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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아브라함
2001년 12월 23일 / 대예배 / 창 12:1-4
아브라함의 본명은 아브람이다. 하루는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아브람아! 너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인간적인 정(情)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아브람이 살고 있던 갈대아 우르는 세계 무역의 중심지이므로 혼잡한 상업의 중심지였다. 그리고 예술, 의학, 사법제도가 세계에서 제일 발달한 곳이었으며 난잡한 우상숭배와 사악한 종교의 중심지였다. 시골에 사는 사람에게 성공하기 위하여 도시로 올라가라 하면 오히려 기쁨으로 순종할 터이나, 가장 번화가 도시 한복판에서 모든 문화혜택을 누리고 있는 아브람에게 그 자리를 떠나 다른 곳으로 떠나라는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합당한 명령이 아니었다. 그러나 생각하건대 아브람으로서는 타락한 물질 문명과 우상숭배로 인하여 마음이 상하였을 것이다.
▶ 세상 것이 아무리 좋아 보여도 하나님이 예비하신 새 것을 받기 위해서는 떠나라 할 때 과감히 떠날 수 있어야 한다. 영적인 축복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한 성도에게 “너는 여기서 영적 훈련이 끝났으니 이제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하신다면 우리는 기쁨으로 움직여야 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 한 목회자에게 “너는 여기서 할 일이 끝났으니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하신다면 하나님께 순종하여 움직여야 할 것이다.
반면에 제자들에게 명령하셨듯이 (행 1: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셨으면 천지가 개벽한다고 해도 기다려야 한다.
이에 잘 순종한 사람이 있다. (마 8:8-10)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10)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
많은 사람들이 가만히 앉아서 “하나님 저에게 복을 주세요.”라고 기도하지만 오히려 하나님은 나에게 작은 일서부터라도 순종하고 움직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질그릇이다.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이 하자는 대로해야 한다. 아브람은 순종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한 가지 곧 순종이다. 하지만 아브람은 사실상 제대로 순종하지는 못했다. 하나님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네 가지를 명했지만 아브람은 두 가지, 본토와 집만 떠났던 것이다. 아비를 데리고 가되 오히려 데라가 앞장서고 아브람이 따라갔으며, 조카 롯을 데리고 함께 갔던 것이다. 아브람의 믿음은 처음부터 큰 것이 아니라 겨자씨 만한 믿음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아브람은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하나님을 좇는데 있어 걸림돌은 세 가지 정도인데, 요한복음 1장 13절 말씀대로 1)혈통과 2)육정과 3)사람의 뜻이며 그 중에서도 대표적으로 성령의 열매와 역사를 막는 것은 ‘인간의 정’이라 할 수 있다.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려면 철저히 인간적인 정까지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情)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 5:24) 부모와 자식간의 인간적인 정, 목회자와 성도간의 인간적인 정, 친구 친척간의 인간적인 정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막는 거침돌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이다.
(마 8:19-22)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21)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불교도 도를 닦기 위해서는 세상을 등지고 간다. 하물며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자 하는데 세상과 더불어 세상의 정을 끊지 않고서는 따를 수 없는 길이다. 그러기에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라고 말씀하셨고, 세상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고서는 성령의 뜻대로 살 수 없는 것이다.
아브람은 인간적인 정에 약하여 이로 인해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세속적인 야심을 버리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랐다. 아브람은 떠나라 할 때 떠났고, 버리라 할 때 버렸고, 바치라 할 때 바쳤다.
그의 신앙원칙은 단순하다. 단지 하나님은 말씀하셨고 아브람은 순종했다는 것이 전부이다.
네가 순종하면 나머지는 내가 하겠다
하나님은 “네가 순종만 하면 그 다음은 내가 하겠다.”고 하셨는데, “내가 … 하리라.”고 7번 말씀하셨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 “내가 네게 복을 주겠다.”, “내가 네 이름을 창대케 하겠다.”, “내가 너로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 “내가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내리겠다.”, “내가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하겠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게 하겠다.”
이제 우리(우리 교회)도 이런 일곱 가지 완전한 은혜를 받아야 한다. 순종해야 할 때 순종하자. 내가 무엇인가 이루어보려고 몸부림을 치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편이 훨씬 수월할 것이다. 허공만을 잡으려고 하기보다는 나에게 손을 내미신 하나님의 손을 잡자는 말이다.
