났는데, 이를 기회로 김공의 형제들과 함께 어울려 지내면서 강론을 그치지 않았다. - 매암(梅庵) 조식(曺湜)도 와서 참석했다. ○ 남계서원에 머물렀다. 옥계 노진, 개암 강익과 더불어 《연평답문》ㆍ《주자연보》를 강론하였다. ○ 12월. 동산사(東山寺)에 가서 효렴재를 뵙고 주자서를 배우며 토론하였다.
45년(1566) 병인 선생 46세
1월. 남명 선생을 모시고 지곡사에서 모였다. - 남명 선생이 선생에게 서신을 보내 옥계 노진, 동강 김우옹을 불러 이 절에서 만나자고 약속하였다. 사림이 운집하여 요사채에 모두 수용할 수 없었다. 닷새를 머무르다가 파하고 돌아갔다. 남명 선생은 선생이 서계(西溪)에 집을 지을 계획이 있음을 알고 가본 것이다. 세 곳을 둘러보았는데 가장 높은 곳에 이르자, 제일 좋은 곳이라 하셨다고 한다. 사우(師友)가 서로 어울려 지내는 즐거움과 애틋한 정을 상상해 볼 수 있다. - 남명 선생이 시를 보내왔다. - 그 시에 “한 발짝 내디디며 막 헤어지던 곳이, 오다 보니 멀어져 백 리인 듯하구나. 산마루에서 아련히 돌아보니, 한양 가는 길은 더더욱 멀더구나.”라고 하였다. 또 “산 북쪽 절에서 잠시 만났는데, 모두가 훌륭한 인물이었네. 보아하니 모두 실력이 충실하고, 마음에 맞는 벗으로서 동지가 될 만하네. 바람에 떨리는 나무 보고 부모를 생각하고, 의리를 지키다 억울하게 당한 사람을 슬퍼하네. 아름다운 손님 대접할 것이 없기에, 남쪽 시냇가에서 마름을 캐었다네.”라고 하였다. - 도 저작을 문병하였다. - 선생은 그를 위해 의원에게 물어서 약을 지어 보냈다. 염려하고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을 스스로 그칠 수가 없어서 그가 죽을 때까지 그러하였다. - 이달에 성균관 학정(成均館學正)에 제수되어 한양으로 가서 사은숙배하였다. ○ 9월. 일재(一齋) 이항(李恒) 선생이 머무는 여관으로 가서 배알하였다. - 일재는 이름이 항(恒)인데, 당시 남명 선생과 함께 임금의 부름을 받고 한양에 왔다. - 10월. 예문관에 천거되었다. - 당시 조정에서 선생이 어질다는 것을 알고 사관으로 천거했으나 사관(史官)은 재주를 시험하는 것이 관례인지라 선생이 나아가지 않았다. - 남명 선생이 곧 도착하리라는 소식을 듣고 한강으로 나가 마중하였다. ○ 남명 선생이 방문하였다. - 남명 선생이 한양에 온 지 열흘 만에 남쪽으로 돌아가자, 또 한강으로 나가 전송하였다. - ○ 12월. 성균관 박사로 승진하였다.
명나라 목종 융경 1년(1567, 명종22) 정묘 선생 47세
1월. 승정원주서 겸 기사관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휴가를 청하였다. - 일기가 있는데 문집에 보인다. - 2월. 성균관 전적으로 승진하였다. ○ 3월.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다. ○ 4월. 예조 정랑에 제수되었다. ○ 5월. 정언에 제수되었다. ○ 6월. 예조 좌랑에 제수되었다. ○ 명종이 승하하였다. - 선생은 상제(喪制)를 지켜 극진히 애도하였는데 부모상과 다름이 없었다. 친구들이 선생에게 깊은 병이 있다는 것을 알고 생강과 계피를 써 보라고 권하자, 선생은 “방상(方喪)은 신하가 온 마음을 바쳐야 할 일이네. 나는 스스로 견딜 수 있네.”라고 하면서 그 말을 듣지 않고 상제를 마쳤다. - 8월.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다가 같은 달에 병조 좌랑에 제수되었다.
2년(1568, 선조대왕 1년) 무진 선생 48세
2월. 병조 좌랑에 제수되었다. ○ 4월.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다. 상소하여 학문에 힘쓰고 간언을 받아들이라고 청하였다. - 소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신이 삼가 듣건대, ‘군주가 학문에 힘쓸 때는 반드시 뜻을 겸손히 하는 것을 기본 바탕으로 삼아야 하며, 간언을 받아들일 때는 마음 비우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라고 합니다. 대개 뜻이 불손하면 항상 민첩한 공부를 할 수 없고, 마음이 비어 있지 않으면 많은 선(善)을 받아들일 수가 없으니, 어찌 자기 지혜에 만족하면서 의리의 심오함을 탐구할 수 있겠습니까. 사사로운 주장이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천하의 말을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고대의 제왕들은 그의 학문을 제대로 익히지 않은 것을 근심하지 않고 오직 그 뜻이 불손한 것을 근심하였으며, 다른 사람의 말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을 책망하지 않고 오직 그 마음이 비어 있지 않은 것을 책망하였습니다. ‘묻기를 좋아하면 넉넉해진다.’라는 말과 ‘자신을 버리고 남을 좇는다.’라는 말은 어찌 이른바 뜻을 겸손히 하여 민첩하게 하라는 말이 아니겠으며, 마음을 비워서 받아들이라는 실상을 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그러하지만 이것은 귀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敬)으로써 안을 곧게 하며 성(誠)으로써 가득 채워 허위와 가식이 없어지고 쉬거나 그침이 없어진 다음에 그 뜻을 지키고 그 마음을 보존하여 천하의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간혹 주재하는 마음이 의거하는 바가 없이 들락날락하는 마음으로 의심하며, 두 마음을 품는 총명함을 고집하여 자신을 넓다고 생각하고 남은 좁다고 생각하면서 잠시 열었다가 도로 닫아 버리며, 길거리의 말을 듣는 가식은 있으나 남의 말을 즐겨 듣는 실상이 없으시면, 넓고 흡족하게 여기는 것은 다만 어둡고 막힌 것을 더할 뿐이고, 고명하다고 믿는 것은 단지 집착하여 막히기에 족할 뿐입니다. 어찌 일마다 바로잡으며 사람마다 그르다고 하겠습니까.
신이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는 빼어나게 밝은 자질로 세상을 밝히는 학문을 익히셨으며 날마다 유신(儒臣)들을 접하시느라 잠자고 먹을 겨를도 없으니, 전하께서 치도(治道)에 있어서 근본으로 삼아야 할 것을 아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널리 공의(公議)를 모으고 간사함을 물리치며, 사사건건 올라오게 마련인 간언을 용납하고 받아 주시니 전하께서 간언을 따르는 것이 지극하다 할 수 있습니다. 사사로움에 편벽되이 매이고 고집스럽게 막힌 생각에 묶여 있으시다가도, 소차(疏箚)로 아뢰는 바가 있으면 ‘반복해서 그 뜻을 헤아려 보니 모두 좋은 말이다.’라고 하시거나 ‘나의 병통에 꼭 들어맞으니 어찌 감히 스스로 경계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시니 이는 진실로 전하께서 마음으로 깨달은 것이며 진실로 날로 새로워지고 또 나날이 새로워지고자 하는 뜻입니다. 온 나라의 신민(臣民)이 누군들 기쁜 마음으로 우러러보면서 태평한 시절을 기다리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근일에 들어서 사람들의 마음이 믿으려 하다가도 다시 의심하며 선비의 기상이 진작되려 하다가도 다시 막히니, 전하께서 학문을 좋아하시는 성실함에는 체험의 힘이 적다는 것과 간언을 따르는 아량에는 전환(轉圜)의 아름다움에 부끄러움이 많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옛날 진선(進善)의 기(旗)를 세우고 감간(敢諫)의 북을 설치한 것, 좌우와 앞뒤로 걸맞지 않은 사람이 없었던 것, 출입ㆍ기거에 경계하지 않음이 없었던 것에서 태사(太史)의 가르침과 악사(樂師)의 깨우침에 이르기까지 모두 충성을 바치게 할 수 있었습니다. 군주는 조그마한 잘못도 없어서 덕업(德業)을 날로 새로이 하였으며, 정치에 실수가 없어서 정치와 교화가 두루 통했던 것입니다. 지금 관직을 설치하고 관원을 둔 것도 그들이 자신의 책임을 다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잘못된 점을 보필하게 하려는 것인데, 신하가 자신의 의견을 아뢸 때마다 문득 다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기색을 보이시면, 중요한 일에 관련되어 있는 기미를 살피지 못하는 바가 있을 것이고 작은 일에도 간혹 어려움을 남기게 될 것입니다. 모자라는 부분을 꾸짖고 어려움을 책망하는 일은 항상 고인(古人)에게 부끄러운데 오히려 그것을 지나치다고 꾸짖으시며, 예나 지금이나 공의(公議)는 저절로 생기는 것인데도 일찍 일으키지 않았다고 그것을 거부하십니다. 혹 치우친 생각에 얽매여 때때로 온당하지 못한 명을 내리시며, 비록 윤허를 받는다 해도 반드시 열흘이나 한 달이라는 오랜 기간을 넘기시니, 구차하게 따르고자 하는 뜻은 있어도 기꺼이 듣고자하는 성의는 없습니다.
신이 삼가 의심컨대, 전하의 학문은 일취월장하고 있으나 일을 행하는 업적은 초기보다 못한 것 같습니다. 전하의 빼어난 현명함으로 어찌 정사를 의논하고 생각하는 일을 중요시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과 언로(言路)를 넓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모르시겠습니까. 다만 한 번 생각하는 사이에 사사로운 주장이 먼저 들어오는 것을 면치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빼어난 밝음으로 비추어 보신 것이라 여겨서 독단(獨斷)하실 수 있으니, 어찌 반드시 다른 사람의 말을 기다려서 중지(衆智)에 의존하시겠습니까.
