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205위 복자 순교자와 조선인 천주교 신자
5). 조선인 궁녀(宮女) 막센시아
임란(王亂) 때 포로로 건너온 조선 여인으로 궁녀(宮女)가 된 또 다른 두 사람에 대한 문헌이 전해져 오는데, 그 기록이 순교한 선교사 세바스티아노 비에이 라 (Sebastiano Vieira)신부의 서술에 보이고있다. 그중에 한 여인은 막센시아(Maxentia)라는 조선 여인이다. 조선 여인 막센 시아의 정신적인 용기에 대하여 비에이라 신부는 아래의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다. 그녀는 1613년에 배교한 유마 직통(有馬直統) 아리마 공(미카엘과 결혼한 피마 : 황제의 조카딸이 된다) 왕녀의 시녀였다.
이 아리마 부부는 천주교도들이 형벌이나 죽음을 무서워하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이를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당시에 일본에서 고명하다는 승려를 데려다 능변과 궤술로 막센시아를 비롯한 신도들을 조롱하고, 어린아이들에게마저 놀림감을 만들리라 생각하였다. 왕녀는 그렇게 해서라도 승려를 돋보이게 할 심산이었다.
승려는 왕녀가 체재하는 성으로 불리워 갔다. 승려는 능력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 성채(城智)에서 종사하는 천주교도 명사들에게 왕녀가 보는 앞에서 이교 도(異敎徒) 제사 때 쓰는 꽃 관을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신하고 병사고 간에 숭려의 손에서 이교도 제사의 상징인 꽃 관을 받으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승려는 당황하여 적어도 궁녀들에게는 억지로라도 쥐어주리라 하고 서는 그녀들 손에 하나씩 얹어 주었다. 그러나 화관은 그녀들 손에서 스르르 홀러 내려 땅바닥에 떨어졌다.
그중의 하나인 막센시아라는 여자는 분히 여겨 멀찍이 뒤로 물러나 버리는 것이었다. 숭려는 더욱 당황했고 그를 불러들인 왕녀 역시 난처해졌다. 왕녀는 노기를띄고, 비록 궁녀라 할지라도 화관을 순순히 받지 않는 사람은 천주교도와 똑같이 죄를 씌우겠다고 위협하였다.
천주교에 대하여 새로운 박해를 일으킨 왕녀는 이 소행을 몹시 불쾌히 여겼고, 특히 조선 여인이라는 이유로 막센시아를 더욱 증오하였다. 막센시아가 신앙을 저버리 지 못해 기어이 승려 앞으로 나오지 않자, 피마는 그녀를 함 속에 가두었다. 그리고 기둥에다 동아줄로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서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주지 말고 굶겨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굶어 죽기가 싫으면 교(敎)를 버리라는 것이었다.
또 이교도 부인들을 보내어 온갖 감언이설로 그녀를 종 용케 하였으나 이것도 허사였다. 이렇게 일주일이나 지 나자 부인들도 동정심이 발동했는지 그녀의 결박을 풀어 기둥에서 놓여나게 하였다. 그는 한 주일 동안 기도하고 그토록 수난 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회상하는 길 외에 다른 수가 없으며 주님의 보호는 끊어지지 않았던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열이틀 동안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이 감옥 바닥에 누워 있는 사이에도 어떤 갈증도 배고픔도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하룻밤에는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나, 지체 높은 귀부인들 몇이 와서 음식을 차려주기에 이것을 먹고 힘을 차렸다는 것이다. 그 음식은 진귀하고 신선한 음식이어서 하늘에서 주신 음식에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도나(배 교자 미카엘) 나 다른 사람들도 그때까지 막 센 셔서 살아 있음을 보았으므로 이 이야기를 묵살 할 수는 없었다. 이와 같은 이상한 이야기와 그 증거를 목격한지라, 그리스도의 위대한 능력과 많은 순교자가 실제로 아무것도 먹지 않고도 오래 견디어낸 일이 사실무근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었다. 막센시아에 대한 학대와 수모는 그치지 않았다. 도노는 명을 내려 그녀를 다른 태수의 손에 넘겨 버렸다.
새 주인집에 들어가자 그녀는 속세를 끊는다는 표시로 머리를 깎고서 남루한 의복을 걸치고, 여전히 남에게 좋은 표양을 끼치며 그들을 교화하는 등 성스러운 선교 업에 전념하며 살고 있었다.
위에서 언급한 몇몇 조선 여인들 이외도 참수당하여 순교한 조선 여인들 중에는 가타리나 안또니오와 꼬 레아의 아내 마리아, 고시모 꼬레아의 아내 아네스가 있었다.
1624년 11월 4일, 조선인 식스또 가자예몬이 “적은불”에 화형(火刑) 당하고 있는 같은 시각에 그의 아내 가타리나도 참수당했다. 그리고 조선인 안또니오의 아내 마 리아도 이 “대순교”(大鞠敎)의 날에 목을 잘리웠다. 하인이나 종과는 혼인하지 않는다는 일본인들의 습성으로 미 루어 마리아 역시 조선인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일본에 붙잡혀온 조선인들 대부분이 종의 신세가 되었던것이다. 조선인 순교자 고시모의 아내로서 “대순교” 때에 목 잘 리워 죽은 과부 아녜스도 조선인이었다. 그 외에도 많은 조선인 포로들이 있었을 것이나, 기록에는 다 나타나 있지 않고 있다.
1629년 가장 참혹한 박해가 일어났는데, 이 박해 때에는 천주교도들을 괴롭힐 신기한 고안을 해내어 사용했다고 한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줄곧 단말마의 고통이 계 속되고 결국은 죽어가는 무시무시한 형벌이었다. 이 박해에 수 많은 신도들이 불쌍하게도 배교하고 떨어져 나갔다는 것이다.
이 박해 때에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으니, 일본 천주교의 두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들이 배교하고 만 것이다. 일본인 사제 토마스 사마(Thomas Sa- ma)와 선교사 크리 스토포로 페레이라(Christoforo Fer reira) 신부이다.
사마는 바오로 5세 때 로마에 유학하였으며, 서품이 임박하여 보기 드문 신앙심을 보였고, 정말 독실한 자세를 갖추어 서품을 받았다. 그런고로 벨라르미노 추기경도 그와 함께 성무일도 바치기를 즐겨하였다 한다.
그리고 페레이라 역시 일본어는 지방에서 천주교도들 이 겪은 박해를 소개하는 책자 속에 나오는 인물이다. 여러 해가 지난 뒤, 두 사람 다 마음을 바로잡아 지난날 배반한 신앙을 다시 고백하고 그 때문에 목숨을 바쳤다고 한다.
이상과 같이 엄청난 고문 형으로 배교와 수많은 사건 속에서, 대부분의 조선인 여성 순교자들은 고통받는 다른 신도들의 용기를 북돋우게 하였고, 그녀들은 박해받는 이들에게 정신적 승리자의 영광을 안겨 주었다고 수많은 기록에 나타나 있다.
자료: 일본 안의 한국인 그리스도 교인들 [김옥희.이성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