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레이션: 문명의 기원, 그 시작은 무엇이었을까? 위대한 인류문명을 일으킨 다섯 가지의 원소, 나무(木)와 흙(土)과 물(水)과 그리고 철(金)과 불(火)과 지금까지 그 기원을 찾아 거대한 여정을 떠난다. (동영상: 데르바 농장에서 밭을 가는 트랙터), 3월초, 생명의 계절, 마침내 흙이 따뜻해졌다. 흙이 따뜻해졌다는 것은 비로서 씨앗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 필로 데르바 농장), 이곳은 남부 유럽에 위치한 이탈리아 베니토 지방의 한 작은 시골 마을, 선생: 자, 작은 씨앗 심으러 가자. 내레이션: 봄이 되자 학교의 아이들이 야외 수업을 나왔다. 선생: 뭐가 필요하지? 학생들: 물 내레이션: 흙이 무엇인지 씨앗이 어떻게 흙과 만나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하는지를 배우기 위해서다. 수업에 참가한 아이들은 그 어느 때 보다도 진지하며 이런 수업을 통해 흙과 씨앗의 속삭임을 듣는다. 학생1: 흙은 저한테는 물건이에요. 식물을 심고 항상 많이 이용하거나 저한테는 물건이에요. 학생2: 흙에서는 식물이 자라고 동물도 살고 곤충도 살아요. 학생3: 흙은 우리에게 먹을 걸 줘요. 내레이션: 옷을 더럽히는 물질이 아닌 생명을 품고 키워주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흙~, 아이들은 이처럼 흙을 만지고 흙의 생명을 확인함으로써 흙의 소중함을 배우는 것이다. 수업의 막바지, 흙은 아이들의 친구가 된다. 아이들이 직접 흙을 채취한 다음, 정성스럽게 씨앗을 넣은 흙 경단을 만들었다. 그리고 넓은 풀 숲으로 달려가 새 생명의 탄생을 염원하며 힘껏 내던진다. 너무도 흔한 물질이기에 아무도 눈여겨 보지 않는 흙, 그러나 이 흙의 수고는 잠시도 멈추는 법이 없다. 씨앗으로부터 뿌리를 불러내 자신이 갖고 있는 온갖 자양분을 제공하고 씨앗은 그 자양분을 바탕으로 마침내 지상에 얼굴을 내민다. (동영상: 꽃들이 피는 장면), 지상에 살고 있는 27만 종의 식물, 이 식물을 키우는 것이 흙인 것이다. 마이크 타일러 박사/영국 요크셔 농업박물관: 흙은 우리에게 식량을 제공하고 우리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죠. 그러니까 흙은 생명이죠. 내레이션: 인류의 역사는 곧 흙과 동행의 역사이기도 했다. 중국 윈난성 쿤밍시에 있는 홍토지, 해발 2000미터에 달하는 이 고원지대는 사시사철, 형형색색의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이 아름다움이야말로 삶의 여정, 인류가 흔히 써 내려온 가장 행복하면서도 고단한 이력서라 할 것이다. 이곳 사람들은 대부분 흙으로 지어진 아담한 집에서 살고 있다. 홍토지에서 조상 대대로 고구마, 옥수수, 보리와 밀 그리고 감자와 같은 작물을 일구며 살아온 장개주(張開柱/59세)씨 부부, 수십 년을 이 집에서 살아온 부부의 삶의 방식은 어느 것 하나 변한 것 없다. 그들의 조상들이 그랬듯 이곳의 이른 아침은 늘 분주하다. 매일 아침 장개주씨 부부가 일터로 나가기 전에 곡식을 꺼내 제단에 올림으로써 이를 주신 하늘과 조상신에게 감사함을 나타내는 일이다. 제단 앞에 설 때보다 곡식들이 어디에서 왔고 왜 흙을 정성스럽게 대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된다는 장개주씨 부부, 장개주/59세 농부: 하늘과 땅, 그리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거예요. 해마다 풍년이 깃들고 자손 삼대가 평안하기를~ 기후가 순조로워 곡식이 잘 되길 바라는 거예요. 내레이션: 이렇듯 부부의 삶을 오래도록 지속시킨 것은 조상에 대한 감사와 자식에 대한 염원, 자신이 일군 흙에 대한 믿음이다. 그리하여 조상이 살았던 집에서 나와 조상이 걸었던 길을 따라 조상이 일구어 왔던 산밭으로 향하는 부부~ 장개주: 저는 평생 흙을 끼고 살았어요. 이곳에서 나고 자라 농부로 살아왔죠. 어릴 때는 부모님이 키워 주셨고 20살에 결혼해서 가정을 이뤘죠. 그리곤 아내와 지금까지 농사를 짓고 있어요. 저에게는 밭이 특별해요. 우리가 씨앗을 심기만 하면 우리의 생활을 책임져주죠. 저희는 평생 밭에 고마워해야 해요. 저희한테 밭은 소중해요. 내레이션: 산밭을 일구는 것은 이 가파른 계곡 만큼이나 지난하고 고된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흙을 믿었고 매년 씨앗을 심었으며 비와 햇빛의 도움을 받았다. 글자는 몰라도 땅과 하늘, 바람과 비를 알아야 했던 농부, 농부는 이렇듯 자연의 섭리를 숙명적으로 터득해야만 했다. 장개주: 바람도 보고, 날씨도 보고 곡식을 심을 때가 됐는지, 적합한 시기인지 보는 거예요. 밭을 잘 갈아 종자를 심고 곡식이 잘 자라서 잘 살길 바라죠. 내레이션: 농부들은 곡식이 잘 되고 안되고의 여부를 두고 흙을 탓하지 않는다. 흙은 정직한 것이어서 농부의 마음을 먼저 알아보고 응당 그에 따른 댓가를 준다고 믿는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 조상 대대로 흙에 써내려 왔을 또 하나의 인생 교과서, 그러나 흙에 새겨진 이 교과서의 주인공은 비단 농부만이 아니었다. 농부를 도와 함께 땅을 일궈온 수많은 주역들이 있었던 것이다. 소가 끄는 쟁기, 그러나 처음부터 가축이 동원된 건 아니었다. 힘있는 장정들이 쟁기를 끌기도 했고 쟁기가 없던 시절에는 따비, 따비 조차 없던 과거엔 호미가 그것을 대신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서울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이곳은 한반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곳이다. 그 한쪽 유리관 속에 소중히 보관되어 있는 한 점의 유물 (농경문청동기 BC5~BC4세기), 이 유물 속에 한반도 농경문화의 비밀이 숨어 있다. 