이것은 바로 《상서(商書)》에 나오는 자용(自用)의 가르침이자 《주역》에 나오는 항룡(亢龍)의 경계로, 신이 전하께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병통에 대한 약은 전하께서 익히 알고 계시니, 어찌 마음에서 구하고 학문에서 받아들이는 터전을 넓히는 것이 아니겠으며 사람에게서 구하고 자기를 다하는 방책이 아니겠습니까. 진실로 다른 사람의 선이 나의 선이어서 안팎도 없고 피차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면, 뜻은 겸손하지 않을 수 없고 마음은 비우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로써 동정을 관통하고 내외를 합하고 상하를 통하고 시종을 하나로 하는 것이니 또 어찌 ‘지경(持敬)’의 밖에 있겠습니까. 그 힘쓰는 방책은 반드시 이 마음의 신령함을 바탕으로 삼아 단정하고 장엄하며 면밀하고 전일한〔端莊精一〕한 가운데 보존하며, 이 이치의 묘함을 알고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변별하는〔學問思辨〕 때에 궁구하며, 보지 않고 듣지 않을 때에도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것〔戒愼恐懼〕을 더욱 엄하고 더욱 공경스럽게 하며, 은미하고 그윽하여 혼자만 아는 곳에서 선악의 기미를 삼가는 것을 더욱 정밀하게 하는 것입니다. 크고 작은 것을 서로 함양하고 동(動)과 정(靜)을 서로 기르면서 힘써 따르고 오래도록 쉬지 않으면, 편협하고 막힌 병통이 녹아 사라져 혼연일체가 될 것입니다. 텅 비어 밝으며 넓고 커다란 본체가 속기를 벗어나서 모습을 드러내면 온갖 변화에 대응하여 저마다 그 마땅함을 얻게 될 것이니, 나라를 다스릴 포부와 재능 및 협조를 모색하는 것 등이 모두 그 속에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일들은 애초에 오만하고 경박한 자가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고, 반드시 겸손한 마음을 지닌 속으로부터 나옵니다. 무릇 쉽게 흩어지는 것이 마음〔心〕이며 막기 어려운 것이 기(氣)입니다. 지극히 넓은 것이 일〔事〕이고 지극히 요약된 것이 이(理)입니다. 놓기 쉽고 막기 어려운 마음〔心〕과 기(氣)로 지극히 넓고 지극히 요약된 일〔事〕과 이(理)에 임해서, 조금이라도 교만함이 그 속에 싹트면 장차 무엇으로 정조(精粗)를 탐색하고 진망(眞妄)을 분별하여 만 가지 변화의 근원을 세워서 한 마음의 묘함을 궁구하겠습니까? 순 임금이 묻기를 좋아하고 살피기를 좋아한 것과 우 임금이 스스로 자만하지 않은 것과 탕왕이 스스로 스승을 얻을 수 있었던 것과 문왕이 도를 바랐으나 보지 못한 것과 주공이 교만하거나 인색하지 않은 것과 공자께서 이른바 자신을 낮추어 몸가짐을 단속하신 것과 안연이 있으되 없는 듯하며 충실하되 빈 듯했던 것이 모두 이 때문이었습니다. 전하께서는 유의하십시오.
신이 삼가 들으니, 부열(傅說)이 고종(高宗)에게 아뢰기를 ‘나무는 먹줄을 따르면 곧게 자를 수 있고 임금은 간언을 따르면 성스러워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성군이 되는 방책은 학문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분명하지만 또한 간언을 받아들여서 그 허물을 바로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뜻을 겸손하게 하는 단서를 근본으로 삼고 다시 마음을 비우는 방책을 지니면, 공력이 서로 작용하여 겉과 속이 서로 도움이 될 것이니, 어찌 마음에서 얻고 말에서 얻지 말라는 것이 있겠습니까. 그 받아들이는 도는 반드시 안색을 온화하게 하고, 즐거움을 가까이하고, 말을 하되 비루함과 패역함을 멀리하며, 너그러운 아량을 넓히고, 겹문이 열리듯 통하고, 다른 사람이 잘못을 알려 주는 것을 즐거워하여 그것을 고치는 일에 혹 인색할까 두려워하고, 다른 사람이 의로움을 상주하는 것을 즐기되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일에는 혹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완곡하게 타이르는 말은 기뻐하고 참뜻을 찾아야 하며, 깨우쳐 주는 말은 따르고 곧 고쳐야 합니다. 고지식한 자를 포용하시고 그 말을 어기지 마십시오. 천근한 말을 비루하다 여기지 마시고 그 뜻을 잘 살펴 주십시오. 지나치다고 해서 그 곧은 기운을 꺾지 마시고, 세미하다고 해서 그 큰 덕을 부담스럽게 여기지 마십시오. 총명함을 자부하면서 홀로 사사로운 지혜를 쓰지 마시고, 치밀함을 현명함이라 여겨 세밀한 뜻을 억지로 탐색하지 마십시오. 구차하게 애써 따르는 습관이 없으면 넉넉히 포용하며 기꺼이 받아들이는 아름다움이 생깁니다. 정신을 한데 모아서 기쁘게 서로 마음을 맞추어 가슴속에 품은 것을 반드시 통달하면 논설에 의심이 없게 될 것입니다. 마음의 그릇됨을 바로잡아서 한 가지 일도 정도(正道)에서 나오지 않음이 없게 하시고, 다른 사람의 실수를 바로잡아서 온 나라가 그 의로움을 두려워하도록 하십시오. 선비의 기상은 그로써 진작되고 인심은 그로써 기뻐 박수 칠 것입니다. 아랫사람의 의견이 쉽게 위로 전달되고 위에서 쉽게 알게 되면, 보는 것이 더욱 밝아지고 듣는 것이 더욱 밝아지리니, 비록 나라를 팔아먹고자 하는 간계를 가지고 있어도 그 틈을 엿볼 데가 없고 갑작스런 변고가 일어날 곳이 없을 것입니다.
지록위마(指鹿爲馬)의 적신이 먼저 진(秦)나라 사람의 입을 막았고, 흉노족의 반란이 실로 장구령(張九齡)의 간언을 막은 데에서 말미암은 것과 비교해 볼 때, 실로 어떻겠습니까. 역대의 군주들은 그 누가 간언을 따르면 창성하고 간언을 막으면 망한다는 것을 몰랐겠습니까. 생각하면 거울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직 마음을 비우지 못했던 탓에 위태롭고 혼란한 처지에 빠져도 스스로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정자(程子)가 이르기를 ‘자아(自我)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인지라, 애써 버리려고 해도 자아를 지키려는 마음은 견고하고 남을 따르려는 마음은 약할까 걱정스럽다.’라고 하였습니다. 진실로 편견에 사로잡힌 사사로움이 먼저 마음속에 자리를 잡으면 그것을 버릴 수가 없으니, 충성스런 말과 논의가 어디로 들어오겠습니까. 그러니 학문에 힘쓰는 것과 간언을 받아들이는 것이 비록 다른 일이라고 하지만, 병통을 치유하는 것이라는 점에서는 같은 것입니다. 배움에 독실하면서 다른 사람의 충고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며, 그 뜻을 겸손하게 하지 않으면서 자기의 마음을 비우는 자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옛날에 간언을 받아들이면서 학문에 힘쓰지 않는 사람은 간혹 있었지만, 학문에 독실하면서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 언로가 열렸는지 닫혔는지를 보면 배운 바가 깊은지 얕은지 대개 알 수 있습니다.
신은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주역》에 나오는 하제(下濟)의 가르침을 터득하고, 요 임금이 익(益)의 계책을 받아들인 것을 본받으며, 공자가 겸손한 덕행으로 스스로를 다스린 가르침을 본받으십시오. 그래서 강학에 임할 때는 먼저 뜻을 겸손하게 하는 것을 위주로 삼고, 간쟁을 받아들일 때는 반드시 마음을 비우는 것을 우선으로 하여 막히거나 끌리지 말고, 안으로 몸과 마음에 돌이켜 보아서 오로지 공경하여 중간에 그만두지 마시고, 겉으로 다른 사람의 간언을 받아들이는 것은 오로지 진실하며 가식이 없도록 하십시오. 마음이 일과 함께하되 서로 함양하고, 행동이 말과 함께하되 서로 돌아보며, 깊이 탐구하고 힘써 행하여 그 끝을 향해 모든 노력을 다하십시오. 잘 듣고 잘 보셔서 조금도 막힘이 없이 서로 함께 진보하기를 기대하십시오.
앞에서 간언을 드린 바와 같이 하신다면 덕이 날로 나아갈 것이며 도가 날로 이루어질 것이며 겸손이 성대해질 것입니다. 선(善)이 더욱 모이고 지혜가 더욱 밝아져서 빈 것이 채워질 것입니다. 선대의 유자들께서 이르기를 ‘한 번 경(敬)하면 천 가지 삿됨을 대적할 수 있고, 한 번 성(誠)하면 백 가지 거짓을 이길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
○ 같은 달. 예조 좌랑에 제수되었다. ○ 6월.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다. ○ 7월. 호조 좌랑에 제수되었다. 같은 달.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다. ○ 8월. 이황(李滉)을 의례적으로만 접견하지 말라고 계청(啓請)하였다. - 선생이 계를 올려서 “이황은 올라오기가 어려우니 의례적으로만 접견하지 마십시오. 비록 주강(晝講)ㆍ석강(夕講)에라도 불러서 강론하게 하면 반드시 유익함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그 말을 따랐다. -
소를 올려 국혼(國婚)이 예에 맞지 않음을 논하였다. - 그 소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군자의 도는 그 단서가 부부(夫婦)에게서 시작되는데, 부부의 예는 오직 그 처음을 삼가는 데 있습니다. 처음을 삼가지 않으면서 그 끝을 능히 삼가는 것은 없습니다. 《춘추》가 빙문(聘問)에 엄격하고 《예기》가 혼인의 의리를 중시한 것은, 진실로 배필을 정하는 일은 사람이 존재하는 시작이며 만복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혼인의 예가 바루어진 다음에야 만물이 생을 영위하여 천명이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비록 여염집의 부부라도 그 처음을 삼가지 않으면 한 집안의 마땅함을 얻을 길이 없는데, 하물며 군주는 백성의 부모이자 온 나라 사람의 모범이 되는 데 있어서이겠습니까. 신 등이 삼가 보건대, 주(周)나라 사람의 시에 ‘도끼자루 베기를 어찌해야 하는가. 도끼가 아니면 하지 못한다네. 아내를 얻으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중매가 아니면 얻지 못한다네.’라고 하였으니, 이는 대개 먼저 중매쟁이로 하여금 오가면서 말을 전하고, 여자 집안에서 허락하기를 기다린 다음에 납채(納采)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이 세상의 변할 수 없는 법입니다.
제왕의 일은 비록 필부와 다르지만, 혼인할 때 중매쟁이의 말을 통하는 것이 치도(治道)에 무슨 해가 될 것이며, 귀천의 다름이 있겠습니까. 우리나라는 이 예를 폐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제후의 높은 신분으로 배필을 구해야 하는데 먼저 처녀들을 대궐에다 구름처럼 모아놓고 용모가 아름다운 사람을 가려 뽑으니, 어찌 그것이 선왕이 예의를 제정한 뜻이겠습니까. 옛날 제후가 이웃 나라에서 아내를 맞이할 때 형편상 국경을 넘어서 맞이할 수가 없으면 대부를 시켜 가서 맞이하게 하였는데, 성인은 오히려 그것이 예가 아니라고 꾸짖었습니다. 하물며 구구한 이런 일이 떳떳한 법도에 크게 어긋나는 것인 데 있어서이겠습니까. 고금의 변화를 참작하고 줄이고 더함의 마땅함을 참작하면, 천리(天理)에 맞는 절도와 인정이 순종하는 바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전철을 그대로 따라 일이 심히 구차해져 드디어 널리 행해지는 예를 들판에 버렸으니, 이 어찌 처음을 바로잡는 방법이겠습니까.
신 등이 삼가 듣건대, 범조우(范祖禹)는 선인황후(宣仁皇后)에게 ‘규문(閨門)의 덕은 드러나 보이지 않습니다. 반드시 그 선조를 보고, 그 조부와 부친을 보고, 그 가풍을 살피고, 모든 일을 참고하여야 알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진실로 멀리 보고 가까이 살필 수 있다면, 보는 것이 밝지 못한 것과 가리는 것이 자세하지 못한 것을 어찌 근심하겠습니까. 그 교화에 젖어드는 것과 덕행이 바탕으로 삼은 것은 겉을 보아도 속을 알 수 있습니다. 길러진 바탕을 고려하지 않고 그저 용모의 아름다움만을 취한다면 곧 스승의 가르침을 들을 적에는 기쁘지 않은 바가 있고 어기지 말라는 가르침에 대해서는 받아들이지 않는 바가 있을 것이니, 어찌 천하의 지극히 정숙한 분을 얻어서 천하의 지극히 강건한 분의 짝이 되겠습니까. 종묘의 왕통을 받들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만물의 마땅함도 다스릴 수 없을 것입니다.