▶ 성경에는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령님의 인도를 좇는 삶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말씀을 좇아가는 것을 말한다. 성령님께서는 오늘날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우리는 나와 함께 계시는 나의 하나님 곧 성령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은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신 28:1)
성령님의 음성은 여러 모양으로 우리에게 들려진다. 성경, 설교말씀, 세미한 음성, 꿈, 환상, 예언, 환경, 사건, 역사적 흐름, 성경인물의 예(例)를 통해 말씀하신다. 성령님의 음성은 종합적으로 들려온다. 성령님은 가장 위대하고 실력있는 영적 교사이시기 때문에 개개인의 특성에 따라 언제 어떤 방법으로 말씀하셔야 그 사람이 가장 잘 알아듣는 지를 아신다. 우리가 “성령님, 어떻게 할까요? 성령님, 저에게 말씀해 주세요.”라고 말씀드린 후 기다리자. 그러면 성령님의 그분의 시간에, 그분의 방법으로 정확하게 우리에게 거듭 반복해서 알아듣도록 말씀하신다. 그 대신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를 따르며, 하시는 말씀에 대하여 전적으로 순종하여야 한다.
▶ 아브람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다. 감추어진 장소를 향하여 출발한 것이다. 여기서도 성공의 의미를 다시 파악해 볼 수 있다. 참된 성공은 무엇인가? 차에 시동만 걸면 목적지를 향해 쉬지 않고 정신없이 달려가는 것인가? 그 목적지에 남보다 먼저 도착해서 놀고 쉬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 참된 성공은 과거 하나님과 아담이 동행하듯이 성령님과 함께 기쁨과 감사 속에서 살아가는 삶 그 자체인 것이다. 아브람은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성공은 온 천하를 남보다 더 많이 소유하고 그것을 누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온 천하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사랑의 데이트를 하는 것이다. 75세의 아브람은 하나님과의 첫 사랑에 빠졌던 것이다. “나는 너희의 남편이다. 내가 너희를 성읍 중에서 하나와 족속 중에서 둘을 택하여 시온으로 데려오겠다.”(렘 3:14)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
아브람은 남편 되신 하나님과 함께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으며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렀다. 아브람은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고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다. 여기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브람이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아브람을 택하셨고, 아브람이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아브람을 찾아오셨고, 아브람이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람을 위해 피의 언약을 주셨던 것을 알 수 있다.
아브람이 단을 쌓은 것은 자기 행위와 의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닌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위해 단을 쌓은 것이다. 우리도 예배를 드리거거나 예물을 드릴 때에도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한다.
▶ 그는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아브람의 눈에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영으로 존재하셨다. 그러므로 그는 영이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언제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인정했던 것이다. 그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점점 남방으로 내려갔다. 이제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또는 에녹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자.
네 스스로 승리한 것이 아니다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다. 애굽은 세상을 의미하며 사단의 요새를 가리킨다. 제 아무리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환경적인 어려움이 오면 힘들어하며 다 포기하고 당장 세상으로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마련이다. 자기 혼자면 그런 대로 참겠거늘 딸린 식구들이 있으면 더욱 그러하다. 아브람은 빈궁에 처함으로 인한 곤경을 겪게 되어 애굽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애굽사람이 두려워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바람에 아내가 바로의 궁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시므로 이 일이 탄로되어 아브람이 애굽에서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아브람은 다시 남방으로 올라가 벧엘로 이르러 처음으로 단을 쌓았던 곳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여호와여! 사랑하는 나의 여호와여!” 잠시나마 흔들렸던 하나님과의 교제가 다시 회복되었던 것이다.
▶ 그러나 얼마 안가 또 시험이 닥쳐왔다. 이제는 빈곤이 아닌 풍부함으로 인한 곤경이 온 것이다.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거하는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치 못하였던 것이다. 곧, 그들의 소유가 너무 많아서 함께 동거할 수 없었으며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었다. 아브람은 이것이 단순한 문제가 아님을 깨닫고 하나님의 처음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기 위해 대가를 치르기로 결심했다. 그는 자신의 권력(권한)으로 좋은 땅을 택할 수 있었지만 권력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좇았다. “롯아 나를 떠나라. 네가 먼저 원하는 땅으로 가라.”
아버지 데라는 일전에 하란에서 죽었고, 조카 롯도 갈라섰으니 그는 100%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것이다.