이나경/국립중앙박물관 고고역사부: 대전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농경문 청동기는 BC5~BC4 세기 경의 사람들이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농경문 청동기에는 농사를 짓는 일련의 과정들이 표현되어 있어서 지금 까지도 농경문 청동기라는 별칭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내레이션: 손바닥 만한 크기의 청동기에 새겨진 의문의 그림들, 오른쪽 상단에 있는 이것은 2500년 전 따비로 땅을 일구는 농부이며 아래에는 괭이로 땅을 파는 농부도 있다. 그리고 왼쪽 위 수확한 곡식을 토기에 담는 농부, 이렇듯 이 청동기는 춘하추동 이 땅에서 벌어졌을 고대의 농사과정을 담아내는 또 하나의 타임캡술이었던 것이다. (대평리 어은1지구 유적, 경상남도 진주시, BC5세기), 청동기에 새겨진 밭과 같은 시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진주 대평리 유적지, 이 유적지는 기원전 4~5세기 한반도에서 이미 활발하게 농사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그랬다. 2500년 전 이 땅은 밀과 조와 벼들로 더 없이 풍요로워졌을 것이다. 이 풍요에 대한 염원으로 새겨 놓았을 청동기 무뉘는~ 이나경: 따비를 이용해서 밭을 갈고 있는 남성의 머리 위에 꽂힌 두 갈래의 긴 새 깃털이나 그리고 나뭇가지 위에 앉은 새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데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존재로 인식됐던 새들에게 일년의 풍작을 바라는 그들의 마음을 투영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레이션: 오늘날 인류의 조상이라 할 수 있는 호모사피엔스가 아프리카에 등장한 것은 약20만 년 전이었다. 이들은 오로지 수렵을 통해 먹을 것을 구했다.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을 것이다. 운좋게 사냥에 성공한 날도 있었지만 실패하면 굶어야만 했을 사람들, 때문에 7만 년 전쯤 지상에 생존한 호모사피엔스는 2천 명에 불과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만년 전쯤 그 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한다. 사냥이 아닌 씨앗의 파종, 그것은 다름 아닌 농업 때문이었다. 흙은 생존을 위해 떠돌던 인간을 붙잡은 것이다. (중국 농업박물관), 중국 베이징에 있는 농업 박물관, 이곳은 중국 전역에서 온 각종 농기구들을 전시하고 있는 곳이다. 나노 탈곡기며 손잡이가 달린 풍구, 복잡한 모양의 파종기도 보인다. 그런데 우리가 익히 보아왔던 것 바로 쟁기다. (철제 쟁기), 쟁기가 없었다면 인류는 그 많은 땅을 경작할 수 있었을까. 쟁기의 등장은 본격적인 농경의 시작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진건립(陳建立)/베이징 대학 교수: 중국은 춘추시대에 최초로 철기를 사용하기 시작했죠. 춘추시대 후기 산시성 허우마 지역에서 철제 쟁기가 발견됐어요. 전국시대에 만들어진 철제 쟁기가 비교적 많이 출토돼요. 현재까지 진한 시대의 쟁기는 수천 점이나 발굴되었습니다. 내레이션: 요즘 시각에선 매우 단순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농경을 시작한 인류가 이 단순한 도구를 만들기 까지 최소한 7천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쇠가 금 만큼이나 귀했던 시절에도 불구하고 고대 중국인들은 쟁기에 쇠 보습을 달았고 그 위에 곡선 모양의 볏을 덧댔다. 그렇다면 이 쟁기에는 어떤 비밀이 숨어 있을까. 앞에서 동물이 끌 때 중심을 잡아주는 손잡이, 땅을 파서 들어올리는 쇠 보습과 들여 올려지는 볏과 한쪽으로 뒤집어질 수 있도록 고안된 볏, 애써 힘을 주지 않아도 자유자재로 파는 깊이를 조절할 수 있는 한마루와 비녀장, 이렇듯 과학적 경험이 총집결된 쟁기를 소가 끌게함으로써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월등한 능률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박호석/前농협대학교 교수: 농사에서 가축의 힘을 이용하려고 하는 시도가 쟁기에서 비롯됐을 것으로 보입니다. 농사일에서 제일 힘든 일이 흙을 가는 일인데 가축이 농경에 이용됨으로써 사람이 중노동으로부터 해방이 되고 또 생산이 증대되는, 풍요로워지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 중심에는 쟁기가 있었다. 내레이션: 인간은 야생동물을 길들이기 시작했다. 애써 떠들지 않아도 언제 어디서든 충분한 고기와 추위를 극복할 수 있는 옷감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고기와 젖과 자신이 가진 힘을 인간에게 제공해 왔던 동물,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은 이 동물의 힘보다 광범위하게 활용하기 시작했다. 소가 끄는 쟁기의 역사도 그렇게 시작됐을 것이다. 쟁기의 가장 큰 역할은 작물이 잘 자랄 수 있도록 흙을 뒤집는 일이다. 이 때 보습과 함께 중요한 일을 하는 것이 바로 볏~, 진건립: 중국 전국시대 후기부터 볏 쟁기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품질향상, 생산량 증가와 더불어 밭의 경작 면적을 확대할 수 있었어요. 그뿐만 아니라 토질 개선에도 엄청난 도움이 됐어요. 농업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한 거예요. 고대 사회에서 농업은 경제, 군사, 도시 등 모든 방면에서 발전의 기초였어요. 당시 중국 사회의 발전을 촉진한 거예요. 내레이션: 볏 쟁기가 세상을 바꿨다. 