부부간에 반목하는 근심과 정사에 참여하는 화가 반드시 배와 겨드랑이 밑에서 생겨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대해 옛날 역사를 살펴보면 역력히 알 수 있습니다. 한나라 원제(元帝)와 성제(成帝)를 만나지 않았다면 다섯 명의 왕씨(王氏)가 하루아침에 제후에 봉해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순제(順帝)와 충제(沖帝)를 만나지 않았다면 양기(梁冀)는 20년 동안 발호하는 위세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군주가 권위(權威)를 잃어서 그렇게 된 것이나, 한 고제(漢高帝)의 영단(英斷)으로도 훗날 여씨(呂氏)의 화를 지킬 수 없었으니, 어찌 스스로 자신이 엄숙하고 공정하다는 점만 믿고서 처음을 바로잡는 시기에 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시인이 문왕(文王) 후비(后妃)의 덕을 찬미하기를 ‘기린의 뿔 같은 어진 공족이니, 아! 기린답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이점에 유의하십시오. 신 등이 듣자하니 궁중의 내전은 사방에서 보고 모범으로 삼는 곳입니다. 한 사람의 사치와 검소함이 비록 미약한 것이기는 하나 천만 세에 관련된 것이 심히 크며, 복색에 정성을 다하는 것은 비록 작은 일이지만 천만 리에 관련된 것이 심히 머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몸소 거친 삼베옷을 입은 것은 마황후(馬皇后)가 동한(東漢)을 흥기시킨 것이고, 공작새의 깃털로 장식하는 것을 경계한 것은 송 태조(太祖)가 공주를 경계한 것입니다. 비록 지존의 배필이라 해도 오히려 검소함을 우선으로 하였는데, 그 나머지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오늘날 처자들이 궁궐을 출입할 적에, 여러 집안에서 남들보다 나아 보이려는 마음을 다투어 품고 복식의 아름다움을 극도로 꾸며서 구슬과 비취가 영롱하여 도로를 현란하게 하며, 종들이 구름처럼 모여 어지러이 문 안에 가득하니, 사치를 좋아하고 의리를 저버리는 단서가 실로 여기에서 열립니다. 이것이 어찌 엄숙하고 화목한 덕에 맞겠습니까. 시인은 문왕 후비의 덕을 찬미하여 ‘칡넝쿨이 뻗어감이여! 골짜기 가운데까지 뻗었구나. 칡넝쿨 베어 이에 삶아서 고운 갈포 거친 갈포 만들어 새 옷을 입으니 싫증이 안 나네.’라고 하였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이 점에 유의하십시오.”
또 국혼에 검소함을 숭상할 것을 청하는 계(啓)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국고(國庫)가 비었기 때문에 모든 일은 검약을 힘써 따라도 오히려 지탱할 수 없습니다. 가례(嘉禮)에 쓰일 의복과 거마(車馬)는 한결같이 정축년 등록(謄錄)에 따르고 있습니다. 중종조 때는 나라에 축적된 재원이 있었고 흉년의 징조가 없어서 공사(公私)가 모두 넉넉하여 쓰고도 남음이 있었으니, 오늘날과 비교하면 풍족함과 검약함이 전혀 다릅니다. 지금의 부족함을 헤아리지 않고 지난날의 규모를 표준으로 삼는다면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무릇 행정은 그 당시의 사정에 따라 더하거나 줄이는 것으로, 반드시 전철을 따를 필요는 없습니다. 하물며 검약은 임금의 실덕(實德)인데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임금이 마음으로 터득하여 몸으로 행하시는 것은 반드시 궁궐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거친 베옷을 몸소 입고 비취로 장식한 화려한 이불을 물리치며 황금으로 수레를 장식하지 않는 것 등은 모두 전대 후비(后妃)의 검소한 덕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풍부한 업적을 이루고 장구한 치적을 이룰 수 있었으니, 오늘날 거울로 삼을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사치와 검소의 차이를 살펴서 그 사이에서 취하고 버리는 일은 반드시 대혼(大婚)을 시작할 적에 삼가야 합니다. 처음을 삼가지 않으면서 그 마지막을 삼갈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지금 보아하니 여염집에서 아들ㆍ딸을 혼인시킬 적에 복식을 극도로 꾸며 남들보다 나으려 힘써서 그 아름다움을 자랑합니다. 이리저리 서로 잘못된 풍습을 본받아 마침내 가산을 탕진하고 끝내 빈궁한 지경에 이르니, 이른바 사치의 해로움이 하늘이 내린 재앙보다 더 심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궁인의 다리〔䯻〕를 한 자 높이면 사방에서 그것을 보고는 반드시 석 자로 할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보고 느끼는 소재가 있어 그런 것이니, 임금께서 대혼을 하실 때부터 먼저 절약과 검소의 덕을 보이시면 사방의 사람들도 사치와 허세를 배척하지 않을 수 없으며, 검소와 절약을 숭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니, 어찌 풍속과 교화에 크게 관련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창고 가득 쌓여있는 재물이 물이 솟구치듯 산이 솟듯 나온다고 해도 소비를 아껴 재물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하물며 지금은 도감(都監)에서 어떤 물건이 없다고 하면 시정(市井)에서 내놓도록 책임을 지우니, 어찌하여 지난날의 규모를 꼭 채우려고 하여 아래위를 모두 곤궁하게 하십니까?” -
11월. 또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다. ○ 동료들과 함께 누차 소차(疏箚)를 올려서 정심(正心)ㆍ납간(納諫)ㆍ제가(齊家)에 관한 일을 논하였다. - 제가를 논한 소(疏)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송(宋)나라의 신하 주희(朱熹)가 효종(孝宗)에게 올린 말을 삼가 살펴보건대 ‘천하의 근본은 나라에 있고, 나라의 근본은 집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임금의 집안이 다스려지면 천하에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없으며, 임금의 집안이 다스려지지 않으면 그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까닭에 번성하던 삼대(三代)에 성스럽거나 어진 군주가 그 정사를 잘 돌보았던 것은 모두가 제가에 근본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대개 남자가 바깥에서 자리를 바로잡고 여자는 안에서 자리를 바로잡아, 부부의 구별이 엄격한 것이 집안이 잘 다스려진 것입니다. 처(妻)가 위에서 대체(大體)를 바로잡으면 첩(妾)이 아래에서 이어 받들어서, 본처와 첩의 직분이 정해지는 것이 집안이 잘 다스려진 것입니다. 덕이 있는 사람을 문채나게 하고 음성과 안색을 경계하고, 엄숙과 공경을 가까이하며, 기능을 멀리하는 것이, 집안이 잘 다스려진 것입니다. 안의 말이 밖으로 나가지 않고, 밖의 말이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며, 뇌물이 이르지 않고, 청탁이 행해지지 않는 것이, 집안이 잘 다스려진 것입니다.
그러나 규문(閨門) 안에서는 은혜가 항상 의리를 가립니다. 그러므로 비록 영웅의 재주로서도 오히려 주색(酒色)에 곤란을 당하고, 정(情)과 사랑에 빠져서 스스로 이겨내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마음을 바루고 몸을 닦아 행동이 예의를 말미암아 그들로 하여금 나의 덕에 감복하고 나의 위엄을 두려워하게 함이 있지 않다면, 또 무엇으로 궁녀들을 바로잡고 그들의 청탁을 막으며 그 인척을 단속하여 화란의 싹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신 등이 이 주희의 설을 가지고 전하의 가법에 맞춰 본다면, 안팎을 엄격히 구분하고 인척을 단속하는 것이 과연 선유의 지결(旨訣)에 완전히 합치될 수 있겠습니까. ‘공주가 시집간 뒤에 공경하고 화락했다’라는 것은 비록 천자의 지친(至親)이라 해도 아내의 직분은 이미 정해졌다는 것입니다. 친정에 가서 부모ㆍ형제에게 문안하는 것은 성인이 금한 것인데, 공주가 제멋대로 왕래하는 것은 천하의 큰 법도가 무너진 것입니다. 황당무계한 말과 물어보지도 않은 계책이 궁중으로 섞여 들어와서 임금의 뜻을 번거롭게 하며, 공론에 나타나게 됩니다. 인정과 의리가 서로 연관되고 이쪽과 저쪽에서 끌어당기는 데에 이르러 성상의 생각을 많이 허비하게 하고 일을 처리하는 데 결단을 어렵게 하니, 전하께서는 이런 데서 바깥의 말이 들어오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성인은 허물을 고치는 것을 위대하게 여겼으니, 허물을 알고서 뉘우치고 뉘우치고서 능히 고친다면, 비유컨대 일식ㆍ월식과 같아서 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보게 되며, 허물을 고치게 되면 사람들이 모두 그를 우러러보게 됩니다. 어둠이 걷히면 온갖 모습이 모두 새로워지니, 맑고 밝은 다스림에 무슨 해가 되겠습니까.
간혹 전철을 따라 용감하게 고치지 않는다면, 연줄을 대고 매달려서 교활하게 아첨하는 자가 반드시 밖에서 엿볼 것이며, 안색을 살펴서 임금의 의향을 미리 짐작하는 자가 반드시 안에서 호응할 것입니다. 속이거나 과장하여 현란하게 하고 검은 것과 흰 것을 바꿔서 어지럽게 만들 것이니, 텅 비고 밝은 거울 같은 전하의 안목이 가려진 곳에서 점점 어두워질 것입니다.
형벌과 상을 주는 권한이 총애하는 신하의 손으로 은밀히 옮겨지면, 국가가 위태로워져 망하게 되는 기미가 여기서 결정됩니다. 이런 까닭에 송(宋)나라 신하 정이(程頤)는 윤리를 바루고 은애를 독실하게 하는 것을 집안사람의 도로 삼았으며, 진덕수(眞德秀)는 집안을 엄하게 다스리고 친척을 가르치는 것을 집안을 단속하는 요체로 삼았으니, 이것이 바로 고금의 제왕 사이에 서로 전하는 가법입니다.
신 등이 엎드려 보건대, 전하께서는 타고난 바탕이 빼어나게 밝으시며 학문이 날로 발전하여 선악의 귀추를 밝히시고 충성과 사악함의 차이를 분별하시니, 어찌 정(情)과 예(禮) 사이에 경중이 있다는 것과 은(恩)과 의(義) 사이에 취할 것과 버릴 것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시겠습니까.
다만 자전(慈殿)의 뜻이 받들어 순종하는 데에 있기 때문에 친애의 사사로움을 감히 잘라 끊어 버리지 못한 채 전철에 따르거나 정에 이끌려 왜곡되게 엄호를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조금 용납하십니다. 또한 비록 이렇게 해도 심하게 일을 해치는 데에 이르지는 않는다고 생각하십니다. 그것이 간사한 자들을 불러들이고, 남몰래 사당을 심게 하고, 유언비어를 날조하고, 제멋대로 논의를 만들어 내 전하의 총명을 미혹하게 하고 위엄과 복을 줄 수 있는 전하의 권한을 몰래 빼앗는 단서가 실로 여기에서 기초한다는 사실을 모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서리를 밟으면 굳은 얼음이 이른다.’라는 말을 어찌 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고 기운을 낮추어 기미를 보아 간해서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 진실로 자식 된 자의 효도이고, 궁궐을 엄숙하고 깨끗하게 하고 종묘사직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은 실로 제왕의 큰 효도입니다. 선왕께서 전하께 부탁하신 것이 이것이며 자전께서 전하께 바라는 것 역시 이것입니다.