그 때 즉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창 13:14)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복을 주리라.” 롯을 떠나보낸 그 상처받고 빈 공간에 하나님이 찾아오셨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땅을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하셨다. 아브람은 롯을 기름진 땅 소돔과 고모라로 보낸 뒤 자신은 광야의 박토에서 살면서 점점 강해졌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가 우리 안에 누운 배부른 돼지보다 넓은 평야의 매우 멋있는 준마(駿馬)가 되기를 원하신다.
▶ 소돔과 고모라에 살고 있던 조카 롯이 그돌라오멜에게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아브람은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신의 군사 318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그돌라오멜과의 대규모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왔다. 그 때 소돔왕이 그를 영접하였고 거의 동시에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그를 영접했다. 아브람은 세상 왕의 영접보다는 평강의 왕이자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살렘왕의 영접을 더 기뻐했다. 멜기세덱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며 말했다. (창 14:19-20)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오히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던 것이다. 소돔 왕이 전리품을 모두 주려고 했을 때에는 오히려 거절을 하더니 멜기세덱이 복을 빌며 ‘너희 대적을 멸망시키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하였을 때에는 ‘하나님만이 나의 모든 것이 되시며 나의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면서 십일조를 드린 것이다.
아브람은 세상적인 야심에 대하여 초연한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진정 하나님의 사람이 원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인 것이다. 아브람은 족장으로서는 정말 이기기 힘든 물질문제를 초월까지 하였고 나아가 영적인 힘을 가지게 되었다.
▶ 그렇지만 아브람의 마음 한 쪽은 불안이 밀려왔다. 돈과 물질의 유혹을 물리치시기는 하였지만 주변 국가들과 적군으로부터의 재침략을 염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돈과 물질의 유혹을 물리친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세상의 권력과 권세로부터 보호해주겠다고 하셨다.
(창 15:1)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함께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축복도 있지만 아브람에게 있어서의 현실은 그렇지를 않았다.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던 것이다. 아브람의 한탄과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 주셨는가를 본다.
(창 15:2-4, 5-7)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3)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4)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 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7)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진리를 터득해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고, 그 약속을 하신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시는데도 아브람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도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했던 것이다. 아브람은 자기에게 자식이 없는 것을 알고 충성된 종인 엘리에셀 또는 자기 집에서 길리운 자가 자로 하여금 상속자를 삼아 하나님께서 계속 당신이 하시고자 하는 뜻을 이루시라고 하였다. 그리고 아내의 권유로 하갈과 동침해서 자기 나름대로 아들을 얻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고 했던 것이다. 이것은 인본주의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인본주의 즉 자기의 생각과 방법대로 가정과 교회와 기업을 세우려고 한다. 이것은 모두 ‘종의 교회, 가정, 기업’ 또는 ‘이스마엘 교회, 이스마엘 가정, 이스마엘 기업’인 것이다. 그러면서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하며 어느 정도 만족감을 누린다. 그렇지만 그것은 결코 아니다. ‘이스마엘 교회’도 번성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성령에 의해서가 아닌 자기의 힘과 재능, 프로그램으로 교회를 부흥시켰으며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의를 드러낸 것이다. 과연 이스라엘 나라 또는 가정 그리고 교회가 어떻게 되었는가를 우리는 현재의 이슬람교를 통하여 잘 알고 있다.
▶ 하나님은 그 후 13년이 지난 후 아브람의 나이 99세 때에 나타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창 17:1-2) 아브람의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2)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브람은 땅에 엎드렸다. 이에 하나님은 또 그에게 말씀하셨다.
(창 17:4-8)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6)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그러면서 아브라함에게 한 가지 언약을 세우셨다.
(창 17:9-11, 14)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1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11)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14)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 아브라함은 아멘으로 화답하며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기는커녕 아직도 인간의 힘과 생각을 의지했다.
(창 17:17-18)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18)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아브라함의 불신에 대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분명히 하셨다.
(창 17:19)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
지금까지 지내온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지만 이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자신이나 사람들 그리고 세상에 나타낼 수 있는 증거를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다.
창 17:17에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에 웃었고, 창 18:12에는 사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여 속으로 웃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실제적으로 그들의 비웃음과는 달리 기쁨의 웃음을 주셨던 것이다.
(창 21:1-3)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2) 사라가 잉태하고 하나님의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3) 아브라함이 그 낳은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오랜 기간 즉 25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기다린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선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으로 삼고자 하셨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각이나 방법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졌음을 믿게 하려 하심이다. 그리고 사람의 힘이나 사람의 변덕스러운 믿음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음도 일깨어 주셨던 것이다. 아브라함이나 사라는 여러 모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능력을 믿었지만 인간으로 믿을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믿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이상도 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심을 알아야 했던 것이다.