황무지들이 개선되었고 뿌리를 잘 내린 작물의 알곡은 더욱 여물고 튼실했다. 바야흐로 잉여농산물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거기에는 활력이 넘쳐났다.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농사에 매달리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게 됐고 전답을 떠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모여들어 도시를 형성하고 번성하기 시작했다. 쟁기라는 작은 발명품이 제국의 틀을 만들어 낸 것이다. 중국의 대표적인 고대 도시, 한나라와 당 송 시대의 전성기를 열었던 옛 천년 고도 시간, 시안은 당 나라의 수도 장안이었다. 실크로드의 출발지이자 종착지이며 서역에서 수많은 대상들이 찾아오는 명실공히 국제도시였다. 그리하여 800년대 이곳 장안의 인구는 약100만 명에 이른다. 이는 같은 시기 영국 런던의 인구 12,000명, 프랑스 파리 25,000명, 이탈리아 로마의 인구 50,000명에 비하면 실로 엄청난 규모였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했을 만큼 세상의 중심이었으며 위대한 정복자의 도시였던 로마, 그렇다면 중국의 장안이 100만 인구일 때 로마를 비롯한 유럽 도시들의 인구는 왜 그토록 적은 것이었을까. 존 홉슨/셰필드 대학교 교수: 중국의 농업은 분명 엄청난 인구수 뿐만 아니라 대규모의 도시도 뒷받침할 수 있을 만큼 탄탄했다고 봅니다. 그 덕분에 그토록 규모가 큰 도시가 가능했던 거죠. 유럽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물론 강력한 농업 생산성을 위해 중국이 내놓은 다른 여러 기술이 있습니다만 궁극적으로 중국과 유럽을 비교해 보면 중국의 곡선형 볏 쟁기야말로 인구수 100만인의 당의 장안과 같은 대도시를 가능케 했는데 이것이 주요 차이점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동영상: 이집트 피라밋드와 낙타 대상들), 이집트를 포함한 지중해 연안에선 이미 4,5천년 전에 쟁기를 사용했다. 이집트 왕가의 무덤에서 발견된 이 벽화는 수확의 풍요로움을 찬사하고 있으며, 기원전 1200년 경 그려진 이 벽화는 물소가 끄는 쟁기의 모습을 담고 있다. 나일 강변은 풍요의 땅이었다. 매년 찾아오는 홍수는 온갖 유기물을 끌고 와 땅을 기름지게 했고 땅을 파서 씨를 뿌리면 알곡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러나 그들이 사용했던 쟁기, 이 쟁기에선 볏이 보이지 않았다. 단지 씨를 뿌리기 위해 땅을 긁는 수준의 아드(이집트의 볏 없는 쟁기)라 불리는 단순한 쟁기일 뿐이다. 프란체스카 브레이/에딘버러 대학교 교수: 쟁기의 역사는 유럽을 한 참 넘어 중동 즉 이집트에서 시작되었다. 여기서 아드와 볏 없는 쟁기(긁는 쟁기)도 최초로 나오죠. 아마 BC 3000~BC 2000년 경부터 였을 겁니다. 이런 쟁기들은 이름이 의미하듯 땅의 표면을 긁는 것이었습니다. 뒤집어 섞는 게 아니고요. 그래서 건조한 지역에서 사용하기가 매우 좋습니다. 내레이션: 이집트 왕가의 무덤에서 발견된 벽화 속에 날이 뾰죽한 쟁기(이집트 쟁기), 그리스 아테네에서 발견된 이 쟁기에도 볏을 찾아볼 수 없다. 로마시대의 쟁기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중세 유럽의 쟁기에 놀라운 변화가 생긴다. (중세 유럽쟁기), 드디어 볏 쟁기가 등장한 것이다. 진건립: 중국은 전국 시대 후기부터 흙을 뒤집을 수 있는 쟁기를 사용했어요. 이런 기능을 가진 쟁기, 이른바 볏 쟁기를 유럽에서는 10세기 이후에야 사용하기 시작해서 농업혁명을 불러 일으켰죠. 흙을 뒤집을 수 있는 쟁기의 사용으로 보면 중국과 유럽 사이에는 1500여 년의 격차가 있어요. (호헨하임 대학교 독일 농업박물관), 내레이션: 중세 유럽의 다양한 쟁기들을 모아 놓고 있는 독일 호헨하임 대학교 농업박물관, 이곳은 지금은 은퇴했지만 유럽의 농업역사를 읽어온 수많은 쟁기들이 과거를 기억하고 있다. 박물관 한쪽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볏 쟁기, 그런데 날렵한 중국 것과 달리 이 볏은 나무로 되어 있으며 평평한 모습이다. 더구나 바퀴까지 달려 매우 무거운 까닭에 서너 마리의 말이 끌어야 겨우 움직일 수 있었다는 유럽 최초의 볏 쟁기, 존 홉슨: 이 쟁기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땅을 분쇄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이것으로는 고랑을 잘 팔 수가 없었어요. 고랑은 여러 가지 이유로 중요해요. 고랑을 파면 토양이 뒤집혀 영양분이 생기고 배수 역시 잘 되거든요. 그러니 중세의 쟁기는 굉장히 단순하고 비효율적인 물건이었습니다. (요크셔 농업박물관 영국), 내레이션: 그러나 평평한 나무 쟁기는 얼마 후 놀라운 변화를 시도한다. (로더럼 쟁기), 1730년대 영국 로더럼 지역에서는 한 농부에 의해서였다. 투박함을 버리는 대신 쇠로 만든 유려한 곡선형의 볏을 달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로더럼 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쟁기~ 마이크 타일러 박사/요크셔 농업박물관: 로더럼 쟁기의 주된 이점은 효율적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훨씬 빠르게 만들어지죠.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쟁기를 소유할 수 있는 겁니다. 볏에 철을 덧 대면서 내구성이 훨씬 강화되었고 능률 또한 크게 올랐습니다. 볏이 휘어져서 흙을 더 잘 뒤집을 수 있어요. 잡초는 흙 속으로 들어가고 영양소는 흙 밖으로 나오게 돼요. 흙에는 훨씬 좋습니다. 