정(情)으로 예(禮)를 이기고 은혜로 의리를 빼앗으며, 사사로운 사랑에 이끌려 바른 이치를 잃어버리고, 사소한 절목에 구속되어 대체를 그르치는 것이 어찌 선왕과 자전의 마음이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먼저 자신을 엄격하게 하고 기강을 정돈하여, 대대로 편안히 이어질 계책을 잘 받드십시오.
그 전체(全體)와 대용(大用)은 모두 《대학》 한 권에 다 실려 있습니다. 대개 다섯 가지의 편벽됨이 수신(修身)의 경계가 되지만, 친애(親愛)가 곧 그 첫 번째입니다. 하나라도 편벽된 것이 있으면 좋아하고 싫어함이 평등을 잃어서 그 근본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자신을 수양하지 않으면 그 집안을 가지런히 할 수 없는데, 어찌 그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전하께서 학문하시는 내용에 있는 일입니다. 반드시 그 들은 바를 존중하고, 아는 바를 행하며, 의리를 사색하여 총명을 드러내며, 엄숙하고 장중하고 고요하고 한결같이 하여 순수하고 알차 거짓이 없어지면, 인욕의 싹을 녹여 없애고 편벽되이 얽매인 사욕을 없애어, 일에 따르고 사물에 응하는 것이 확고하여 흔들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 뒤에 광명정대한 본체가 모범이 되는 곳에 성립되면, 친밀함과 사랑의 사사로움이 그 사이에 끼어들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크게 힘을 써서 분발하여 머뭇거림 없이 곧장 결정하지 않으면, 장차 무엇으로 쉽게 어두워지는 총명을 드러내고 우유부단함을 끊어서 그 안팎을 엄하게 하고 그 출입을 금하여 화란을 싹트기 전에 없앨 수 있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집안을 다스리는 도는 굳셈〔剛〕을 선(善)으로 여깁니다. 《주역》에서 ‘위엄이 있으면 길하다’라고 하였는데, 자신에게 돌이켜 보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이점에 잠심하십시오.”
마음을 바루고 간언을 받아들일 것을 논한 차자(箚子)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 등이 삼가 듣건대, 군주의 마음은 오직 지향하는 바가 치우쳤느냐 바르냐를 살필 뿐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그 올바름을 얻으면 본체가 텅 비고 작용이 곧아서 대본(大本)과 달도(達道)가 서로 유통하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에 혹 편벽됨이 있으면 인정에 끌리고 사욕에 가려져 일에 따르고 사물에 응하는 것이 모두 그 도를 잃게 됩니다. 이런 까닭에 학문의 공부에 힘써서 총명을 개발하고, 잘못을 간하는 직책을 세워서 허물과 잘못을 바로잡는 것이 이 마음을 바로잡아 한쪽으로 치우치는 데 빠지지 않게 하는 방법입니다.
신 등이 엎드려 보건대, 전하께서는 고금에 으뜸가는 영명(英明)한 자질에다 정밀하고 전일하며 선왕의 덕을 이어 밝히는 공부를 더하셨고, 유신(儒臣)들에게 자문을 구하시어 날마다 세 번 접견하기를 힘쓰시며, 의리에 침잠하고 몸과 마음을 체찰하시니, 그 뜻을 겸손히 하며 그때그때 민첩하게 하는 성실함은 독실하다 할 수 있습니다.
임금의 위엄을 범하면서 과감하게 올리는 직언을 용납하시고, 군주의 안색을 살피지 않고 간하는 것을 꺼리지 않으시어, 내사(內司)로 들어온 것은 나누어 그 주인에게 돌려보내고, 분에 넘치게 베푼 벼슬에 대해서는 곧 그 명을 거두시니, 마음을 비우고 간언을 받아들이는 정성은 부지런하다고 할 만합니다.
골목길에 뛰노는 아이들조차도 모두 다 칭송하지 않는 이가 없어, 간절히 바라던 한 가지 효험으로 여길 것이니 어찌 본받을만한 부분이 아니겠습니까. 치우침과 사사로움을 끊고 호오(好惡)를 공평하게 하는 것은 인심이 모두 동일하게 옳다고 여기는 부분입니다. 이것은 실로 성학(聖學)의 효험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크게 걱정되는 바가 있으니, 근래에 있었던 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궁궐의 법도가 엄격하지 못하여 교활한 자들이 서로 내통하며, 강상에 변고가 있어서 부자간에 도리를 잃으며, 정령(政令)이 조정으로부터 나오지만 내시가 멋대로 농간을 하며, 송사(訟事)를 판결하는 것은 책임이 담당 관원에게 있는데 간혹 아랫사람에게 침범을 당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음탕하고 사악함을 물리쳐 인륜의 기강을 부지하고, 간사하고 참람한 자를 엄하게 다스려 잘못된 행위를 고쳐 바로잡아야 하는데, 복합(伏閤)의 아우성은 그저 귀를 거스르는 것으로 치부해 버리고, 법 집행을 결단력 있게 하면 도리어 멋대로 고쳤다는 견책을 받습니다.
신 등이 삼가 염려하는 것은, 친밀과 애정의 사사로움이 혹 텅 비고 밝은 마음을 가리고, 편협하고 꽉 막힌 병통이 아직 강론하고 질문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점입니다. 본령이 오히려 올바름을 얻지 못하여 사물에 응하는 것이 이처럼 어긋나는 것입니다. 사사로운 주장이 먼저 마음속에 자리를 잡아버리면, 충성스런 말과 곧은 의논이 날마다 그 앞에 펼쳐진다 해도 어찌 자기의 주장을 고수하는 견고함을 풀고 의리로 옮겨가는 용기를 결단할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본원을 먼저 다스리고 그 덕성을 길러, 단정하고 장엄하며 고요하고 한결같은 가운데서 보존하여 궁리의 근본으로 삼고,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과정에서 이치를 궁구하여 마음을 다하는 공부를 극진히 해야 합니다. 편벽되고 얽매인 허물이 마음에 남아 있지 않고, 호오의 사사로움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고요히 텅 비고 밝은 가운데 더욱 계신(戒愼)하고 신독(愼獨)하는 공부를 더해야 합니다. 사물에 따라 감응할 적에 잘못하는 실수를 더욱 살펴서, 크고 작은 것이 서로 길러지고 동정에 서로 함양하여 훤히 녹아 시원하게 통하여 정대광명해지면 비록 간하지 않아도 또한 귀에 들어올 것입니다. 하물며 그것을 간하는데 어찌 들어오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맹자가 순 임금을 찬미하기를 ‘자기를 버리고 남을 따르셨다.’라고 하셨고, 이윤(伊尹)이 태갑(太甲)을 경계하면서 ‘말이 폐하의 마음에 거슬리거든 반드시 도에서 찾으시며, 말이 폐하의 뜻에 공손하거든 반드시 도가 아닌 것에서 찾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점을 유념하여 살피십시오.” -
차자(箚子)를 올려 15일의 조하(朝賀)를 중지하라고 청했다. - 15일 밤에 월식이 일어나려 하자, 선생이 차자를 올려서 “군주는 하늘의 변고에 경건한 마음을 갖고 두려워하여 수성(修省)의 도리를 극진히 하여 어느 곳인들 그 지극한 마음을 쓰지 않음이 없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더라도 오히려 천심(天心)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감히 조금이라도 태만하거나 소홀한 뜻이 있음이겠습니까? 일식과 월식은 재앙과 이변 중에서도 큰 것인지라, 제후가 친히 북채를 잡고 쳐서 구제하였으니 그 의미가 도리어 무겁지 않겠습니까? 이달 16일 축시에 생길 월식은 비록 날짜가 다른 것 같지만 실제로는 15일 밤입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이날 장차 조하를 받으려 하시면서 달리 두려워하거나 수성하는 뜻이 없으니, 어찌 재변이 임박하였다는 것을 미리 알 수 있는데도 감히 이런 일을 하면서 평상시처럼 태연할 수 있겠습니까? 청하옵건대 15일의 조하를 중지하라고 명하십시오.”라고 하였다. -
선생이 석 상궁(石尙宮)을 쫓아내라고 청하였는데, 세 번 계(啓)를 올리자 그제야 윤허하였다. - 당시 퇴계 선생이 석강(夕講)에 입시하여 계청하기를 “옛날 성왕은 궁중의 일을 외정(外廷)이 함께 알지 못하는 바가 없도록 하였습니다. 만약 내정(內廷)의 일은 외정이 알아서는 안 된다고 여기신다면 심히 불가한 일입니다.”라고 하여 결국 윤허를 받았다. - 선생이 신사정(申士楨)에게 죄를 물을 것을 청했다. - 계사는 문집에 보인다. ○ 앞뒤의 소(疏)와 계(啓)는 날짜가 분명하지 않지만, 대체로 모두 선생이 사간원에 있을 때의 일이므로 여기에 함께 기록하였다. -
3년(1569) 기사 선생 49세
2월. 공조 좌랑에 제수되었다. ○ 4월. 예조 좌랑에 제수되었다. 같은 달. 공조 좌랑에 제수되었다. ○ 5월. 정언에 제수되었다. ○ 6월. 공조 좌랑에 제수되었다. ○ 윤월. 전적에 제수되었다. ○ 8월. 사간원 헌납에 제수되었다. ○ 11월. 성균관 직강에 제수되었다. 같은 달.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다. - 이해 봄에 퇴계 선생이 소명을 받고 한양에 와 있었는데, 선생과 함께 〈월야회화(月夜會話)〉라는 시를 지었다. 퇴계 선생이 남쪽으로 돌아갈 때 선생은 행차를 전송하는 시를 지었다. -
4년(1570) 경오 선생 50세
1월. 직강에 제수되었다. ○ 2월. 이조 좌랑에 제수되었다. 소장을 올려 사직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 충정공(忠定公) 권벌(權橃)에게 시호를 내리라는 명을 받고 선시관(宣諡官)이 되었다. - 도동서원(道東書院) 유생들에게 보낸 편지가 있는데, 대략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가 임금의 명을 받들어 남쪽으로 온 것은 고(故) 상신(相臣) 권모(權某)를 위한 것인데, 충정(忠定)이 그 시호입니다. 창녕 현감(昌寧縣監)이 곧 그 주인으로, 임금께서 시호를 내려 주신 것에 감격하고 부친의 총애를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더없이 큰 은혜를 갚고자 하여 사명을 받들어 온 사람인 나에게까지 모든 성의를 다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마름꽃무늬 비단 반 필을 바쳐서 정성을 보이는 것에 이르러서는 또한 하나의 관례이긴 합니다만, 예물을 주고받을 때는 참으로 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귀는 것을 도로 하고 대접하기를 예로 하니 또한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을 받되 자신이 가진다는 혐의가 있고 또 유익하지 않은 곳에 사용한다면, 부득이하여 받은 것이라 하지만 또한 어찌 재물을 사용하는 의리에 완전히 합치되겠습니까. 하물며 폐백을 받기 전에 이미 경모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습속에 따르는 이런 의식을 당하게 되었으니, 감히 무익한 물건을 가지고 유용한 데에 이바지한다면 그 성의를 허락하여 그 물건을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물건을 주는 것은 저마다 그 성의가 있어서이지만, 마음에 보존된 것은 반드시 이로 인해 드러납니다. 그러니 제가 이 폐백을 서원에 바치고자 하는 것이 어찌 공연히 그러는 것이겠습니까. 여러 유생들이 만약 그 물건이 어디서 왔는가를 묻는다면 충성을 장려하는 것이 그 시호이고,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 그 폐백입니다. 그 마음이 보존된 바를 살핀다면 비루한 제가 사모하는 정성이니 어찌 군자가 허락할 바가 아니겠습니까. 그 정성을 허락할 수 있고 그 물건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의리의 개결함은 진실로 여러분들이 일찍이 밝히고 헤아린 것이니, 어찌 저의 비루한 말을 기다린 뒤에 그 주고받는 것을 정할 수 있겠습니까.……” 이를 보면 선생이 주는 것과 받는 것의 의리를 알 수 있다. 그래서 여기에 덧붙여 드러내었다. -
8월. 어사 겸 재상경차관(御史兼災傷敬差官)으로 호남을 복심(覆審)하였다. 진산군(珍山郡)의 전세(田稅) 일부를 감면시켜 줄 것과 순천부(順天府) 돌산도(突山島) 목장에 농사짓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계청하였다. - 계사는 문집에 보인다. - 태인현(泰仁縣)으로 가서 이일재(李一齋)를 방문하였다. ○ 남부지방의 조세포탈과 군역회피 등 고질적인 폐단을 논하였다. - 계사는 문집에 보인다. ○ 남명 선생이 선생에게 서신을 보내 “일찍이 조보(朝報)를 보고 건의한 바가 많음을 알았습니다. 나라의 큰일은 국방과 경제에 지나지 않습니다. 조세포탈과 군역회피에 있어서는 바야흐로 백 년 동안 막혔던 숨통을 틔운 것이니, 공과 같은 사람은 배운 것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
12월. 퇴계 선생을 곡하였다.