완벽을 요구하시는 하나님 / 완벽한 복을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약속대로 아브라함에게 100살이 되었을 때에 이삭이라는 자식을 주셨다. 이삭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사 우리로 하여금 즐겁게 웃게 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은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의 집에 자꾸 먹구름과 흙바람을 일으키는 이스마엘과 그의 어미 하갈을 내어쫓게 하셨으며, 아비멜렉과 군대장관 비골로 하여금 아브라함을 더 이상 괴롭히지 못하게 하셨던 것이다. 아브라함의 주변에는 하나님이 주신 복에 대하여 모두가 다 부러워하며 그를 대적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 그런데 이상하게도 창 22장에 오면서 하나님은 이삭을 죽이라고 하셨다. 그 이유는 아무리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주신 선물일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여 주신 자식이라 할지라도 아브라함으로서는 그 자식에게만 매달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주신 선물에 대하여 감사는 당연하지만 그 자식을 신앙으로 잘 키우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아브라함에게는 약속으로 주어진 선물인 이삭이 중요하냐? 아니면 하나님이 더 중요하냐? 는 문제를 분명히 해결해야만 했다.
요즈음처럼 자식을 귀엽게 생각하다보니까 자식을 우상시 하고만 것이다. 이렇게 해서는 결코 자식을 훌륭하게 키울 수가 없다. 내가 자식을 이모저모로 돌보지만 역시 자식은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키워주셔야 한다. 이것을 넘어 자식을 내가 사랑하고, 내가 돌보고, 내가 키우겠다고 하니까 문제가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니 심하게 말하자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인 이삭을 버려놓는다는 말이다. 이삭으로 말미암는 축복의 물줄기를 막는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잘못된 생각과 행동을 가로막은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이 없이 자라는 이삭이 과연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영적인 자손이 될 수 있겠는가? 결코 아니다. 보통 사람보다 조금 나은 평범한 사람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기에 이러한 잘못된 자식을 죽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시 훌륭한 영적인 자손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안 아브라함은 이를 악물고 이삭을 향해 칼질을 하였던 것이다. 아브라함의 마음을 아신 하나님은 곧 육적인 칼질을 멈추게 하시고 이삭 대신 준비한 양을 제물로 받으시고 이삭을 당신의 자식으로 받으신 것이다. 이제 이삭은 아브라함에 의하여 키워지는 자식이 아닌 하나님의 자식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도르가의 작은 봉사
2001년 12월 23일 / 저녁예배 / 행 9:36-43
대해라고도 불리는 지중해 아름다운 바닷가에 욥바라고 하는 항구도시가 있다. 이 욥바는 인천항과 같은 큰 항구 도시로서 옛부터 무역 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다 보니 외국인들도 많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 욥바에 도르가(다비다)라는 여인이 살고 있었다. 이 여인은 헬라어로 ‘다비다’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그 뜻은 ‘노루 같은 여성, 혹은 ’영양‘의 의미이다.
그녀는 바느질을 잘하는 사람으로 알려졌는데, 그 바느질 솜씨만큼이나 아름답게 자신의 생을 수놓아 간 사람이다. 그가 사랑하고 함께 했던 여인들이 있는데 그들은 세상에서 외롭고 힘들게 살아가는, 남편을 일찍 잃은 과부들이다. 다비다는 이들에게 많은 사랑을 베풀었다.
영화 ‘로마의 휴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아 전 세계 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오드리 햅번’이라는 배우가 있다. 가냘픈 몸매, 둥근 눈, 밝은 미소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세상에서 부와 명성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던 그가 이 모든 것을 버리고 배고파 죽어가는 어린이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훗날 그녀를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진정으로 아름다운 ‘오드리 햅번’을 만난 것은 관객들의 환호 속에서가 아니고 수없이 막을 울렸던 그녀의 영화에서가 아니라 메마르고 굶주린 땅 아프리카에서였다.” 어느 적막한 밤 그녀는 오랜 투병 끝에 고요히 눈을 감았지만 그녀는 짧은 글을 우리의 가슴에 써주고 갔다. “당신에게는 또 다른 손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는 자신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을 도와 주기 위한 것입니다.”
