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서해랑길3구간 (인천:순)( 신광초교 입구~ 검암역 : 95-1 , 96코스 ,97코스)
◈ 일 자/기상: 2025. 1. 14 /맑음 (영하1도~영상5도:인천)
◈ 위 치: 인천
◈ 누구와: 나홀로
◈ 경로: 검암역- 선화동 신광초교- 자유공원입구- 가재울사거리-대우하나아파트정류장 - 천마산-피고개산-검암역 (35.13 ㎞)
* 95-1코스 : 선화동 신광초교- 자유공원입구 (3㎞)
* 96코스: 자유공원입구-가재울사거리-대우하나아파트정류장 (15.1㎞)
* 97코스: 대우하나아파트정류장-천마산-피고개산-검암역 (17.03㎞)
◈ 거리: 총35.13㎞
◈ 시간: 9시간38분(06시47분~16시27분)
◈ 교통
- 갈때 : 백석역(3호선) → 대곡(서해선) → 소사역(서해선) → 도원역(1호선)
- 올때 : 검암역(공항철도) →김포공항역(서해선) → 대곡(3호선) → 백석역
▼서해랑길 95-1코스(3km)
▼서해랑길 96코스(15.1km)
▼서해랑길 97코스(17.03km)
도원역: 06시401도착... 출발06시47분
오늘은 서해랑 3구간을 답사하기 위해 도원역에 06시40분에 도착해 간단히 답사준비후
도원역에서 06시47분에 출발
약1키로미터 정도 떨어진 신광초등학교까지 가서 출발한다
최초에는검암역에서 출발할려고 했으나 아침에 눈이 내려
역으로 신광초등학교에서 출발한다
황골 특화 상품거리
07시03분...신광초등학교 앞 4거리
도로따라 진행
인천여자 상업고등학교/이마트 버스 승하차장
신포역
인천세관 역사 공원
제물량로를 따라 진행
차이나 타운쪽 으로
인천 중구청
인천 개항장 박물관거리
07시32분...차이나 타운거리 입구... 3키로미터 지점
차이나타운거리... 식당들 모습
차이나타운거리 모습
차이나타운 황제의 계단
자유공원으로 오르는 계단
자유공원안내도
**인천 자유공원
인천시 중구 응봉산에 위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다.
초기에는 '만국공원'으로 불리다가 1957년 10월 3일부터 '자유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인천시 중구 송학동 응봉산에 1888년 조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으로, 1897년 조성된 서울의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보다 9년 먼저 설립된 공원으로 알려져 있다.
자유공원의 설립 당시 이름은 '만국공원(萬國公園)'이었으나,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했던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세워진 무렵인 1957년 10월 3일부터 자유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883년 인천은 제국주의의 강압으로 제물포 항구를 개항하면서 외국인들의 치외법권지역인 '지계(地界)'를 설정했다.
이에 일본과 청나라를 비롯해 미국, 영국, 러시아 등의 '각국지계'가 이곳에 위치하기 시작했고, 지계를 설치하고 남은 골짜기와 주변의 급경사들에는 조경시설이 설치돼 '퍼블릭 가든(Public garden)'이라 불렸다.
이후 각국공원·만국공원이라 불리던 이 공원은 일제강점기 때 '서공원'이라 불리다 1945년 해방 이후 다시 만국공원으로 바뀌었고, 1957년 맥아더 동상 건립 이후 '자유공원'이라 명명됐다.
자유공원은 초기 설립 당시에는 서구식 정원과 근대 건축물들로 꾸며졌으나, 대부분 6·25전쟁 때 파괴돼 사라졌다.
현재는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비롯해 인천상륙작전, 인천 학도를 기리는 기념비 등의 역사유적이 자리잡고 있으며 산책로가 잘 조성돼 있어 시민들의 쉼터 역할을 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자유공원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
맥아더 동상
인천 학도 의용대 기념탑
도시 구석 구석을 지나고..