내레이션: 로더럼 쟁기가 만들어진 이유 모든 쟁기는 새로 만들어진 곡선형의 볏을 갖게 됐고 이전 것보다 더욱 가벼워졌으며 규격화 되었기에 부품교차는 물론 볏을 가진 쟁기는 영국에서 만들어진 순수한 창작물이었을까요. 존 홉슨: 우리는 중국의 곡선형 볏 쟁기가 유럽에 도입되었다는 사실을 압니다. 네델란드 선원들이 들여와 네델란드로 가져갔죠. 또한 네델란드인들이 더치 바스터 플라워 라고 알려진 쟁기에 그 모델을 적용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그 모델은 영국의 로더럼 쟁기에 적용되었어요. 이것이 영국 최초의 곡선형 볏 쟁기였습니다. 내레이션: 볏 쟁기의 등장은 유럽 농업에 새로운 시대가 왔음을 의미하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매년 열리는 영국 쟁기대회에서 챔피온을 수상했다는 엘리엇 씨, 엘리엇 씨가 사용하는 쟁기는 서로 다른 두 개의 바퀴가 달려있는 곡선형 볏 쟁기다. 두 마리에서 네 마리까지 말이 끌 수 있도록 고안된 이 볏 쟁기는 화진 쪽의 바퀴를 크게 만들어 균형을 유지했고 볏을 통해 흙이 한 쪽으로 뒤집어질 수 있도록 했다. 이로써 유럽의 농부들은 언제든 습지를 개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존 홉슨: 지중해 지역의 흙은 상당히 건조합니다. 그래서 볏 없는 쟁기를 사용하죠 볏 없는 쟁기(긁는 쟁기)는 명칭이 의미하듯 단순히 지표면을 스치듯 지나갈 뿐이죠. 문제는 유럽의 북서부 지역의 토양은 훨씬 무겁다는 겁니다. 빗물에 흠뻑 젖어 있기 때문에 벗 없는 쟁기는 별로 효율적이지 않죠. 그래서 중세의 쟁기를 만들게 됐죠. 이 쟁기는 대단히 무겁습니다. 바퀴 등도 달렸고요. 그러나 중세의 볏 쟁기는 경제발전이 지중해 지역의 남부 유럽에서 유럽의 북서부, 특히 영국까지 이동하게 된 중요한 원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쟁기가 그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내레이션: 습한 땅에선 작물의 뿌리가 쉽게 썩는다. 하지만 곡선형 쟁기는 습한 땅에 고랑을 만듬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고랑에 의해 땅이 숨을 쉬고 물이 배출되면서 죽어있던 땅이 되살아난 것이다. 이렇듯 황무지에서 옥토로 변한 땅, 그러자면 말의 힘은 농부들에게 절대적이었다. 제임스 엘리엇/56세: 말을 다루기가 쉽죠. 한 사람이 두 마리, 심지어 네 마리까지도 몰 수 있어요. 소 쟁기의 경우는 소를 모는 사람이 따로 있어야 해요.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쟁기를 다뤄야 하죠. 그리고 말과 사람 간에는 강한 유대감이 있습니다. 소의 경우에는 유대감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소 쟁기는 느리지만, 말 쟁기는 훨씬 빠릅니다. 심지어 밭에 나가서도요. 내레이션: 하지만 사람들은 그후 말의 힘 그 이상을 원했다. 이 때 등장한 것이 증기기관, 증기엔진의 힘은 말과는 비교가 안 된다. 운전대만 잡고 앉아 있으면 됐고 여러 개의 쟁기 날을 장착했기에 같은 시간에 훨씬 많은 일을 해낼 수 있었다. 위르겐 바이사 박사/호헨하임 대학교 독일 농업박물관: 증기기관의 발명은 농업에서도 중요했습니다. 말은 하루 1/3 헥타르를 일할 수 있지만 증기기관으로는 10~12 헥타르를 일할 수 있죠. 성능이 대략 30배 차이가 납니다. 이로써 많은 농부들이 할 일이 없어져 훗날 산업현장으로 몰려들었죠. 산업혁명은 기술화로 인해 농촌에서 많은 노동력이 방출됐기에 가능했습니다. 내레이션: 사람이 해야 할 일을 기계가 대신 하는 시대, 기계의 힘이 더 넓은 경작지를 만들어낼수 있었고 유럽인들은 그 땅에서 충분한 양의 밀을 수확했다. 아시아 보다 위도가 높아 태양광선이 그만큼 부족했던 유럽, 그래서 유럽인들은 이런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작물을 선택해야 했다. 그것은 밀이었다. 빻아서 가루로 만들면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모양과 맛을 낼 수 있는 창조적인 식량인 밀~ 밀가루는 이처럼 물에 반죽하여 요리사의 취향에 따라 때로 빵이 되고 스파게티가 되고 피자가 된다. 말 그대로 천의 얼굴을 가진 음식재료인 셈이다. 더 없이 다양하고 풍요로워진식탁, 그렇다면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이 식탁에 풍요가 있기까지 조상들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고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시행착오를 겪었으며 얼마나 많은 기술의 진보와 크게 수고가 있었는지를~(베트남 호앙수피), 유럽인들이 주식으로 밀을 선택했다면 일조량이 충분한 까닭에 아시아인들이 택한 주식은 쌀이었다. 오래 전 이주 지역 열 일곱 개 부족 6만여 명이 일궜다는 베트남 호앙수피의 다랑이 논, 지금도 이곳 사람들은 중국의 홍토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수백 년 전과 거의 다름 없는 삶을 이어오고 있다. 여전히 단순한 도구인 낫으로 벼를 베어낸다. 고된 작업이지만 흙이 내어준 소중한 선물, 베어진 벼들을 한 곳에 모아 나무통을 이용해 털어낸다. 어쩌면 대대로 변화없는 이런 삶은 흙이 주는 풍족함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티도 반 탕/35세: 이 땅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줍니다. 우리의 핏줄과 같아요. 천 년 이상 저희 조상들은 여기에서 벼를 심었습니다. 이 땅과 쌀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합니다. 즈앙 띠 진/28세: 다랑 논은 오래 전부터 우리에게 쌀을 주는 삶의 터전이에요. 내레이션: 조상 대대로 전답을 일궈내고 그 전답이 오늘의 가족에게 내어 준 쌀~ 그래서 사람들은 쌀을 단순한 음식으로 보지 않는다. 