5년(1571) 신미 선생 51세
1월. 이조 좌랑에 제수되었다. 소장을 올려 사양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 판중추부사 이황(李滉)의 사제문을 지어 올렸다.
○ 3월. 퇴계 선생의 별세를 애도하는 만사를 지었다. - 만시는 문집에 보인다. -
4월. 홍문관 부교리에 제수되었다. 차자를 올려 ‘이치를 궁구하고 경(敬)을 실천하는 것’에 대해 논했다. - 차자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학문의 도리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치를 궁구하고 경을 실천하는 것’일 뿐입니다. 선유가 말하기를 ‘혹 글을 읽어서 의리를 강구하여 밝히기도 하고, 혹 고금의 인물을 논하여 그 옳고 그름을 구별하기도 하고, 혹 사물을 응접하면서 그 마땅함과 부당함을 재단하기도 한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궁리의 일입니다. 선유들 가운데는 주일무적(主一無適)으로 경을 설명한 분도 있고, 정제엄숙(整齊嚴肅)으로 경을 말한 분도 있고, ‘항상 마음을 깨어 있게 하는 것〔常惺惺法〕’이라고 말한 분도 있고, ‘그 마음을 수렴하여 한 가지 사물도 마음에 두지 않는 것〔其心收斂 不容一物〕’이라고 말한 분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곧 거경(居敬)의 공부입니다. 이는 곧 본원을 함양하는 것이자 학문을 하는 데에 처음 들어가는 곳으로, 천하만사가 나오는 곳이자 치란과 흥망이 유래하는 곳입니다.
송나라 이종(理宗)은 정주학(程朱學)을 숭상하였으니 그 뜻이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궁리ㆍ거경의 공부가 없어 시비가 밝혀지지 않았고, 등용하고 내치는 것이 전도되었습니다. 이때에 진덕수(眞德秀)ㆍ위요옹(魏了翁) 등은 군자다운 학자였지만 버려져 쓰이지 못했으나, 사미원(史彌遠)ㆍ가사도(賈似道) 등은 아주 소인이었으나 심복으로 두었습니다. 그 때문에 나랏일은 날로 그릇되고 백성들은 근심하고 원망하였으며, 화가 잇달아 일어나고 강토는 날로 위축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몇 대 후에 전복되어 망하는 화를 면치 못했습니다. 요ㆍ순의 정치는 아주 높고 넓어 천고에 우뚝하지만, 그 힘쓴 곳을 찾아보면 ‘정일집중(精一執中)’이라고 말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정(精)은 궁리(窮理)를 일컫는 것이고, 일(一)은 거경(居敬)의 공부입니다. 정(精)으로 살피면 형기(形氣)의 사사로움에 섞이지 않고, 일(一)로 지키면 의리의 올바름에 순일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움직이고 고요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저절로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잘못이 없게 됩니다. 전하께서 만약 어떤 일을 이루고자 하는 뜻이 있다면, 원하옵건대 요ㆍ순으로 표준을 삼으시고 송 이종(理宗)으로 거울을 삼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 〈행장〉에 의하면 이 조목은 무진년(1568, 선조1) 4월 21일 조강에서 올린 계사라고 하였으나, 선생이 홍문관에 들어간 것은 실제로 신미년(1571, 선조4) 4월의 일이기 때문에 〈행장〉의 연조(年條)는 잘못인 듯하다. 그러므로 여기에 옮겨 넣었다. -
같은 달. 이조 정랑에 임명되었다.
○ 6월. 예조 정랑에 임명되었다. 같은 달. 이조 정랑에 임명되었다.
○ 8월. 이조 정랑 겸 지평에 임명되었다. - 약포 정탁이 〈행록〉을 기록하면서 “공이 시강(侍講)이 되어 경연에 입시하니 강론이 정제되고 깊이가 있어서 당시의 명망이 아주 높아졌다. 이조 정랑이 되어서는 인재를 쓰는 것이 구차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 적합하지 않는 사람은 대부분 바꾸고 바로잡았는데, 장관(長官)이 간혹 꺼리는 기색을 드러내 보이기는 했으나 역시 감히 화를 내지는 못했다. 대각(臺閣)에 출입하자 그 당시의 소차(疏箚)가 대부분 그의 손에서 나왔다. 곧고 바른 의논을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결정하였으며 그 당시에 꺼리는 바를 거리끼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의 동료들 가운데 간혹 기뻐하지 않은 자도 많았으나 공은 끝내 변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또 “공이 이조 정랑으로 있을 때, 초당(草堂) 허엽(許曄)이 이조 참의였는데 여러 다른 동료들과 논의가 맞지 않았다. 마침 대사성 자리가 비자, 공은 허엽이 옮겨 가도록 후보로 올리려 하였으나 동료들은 그것을 난감하게 여겼다. 공은 ‘의견은 형편상 구차하게 같아지기 어렵습니다. 대사성이 되어 인재를 기르는 것은 그 임무가 한가한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면서 마침내 추천하였다. 바깥의 말이 시끄러워지면서 반드시 이로 인해 서로 사이가 벌어질 것이라고 하였으나, 초당은 마음에 두지 않고 느긋하였고 공 또한 격의가 없었다. 그 뒤 공의 부고가 이르렀을 때, 초당은 마침 경연에서 시강(侍講)하고 있었는데, 극력 추허(推許)하고 애도하였다. 공론에서 두 사람을 모두 훌륭하다고 여겼다. -
7월. 부윤 이정의 사제문을 지었다.
6년(1572) 임신 선생 52세
2월. 이조 정랑에 임명되었다. ○ 병가를 내어 남쪽으로 돌아왔다. - 당시 조정의 의논이 점점 격해져 어그러지고 있었는데, 선생은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깨닫고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당대의 명류들이 모두 한강으로 나와 전별하였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주었다. “도를 배우는 것이 평생의 뜻이요, 시대를 근심하는 것이 한 치의 정성이었네. 봄바람은 한수 가에 부는데 눈물을 뿌리며 그대 떠나는 길 전송하네.”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주었다. “병을 안고 봄이 저물어 가는데, 마음 터놓고 술 한 잔 나누네. 돌아올 날은 언제일까. 이별 생각은 풀 우거진 들판에 아득한데.” 또 집구시(集句詩)에서 선생은 “하늘 끝 바라보니 남산은 멀고, 생각이 많아 한수처럼 깊어가네.”라고 하였다.
남쪽으로 돌아온 후 부르는 명이 끊임없이 이르렀지만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소나무를 심고 국화를 옮겨 심고 물을 끌어다 연못을 만들고 연꽃을 심고 고기를 길렀다. 원근의 학자들이 날마다 많이 모여들었다. 그런 가운데서 서로 어울려 학문을 강론하였다. 이런 시를 지었다. “소나무를 심어도 구름 속으로 빼어난 것을 보려고 기다리기 어렵고, 국화를 옮겨 심으니 부질없이 손 가득 향기 나는 것이 슬프도다. 한밤중 멀리 생각하는 꿈에 놀라지 말라. 연못 푸른 연잎에 떨어지는 빗소리 오래 가네.”라고 하였다. ○ 율곡은 《석담유사(石潭遺事)》에서 “오모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늦게야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왔다. 선비들 가운데 그가 어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많아 사관에 천거하였으나, 사관은 재주를 시험하는 것이 관례였으므로 오모는 나아가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묻자 ‘내가 무엇 때문에 천고의 시비가 모여 있는 가운데로 스스로 들어가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전랑이 되어서 공도를 넓히기에 힘썼고 사람됨이 순수하고 착실하며 과감하여 일을 만나면 곧장 앞으로 나아갔기 때문에 원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모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 곧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라고 하였다.
또 “모가 이미 돌아가자 선비들이 대부분 아쉬워하였다. 기필코 다시 등용하게 하여 잇달아 임금님을 가까이서 모시는 벼슬에 임명하였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고향에서 산 지 3년 만에 마침내 졸하였다.”라고 하였다. - 남명 선생의 서거를 애도하였다.
○ 3월. 의정부 검상에 임명되었다. 같은 달에 사인(舍人)으로 승진하였다.
○ 4월. 모여서 남명 선생의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 제문과 만시가 있다. -
○ 5월. 성균관 사성에 임명되었다.
○ 7월. 직강에 임명되었다.
○ 8월.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다. 같은 달. 홍문관 응교에 임명되었다.
○ 10월. 성균관 사예에 임명되었다.
신종 만력 1년(1573, 선조6) 계유 선생 53세
3월. 사인에 임명되었으나 병 때문에 나아가지 않았다.
○ 5월. 장악원 정에 임명되었다.
○ 6월. 성균관 사성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 7월. 홍문관 전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 8월. 사인에 임명되었다.
○ 9월. 사인에 임명되었다. 같은 달. 군기시 정에 임명되었다.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 11월. 또 전한에 임명되었다. 소명에 응하여 나아갔으나 도중에 병이 들어 사직하고 돌아왔다. 사인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 선생은 일찍이 서계(西溪)에 터를 잡았는데 그 경치가 맑고 기이하며 그윽하고 넓은 것을 좋아하였다. 풀을 베고 재목을 모아서 소요하고 완상하면서 일생을 마칠 계책으로 삼았다. 선생의 아취가 비록 천석(泉石)에 있으나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은 실로 잠시도 해이해진 적이 없었다. 〈서계영회시(西溪詠悔詩)〉 10여 수가 있다. -
2년(1574) 갑술 선생 54세
1월. 사헌부 집의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사직하는 글은 문집에 보인다.
○ 2월. 종부시 정에 임명되었다.