신포국제시장 입구
가구거리
옛추억의.. 국장 모습
서울1호선 전철
동구 민방위 교육장
영화 국제 관광 고등학교
서림초등학교
인천세무서
인천중부소방소 119 안전센터
재능대학교 서문 버스 승하차장
송림4동 행정복지센터
가구단지사거리 버스 승하차장
서인천 가구단지
공단지역
77번6번 120번 도로
삼양사인천1공장
삼양사 공장
09시50분...가좌이음숲...12키로미터지점
가좌4동 행정복지센터
가좌초등학교앞 사거리
한신휴 풀러스 아파트
코스모스아파트앞 버스 승하차장
장고개 직전 아람유치원
10시10분...장고개...13키로미터 지점
**장고개 ; [ Janggogae ]
인천광역시 부평구, 인천광역시 서구
인천광역시의 부평구 산곡동에서 서구 가좌동으로 넘어가는 곳에 위치한 고개이다.
과거 산곡동 일대는 초지가 무성하여 마장(馬場) 혹은 마장들이라 불렀다고 하는데,
'마장으로부터 넘어가는 고개'라는 뜻을 갖고 있다.
과거 산곡동 일대는 마장의 끝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의미에서 장끝말이라는 별칭이 부여되었는데,
이 점에서 장고개를 장끝고개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금도 산곡동에는 백마장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오늘날 고개 일대에 군부대와 군사시설이 설치되어 있어 장고개는 기능을 상실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남정맥길이다... 징메이고개 까지
(이길은 2010년에 한남정맥 답사완료)
비단길 같은 한남정맥길...
141.2고지에 위치한 산불감시초소
도상에는 철마산이라고 하는되.. 호?봉산 이라함
시계가 영 아니네요
한남정맥 안내도
한일 초교/세일고등학교 앞
원적 터널
원적산 등산로 입구
이곳의 기준점은 171.85m라함
기준점과 세일고등학교0.6키로미터 이정목
원적산이 조망되고
원적산 정상(정상석과 정자)
원적산
**원적산 ; [ 元績山 , Wonjeoksan ]
인천광역시 부평구, 인천광역시 서구
인천광역시의 부평구와 서구의 경계 지점에 위치한 산이다(고도:165m). 산줄기가 북쪽으로 천마산(天馬山), 계양산(桂陽山)으로 이어진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부평부읍지」에 "부평부의 서쪽 15리 되는 곳에 있다."고 되어 있다.
『여지도서』에서도 지명이 확인된다.
『대동지지』와 『1872년지방지도』에 원적산이 표기되어 있고 산의 동쪽에 현재의 산곡동 일대에 해당하는 마장면(馬場面)이 위치하고 북쪽에 구십현(九十峴) 즉, 안하지 고개가 묘사되어 있다.
산의 서쪽으로는 서구 가좌동이 있고 동쪽으로는 부평구 산곡동이 있다. 『조선지지자료』에도 지명이 확인된다.
오랫동안 부평구와 서구 사이의 교통 장벽이었지만 1972년 원적산 길이 개통되었고 2004년 천마터널이 개통되었다.
천마터널은 원적산 지명이 한때 천마산으로 잘못 인식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멋진 등로...
원적정
비단길 ... 한남정맥길...
산을 이탈하고 가정동으로...
아나지고개
고속도로 위 육교를 지나고(6번 77번 120번)
고속도로 모습
횡단보도와 루원교
루원교
12시14분..하나아파트와 철마산 등산로 입구...19키로미터 지점
철마산 오르는 등산로
철마산 정상(정자, 삼각점)
철마산 삼각점(김포328,1993년복구)
부대 울타리를 따라 진행
좋은 등로를 따라 중구봉으로...
한남정맥길...
한남정맥길...
부대 울타리를 따라
천마산(정상석과 정자:세벌정)
천마산정상석
새벌정
새벌정에서본 인천시전경
중구봉(돌탑과 정상석)
중구봉 정상석
계양산이 조망되고...
징메이고개로 내려가는 계단
13시52분...징매이고개... 23키로미터 지점
**「악명 떨친 징맹이고개 도둑」
서울특별시 구로구에서 징맹이고개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악명 떨친 징맹이고개 도둑」은 서울특별시 구로구에 전해지는 징맹이고개[景明峴]에서 악명을 떨친 도적 이야기로서, 이들로부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 천명이 모여 함께 고개를 넘었다는 일명 천명고개에 대한 지명유래담이다.