조상의 음덕이고 흙의 배려라 생각하는 것이다. 즈앙 세오 뽀어/33세: 이 땅은 우리 조상에게 이어 받았어요. 여기에 우리는 벼를 심어서 쌀을 생산하죠. 이 땅은 우리 가족에게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는 항상 감사하게 생각해요. 내레이션: 아시아의 인구가 유럽보다 월등히 많은 이유를 벼농사에서 꼽는 사람들이 많다. 같은 면적의 땅에서 밀보다 서너 배나 많은 양을 수확할 수 있기에 그만큼 부양능력이 높다는 것이다. 부양력이 높은 기름진 땅은 아시아인들에게 가족과 마을이라는 끈끈한 공동체 문화를 만들어 내는 근간이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모습은 어떨까. 가을을 맞은 김제 평야에 황금색 벼들이 가득하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쌀 생산량은 약 400만톤, 수확의 대부분은 사람의 손이 아닌 기계가 대신하고 있다. 베고 옮기고 흩는 지난 수천 년에 걸친 조상들의 경험이 기계 속에 들어가 그 노동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흙을 밟지 않아도 얻어낼 수 있는 곡식, 그리하여 우리는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에 살게 되었지만 흙과 멀어지게 됐다. 이제 상점에 진열된 이 수 많은 야채들 속에서 누구도 흙을 떠올리지 않는다. 단지 청결함과 깨끗함이 가격으로 그 가치가 환산될 뿐이다. 이처럼 철저하게 흙을 제거해야만 보다 안전하고 믿음을 준다고 생각하는 요즘, 그러나 일고 있을까. 지구를 덮고 있는 평균 두께 1미터의 흙이 오늘날의 문명을 일군 자양분이라는 것을 (전라북도 익산), 봄이 되자 또 다시 농부의 손길이 바빠진다. 농사는 자고로 천하의 근본이라 했다. 농사야 말로 하늘과 흙을 믿고 그 순리에 따라야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정수경/70세: 모든 작물이 흙이 없으면 심을 수도 없고 가꿀 수도 없잖아요. 흙이 있기 때문에 작물을 심어서 모든 열매를 먹고 사니까. 흙이란 건 굉장히 소중하고 귀한 보배죠. 김병식/73세: 흙은 내 육신이 살아 있는 한 흙은 나의 생명이다. 내레이션: 생명을 담고 있는 흙, 흙과 인간의 오래 된 동행, 인간의 문명은 이 동행 속에서 탄생했다. 그래서 흙은 우리의 생명과 삶과 물과 꿈과 기억 모두를 품고 있는 가장 거대한 그릇이다.끝. (EBS 다큐프라임 1453회 5원소, 문명의 기원, 2부 흙, 생명을 품다 에서 정리).
① 문명의 기원, 그 시작은 무엇이었을까 위대한 인류문명을 일으킨 다섯 가지의 원소, 나무(木)와 흙(土)과 물(水)과 그리고 철(金)과 불(火), 지금까지 그 기원을 찾아 거대한 여정을 떠난다. 3월초, 생명의 계절, 마침내 흙이 따뜻해졌다. 흙이 따뜻해졌다는 것은 비로서 씨앗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흙이 무엇인지 씨앗이 어떻게 흙과 만나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하는지를 배운다. 수업에 참가한 아이들은 진지하며 이런 수업을 통해 흙과 씨앗의 속삭임을 듣는다. 흙에서는 식물이 자라고 동물도 살고 곤충도 산다. 흙은 우리에게 먹을 걸 준다. 옷을 더럽히는 물질이 아닌 생명을 품고 키워주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흙, 아이들은 흙을 만지고 흙의 생명을 확인함으로써 흙의 소중함을 배운다. 수업의 막바지, 흙은 아이들의 친구가 된다. 아이들이 직접 흙을 채취한 다음, 정성스럽게 씨앗을 넣은 흙 경단을 만들었다. 그리고 넓은 풀 숲으로 달려가 새 생명의 탄생을 염원하며 힘껏 내던진다. 너무도 흔한 물질이기에 아무도 눈여겨 보지 않는 흙, 그러나 이 흙의 수고는 잠시도 멈추는 법이 없다. 씨앗으로부터 뿌리를 불러내 자신이 갖고 있는 온갖 자양분을 제공하고 씨앗은 그 자양분을 바탕으로 마침내 지상에 얼굴을 내민다. 지상에 살고 있는 27만 종의 식물, 이 식물을 키우는 것이 흙이다. 흙은 인간에게 식량을 제공하고 우리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 흙은 생명이다. ② 인류의 역사는 곧 흙과 동행의 역사이기도 했다. 중국 윈난성 쿤밍시에 있는 홍토지, 해발 2000미터에 달하는 이 고원지대는 사시사철, 형형색색의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이 아름다움이야말로 삶의 여정, 인류가 흔히 써 내려온 가장 행복하면서도 고단한 이력서다. 이곳 사람들은 대부분 흙으로 지어진 아담한 집에서 살고 있다. 홍토지에서 조상 대대로 고구마, 옥수수, 보리와 밀 그리고 감자와 같은 작물을 일구며 살아온 장개주(張開柱/59세)씨 부부, 수십 년을 여기서 살아온 부부의 삶의 방식은 어느 것 하나 변한 것 없다. 그들의 조상들이 그랬듯 이곳의 이른 아침은 늘 분주하다. 매일 아침 장개주씨 부부가 일터로 나가기 전에 곡식을 꺼내 제단에 올림으로써 이를 주신 하늘과 조상신에게 감사함을 나타낸다. 제단 앞에 설 때보다 곡식들이 어디에서 왔고 왜 흙을 정성스럽게 대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부부의 삶을 오래도록 지속시킨 것은 조상에 대한 감사와 자식에 대한 염원, 자신이 일군 흙에 대한 믿음이다. 그리하여 조상이 살았던 집에서 나와 조상이 걸었던 길을 따라 조상이 일구어 왔던 산밭으로 향하는 부부, 산밭을 일구는 것은 가파른 계곡 만큼이나 지난하고 고된 일이었다. 하지만 흙을 믿었고 매년 씨앗을 심었으며 비와 햇빛의 도움을 받았다. 글자는 몰라도 땅과 하늘, 바람과 비를 알아야 했던 농부, 농부는 이렇듯 자연의 섭리를 숙명적으로 터득해야만 했다. 바람도 보고, 날씨도 보고 곡식을 심을 때가 됐는지, 적합한 시기인지 보는 거다. 밭을 잘 갈아 종자를 심고 곡식이 잘 자라서 잘 살길 바란다. 농부들은 곡식이 잘 되고 안되고의 여부를 두고 흙을 탓하지 않는다. 