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절요 제28권 / 공민왕 3(恭愍王三)
무신 17년(1368), 원 지정 28년ㆍ대명 태조 고황제 홍무 원년
○ 신돈이 유숙(柳淑)을 영광(靈光)에서 죽이고 김달상(金達祥)을 청주(淸州)에서 죽였다. 예전에 유숙이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갈 때에 장상(將相)ㆍ대신ㆍ문생(門生)ㆍ고리(故吏)들이 모두 교외에서 전송하였다. 유숙(柳淑)이 시를 지었는데 그 끝 구절에, “충성이 쇠하고 성의가 엷어진 것이 아니라, 큰 명성 밑에는 오래 있기 어렵기 때문이로다.[不是忠衰誠意薄 大名之下久居難]" 하였다. 국인(國人)이 모두 그의 명철(明哲)함을 칭찬하고, 왕도 오히려 유숙을 잊지 못해 칭찬하여 마지아니하였다. 신돈은 유숙이 다시 임용될 것을 두려워하여 기어이 해치고자 하여 가만히 유숙의 죄를 찾으니, 어느 사람이 신돈을 위하여 유숙의 시를 읊어 보였다. 신돈이 왕에게 참소하기를, “유숙이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원한 것은 깊은 뜻이 있었는데 전하께서는 이를 아십니까." 하니, 왕이 이르기를, “무슨 뜻인가." 하였다. 신돈이 아뢰기를, “유숙이 구천(句踐)을 전하에 비교하고 범려(范蠡)를 자기와 비교하였으므로 그가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간절히 원한 것입니다. 구천은 월왕(越王)입니다. 범려가 장수가 되어 오(吳) 나라를 쳐서 이기고, 오왕(吳王)의 비 서시(西施)를 취하여 배에 싣고 떠나면서 말하기를, '새의 부리와 물고기의 아가미 같은 얼굴은 사람을 잡아 먹는 상(相)이다. 큰 이름 밑에는 오래 있기 어렵다.[鳥觜魚腮食人之相 大名之下難以久居]‘ 하였습니다. 구천이 식인상(食人相)인 까닭으로 범려가 그렇게 말한 것이온데, 유숙이 전하를 구천에게 비하였으니 죄가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어떻게 이 말을 들었느냐." 하니, 신돈이 아뢰기를, “유숙이 떠나갈 때 시를 지었는데, 그 한 구절에 그렇게 말하였으니, 이것이 그 증거입니다. 지금 유숙이 서주(瑞州)에 있어 바다에 매우 가까우니 만약 범려를 본받아 배를 타고 떠나간다면 반드시 연경(燕京)에 가서 승왕(僧王)을 세우려고 할 것이오니, 일찌감치 제거하여 후환을 없애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왕이 여러 측근 신하들에게 묻기를, “유숙이 갈 때에 시를 지었느냐." 하니, 끝 구절을 들어서 대답하는 자가 있었으므로 왕이 유숙을 더욱 의심하였다. 달상(達祥)의 맏아들은 군정(君鼎)이고, 다음 아들은 문현(文鉉)이다. 군정이 사랑하는 첩이 있었는데 입직하는 날,
밤중에 병을 핑계대고 갑자기 첩의 방으로 돌아오자, 방 안에 사람이 있음을 깨닫고 잡으려고 하니, 그 사람이 칼을 뽑아 군정을 치고 뛰어나가고자 하므로 군정이 고함을 치니 종들이 모여들었다. 그 사람이 평상 밑에 숨었는데 새벽에 보니 문현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달상이 문현을 매우 미워하였는데 문현이 다시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았으며, 죽은 서령(署令) 박우(朴禑)의 아내와 간통하니, 달상이 헌사에서 문현의 죄를 캐내어 다스릴까 두려워하여 신돈에게 청하기를, “문현은 불초이니 서울에 있으면 반드시 장차 불효할 것이므로 지방에 두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신돈이 말하기를, “무슨 죄인가." 하니, 달상이 차마 지적해 말하지는 못하고 미쳤다고만 하였다. 문현이 이 말을 듣고 달상을 원망하며, 그 형을 시기하여 신돈을 찾아 보고 말하기를, “문현이 불행히도 아버지와 형에게 미움을 받았사오니, 공은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오." 하였다. 신돈이 말하기를, “너의 아버지와 형이 무엇 때문에 너를 미워하느냐?" 하니, 말하기를, “내가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내 입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신돈이 말하기를, “무엇을 두려워하느냐?“ 하니, 문현이 차마 말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하였다. 신돈이 이를 의심하여 비밀리에 문현에게 말하기를, “너의 아버지와 형이 무슨 짓을 하였느냐?" 하니, 문현이 차마 말을 못하는 것처럼 하였다. 신돈이 더욱 의심하여 노하는 척하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지 않으면 너를 순군옥에 가두어 국문하겠다." 하니, 문현이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와 형이 공을 나쁘다고 말하면서 장차 나라를 망칠 것이라 하였는데, 내가 마침 들었으므로 내가 이 말을 누설시킬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신돈이 이 말을 믿고 얼마 안 가서 왕에게 참소하여, 그의 아버지와 형을 내쳤다. 이때에 이르러 신돈이 유숙과 김달상을 죽이고자 하니, 왕이 신돈의 뜻을 어기기가 어려워서 곤장을 치고 관적(官籍)에서 제명하고 적몰하기를 허락하였더니, 신돈이 드디어 그들을 죽였다.
