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227 성 요한 사도 축일 – 133위 011° 신 마리아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2).
133위 011° ‘하느님의 종’ 신 마리아
이름 : 신 마리아
출생 : ?년
순교 : 1801년 4월 28일, 사사(賜死), 양제궁
신(申) 마리아는 은언군(恩彦君) 이인(李䄄)의 장남인 상계군(常溪君) 이담(李湛)[0.1]의 부인으로, 본관은 평산이다. 신오(申[0.2] 또는 申瑍)의 딸로 태어나 1786년 상계군과 혼인하였다.[0.3]
신 마리아는 상계군과 혼인한 뒤 전동(磚洞)의 양제궁(良娣宮, 현 서울시 종로구 수송동)에 거주하였다. 그러나 그해 11월(음력) 남편 상계군이 정치적 상황 때문에 역적으로 몰려 자살하면서 불행하게 되었다. 이때 시아버지 은언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었고, 양제궁은 역적의 집이라 하여 ‘폐궁’(廢宮)으로 불리게 된다. 이후에도 신 마리아는 은언군의 아내, 곧 시어머니 송(宋) 마리아와 함께 양제궁에서 살았다.[1][1.1]
신 마리아와 송 마리아가 천주 교리에 대해 듣게 된 것은 1791~1792년경이었다. 양제궁 나인 서경의(徐敬儀)의 외조모인 조(趙)씨가 그들의 불행을 동정하여 천주교를 전하였고, 두 사람은 신앙으로 자신들의 슬픔과 아픔을 잊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영혼을 구원하고 천당에 갈 수 있는 좋은 길임을 확신하였다.[2][2.1]
1794년 말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입국한 뒤 신 마리아는 시어머니 송 마리아와 함께 주문모 신부에게 성사를 받았고, 여회장 강완숙 골룸바의 집을 방문하여 미사에 참석하고 강론을 들었다. 이후 골룸바 회장과 김연이 율리아나 등은 자주 양제궁으로 두 사람을 방문하여 교리를 강습하였고, 골룸바 회장은 이들을 명도회[2.2]에 가입시키기도 하였다.
신 마리아와 송 마리아는 왕족이라는 신분 때문에 활동에 제약이 있었지만, 집 안에서 열심히 교리를 공부하고 기도 생활을 하였다. 또 양제궁 나인으로 있던 강경복(姜景福) 수산나와 서경의(徐敬儀) 등에게 천주 신앙을 갖도록 권유하여 입교시켰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주문모 신부는 골룸바 회장을 집을 나와 잠시 양제궁으로 피신하였고, 이때 신 마리아와 송 마리아는 위험을 무릅쓰고 신부의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던 중 체포된 신자들의 문초 과정에서 그들이 천주교를 믿고 있다는 사실과 야고보 신부를 집 안에 숨겨 주었던 사실들이 밝혀졌다.[3][3.1]
이때부터 조정에서는 신 마리아와 시어머니 송 마리아의 처형을 두고 논란이 일어났다. 그 결과 대왕대비 정순왕후(貞純王后)는 4월 28일(음력 3월 16일)에 두 사람을 사사(賜死)하라는,[3.2][3.3] 곧 임금이 내린 사약을 마셔 죽게 하라는 명을 내렸고, 신 마리아와 송 마리아는 이튿날 의금부 도사들이 가져온 사약을 마시고 순교하였다. 전승에 따르면 그들은 자살 죄를 피하려고 스스로 사약을 마시기를 거절하였고, 그래서 억지로 사약을 마시게 했다고 한다.[4]
註__________
[0.1] 상계군 이담(1769.1.21-1786.11.20.) : ‘하느님의 종’ 신 마리아의 남편. 왕족으로 초명(初名)은 이준(李濬), 후에 이담(李湛)으로 개명, 다른 이름은 이식(李湜). 정조(正祖)의 양자(원래 이복동생 은언군의 아들)이자 조선 철종의 백부이며, 영조(英祖)의 서증손자(庶曾孫子), 곧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의 서손자(庶孫子), 사도세자의 서자(庶子)인 은언군의 적장자(嫡長子)이다. 그는 이복 중백부(異服 仲伯父)인 정조(正祖)와 그의 첫 측실(側室)인 원빈 홍씨(元嬪洪氏, 1766-1779)에게 양자로 출계하였다.