욥바에 살던 다비다가 그렇다. 오늘 본문은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라고 그녀를 소개한다. 그녀의 아름다운 행실은 오늘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감동을 준다. 그리고 현재 도르가라는 세계적인 자선 단체가 결성이 되어 그의 뜻을 받아 귀한 일들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Ⅰ. 여제자 도르가의 삶
도르가는 하나님을 열심히 믿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여인이었다. 무엇보다 도르가는 수많은 신약의 여성들 가운데 유일하게 여제자로 불리기까지 하면서(행 9:36) 선행과 구제에 힘썼던 여인이다. 도르가라는 이 여인이 결혼을 했다가 과부가 됐는지 아니면 전혀 시집을 안가고 순수한 처녀로 일평생을 주를 위해 헌신한 여자인지는 성경에 분명한 기록이 없어 잘 모르겠지만 많은 성경학자들이 말하기는 이 ‘도르가’라는 여인은 아예 처음부터 “처녀로서 한평생을 오직 주님만을 위해 살기로 헌신하겠다고 서원한 여인”이라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이 여인이 남편도 없이 혼자서 삶을 꾸려가기 위해서는 어떤 일을 하였을 텐데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행 9:39에 보니까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 … 의 말씀을 살펴 볼 때, 도르가라는 여인은 ‘삵 바느질’ 일을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도르가’라는 여인이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으로 삵 바느질을 한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가난한 자들과 과부들을 위해 손수 애정 어린 손길로 헤어진 옷이 있으면 꿰매어 주고 또 여기 저기 다니면서 천을 얻어다 옷이 없는 불쌍한 사람들에게는 예쁜 옷을 손수 만들어서 입혀 주었다. 또한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몸에 꼭 맞게 고쳐 주었다.
‘도르가’가 만들어준 옷은 그 어떤 일류 재봉사와 제단사가 만든 옷보다도 더 솜씨가 훌륭하고 섬세하였다. 그리고 옷을 선물 받은 사람들은 도르가에 대하여 무척 고맙게 여겼다.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고맙다는 인사를 받을 때마다 도르가는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해요. 예수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막 12:31)고 말씀하셨거든요”라고 하며,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만 돌리는 것이었다.
도르가의 이 아름다운 행동을 본받아 도르가가 섬기고 있는 교회 성도들도 뜻을 같이하여 도르가를 물심양면으로 후원해 주었다. 이렇게 욥바 교회를 중심으로 시작한 사랑의 옷 나누어주기 운동은 지금도 계속되어 이제 전 세계적으로 “도르가 협회”라는 자선단체가 조직되어 이 도르가 협회를 중심으로 수백만의 사람들이 구제품과 구호품 등을 받고 있다. 아마 요사이 번지고 잇는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과 사랑의 빵 나누기 운동도, 그리고 바자회 모임도 처음 도르가의 헌신으로부터 출발되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본다.
Ⅱ. 교회 봉사와 헌신
우리는 오늘 도르가라는 여인을 통해 크게 도전 받고 깨달아야 할 교훈이 있다. 그것은 주님을 섬기는 일이 어떤 특정인에게만 한정적으로 주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도르가라는 여인은 부자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많이 배운 사람도 아니다. 또 재주도 많아 여러 일을 하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다. 오로지 그가 할 수단으로 여겼던 삵 바느질 일그것을 가지고 조금도 남에게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조그만 일부터, 다시 말해 교회 안에 혹시 커튼이 찢어져서 꿰매고 고칠 부분은 없는가, 살펴보다가 그것이 더 나아가 성도들에게 큰 관심이 옮겨갔고 더 나아가 가까운 이웃 사람들을 보살펴 주기까지 한 큰사랑으로 옮겨 간 것이다. 처음부터 큰 일을 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은 내가 돈 많이 벌어서 헌금도 많이 낼 때까지 잠시 교회를 쉬겠다 또는 그 때 가서야 십일조를 하겠다고 하는데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하나님의 일은 가진 것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 없지만 믿음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조그만 일부터 아주 작은 일부터 다시 말하면 겨자씨만한 감사로부터 시작해야 큰 일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의 원리이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기를 교회 봉사는 많은 물질이 있어야 하고 실력과 학식이 있어야 하며, 아는 것도 많아야 하며, 은사도 많아야 한다고 잘못 생각하므로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할 수 있는 일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마치 한 달란트를 받은 종처럼 말이다.