.........................
왕이 원 나라의 황제가 상도(上都 북경(北京))로 도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상도(上都) 각주
상도(上都)는 지금의 내몽고(內蒙古) 지역에 해당하는 난하(灤河) 북안(北岸)의 개평부(開平府)를 말한다. 원나라 때 대도(大都)인 연경(燕京)과 병칭하여 양도(兩都)로 일컬어졌는데, 1년에 한 번씩 천자가 순행하는 것이 관례였다. 지금의 내몽고자치구(內蒙古自治區) 석림곽륵맹(錫林郭勒盟) 정람기(正藍旗) 상도진(上都鎮)이다. 2012년 6月에 원상도유지(元上都遺址)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
동사강목 제15상 갑진 고려 공민왕 13년부터, 갑인 공민왕 23년까지 11년간
무신년 공민왕 17년(명(明) 태조(太祖) 홍무(洪武) 원년, 1368)
○ 전(前)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서령군(瑞寧君) 유숙(柳淑)을 죽였다.
처음 숙이 치사(致仕)할 적에 전별을 받는 자리에서 시를 짓기를,
충성이 쇠하고 성의가 없어진 게 아니라 / 不是忠衰誠意薄
큰 이름 아래에 오래 있기 어렵기 때문이네 / 大名之下難久居
하였는데, 신돈은 유숙이 다시 등용될까 두려워하여 이 시를 외며 왕에게 참소하기를,
“숙이 구천(句踐)으로 상(上)을 비정하고 범여(范蠡)로 스스로를 비정했으니 죄가 이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지금 숙이 서주(瑞州) 지금의 서산군(瑞山郡)에 있어 바다가 가깝습니다. 만약 범여를 본받아 배를 타고 떠나간다면 반드시 연도(燕都)로 향해 가 승왕(僧王 덕흥군(德興君)을 가리킨다)을 세울 것이니 일찍 제거하여 후환을 끊음만 같지 못합니다.”
하였다. 왕은 돈이 유숙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으나, 돈의 뜻을 어기기 어렵게 여겨 이에 명하여 곤장을 쳐서 홍주(洪州)로 유배시키고 이름을 삭제하고 가산을 몰수하도록 하였는데, 돈이 드디어 사람을 보내어 영광(靈光)에서 목을 매어 죽였다. 숙이 물러가 있을 때에도 나라 일이 평일과 다름을 들으면 눈물을 줄줄 흘렸다. 화가 일어나자 가족이 숙의 평일의 말에 의하여 용뇌(龍腦)를 보내고, 또,
“달아남만 같지 못하다.”
이르고, 이에 좋은 말까지 보내었으나 숙은,
“군부(君父)는 하늘이다. 하늘을 도피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죽고 삶에는 운명이 있으니 진실로 순순히 받아들여야지 도망한들 장차 어디로 가리요.”
하고는 죽음에 나아갔는데 안색이 평시와 같았다. 사람들이 모두 그를 위하여 눈물을 흘렸다. 아들 실(實)과 후(厚)도 또한 모두 귀양을 갔다. 가족이 〈숙의〉 뼈를 거두어 거적으로 장사지냈다. 신돈이 처형된 뒤에야 왕이 비로소 그러한 일이 있었음을 알고 몹시 슬퍼하여 조지(詔旨)를 내려 그 원통함을 씻어주고 문희(文僖)라 시호하였다. 숙은 충의가 넘치고 천거해 이끌어 주는 바가 있어도 일찍이 〈당자에게〉 말한 적이 없으며, 그 사람이 죄로 쫓겨나가는 경우가 있어도 그 사람을 끊어버리지는 않았으며, 대사(大事)를 만나 대의(大義)를 결단함에 일찍이 유예한 적이 없으니, 대개 정밀 명확함과 인자 관후함 두 가지를 체득했기 때문이다.