[0.2] 유니코드 U+2AF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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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영조 말기부터 정조 초기의 권신이었던 홍국영(洪國榮, 1748-1781)은 1778년 자신의 누이를 정조의 첫 번째 후궁으로 삼게 하였다. 오빠의 후광으로 중전 대우를 받던 원빈 홍씨가 일 년 만에 자식 없이 1779년 6월 20일에 죽자, 홍국영은 은언군(이인)의 장자 이담을 원빈 홍씨의 사후 양자로 삼고 ‘완풍군(完豐君)’으로 봉작하였다. 그는 완풍군을 원빈 홍씨 빈전(殯殿, 王·后의 棺인 梓宮을 두는 殿閣) 대전관(代奠官, 香을 피우고 盞을 올리는 獻官)과 수묘관(守墓官, 능을 管理하는 官吏)으로 참여시켰다. 또한, 완풍군을 가동궁(假東宮, 예비 세자), 곧 왕의 잠재적 후계자로 위상을 높여 놓았다. 그리고 자신은 가동궁의 외숙으로서 역할을 자임하며 세도정권의 길을 차근차근 닦아나갔다. 그런 중에 정조의 왕비 효의왕후(孝懿王后)가 원빈 홍씨를 살해한 것으로 홍국영은 믿고, 1780년 음식에 독약을 섞어 왕비를 독살하려다가 발각되어, 집권 4년 만에 축출당하였다.
[1] A.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ff. 62-63. 강화도로 유배된 은언군은 1801년에 사사되었으나, 1849년 손자 원범이 철종으로 즉위하면서 신원(伸寃)되었다.
[1.1] 홍국영이 축출되자, 완풍군은 역모에 휘말려 파양된다. 한편, 인조반정 공신 이서(李曙, 1580-1637)가 완풍군(完豊君)에 봉군되어 작호가 중복된다는 이유로, 가동군 완풍군의 작호를 상계군(常溪君)으로, 이름도 이준(李濬)에서 이담(湛湛)으로 고쳤다.
[2] 황사영, 「백서」, 교황청 민속박물관 소장, 69-70행; 『추안 및 국안』, 신유(1801년) 3월 15일과 4월 1일 주문모.
[2.1] 평산군부인 평산신씨(상계군 妻, ‘하느님의 종’ 신 마리아)는 남편이 의문의 죽임을 당한 뒤 친정으로 돌아가지 않고 시모 상산군부인 진천송씨(은언군 妻, ‘하느님의 종’ 송 마리아)와 함께 양제궁에 살았다. 양제궁 나인 서경의(徐景儀)의 외할머니 조 노파(서소문 안 거주)의 권고로 두 君 부인은 주문모 신부의 입국 전 천주교에 입교했으며, 1794년 말 주문모 입국 후 ‘마리아’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고부(姑婦)는 여회장 강완숙(姜完淑) 골룸바의 집을 방문하여 미사에 참석하고 강론을 들었다. 이후 골룸바 회장과 김연이(金連伊) 율리아나 등은 자주 양제궁으로 두 사람을 방문하여 교리를 강습하였고, 골룸바 회장은 이들을 명도회(明道會)에 가입시키기도 하였다. 양제궁에 딸린 시종과 궁인들도 이때 세례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하는 이들이 있었다. 시어머니 상산군부인 송씨(마리아)는 주문모 신부님에게 왕실의 양제궁을 은신처로 제공하였다.
[2.2] 명도회(明道會) : ‘교리를 가르치는 회’라는 뜻을 가진 평신도 지도자들의 교리 연구 및 전교 단체로 1795년 주문모 신부님이 북경의 것을 본떠서 조직했다.
[3] 『사학징의』, 1권, 정법죄인질, 강완숙·강경복·김연이; 2권, 작배죄인질, 서경의; 황사영, 「백서」, 69행; 『추안 및 국안』, 신유 3월 15일 주문모; 3월 16일 강경복·서경의; A. Daveluy, Op. cit., f. 63.
[3.1] 그런데, 누군가가 이 사실을 왕실에 밀고하여 양제궁의 궁녀와 하인들이 의금부에 의해 체포되었다. 형문을 하는 과정에서 양제궁 궁인인 서경의(徐景儀)의 자백으로 상산군부인 송씨(마리아)와 평산군부인 신씨(마리아)가 천주교인임이 드러났다. 1801년 3월 12일, 주문모 신부님은 조선 천주교인들이 체포되어 고문당하는 것을 보고 스스로 의금부에 자수하였다.