흙은 정직한 것이어서 농부의 마음을 먼저 알아보고 응당 그에 따른 댓가를 준다고 믿는다. 이런 마음으로 조상 대대로 흙에 써내려 왔을 또 하나의 인생 교과서, 그러나 흙에 새겨진 이 교과서의 주인공은 비단 농부만이 아니었다. 농부를 도와 함께 땅을 일궈온 수많은 주역들이 있었다. 소가 끄는 쟁기, 그러나 처음부터 가축이 동원된 건 아니었다. 힘있는 장정들이 쟁기를 끌기도 했고 쟁기가 없던 시절에는 따비, 따비 조차 없던 과거엔 호미가 그것을 대신했다. ③ 大田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농경문 청동기는 BC5~BC4 세기 경의 사람들이 만든 것으로 보인다. 농경문 청동기에는 농사를 짓는 일련의 과정들이 표현되어 있어서 지금 까지도 농경문 청동기라는 별칭으로 불리고 있다. 손바닥 만한 크기의 청동기에 새겨진 의문의 그림들, 오른쪽 상단에 있는 것은 2500년 전 따비로 땅을 일구는 농부이며 아래에는 괭이로 땅을 파는 농부도 있다. 그리고 왼쪽 위 수확한 곡식을 토기에 담는 농부, 이렇듯 이 청동기는 춘하추동 이 땅에서 벌어졌을 고대의 농사과정을 담아내는 또 하나의 타임캡술이었다. 청동기에 새겨진 밭과 같은 시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진주 대평리 유적지, 이 유적지는 기원전 4~5세기 한반도에서 이미 활발하게 농사가 이루어졌다. 그랬다. 2500년 전 이 땅은 밀과 조와 벼들로 더 없이 풍요로워졌다. 따비를 이용해서 밭을 갈고 있는 남성의 머리 위에 꽂힌 두 갈래의 긴 새 깃털이나 그리고 나뭇가지 위에 앉은 새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존재로 인식됐던 새들에게 일년의 풍작을 바라는 그들의 마음을 투영했던 것이다. ④ 오늘날 인류의 조상이라 할 수 있는 호모사피엔스가 아프리카에 등장한 것은 약20만 년 전이었다. 이들은 오로지 수렵을 통해 먹을 것을 구했다.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운좋게 사냥에 성공한 날도 있었지만 실패하면 굶어야만 했을 사람들, 때문에 7만 년 전쯤 지상에 생존한 호모사피엔스는 2천 명에 불과 했을 것으로 추정, 그런데 만년 전쯤 그 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한다. 사냥이 아닌 씨앗의 파종, 그것은 다름 아닌 농업 때문이었다. 흙은 생존을 위해 떠돌던 인간을 붙잡은 것이다. 중국 베이징에 있는 농업 박물관, 이곳은 중국 전역에서 온 각종 농기구들을 전시하고 있다. 나노 탈곡기며 손잡이가 달린 풍구, 복잡한 모양의 파종기도 보인다. 그런데 우리가 익히 보아왔던 것 바로 쟁기다. 쟁기가 없었다면 인류는 그 많은 땅을 경작할 수 있었을까. 쟁기의 등장은 본격적인 농경의 시작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중국은 춘추시대에 최초로 철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춘추시대 후기 산시성 허우마 지역에서 철제 쟁기가 발견됐다. 전국시대에 만들어진 철제 쟁기가 비교적 많이 출토됐다. 현재까지 진한 시대의 쟁기는 수천 점이나 발굴되었다. ⑤ 요즘 시각에선 매우 단순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농경을 시작한 인류가 이 단순한 도구를 만들기 까지 최소한 7천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쇠가 금 만큼이나 귀했던 시절에도 불구하고 고대 중국인들은 쟁기에 쇠 보습을 달았고 그 위에 곡선 모양의 볏을 덧댔다. 그렇다면 이 쟁기에는 어떤 비밀이 숨어 있을까. 앞에서 동물이 끌 때 중심을 잡아주는 손잡이, 땅을 파서 들어올리는 쇠 보습과 들여 올려지는 볏과 한쪽으로 뒤집어질 수 있도록 고안된 볏, 애써 힘을 주지 않아도 자유자재로 파는 깊이를 조절할 수 있는 한마루와 비녀장, 이렇듯 과학적 경험이 총집결된 쟁기를 소가 끌게함으로써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월등한 능률을 올릴 수 있었다. 농사에서 가축의 힘을 이용하려고 하는 시도가 쟁기에서 비롯됐다. 농사일에서 제일 힘든 일이 흙을 가는 일인데 가축이 농경에 이용됨으로써 사람이 중노동으로부터 해방이 되고 또 생산이 증대되는, 풍요로워지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 중심에는 쟁기가 있었다. 인간은 야생동물을 길들이기 시작했다. 애써 떠돌지 않아도 언제 어디서든 충분한 고기와 추위를 극복할 수 있는 옷감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고기와 젖과 자신이 가진 힘을 인간에게 제공해 왔던 동물,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은 이 동물의 힘보다 광범위하게 활용하기 시작했다. 소가 끄는 쟁기의 역사도 그렇게 시작됐다. 쟁기의 가장 큰 역할은 작물이 잘 자랄 수 있도록 흙을 뒤집는 일이다. 이 때 보습과 함께 중요한 일을 하는 것이 바로 볏, ⑥ 중국 전국시대 후기부터 볏 쟁기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품질향상, 생산량 증가와 더불어 밭의 경작 면적을 확대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토질 개선에도 엄청난 도움이 됐다. 농업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한 거다. 고대 사회에서 농업은 경제, 군사, 도시 등 모든 방면에서 발전의 기초였다. 당시 중국 사회의 발전을 촉진한 거다. 볏 쟁기가 세상을 바꿨다. 황무지들이 개선되었고 뿌리를 잘 내린 작물의 알곡은 더욱 여물고 튼실했다. 바야흐로 잉여농산물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거기에는 활력이 넘쳐났다.