○ 3월. 사인(舍人)에 임명되었다. 같은 달. 또 집의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 사직하는 글이 문집에 보인다. - 방백 임열(任說) 공과 환아정(換鵝亭)에서 놀았다. - 제영시가 있다. - 여름에 옥계(玉溪) 노진(盧禛)과 함양(咸陽)의 삼청야사(三淸野寺)에서 만나 주자서를 강론하였다.
○ 7월 7일에 병이 들어 24일 집에서 돌아가셨다. - 선생의 질병을 당하여 한강 정구, 각재 하항, 이인개 공, 이인제 공 등이 시종 진료하고 간호하였고, 옥계 노진은 매일 자제들을 보내 문병하였다. 현감 이원상 공이 조석으로 와서 문병하였고, 방백도 의원과 약을 지어 보냈다. 한양에서는 이청련ㆍ윤오음ㆍ윤월정ㆍ정약포ㆍ이청강ㆍ김학봉ㆍ이아계ㆍ정서천 등 많은 분들이 서로 면포를 내어서 사람과 말을 고용하여 한양의 의원을 보내 병을 진맥하고 약을 쓰려고 하였으나, 의원이 이르기 전에 선생이 이미 돌아가셨다. 한강이 호상(護喪)이 되어 상사를 관리하였다. 사림이 조문하였는데 원근에서 탄식하며 애도하였다. 당시의 조문과 제전(祭奠)은 다 기록할 수 없다. 선생이 사류의 추중과 애모를 받은 것이 이러했음을 볼 수 있다. ○ 서애 유성룡이 월천 조목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오 정랑의 일은 오래되어도 생각나 더욱 애통합니다. 선을 즐기고 의를 좋아하여 간절함이 정성에 맞으니 세상이 어찌 이런 사람을 쉽게 얻겠습니까. 선한 무리가 나뭇잎 떨어지듯 사라져 산과 들에 오히려 발을 붙이고 살지 못하니 어찌 액운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
○ 11월 1일 선영 남쪽 인좌 언덕에 장사 지냈다. - 당시 윤근수 공이 방백이었고 이원상 공이 지주였는데 상례와 장례를 맡아 특별히 후하였다. 김계휘 공이 방백이 되어 그를 위해 비석을 준비했는데 아직 세우지 않고 묘 앞에 묻어 두었다고 한다. -
34년(1606, 선조39) 병오
서계(西溪) 옆에 서원을 건립하였다. - 한강이 선생의 묘에 제사를 지내고 선생이 잡아 둔 서계의 땅으로 나아갔다. 사림과 더불어 서원을 창건하였다. ○ 한강은 다음과 같이 제묘문을 지었다. “한 번 유명을 달리한 지 30여 년인데, 이날이 다시 돌아오니 감회의 눈물이 옷깃을 적십니다. 옛 시절의 문도들은 하나같이 모두 없어지고 공부하던 집들도 모두 폐허가 되었습니다. 오직 저만 다행히 죽음을 면하였지만 늙고 병들었습니다. 어둡고 쇠약하여 병이 들어 세상의 병신이 되었습니다. 홀로 걷는 외로운 심회 답답함을 풀 길 없는데, 텅 빈 산에 해 지니 탄식이 곱절로 늘어납니다. 예전의 가르침을 생각하니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으셨습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으로 가르쳐 인도하셨고 유독 저를 깊이 사랑하셨습니다. 국에도 보이고 담에도 보이는 모습을 어찌 잊겠습니까. 마음과 눈을 깨끗이 하지만, 항상 능하지 못할까 염려되어 초심을 저버리지 않으려 맹서한답니다. 경건하게 잔을 받들어 올리고 고기와 채소를 올립니다. 나의 슬픔을 모르겠습니까, 초목과 금수인들!”
인조(1624, 인조2) 갑자
서계서원에 위판을 봉안하였다. - 서원은 고을 관아 북쪽으로 십 리 거리에 있다. -
정사(1677, 숙종3)
사액하였다.
[주-D001] 덕천리(德川里) : 현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특리 덕촌 마을이다.[주-D002] 직장공(直長公) : 오륜(吳倫)이다.[주-D003] 교수공(敎授公) : 오종은(吳從誾, 1439~1505)이다.[주-D004] 참봉공(參奉公) : 오세기(吳世紀, 1495~1531)이다.[주-D005] 교수공(敎授公) : 오식(吳軾, 1472~1536)으로, 자는 경부(敬夫)이다.[주-D006] 정수암(淨水菴) : 경상남도 산청군 신등면에 있던 절인데 지금은 없어졌다.[주-D007] 양희(梁喜) : 1515~1580.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구이(懼而), 호는 구졸암(九拙菴)이다.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벼슬은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에 이르렀다.[주-D008] 노진(盧禛) : 1518~1578. 본관은 풍천(豐川), 자는 자응(子膺), 호는 옥계,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벼슬은 예조 판서에 이르렀다. 저술로 《옥계집》이 있다.[주-D009] 이광(李光) : 1485~1551.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명원(明遠), 호는 진조당(眞操堂)이다. 성주(星州)에 살았다. 정구(鄭逑)의 외종조부이다.[주-D010] 유공작(柳公綽) : 1481~1559. 본관은 풍산(豐山), 자는 유재(裕裁)이다. 벼슬은 군수에 그쳤다. 유성룡(柳成龍)의 조부이다.[주-D011] 덕산(德山) : 현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사리이다.[주-D012] 덕산(德山)으로 …… 배알하였다 : 이해의 기록은 사실이 아니다. 조식(曺植)이 덕산(德山) 사륜동(絲綸洞)으로 거처를 옮겨서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강학을 시작한 것은 1561년(명종16)의 일이다. 1551년에는 삼가(三嘉)의 뇌룡정에 살고 있었다.[주-D013] 황준량(黃俊良) : 1517~1563.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중거(仲擧), 호는 금계이다. 이황의 문인으로, 이현보(李賢輔)의 손서(孫壻)이다. 문과에 급제하고 내외의 관직을 두루 거쳐 1560년(명종15) 성주 목사를 지내다가 1563년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오는 도중 예천(醴泉)에서 죽었다. 저술로 《금계집》이 있다.[주-D014] 연평답문(延平答問) : 본집 1권,부록 1권으로 이루어졌으며 송(宋)나라 주희(朱熹)가 찬술한 것이다. 본집은 주희와 그의 스승 이동(李侗)이 유가(儒家) 경전(經典)의 내용에 관한 문답을 주고받은 서신을 모아서 편찬한 것이고, 부록은 주희의 문인들이 평소에 주희가 이동(李侗)에 대해 언급한 내용과 제문ㆍ행장을 엮은 것이다.[주-D015] 궁장(宮牆) : 스승의 학문이 높아 헤아리기 힘들다는 의미이다. 《논어》 〈자장(子張)〉에서 자공이 “대궐의 담장에 비유하면 나〔賜〕의 담장은 어깨에 미친다. 그래서 집안의 좋은 것들을 들여다 볼 수 있거니와, 부자(夫子)의 담장은 여러 길이 된다. 그래서 그 문을 얻어 들어 가지 못하면 종묘(宗廟)의 아름다움과 백관(百官)의 많음을 볼 수가 없는 것이다.〔子服景伯 以告子貢 子貢曰 譬之宮牆 賜之牆也 及肩 窺見室家之好 夫子之牆 數仞 不得其門而入 不見宗廟之美 百官之富〕”라고 하였다.[주-D016] 덕산사(德山寺) : 경상남도 산청군 삼장면에 있는 내원사를 말한다.[주-D017] 하항(河沆) : 1538~1590. 본관은 진양(晉陽), 자는 호원(浩源), 호는 각재(覺齋)이다. 조식의 문인이다. 저술로 《각재집》이 있다.[주-D018] 도희령(都希齡) : 1539~1566.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자수(子壽), 호는 양성헌(養性軒)이다. 당곡(唐谷) 정희보(鄭希輔)의 문인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봉상시 봉사(奉常寺奉事)를 지냈다. 저술로 《양성헌실기》가 있다.[주-D019] 정탁(鄭琢) : 1526~1605.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정(子精), 호는 약포(藥圃)ㆍ백곡(栢谷),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중추부 영사(中樞府領事)에 이르렀다. 저술로 《약포집》이 있다.[주-D020] 서경덕(徐敬德) : 1489~1546. 본관은 당성(唐城), 자는 가구(可久), 호는 화담(花潭)ㆍ복재(復齋)이다. 저술로 《화담집》이 있다.[주-D021] 기대승(奇大升) : 1527~1572.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峰)ㆍ존재(存齋)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은 대사간에 이르렀다. 이황과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논쟁을 폈다. 저술로 《고봉집》이 있다.[주-D022] 강성(江城) :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의 옛 이름이다.[주-D023] 사관(四館) : 조선조 때 성균관(成均館)ㆍ예문관(藝文館)ㆍ승문원(承文院)ㆍ교서관(校書館)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주-D024] 일회(一會) : 당시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에서 누구를 탄핵하려고 할 때, 함께 모여 의견을 통일하는 모임이다.[주-D025] 보우(普雨) : ?~1565. 호는 허응(虛應)이다. 보우는 법명이다. 가계는 미상이다. 문정대비의 신임을 얻어 봉은사 주지가 되면서, 불교의 중흥을 위한 그의 행적은 유생들과 많은 마찰을 빚었다. 문정대비가 죽자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제주 목사 변협(邊協)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주-D026] 정현(鄭礥) : 1526~?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경서(景舒), 호는 만죽헌(萬竹軒)ㆍ세한당(歲寒堂)ㆍ소요산인(逍遙山人)ㆍ내욕거사(耐辱居士)이다.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성천 도호부사를 지냈다.[주-D027] 강익(姜翼) : 1523~1567.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중보(仲輔), 호는 개암(介菴)ㆍ송암(松菴)이다.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소격서 참봉을 지냈다. 저술로 《개암집》이 있다.[주-D028] 임희무(林希茂) : 1527~1577.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언실(彦實), 호는 남계(灆溪)이다. 문과에 급제하였고 벼슬은 승지ㆍ군수를 지냈다. 저술로 《남계집》이 있다.[주-D029] 오준(吳俊) : 1528~1590.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원숙(元叔), 호는 모와(茅窩)이며, 산청(山淸)에 살았다. 오건의 종제(從弟)이다.[주-D030] 환아정(換鵝亭) : 경상남도 산청군 산청읍에 있었던 정자이다. 1395년 산청 현감 심린(沈潾)이 건립하였다. 