옛날 구로를 포함하고 있던 옛 부평부에는 크고 높은 고개가 있었다. 지금의 계양구 계산동에서 서구 공촌동으로 넘어가다 보면 계양산 주봉 서쪽에 길이가 8km에 달하는 기다란 고개가 그것인데, 이름하여 인천서 가장 크고 높다는 ‘징맹이고개’이다. 이 고개는 고려 때 유명했던 발아장(發阿場)[지금의 검암동 바름이마을]에서 가현산의 광인원(廣因院)과 통진의 조강(祖江)나루터와 풍덕(豊德)을 거쳐 바로 국영 매방이 있었던 송도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징맹이고개는 매를 징발한다고 해서 징매[徵鷹]고개라고 부르던 것이 변한 것이다. 특히 고려 충렬왕 때 이 고개는 잡초가 무성하고 솔밭이 우거진 험준한 사냥터였다. 충렬왕의 징맹이 매방에 대한 애정은 너무나 커서 계양도호부를 93년 만에 폐하고, 이곳을 참으로 길(吉)한 고을이라는 이름의 길주(吉州)라는 이름으로 고쳐 목사 고을로 한 등급 승격시키기까지 했다고 한다.
옛날에는 지형이 험준하고 숲이 무성했기 때문인지 이 고개는 도둑이 득실거려 임꺽정[林巨正]도 한 때 이 계양산(桂陽山) 징맹이고개[景明峴]에 자신의 소굴을 가지고 부하들을 훈련시켰다고도 한다.
1560년(명종 15) 부평도호부 부사로 부임한 신건(申健)은 자기가 다스리는 고을에 악명 높은 도둑들이 들끓고 있다는 것을 심히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래서 그는 어느 날 포졸들을 거느리고 이 징맹이고개의 도둑 소탕 작전에 나섰다. 그런데 부사가 포졸들을 거느리고 징맹이고개의 어구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아주 키가 작은 놈 하나가 칼을 들고 부사 앞을 가로 막으며 말하기를, “부사, 자는 범 코 찌르지 말고 큰 코 다치기 전에 어서 돌아가는 게 어떻소?” 하는 것이었다. 아주 당돌한 놈이었다. 주먹만한 놈이 안하무인이요, 방자하기 이를 데 없었던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있던 포졸들이 참다못하여 고함을 질렀다.
“이 무엄한 놈 감히 어느 어른의 앞이라고 함부로 주둥아리를 놀려대느냐?” 그러면서 포졸들이 작은 놈에게 달려들어 생포하려고 했다. 그러자 이 작은 놈은 잽싸게 몸을 빼쳐 옆 바위 위로 날아올라 앉았다. 그리고는 “하하하!” 하고 호기 있게 웃어대며 “흥, 어리석은 것들. 나를 잡아 가려고 했겠다? 어림없는 개수작 떨지 말고 너희들의 패랭이나 벗어 봐라.” 하는 것이었다.
무슨 소린가 하고 패랭이를 벗어 보았더니, 아! 이게 웬일인가? 어느새 그가 칼을 써서 그 많은 사람의 패랭이 꼭지가 모조리 잘려서 땅에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귀신이 탄복할 만한 재주였다. 이 날렵한 검술에 혼비백산한 부사와 포졸들은 도둑을 소탕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냥 도망을 쳐 산을 내려오고 말았다. 그 뒤로 징맹이고개 도둑들은 더욱 더 악명을 높여 갔다고 한다.
징맹이고개는 천명고개라고도 불렸다. 이 고개를 넘으려면 많은 사람들이 떼를 지어서 함께 넘어야만 변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징맹이고개를 항간에서는 ‘천명고개’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악명 떨친 징맹이고개 도둑」의 주요 모티프는 ‘매를 징발하는 고개의 유래’, ‘천명고개의 유래’ 등이다. 악명을 떨친 이 징맹이고개는 지리적으로 중국으로 통하는 큰 길목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계양산 북쪽 삼남지방과 개성을 잇는 중요한 통로였다는 점과, 지형이 험준하고 숲이 무성했다는 점에서 도적 이야기 발생의 최적의 요건을 갖추고 있다. 이 설화는 이러한 지리적 환경을 반영하여 도적설화 혹은 의적설화의 모티프를 가지고 있다.
징맹이고개라 이름 붙여진 이유는 충렬왕 때의 매방과 관련이 깊다. 충렬왕은 고려 제25대 왕으로 그 당시는 원나라에 대한 정치적 의존도가 높았으며 원으로부터의 고려에 대한 간섭도 심했다. 결국 처형된 말기의 충렬왕은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고 사냥과 연회에 몰두했다고 한다. 이때 매 잡는 것을 임무로 하는 응방(鷹坊) 등에 소속된 관원들은 원나라의 세력을 믿고는 전민(田民)을 탈취하는 등 많은 폐해를 낳았다고 한다.