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농사에 매달리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게 됐고 전답을 떠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모여들어 도시를 형성하고 번성하기 시작했다. 쟁기라는 작은 발명품이 제국의 틀을 만들어 낸 것이다. 중국의 대표적인 고대 도시, 한나라와 당-송 시대의 전성기를 열었던 옛 천년 고도 시안, 시안은 당 나라의 수도 장안이었다. 실크로드의 출발지이자 종착지이며 서역에서 수많은 대상들이 찾아오는 명실공히 국제도시였다. 그리하여 800년대 이곳 장안의 인구는 약100만 명에 이른다. 이는 같은 시기 영국 런던의 인구 12,000명, 프랑스 파리 25,000명, 이탈리아 로마의 인구 50,000명에 비하면 실로 엄청난 규모였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했을 만큼 세상의 중심이었으며 위대한 정복자의 도시였던 로마, 그렇다면 중국의 장안이 100만 인구일 때 로마를 비롯한 유럽 도시들의 인구는 왜 그토록 적은 것이었을까. ⑦ 중국의 농업은 분명 엄청난 인구수 뿐만 아니라 대규모의 도시도 뒷받침할 수 있을 만큼 탄탄했다. 그 덕분에 그토록 규모가 큰 도시가 가능했다. 유럽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다. 물론 강력한 농업 생산성을 위해 중국이 내놓은 다른 여러 기술이 있습니다만 궁극적으로 중국과 유럽을 비교해 보면 중국의 곡선형 볏 쟁기야말로 인구수 100만인의 당의 장안과 같은 대도시를 가능케 했는데 이것이 주요 차이점이었다. 이집트를 포함한 지중해 연안에선 이미 4,5천년 전에 쟁기를 사용했다. 이집트 왕가의 무덤에서 발견된 벽화는 수확의 풍요로움을 찬사하고 있으며, 기원전 1200년 경 그려진 벽화는 물소가 끄는 쟁기의 모습을 담고 있다. 나일 강변은 풍요의 땅이었다. 매년 찾아오는 홍수는 온갖 유기물을 끌고 와 땅을 기름지게 했고 땅을 파서 씨를 뿌리면 알곡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러나 그들이 사용했던 쟁기, 이 쟁기에선 볏이 보이지 않았다. 단지 씨를 뿌리기 위해 땅을 긁는 수준의 아드(이집트의 볏 없는 쟁기)라 불리는 단순한 쟁기일 뿐이다. 쟁기의 역사는 유럽을 한 참 넘어 중동 즉 이집트에서 시작되었다. 여기서 아드와 볏 없는 쟁기(긁는 쟁기)도 최초로 나온다. 아마 BC 3000~BC 2000년 경부터 였다. 이런 쟁기들은 이름이 의미하듯 땅의 표면을 긁는 것이었다. 뒤집어 섞는 게 아니다. 그래서 건조한 지역에서 사용하기가 매우 좋다. ⑧ 이집트 왕가의 무덤에서 발견된 벽화 속에 날이 뾰죽한 쟁기(이집트 쟁기), 그리스 아테네에서 발견된 이 쟁기에도 볏을 찾아볼 수 없다. 로마시대의 쟁기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중세 유럽의 쟁기에 놀라운 변화가 생긴다. 드디어 볏 쟁기가 등장한다. 중국은 전국 시대 후기부터 흙을 뒤집을 수 있는 쟁기를 사용했다. 이런 기능을 가진 쟁기, 이른바 볏 쟁기를 유럽에서는 10세기 이후에야 사용하기 시작해서 농업혁명을 불러 일으켰다. 흙을 뒤집을 수 있는 쟁기의 사용으로 보면 중국과 유럽 사이에는 1500여 년의 격차가 있다. 중세 유럽의 다양한 쟁기들을 모아 놓고 있는 독일 호헨하임 대학교 농업박물관, 이곳은 지금은 은퇴했지만 유럽의 농업역사를 읽어온 수많은 쟁기들이 과거를 기억하고 있다. 박물관 한쪽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볏 쟁기, 그런데 날렵한 중국 것과 달리 이 볏은 나무로 되어 있으며 평평한 모습이다. 더구나 바퀴까지 달려 매우 무거운 까닭에 서너 마리의 말이 끌어야 겨우 움직일 수 있었다는 유럽 최초의 볏 쟁기, 이 쟁기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땅을 분쇄하는 것 뿐이었다. 이것으로는 고랑을 잘 팔 수가 없었다. 고랑은 여러 가지 이유로 중요하다. 고랑을 파면 토양이 뒤집혀 영양분이 생기고 배수 역시 잘 된다. 그러니 중세의 쟁기는 굉장히 단순하고 비효율적인 물건이었다. ⑨ 그러나 평평한 나무 쟁기는 얼마 후 놀라운 변화를 시도한다. 1730년대 영국 로더럼 지역에서 한 농부에 의해서였다. 투박함을 버리는 대신 쇠로 만든 유려한 곡선형의 볏을 달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로더럼 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쟁기, 로더럼 쟁기의 주된 이점은 효율적이다. 그리고 훨씬 빠르게 만들어진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쟁기를 소유할 수 있다. 볏에 철을 덧 대면서 내구성이 훨씬 강화되었고 능률 또한 크게 올랐다. 볏이 휘어져서 흙을 더 잘 뒤집을 수 있다. 잡초는 흙 속으로 들어가고 영양소는 흙 밖으로 나오게 된다. 흙에는 훨씬 좋다. 로더럼 쟁기가 만들어진 이유다. 모든 쟁기는 새로 만들어진 곡선형의 볏을 갖게 됐고 이전 것보다 더욱 가벼워졌으며 규격화 되었기에 부품교차는 물론 볏을 가진 쟁기는 영국에서 만들어진 순수한 창작물이었을까. 중국의 곡선형 볏 쟁기가 유럽에 도입되었다. 네델란드 선원들이 들여와 네델란드로 가져갔다. 또한 네델란드인들이 더치 바스터 플라워 라고 알려진 쟁기에 그 모델을 적용했다. 그 다음에 그 모델은 영국의 로더럼 쟁기에 적용되었다. 이것이 영국 최초의 곡선형 볏 쟁기였다. ⑩ 볏 쟁기의 등장은 유럽 농업에 새로운 시대가 왔음을 의미하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매년 열리는 영국 쟁기대회에서 챔피온을 수상했다는 엘리엇 씨, 엘리엇 씨가 사용하는 쟁기는 서로 다른 두 개의 바퀴가 달려있는 곡선형 볏 쟁기다. 두 마리에서 네 마리까지 말이 끌 수 있도록 고안된 이 볏 쟁기는 화진 쪽의 바퀴를 크게 만들어 균형을 유지했고 볏을 통해 흙이 한 쪽으로 뒤집어질 수 있도록 했다. 