믿음이 부족한 어떤 사람은 나는 교회에 가고 싶어도 돈이 없어 못 나가겠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교회 봉사는 피아노 반주나 안내, 헌금 이런 종류의 봉사만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교회를 위하여 할 수 있는 기도 또는 청소 나아가 한 영혼을 위하여 전도하는 것 등 진짜 해야 할 교회 봉사와 헌신에 많은 사람들이 주저한다.
이제 우리는 겨자씨만한 작은 봉사로부터 시작하여 순교까지에 이루는 큰 봉사까지라도 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지자. 지금부터 나도 큰 일을 할 수 있다 또는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부심과 긍지 그리고 책임감을 가지고 작은 일부터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Ⅲ. 도르가의 죽음과 부활
그런데 갑자기 [도르가]라는 여인에게 문제가 생겼다. 그것은 그녀가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너무 열심히 봉사하다가 그만 병이 들어 죽은 것이다. 더욱이 그녀의 시체를 거둘 만한 친척이 없었기에 교회는 더더욱 난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도르가가 죽었다는 소식이 온 마을에 알려지자 평소에 그녀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많은 친구와 과부들이 몰려와 그녀의 시체를 닦아주었고 또 입관까지 시켜 주었다(행 9:37).
그리고, 교회는 욥바에서 두 마일밖에 떨어지지 않은 룻다에 베드로 사도가 머무르고 있음을 알고서는 빨리 사람을 보내어 모셔오게 하였다. 그들은 이미 베드로가 초자연적인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예를 들어 행 5:15에 베드로의 그림자가 덮었을 때, 병든 자가 나았다는 사실과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웠다는(행 3:1-10) 사실들이다.
베드로 사도는 곧 도착하여 죽은 시체를 뉘어 놓은 다락방에 올라가 울고 있는 여자들로부터 도르가라는 여인이 살아 생전 행한 선행과 구제에 대하여 베드로에게 낱낱이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지어준 속옷과 겉옷을 실증적으로 다 내어 보이며 그녀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그러자 베드로는 무릎을 꿇고 기도한 후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고 명하매 죽었던 다비다, 도르가 여인이 눈을 뜨고 일어나 앉았다.
이 기적은 도르가 여인으로부터 인간적인 사랑과 도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지 않은 여인들이 그제야 살아 계신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주 앞에 많이 돌아왔다. 다비다, 즉, 도르가 여인은 베드로를 통해 다시금 생명을 얻었으며 또 그때 이후로 더더욱 주님을 위해 바늘을 쥐고 이 땅의 가난하고, 배고프고,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옷을 지어 주는 일을 죽을 때까지 게을리 하지 않았다.
결론의 말씀
도르가의 작은 헌신과 섬김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주께 돌아오게 하였고 또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온 세상에 널리 알렸던 도르가! 그 첫 출발이 작은 삯바느질에서 시작되었던 것을 기억하며, 우리는 작은 일, 큰일 가리지 말고 주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교회 일에 충성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많은 희망과 능력을 주셔서 이 시대에 능력 있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해 주실 것이다.
작은 봉사에 대한 이야기 한 마디를 하고 말씀을 마친다.
■ 어느 시골의 총각 선생님이 출근길에 시냇물을 건너고 있었다. 그런데 징검다리를 잘못 밟아 신발과 바지가 물에 흠뻑 젖어버리고 말았다. 때마침 서울에서 올라오신 어머니께서 집에 머물고 계셨다. 그가 어머니에게 되돌아온 이유를 말씀드리자 어머니가 물었다.
“네가 밟았던 잘못 놓인 돌은 바로 놓았느냐?”, “미처 그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해서 무슨 선생이 되겠다고 그러느냐? 얼른 가서 돌을 바로 놓고 오너라. 그리고 옷을 갈아입도록 해라!”
어머니의 말씀이 조금 야속하게 들리기는 했지만 몇 백 번 생각해도 옳은 말씀이었다. 그는 얼른 가서 잘못 놓인 돌을 바로 놓고 돌아왔다. 이 후 그는 무슨 일을 하든지 늘 돌을 바로 놓는 마음으로 임했다고 한다. 그 결과 그는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는 훌륭한 교장 선생님이 될 수 있었다. 돌을 바로 놓는 마음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할 것이다. 먼저 내가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고 다른 사람도 바르게 설 수 있도록 도와주자. 그리고 내가 한 실수를 다른 사람도 하지 않도록 작은 징검다리를 제대로 놓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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