유숙의 호는 사암(思菴)이다.
○ 오씨(吳氏)는 이렇게 적었다.
공(公)의 벽란도(碧欄渡) 시에,
오랫동안 강호의 약속을 저버리고 / 久負江湖約
홍진에서 이십 년 / 紅塵二十年
백구는 비웃기라도 하려는 듯 / 白鷗如欲笑
짐짓 헌함에 가까이 오네 / 故故近檻前
하였는데, 남추강(南秋江 추강은 남효온(南孝溫)의 호)은,
“사암(思菴)이 필경은 홍진(紅塵)의 액을 면하지 못하였는데 그 충성스럽고 청렴한 대절(大節)이 큰 이름[大名] 아래에 끝내 드러나지 못한 채 역적 돈(旽)의 무함을 받아 남모르게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하고, 유숙(柳淑)의 시에 화답하기를,
청운의 길 알지 못한 채 / 未識靑雲路
강호에서 사십 년 / 江湖四十年
하였다. 그런데 추강 역시 혹독한 화를 면하지 못해 후세 사람으로 하여금 애닯게 하니 어진 이를 해치는 무리가 어느 시대엔들 없으리요. 통탄스럽다.
...............................
역주 동국신속삼강행실도 3집(충신도 권1) 동국신속삼강행실 충신도 제1권 주해 충신도 제1권 유숙각마(柳淑却馬)
유숙각마(柳淑却馬)
柳淑却馬
柳淑주001) 瑞山郡주002) 人仕高麗忠宣朝주003) 官至贊成주004) 及忠穆주005) 卽位人多失身淑獨終始全節辛旽주006) 用事주007) 退居田園주008) 聞國事日非坐臥未嘗不涕泣謫靈光주009) 將被禍家人送良馬勸走淑曰君父天也天可逃乎從容就死人皆流涕旽敗伸雪주010) 諡文僖配享주011) 太室 旌門주012)
Ⓒ 편찬 | 이성 / 1617년(광해군 9)
뉴슉은 셰산군 사이니 고려 션됴의 벼여 벼리주013) 찬의 니니라 목이 즉위주014) 호매 미처 사이 몸 일흐리주015) 주016) 만호주017) 슉은 홀로 시예주018) 졀늘주019) 올게주020) 니라 신둔이 호매 믈러와 뎐원의 살며 나라 이리주021) 날로 그주022) 되 줄 듣고 안즈나주023) 누으나주024) 일즙 우디주025) 아닐 제기주026) 업더라 의 귀주027) 가 화 닙게주028) 되매 집사주029) 이 됴 주030) 보내여 라나라주031) 권니 슉이 닐오 군부주032) 하히니 하 가히 도 것가 고 히주033) 주그매 나아가니 사이 다 눈므주034) 흘리더라 둔이 패호매주035) 신셜여 시호 문희라 고 태실주036) 의 향니라 졍문 시니라
Ⓒ 언해 | 이성 / 1617년(광해군 9)
유숙각마 - 유숙이 말을 거절하다
유숙(柳淑)은 서산군(瑞山郡) 사람인데, 고려 제26대 충선왕의 조정에서 벼슬하여 벼슬이 찬성(贊成)에 이르렀다. 제29대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함에 이르러서 절개를 지키지 못한 사람이 많았지만 유숙은 홀로 끝까지 절개를 온전하게 지켰다. 신돈(辛旽)이 유숙이 지은 시 한 구절을 두고 고사(故事)를 끌어다가 임금께 참소하므로 유숙은 퇴임하여 전원에 살면서 나랏일이 날로 잘못되어 가는 것을 듣고 앉으나 누우나 일찍이 울지 않을 때가 없었다. 영광(靈光)으로 귀양 가서 얼마 후 화를 당하게 되자 집안 사람들이 좋은 말을 보내어 빨리 도망가라고 권하였으나, 유숙은 이르기를, “임금과 아버지는 하늘이신데, 어찌 하늘로부터 도망할 것인가?” 하고,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이니,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신돈이 처형당한 후 〈임금이 유숙을 위해〉 신원설치(伸寃雪恥)하고 문희(文僖)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종묘(宗廟)에 배향하였다. 정문(旌門)을 내리셨다.
Ⓒ 역자 | 김문웅 / 2015년 5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