이로써 유럽의 농부들은 언제든 습지를 개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지중해 지역의 흙은 상당히 건조하다. 그래서 볏 없는 쟁기를 사용한다. 볏 없는 쟁기(긁는 쟁기)는 명칭이 의미하듯 단순히 지표면을 스치듯 지나갈 뿐이다. 문제는 유럽의 북서부 지역의 토양은 훨씬 무겁다. 빗물에 흠뻑 젖어 있기 때문에 벗 없는 쟁기는 별로 효율적이지 않다. 그래서 중세의 쟁기를 만들게 됐다. 이 쟁기는 대단히 무겁다. 바퀴도 달렸다. 그러나 중세의 볏 쟁기는 경제발전이 지중해 지역의 남부 유럽에서 유럽의 북서부, 특히 영국까지 이동하게 된 중요한 원인이다. 그래서 이 쟁기가 그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⑪ 습한 땅에선 작물의 뿌리가 쉽게 썩는다. 하지만 곡선형 쟁기는 습한 땅에 고랑을 만듬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고랑에 의해 땅이 숨을 쉬고 물이 배출되면서 죽어있던 땅이 되살아난 것이다. 이렇듯 황무지에서 옥토로 변한 땅, 그러자면 말의 힘은 농부들에게 절대적이었다. 말을 다루기가 쉽다. 한 사람이 두 마리, 심지어 네 마리까지도 몰 수 있다. 소 쟁기의 경우는 소를 모는 사람이 따로 있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쟁기를 다뤄야 한다. 그리고 말과 사람 간에는 강한 유대감이 있다. 소의 경우에는 유대감이 별로 없다. 소 쟁기는 느리지만, 말 쟁기는 훨씬 빠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후 말의 힘 그 이상을 원했다. 이 때 등장한 것이 증기기관, 증기엔진의 힘은 말과는 비교가 안 된다. 운전대만 잡고 앉아 있으면 됐고 여러 개의 쟁기 날을 장착했기에 같은 시간에 훨씬 많은 일을 해낼 수 있었다. ⑫ 증기기관의 발명은 농업에서도 중요했다. 말은 하루 1/3 헥타르를 일할 수 있지만 증기기관으로는 10~12 헥타르를 일할 수 있다. 성능이 대략 30배 차이가 난다. 이로써 많은 농부들이 할 일이 없어져 훗날 산업현장으로 몰려들었다. 산업혁명은 기술화로 인해 농촌에서 많은 노동력이 방출됐기에 가능했다. 사람이 해야 할 일을 기계가 대신 하는 시대, 기계의 힘이 더 넓은 경작지를 만들어낼 수 있었고 유럽인들은 그 땅에서 충분한 양의 밀을 수확했다. 아시아 보다 위도가 높아 태양광선이 그만큼 부족했던 유럽, 그래서 유럽인들은 이런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작물을 선택해야 했다. 그것은 밀이었다. 빻아서 가루로 만들면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모양과 맛을 낼 수 있는 창조적인 식량인 밀, 밀가루는 이처럼 물에 반죽하여 요리사의 취향에 따라 때로 빵이 되고 스파게티가 되고 피자가 된다. 말 그대로 천의 얼굴을 가진 음식재료인 셈이다. 더 없이 다양하고 풍요로워진 식탁, 그렇다면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이 식탁에 풍요가 있기까지 조상들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고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시행착오를 겪었으며 얼마나 많은 기술의 진보와 크게 수고가 있었는지를, 유럽인들이 주식으로 밀을 선택했다면 일조량이 충분한 까닭에 아시아인들이 택한 주식은 쌀이었다. ⑬ 오래 전 이주 지역 열 일곱 개 부족 6만여 명이 일궜다는 베트남 호앙수피의 다랑이 논, 지금도 이곳 사람들은 중국의 홍토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수백 년 전과 거의 다름 없는 삶을 이어오고 있다. 여전히 단순한 도구인 낫으로 벼를 베어낸다. 고된 작업이지만 흙이 내어준 소중한 선물, 베어진 벼들을 한 곳에 모아 나무통을 이용해 털어낸다. 어쩌면 대대로 변화없는 이런 삶은 흙이 주는 풍족함에서 비롯됐다. 조상 대대로 전답을 일궈내고 그 전답이 오늘의 가족에게 내어 준 쌀, 그래서 사람들은 쌀을 단순한 음식으로 보지 않는다. 조상의 음덕이고 흙의 배려라 생각한다. 아시아의 인구가 유럽보다 월등히 많은 이유를 벼농사에서 꼽는 사람들이 많다. 같은 면적의 땅에서 밀보다 서너 배나 많은 양을 수확할 수 있기에 그만큼 부양능력이 높다는 것이다. 부양력이 높은 기름진 땅은 아시아인들에게 가족과 마을이라는 끈끈한 공동체 문화를 만들어 내는 근간이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모습은 어떨까. ⑭ 가을을 맞은 김제 평야에 황금색 벼들이 가득하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쌀 생산량은 약 400만톤, 수확의 대부분은 사람의 손이 아닌 기계가 대신하고 있다. 베고 옮기고 흩는 지난 수천 년에 걸친 조상들의 경험이 기계 속에 들어가 그 노동을 대신하고 있다. 흙을 밟지 않아도 얻어낼 수 있는 곡식, 그리하여 우리는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에 살게 되었지만 흙과 멀어지게 됐다. 이제 상점에 진열된 이 수 많은 야채들 속에서 누구도 흙을 떠올리지 않는다. 단지 청결함과 깨끗함이 가격으로 그 가치가 환산될 뿐이다. 이처럼 철저하게 흙을 제거해야만 보다 안전하고 믿음을 준다고 생각하는 요즘, 그러나 알고 있을까. 지구를 덮고 있는 평균 두께 1미터의 흙이 오늘날의 문명을 일군 자양분이라는 것을, ⑮ 봄이 되자 또 다시 농부의 손길이 바빠진다. 농사는 자고로 천하의 근본이라 했다. 농사야 말로 하늘과 흙을 믿고 그 순리에 따라야 된다는 의미다. 생명을 담고 있는 흙, 흙과 인간의 오래 된 동행, 인간의 문명은 이 동행 속에서 탄생했다. 그래서 흙은 우리의 생명과 삶과 물과 꿈과 기억 모두를 품고 있는 가장 거대한 그릇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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