[3.2] 정순왕후 김씨는 왕실의 두 군부인이 천주교에 귀의했다는 이유로 재판과 심문 없이 평산군부인 신씨와 상산군부인 송씨에게 사약을 내리도록 1801년 3월 16일에 명하였다. 두 君부인은 그해 4월 4일 사사되었다. 성산군부인 송씨(마리아)의 남편 은언군도 1801년 5월 29일 사사령을 받고 6월 30일 강화 배소에서 사사되었다.
[3.3]순조실록 2권, 순조 1년 3월 16일(양력 1801.4.28.) - 추국 죄인 주문모의 공초문. 대왕대비가 사학에 연루된 은언군 이인의 처와 며느리를 사사하다
추국 죄인 주문모(周文謨)가 언어가 익숙하지 못하므로 글을 써서 고하기를 청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이 몸은 대대로 소주(蘇州) 땅에서 살다가 장년(壯年)이 되어 북경(北京)의 천주당(天主堂)에 와서 머물러 살았습니다. 갑인년(1794 정조 18년) 봄에 조선인(朝鮮人) 지황(池璜)을 만나 동지사(冬至使)의 행차 때에 변문(邊門)이 통하였으므로 비로소 책문(柵門)을 나오게 되었는데, 이는 서양인 양동재(梁棟材)가 소개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권성(權姓)·최성(崔姓)의 사람과 서로 서찰을 통하였는데, 처음에 상봉했던 지황은 을묘년(1795년)에 포청(捕廳)에서 죽었습니다. 저는 의주(義州)로부터 서울에 이르기까지 학습하기를 원하는 여러 사람의 집을 옮아가며 머물러 거주하였습니다.”라고 공술하였다.
그런데 그 말에 연루된 여러 사람이 대개 국옥(鞫獄) 가운데 감죄(勘罪)받은 자가 많이 있었다. 또 섬(강화도)에 천극(栫棘, 위리안치)한 죄인 이인(李䄄)의 처 송씨(宋氏)와 인의 아들 이담(李湛)의 처 신씨(申氏)에 이르러서는 영세(領洗)까지 받았는데, 영세란 곧 사학에서 교육받는 법이었다. 국청에 참여했던 시임 대신·원임 대신 및 금오당상(金吾堂上, 의금부 소속의 당상관인 판사·지사·동지사를 이르던 말)이 서로 거느리고 구대(求對)한 다음 인(䄄)의 처와 담(湛)의 처에게 사사(賜死)하기를 청하자,
대왕대비가 하교하기를, “선조(先祖)께서는 이 죄인들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한 은혜를 베푸셨는데, 그 권속(眷屬)들이 이번에 부범(負犯)한 것에 이르러서는 크게 풍화(風化)에 관계되니, 단지 그 죄를 죄주어 다른 사람들을 징계함이 마땅하다. 그 집안이 이미 국가의 의친(懿親)에 관계되지만, 먼저 이 무리로부터 법을 적용한 후에야 여항(閭巷)의 필서(匹庶)들이 방헌(邦憲)이 있음을 알고 징계 되어 두려워하는 바가 있을 것이니, 경들이 청한 것을 윤종(允從)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전지(傳旨)하기를, “강화부(江華府)에 안치(安置)한 죄인 인의 처 송성(宋姓) 등은 고부(姑婦)가 모두 사학에 빠져서 외인(外人)의 흉추(凶醜)와 왕래하여 서로 만났으며, 방금(邦禁)이 엄중함을 두려워함이 없이 방자하게 그 집안에 숨겨 주었으니, 그 부범(負犯)한 죄를 논하면 하루도 천지 사이에 용납할 수가 없다. 이에 아울러 사사(賜死)한다. 또 주문모의 공사(供辭) 가운데 김건순(金建淳)·강이천(姜彛天)·김여(金鑢)·김이백(金履白) 등 여러 사람은 서로 모여서 전법(傳法)했다는 말이 있었으니, 아울러 발포(發捕)하도록 하라.” 하였다.
[4] 『추안 및 국안』, 신유 3월 16.17일; 『순조실록』, 2권, 순조 1년 3월 16.17일; A. Daveluy, Op. cit., ff. 118-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