1950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현재 산청초등학교가 위치한 자리이다.[주-D031] 정복현(鄭復顯) : 1521~1591. 본관은 서산(瑞山), 자는 수초(遂初), 호는 매촌이다. 경상남도 거창 무등리(無等里) 죽곡(竹谷)에서 태어나 함양에 거주하였다. 조식에게 수학하였다. 그에 관한 사적을 기록한 《매촌실기》가 있다.[주-D032] 조종도(趙宗道) : 1537~1597.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백유(伯由), 호는 대소헌(大笑軒)이다.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함양 군수를 지냈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의병을 모아 안의(安義)의 황석산성에서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인솔한 적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저술로 《대소헌집》이 있다.[주-D033] 지곡사(智谷寺) : 현 경상남도 산청군 산청읍 내리에 절터가 있다. 지금의 지곡사(智谷寺)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주-D034] 주무숙(周茂叔) : 주돈이(周敦頤, 1017~1073)를 말한다. 주자(周子)라고도 한다. 자는 무숙(茂叔), 호는 염계(濂溪), 시호는 원공(元公)이다.[주-D035] 한 …… 기대섰네 : 이 시는 《덕계집》 권1에 실린 〈지곡사류대남명선생(智谷寺留待南冥先生)〉이다.[주-D036] 오현(吳俔) : ?~?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형숙(馨叔), 호는 의당(義堂)이며, 산청(山淸)에 살았다. 오건의 종제(從弟)로 임진왜란 때 창의하였다.[주-D037] 우치적(禹致績) : ?~? 본관은 단양(丹陽)이며, 산청(山淸)에 살았다. 오건의 생질(甥姪)이다.[주-D038] 노흠(盧欽) : 1527~1601.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공신(公愼), 호는 입재(立齋)ㆍ죽천(竹泉)이다.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저술로 《입재집》이 있다.[주-D039] 이경주(李擎柱) : 1480~? 본관은 월성(月城), 자는 석초(石礎), 호는 효렴재이다. 연풍 현감(延豊縣監)을 지냈으며 저술로 《효렴재집》이 있다.[주-D040] 달존(達尊) : 사람이면 누구나 높이게 마련인 인물이라는 뜻이다. 《맹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서 “천하에 달존(達尊)이 세 가지가 있으니, 관작(官爵)이 하나요, 연치(年齒)가 하나요, 덕(德)이 하나이다. 조정에는 관작만 한 것이 없고, 향당에는 연치만 한 것이 없고, 세상을 돕고 백성을 자라게 하는 데는 덕만 한 것이 없으니, 어찌 그 한 가지를 소유하고서 두 가지를 가진 사람을 깔볼 수 있겠는가.〔天下 有達尊 三 爵一 齒一 德一 朝廷 莫如爵 鄕黨 莫如齒 輔世長民 莫如德 惡得有其一 以慢其二哉〕”라고 하였다.[주-D041] 남계서원(灆溪書院) :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에 있다. 정여창(鄭汝昌)을 향사하기 위해 1552년(명종7) 건립되었다.[주-D042] 김우홍(金宇弘) : 1522~1590. 자는 면부(勉夫), 호는 이계,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김우옹(金宇顒)의 형이다. 문과에 급제하였다.[주-D043] 산 …… 만났는데 : 이 구절은 《덕계집》 원문에 ‘盍簪山北寺’라고 되어 있으나, 《남명집》에는 ‘篕簪山北寺’라고 되어 있으므로 《남명집》에 의거해 바로잡았다.[주-D044] 방상(方喪) : 신하가 임금의 상을 당하여, 부모상을 당한 것과 같이 삼년상을 입는 것을 말한다.[주-D045] 군주가 …… 하며 : 《서경》 〈열명 하(說命下)〉에서 “배울 때는 뜻을 겸손하게 해야 한다. 힘써서 항상 민첩하게 하면 그 수양이 이루어지리니, 이를 마음 깊이 새겨 두면 도가 그 몸에 쌓일 것이다.〔惟學 遜志 務時敏 厥修乃來 允懷于玆 道積于厥躬〕”라고 하였다.[주-D046] 묻기를 좋아하면 넉넉해진다 : 《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에서 “묻기를 좋아하면 넉넉해지고 스스로 지혜를 쓰면 작아진다.〔好問則裕 自用則小〕”라고 하였다.[주-D047] 자신을 …… 좇는다 : 《서경》 〈대우모(大禹謨)〉에서 “자신을 버리고 남을 좇는다.〔舍己從人〕”라고 하였다.[주-D048] 경(敬)으로써 …… 하며 : 《대학장구》에서 “마음이 없으면 봐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라고 하였다. 이에 대한 주희의 주석에서 “마음이 보전되지 못함이 있으면 그 몸을 검속(檢束)할 수가 없다. 이 때문에 군자는 반드시 이를 살펴서 경(敬)하여 마음을 곧게 하니, 그러한 뒤에야 이 마음이 항상 보존되어서 몸이 닦아지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心有不存 則無以檢其身 是以 君子必察乎此 而敬以直之 然後 此心常存 而身無不修也〕”라고 하였다.[주-D049] 허위와 …… 없어진 : 《중용장구》 제26장에서 “지성(至誠)은 쉼이 없다.〔至誠無息〕”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희의 주석에서 “이미 허위(虛僞)와 가식(假飾)이 없으므로 자연 간단(間斷)함이 없는 것이다.〔旣無虛假 自無間斷〕”라고 하였다.[주-D050] 세상을 밝히는 학문 : 원문의 ‘집희(緝煕)’는 《시경》 〈대아(大雅) 문왕(文王)〉의 “심원(深遠)하신 문왕(文王)이여, 아! 계속하여 경(敬)을 밝히셨도다.〔穆穆文王 於緝煕敬止〕”라는 구절에서 나온 것이다.[주-D051] 전환(轉圜) : 한 고제(漢高帝)가 신하의 옳은 말 잘 듣기를 둥근 것 굴리듯 쉽게 하였다 한다.[주-D052] 진선(進善)의 기(旗) : 나라의 정사에 대해 잘못된 점을 지적해 주고 유익한 말을 진달해 달라는 뜻으로, 중국 요 임금 때 사통오달의 거리에 깃대를 세워놓고 정사에 유익한 말을 할 사람은 그 아래 서 있게 하던 깃발을 말한다.[주-D053] 감간(敢諫)의 북 : 순 임금이 이 북을 설치하여 간언할 사람으로 하여금 북을 울려 자신의 뜻을 전달하게 하였다.[주-D054] 좌우와 …… 것에서 : 《서경》 〈경명(冏命)〉에서 “옛날 문왕(文王)ㆍ무왕(武王)에 있어 총명하고 공경하며 성스러우셨는데 작고 큰 신하들이 모두 충량(忠良)을 생각하며, 시어(侍御)하는 복종(僕從)들이 올바른 사람이 아닌 이가 없었다. 그리하여 아침저녁에 군주를 받들어 순종하고 보필하였으므로, 출입하고 기거함에 공경하지 않음이 없으며 호령을 냄에 불선함이 없으니, 하민(下民)들이 공경하여 순종하며 만방이 모두 아름다웠다.〔昔在文武 聰明齊聖 小大之臣 咸懷忠良 其侍御僕從 罔匪正人 以旦夕 承弼厥辟 出入起居 罔有不欽 發號施令 罔有不臧 下民 祗若 萬邦 咸休〕”라고 하였다.[주-D055] 자용(自用) : 《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에서 “묻기를 좋아하면 넉넉해지고 스스로 지혜를 쓰면 작아진다.〔好問則裕 自用則小〕”라고 하였다.[주-D056] 항룡(亢龍) : 《주역》 〈건괘〉에서 “‘항룡(亢龍)이니 뉘우침이 있다.’라고 하니, 공자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귀하나 지위가 없고 높으나 백성이 없으며, 현인(賢人)이 하위(下位)에 있어 도와주는 이가 없다. 이 때문에 동(動)하면 뉘우침이 있는 것이다.〔亢龍 有悔 子曰 貴而无位 高而无民 賢人 在下位而无輔 是以動而有悔也〕’”라고 하였다.[주-D057] 나무는 …… 성스러워진다 : 《서경》 〈열명 상(說命上)〉에서 “나무는 먹줄을 따르면 곧게 자를 수 있고, 임금은 간언(諫言)을 따르면 성스러워지니, 임금께서 성스러우시면 군주가 명령하지 않아도 신하들이 받들거늘 누가 감히 왕의 아름다운 명령에 공경히 순종하지 않겠습니까.〔惟木從繩則正 后從諫則聖 后克聖 臣不命其承 疇敢不祗若王之休命〕”라고 하였다.[주-D058] 완곡하게 …… 합니다 : 《논어》 〈자한(子罕)〉에서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법으로(바르게) 해주는 말은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신의 잘못을 고치는 것이 중요하다. 완곡하게 해주는 말은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실마리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기뻐하기만 하고 실마리를 찾지 않으며, 따르기만 하고 잘못을 고치지 않는다면 내 그를 어찌할 수가 없다.〔子曰 法語之言 能無從乎 改之爲貴 巽與之言 能無說乎 繹之爲貴 說而不繹 從而不改 吾末如之何也已矣〕’”라고 하였다.[주-D059] 지록위마(指鹿爲馬)의 …… 것 : ‘지록위마’는 진(秦)나라 환관 조고(趙高)가 권력을 장악한 후 언로를 막고 국정을 농단한 일을 뜻하는 말이다. 장구령(678~740)은 당 현종 때의 대신이자 시인으로, 소주(韶州) 곡강(曲江) 사람이다. 일찍이 안녹산(安祿山)을 제거하라고 건의한 적이 있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현종의 생일인 천추절에, 역대 정치의 잘잘못을 적어서 후대의 거울로 삼도록 한 《천추금감록(千秋金鑑錄)》을 지어 바쳤다. 저술로 《곡강집(曲江集)》이 있다.[주-D060] 자아(自我)란 …… 걱정스럽다 : 《이정유서(二程遺書)》 〈소일소문제사우설(少日所聞諸師友說)〉에 보인다.[주-D061] 하제(下濟) : 《주역》 〈겸괘(謙卦)〉에 나오는 말로, ‘겸손하면 길하다’라는 뜻이다.[주-D062] 군자의 …… 시작되는데 : 《중용장구》에서 “군자의 도는 단서가 부부에게서 시작된다.〔君子之道 造端乎夫婦〕”라고 하였다.[주-D063] 도끼자루 …… 못한다네 : 《시경》 〈빈풍(豳風) 벌가(伐柯)〉에서 “도끼자루를 베기를 어찌해야 하는가. 도끼가 아니면 하지 못하느니라. 아내를 얻으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중매가 아니면 얻지 못하느니라.〔伐柯如何 匪斧不克 娶妻如何 匪媒不得〕”라고 하였다.[주-D064] 납채(納采) : 고대 혼례의식에 행하던 육례(六禮) 가운데 하나로, 남자 측에서 여자 측에 구혼(求婚)의 예물을 보내는 것을 말한다.[주-D065] 범조우(范祖禹) : 1041~1098. 송(宋)나라 화양(華陽) 사람으로, 자는 순보(淳甫)ㆍ몽득(夢得)이다. 진사시에 합격하여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 편수에 참여하였다. 저술로 《화양문집》이 있다.[주-D066] 선인황후(宣仁皇后) : 송(宋)나라 영종(英宗)의 부인 고씨(高氏)이다. 신법당에 반대하였고, 손자 철종(哲宗)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했다.