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비자 강화로 한국만 최대 피해
매일경제 2004년07월02일 17:23
"과거 1년에 서너 차례 학술회의 참석차 미국을 방문했지만 이제 웬만하면 안 가려고 합니다. " 한국 명문 의대 송 모 교수는 "미국에만 갔다 하면 심하다 싶을 정도의 몸수색을 받아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과거 중동지역을 방문했던 것이 원인이었다"며 "다시는 가고 싶지 않다"고 손을 내저었다.
지난해 모 국영기업체장은 북미 전체회의를 미국이 아닌 캐나다에서 열기도 했다. 입국 때 허리띠를 풀고 신발까지 벗어야 하는 현실에 큰 모욕감을 느꼈다는 게 주변의 귀띔이었다. 국내 최대 로펌 김&장의 한 변호사도 미국 입국 때마다 교도소를 연상케 하는 별도 심문실로 불려가는 바람에 방미를 극도로 꺼린다고 말했다. 테러 우려로 최근 크게 강화된 미국 비자발급 및 입국심사 강화에 대해 한국 기업인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
심지어 미국 기업인들조차 비자정책 강화로 미국 경제에 심각한 타격이 올 것이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2일 미국이 9ㆍ11테러 이래 제정한 애국법에 따라 입국 비자 발급을 까다롭게 하면서 미국 경제가 심각한 타격을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또 미국의 가장 강력한 동맹국이자 5대 무역국이지만 일본 영국 등과는 달리 비자를 획득해야 하는 한국의 피해가 가장 크다고 전했다.
뉴욕에 거주하고 있는 한 교민은 "영주권을 가지고 있는 교포들조차 해외에 다녀올 때 기분 나쁠 정도로 입국심사를 받는 게 보통"이라고 전했다.
한국계 콜 택시 영업을 하고 있는 김 모씨는 "9ㆍ11 전만 해도 하루 300~400달러는 거뜬히 벌었지만 요즘은 200달러를 손에 쥐기도 벅차다"고 울상을 짓는다.
◆ 미국 경제 피해 사례
미국의 대표적인 마케팅회사 암웨이는 최근 한국인 참석자 8000명의 비자를 확보하기 힘들어 올해 총회 개최지를 당초 로스앤젤레스에서 도쿄로 급히 변경했다. 총회 개최지 변경으로 인한 미국측 손실액은 1800만 달러로 추산된다.
매년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던 세계 최대 전자제품 박람회인 컴덱스가 올해 취소된 것도 까다로운 비자 발급 영향이 크다. 평균 13만 명이 참석해온 컴덱스의 해외 참관객은 평균 2만 명 선. 컴덱스 주최 측은 해외 참관객 중 20%가량이 비자를 받지 못해 참석이 불가능했고 60% 정도는 비자를 받았지만 매우 어려운 과정을 거쳐 비자를 획득했다고 밝혔다.
또 2주 전 뉴욕에서 열린 중국직물쇼 역시 초대된 중국기업 경영자 420명 가운데 절반 정도가 비자를 받지 못해 전시장의 3분의 1가량이 빈 채 치러졌다.
항공사인 보잉의 경우 까다로운 비자 발급으로 외국인 조종사를 확보하기 힘들어졌다고 호소하고 있다.
FT는 2001년 9ㆍ11테러 이래 비자 발급이 까다로워진 후 미국 제조업계에서만 지난 2년여 간 본 피해가 모두 300억 달러에 달한다고 주장하며 대학과 병원, 관광업계에서도 불만이 확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 한국이 최대 피해국
윌리엄 오벌린 주한미국상공회의소 회장은 FT와의 인터뷰에서 "한국과의 비즈니스와 한국인 관광객, 한국인 학생들을 잃어버린 것 도 있지만 한국인 친구들과 영향력을 동시에 잃어버리게 된 것이 더 큰 문제" 라고 지적했다.
오벌린 회장은 "한국인들이 미국에서 지출하는 여행 비용 200억 달러가 사라질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다"면서 "한 미국 기업은 한국 고객사 대표가 8주 동안이나 비자를 받지 못하는 바람에 수백만 달러에 달하는 계약이 파기될 위기" 라고 말했다.
지문 채취나 사진 촬영 등 미국의 까다로운 입국 절차 때문에 경유지로 미국을 기피하는 현상도 부쩍 늘고 있다. 지난달 비영리 경제단체인 미국해외무역위원 회(NFTC)는 보고서를 통해 미국 정부의 외국인 비자발급 지연에 따른 피해 금액이 무려 310억 달러(약 37조원)에 달한다고 분석했다.
<뉴욕 = 전병준 특파원 / 김민구 기자 / 현경식 기자 / 이향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