한때 징맹이고개는 홍길동(洪吉童), 장길산(張吉山)과 함께 조선의 3대 도적으로 일컬어지는 임꺽정의 활약 무대이기도 했다. 16세기 중반 조선시대 임꺽정은 몰락농민과 백정과 천인들을 규합하여 지배층의 수탈정치에 저항하며 정국을 위기로 몰아넣고는 하였다. 당시의 상황을 사관이 기록하기를, “도적이 되는 것은 도적질하기 좋아서가 아니라 배고픔과 추위가 절박해서 부득이 그렇게 된 것이다. 백성을 도적으로 만드는 자가 누구인가.” 이렇게 기록될 정도로 당시의 사회 경제적 모순이 격화됨에 따라 민중이 지배층에 대해 저항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적이 발생하는 일이 잦았다.
임꺽정은 날쌔고 용맹스러우며 지혜로워 관청이나 양반·토호의 집을 습격하거나 주요 교통로를 장악하여 정부가 농민들로부터 거두어들인 토지세·공물·진상물 등을 탈취했으며, 이것을 다시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임꺽정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상반되어 지배층은 그를 흉악무도한 도적이라고 했고, 민중들은 그를 의적이라며 영웅시했다. 물론 징맹이고개에는 임꺽정 같은 의적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민중의 피를 빨아먹는 공포의 도적들도 많았다. 따라서 천명이 함께 건너가야 할 정도였다. 이렇듯 「악명 떨친 징맹이고개 도둑」은 당시 부정부패하고 불안정한 사회현실을 반사하고 있는 이야기인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그때 그시절 사진... 한남정맥 사진(2010년7월10일)
징매이고개 사진
계양산과 징메이고개 생태통로
징맹이고개에서 본 도로는 결국 84번 국도로 이어짐
계양산 둘레길
예쁜 계양산 둘레길
계양산 장미원 모습
계양산 둘레길
아래쪽에 노트르담 수녀원과 경인여자대학교
**노트르담수녀회 ; [ Congregation of the sisters of Notre-Dame , ─修女會 ]
독일 쾨스펠트에서 설립된 활동 수녀회.
1850년 10월 1일 독일 쾨스펠트에서 아델곤드 월브링(Adelgonde Wolbring)과 리제테 퀼링에 의해 창립되었다. 1789년 프랑스의 아미앙에서 줄리 빌르아르
(Julie Billiart)가 설립한 여자 활동수녀회의 수족 중 하나로서, 한국에는 1967년 7월에 처음 진출하였는데 서울 종로구 계동에 서울 분원을 설치하고 1971년 한국인 지원자를 받았다.
또 1972년 10월에는 부산 부민동에 분원을 설립, 한국지부가 창설되었고, 같은 시기에 유치원을 개원하였다. 1975년에는 인천 송림동에 분원을 설립하고 박문여자고등학교를 위임 경영하게 되었으며, 1977년에는 경기도 오산에 분원을 설립하고 유치원을 개원하였다.
이 수녀회는 여성들의 교육사업에 주력하면서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불우여성의 기술·교양 교육, 노인학교 경영, 소외계층에 대한 사회 적응 교육 등 다양한 사회사업을 펼치고 있다. 1992년 설립 25주년을 맞아 관구(管區)로 승격하였다. 초대 관구에는 지부장이던 강금옥 수녀가 임명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계산동으로
계산동 지구대
계양산성 박물관
계단으로 올라가야하나... 계속 도로로 위회
임하공원
인천어린이과학관
계양유소년 축구장
계양누리길을 따라 진행(계양산이 조망)
한적한 시골길...
아주 산적하고 멋진길...
공항철도, 공항고속도로, 아래뱃길 옆을 따라. 진행..
이곳부터 약간 난해.. 산으로...
요런곳으로 진행..위험.. 조금 우회하면 좋은 등로 있음
다시 좋은 등로로....아래뱃길과 공항고속도로, 공항철도
서천교가 조망
검암초등학교
16시25분...검암역...35.13키로미터
답사종료하고 역 화징실에서 세수하고 옷갈아입고 전철타고 집으로 복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