[주-D067] 규문(閨門)의 …… 있습니다 : 《속자치통감》 〈철종(哲宗)〉 조에 보인다.[주-D068] 부부간에 반목하는 근심 : 《주역》 〈소축괘(小畜卦)〉에서 “수레에 바퀴통이 빠지며 부부간에 반목하도다.〔輿脫輻 夫妻反目〕”라고 하였다.[주-D069] 다섯 명의 왕씨(王氏) : 한(漢)나라 성제(成帝) 때 후(侯)로 봉해진 다섯 왕씨(王氏)인 평아후(平阿侯) 왕담(王譚)ㆍ성도후(成都侯) 왕상(王商)ㆍ홍양후(紅陽侯) 왕립(王立)ㆍ곡양후(曲陽侯) 왕근(王根)ㆍ고평후(高平侯) 왕봉시(王逢時)를 말한다.[주-D070] 양기(梁冀) : 후한 순제(順帝) 때 양 태후(梁太后)의 오라비로 자는 백거(伯車)이다. 아버지 양상(梁商)을 대신하여 대장군이 되고 권력을 남용하여 축재하였으며, 질제(質帝)를 옹립하였으나 자신의 권력 남용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독살하고 환제(桓帝)를 다시 옹립하였다. 그 후 중상시(中常侍) 선초(單超) 등에 의해 실각하여 구속되자 자결하였다. 《後漢書 卷34 梁冀列傳》[주-D071] 발호하는 위세 : 순제의 황후 양씨(梁氏) 일족은 순제가 죽은 후, 충제(沖帝)ㆍ질제(質帝)ㆍ환제(桓帝)가 각각 2세, 8세, 15세로 즉위하였기 때문에 3대에 걸쳐 권력을 장악했다. 양씨는 사상 최대의 외척으로서, 양씨 중 후(侯)로 봉해진 자가 7인, 황후가 된 자가 3인, 황후 다음인 귀인(貴人)이 된 자가 6인, 여성으로 식읍을 받은 자가 7인, 황녀의 배필이 된 자가 3인, 대장군 2인, 그 외 고관과 장군 등 57인이었다고 한다. 그중 양태후의 오빠 양기(梁冀)는 4대에 걸쳐 약 20년 동안 전횡하였다.[주-D072] 기린의 …… 기린답도다 : 《시경》 〈인지(麟趾)〉에 있다.[주-D073] 몸소 …… 것이고 : 후한 명제의 후비인 마황후는 성품이 검소하여 비단옷이 아닌 삼베옷을 즐겨 입었다.[주-D074] 칡넝쿨이 …… 나네 : 《시경》 〈주남(周南) 갈담(葛覃)〉에 보인다.[주-D075] 대혼(大婚) : 임금의 혼인이다.[주-D076] 공주가 …… 화락했다 : 《시경》 〈소남(召南) 하피농의(何彼穠矣)〉에서 “어쩌면 저리도 성대한가, 당체(唐棣)의 꽃이여. 어찌 엄숙하고 화하지 않으리오, 공주의 수레여.〔何彼穠矣 唐棣之華 曷不肅雝 王姬之車〕”라고 하였다. 비록 공주라는 귀한 신분이지만 시집을 가면 시댁의 법도에 맞추어야 한다는 의미이다.[주-D077] 비유컨대 …… 됩니다 : 《맹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서 “옛날의 군자들은 그 과실이 일식ㆍ월식과 같아서 백성들이 다 그것을 보았고, 과실을 고침에 미쳐서는 백성들이 다 우러러보았다.〔古之君子 其過也 如日月之食 民皆見之 及其更也 民皆仰之〕”라고 하였다.[주-D078] 정이(程頤) : 1033~1107. 자는 정숙(正叔), 호는 이천(伊川)이다. 형 정호(程顥)와 함께 주돈이(周敦頤)에게 배웠고, 형과 아울러 ‘이정자(二程子)’라고 불리며 정주학(程朱學)의 창시자로 알려졌다. 저술로 《역전(易傳)》이 있으며, 그의 저술은 《이정전서(二程全書)》에 수록되었다. 이천백(伊川伯)에 봉해졌다.[주-D079] 진덕수(眞德秀) : 1178~1235. 호는 서산(西山),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진사시에 합격하여 벼슬이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으며 강직하기로 이름났다. 저술로 《대학연의(大學衍義)》, 《문장정종(文章正宗)》, 《서산문집(西山文集)》 등이 있다.[주-D080] 서리를 …… 이른다 : 《주역》 〈곤괘(坤卦)〉에서 “서리를 밟으면 단단한 얼음이 이른다.〔履霜堅氷〕”라고 하였다. 소인이 처음에는 그 세력이 미약하나 자라나면 성대해진다는 의미이다.[주-D081] 다섯 가지의 편벽됨 : 《대학장구》에서 “이른바 그 집안을 가지런히 함이 몸을 닦음에 있다는 것은 사람들이 친애(親愛)하는 바에서 편벽되며, 천히 여기고 미워하는 바에서 편벽되며,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바에서 편벽되며, 가엽게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바에서 편벽되며, 거만하고 태만히 하는 바에서 편벽된다. 그러므로 좋아하면서도 그 나쁨을 알며, 미워하면서도 그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이 천하에 적은 것이다.〔所謂齊其家 在修其身者 人之其所親愛而辟焉 之其所賤惡而辟焉 之其所畏敬而辟焉 之其所哀矜而辟焉 之其所敖惰而辟焉 故好而知其惡 惡而知其美者 天下鮮矣〕”라고 하였다.[주-D082] 위엄이 있으면 길하다 : 《주역》 〈대유괘(大有卦)〉에 “위엄이 있으면 길한 것은 쉽게 여겨 대비함이 없기 때문이다.〔威如之吉 易而無備也〕”라고 하였다. 위엄이 있으면 길하다는 것은, 만약 위엄이 없으면 아랫사람들이 함부로 하고 업신여겨 경계하고 대비함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주-D083] 복합(伏閤) : 신하들이 청하는 것을 왕이 듣지 않을 때에는 합문(閤門) 앞에 엎드려 승낙을 받을 때까지 물러가지 않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주-D084] 자기를 …… 따르셨다 :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서 “위대한 순 임금은 이보다도 더 위대함이 있었으니, 선을 남과 함께하사 자신을 버리고 남을 따르시며 남에게서 선을 취함을 좋아하셨다.〔大舜 有大焉 善與人同 舍己從人 樂取於人 以爲善〕”라고 하였다.[주-D085] 말이 …… 찾으소서 : 《서경》 〈태갑 하(太甲下)〉에서 “말이 당신의 마음에 거슬리거든 반드시 도에서 찾으시며, 말이 당신의 뜻에 공손하거든 반드시 도가 아닌 것에서 찾으소서.〔有言 逆于汝心 必求諸道 有言 遜于汝志 必求諸非道〕”라고 하였다.[주-D086] 수성(修省) : 천재지변이 있을 때 왕이 자신을 반성하면서 근신하고 덕을 닦는 것을 말한다.[주-D087] 제후(諸侯)가 …… 구제하였으니 : 《춘추좌씨전》 문공(文公) 15년 6월 조에 “일식이 일어나면 천자는 성찬(盛饌)을 들지 않고 사(社)에서 북을 치며, 제후는 사(社)에서 폐백(幣帛)을 사용해서 제사하고 조정에서 북을 쳐서 신을 섬기는 도리를 밝히고 백성에게 임금 섬기는 도리를 가르쳐서 등급(等級)이 있음을 보이는 것이 옛날의 법도였다.〔日有食之 天子不擧 伐鼓于社 諸侯用幣于社 伐鼓于朝 以昭事神 訓民事君 示有等威 古之道也〕”라는 기록이 있다.[주-D088] 석 상궁(石尙宮) : 명종 때부터 대궐에 있던 늙은 상궁인데, 대궐 밖으로 비밀리에 정보를 누설한 죄상이 있었다.[주-D089] 신사정(申士楨) : 1546~1593.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중종(中宗)의 넷째 딸 경현공주(敬顯公主)의 장남이다. 부친은 신의(申檥, 1530~1584)이다.[주-D090] 계사는 문집에 보인다 : 《덕계집》 권4 〈청죄신사정불효계(請罪申士楨不孝啓)〉에 기록되어 있다.[주-D091] 권벌(權橃) : 1478~1548.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冲齋)ㆍ훤정(萱亭),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명종 때 원상(院相)에 임명되었다. 저술로 《충재집》이 있다.[주-D092] 선시관(宣諡官) : 국왕이 내린 시호를 받들어 본가(本家)에 전달하는 임시 직책이다.[주-D093] 그 주인 : 권벌(權橃)의 둘째 아들 권동미(權東美, 1525~1585)로, 자는 자휴(子休), 호는 석정(石亭)이다.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초계 군수(草溪郡守)를 지냈다. 저술로 《석정집》이 있다.[주-D094] 복심(覆審) : 한 번 심사가 끝난 것을 다시 심사하는 것을 말한다.[주-D095] 계사는 문집에 보인다 : 《덕계집》 권4 〈어사겸재상경차관시계(御使兼災傷敬差官時啓)〉에 기록되어 있다.[주-D096] 이일재(李一齋) : 이항(李恒, 1499~1576)으로,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항지(恒之), 호는 일재,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벼슬은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이르렀다. 저술로 《일재집》이 있다.[주-D097] 계사는 문집에 보인다 : 《덕계집》 권4 〈논포조포졸폐막계(論逋租逋卒弊瘼啓)〉에 기록되어 있다.[주-D098] 일찍이 …… 있습니다 : 《남명집》 〈여자강자정서(與子强子精書)〉에 기록되어 있다.[주-D099] 만시는 문집에 보인다 : 《덕계집》 권2에 〈사제판부사이황문(賜祭判府事李滉文)〉이 있다.[주-D100] 주일무적(主一無適) : 정자(程子)가 경(敬)을 설명한 말로,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다른 쪽으로 흩어지지 않게 한다’라는 뜻이다.[주-D101] 정제엄숙(整齊嚴肅) : 정자(程子)가 경(敬)을 말한 것으로, ‘주일무적(主一無適)’이 내면적인 경이라면 ‘정제엄숙’은 밖으로 나타나는 경이다.[주-D102] 항상 …… 것 : 송나라 사양좌(謝良佐)가 《심경부주(心經附註)》에서 “경(敬)은 마음을 항상 깨어 있게 하는 법이다.〔敬是常惺惺法〕”라고 하였다.[주-D103] 그 마음을 …… 것 : 윤돈(尹焞)은 “그 마음을 수렴해서 한 가지 일도 마음에 두지 않는 것.〔其心收斂 不容一物〕”이라 하였다.[주-D104] 위요옹(魏了翁) : 1178~1237. 자는 화보(華父), 호는 학산(鶴山)이다. 사미원(史彌遠)이 재상에 임명되자 극력 반대하였다. 백학산(白鶴山) 아래에 서실을 짓고 후진을 가르쳤다. 사람들이 학산 선생(鶴山先生)이라 불렀다. 저술로 《학산집》이 있다.[주-D105] 사미원(史彌遠) : 1164~1233. 자는 동숙(同叔)이다. 가정(嘉定) 원년에 우승상 겸 추밀사(右丞相兼樞密使)가 되었다. 이종(理宗)을 옹립하여 9년 동안 재상을 지냈으며 태사에 임명되어 권력을 휘둘렀다.[주-D106] 가사도(賈似道) : 1213~1275. 자는 사헌(師憲), 호는 추학(秋壑)이다. 누이가 이종(理宗)의 귀비였기 때문에 중용되었다. 쿠빌라이 군대를 물리친 공로로 우승상이 되었다.[주-D107] 석담유사(石潭遺事) : 이이(李珥, 1536~1584)가 조정의 정치에 관한 사건 중 모범이 될 만한 일들을 기록한 책이다. 《율곡전서(栗谷全書)》에 실려 있는 〈경연일기(經延日記)〉를 필사한 것이다.[주-D108] 임열(任說) : 1510~1591. 본관은 풍천(豐川), 자는 군우(君遇), 호는 죽애(竹厓)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직제학(直提學)을 지냈다.
ⓒ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남명학연구소 | 양기석 김익재 (공역) |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