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양업 신부의 네 동생들 이야기
당고개에서 이성례 마리아가 순교한 후 최양업 신부의 네 동생(희정, 선정, 우정, 신정)의 후일담을 셋째 동생인 최우정 바시리오의 큰아들 최상종이 1939년에 기록한 내용과 넷째 동생인 최신정 델레신포로의 아내 송 아가타(1838~1930)의 구술을 바탕으로 정리하였다.
최양업 신부의 증조부 최한일은 이존창의 전교로 천주교인이 되었는데 아들 최인주 하나를 두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1791년 신해박해 때 과부가 된 부인 이씨(이존창의누이)는 아들 최인주를 데리고 서울을 떠나 청양 다락골에 정착하였다.
그 후 최인주가 결혼하여 아들 셋을 두었는데 최영렬, 최영겸, 최영눌이다.
최영눌이 최양업 신부의 부친 최경환 프란치스코다.
삼 형제는 나중에 서울에 와 살다가 박해로 도피하게 되는데, 첫째인 최영렬은 목천 서덕골, 둘째 최영겸은 용인 한덕골에 와서 살다가 골배마실로, 최경환은 여러 지방을 거쳐 과천 수리산에 있는 교우촌으로 각각 피신하였다.
1836년 15살의 최양업은 신학생으로 발탁되어 마카오로 떠났고 3년 후인 1839년 기해박해 때 담뱃골의 최경환, 이성례 부부는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최희정 야고보는 어린 동생들을 목천 서덕골 큰 아버지(최영렬) 댁과 한덕골 작은아버지(최영겸) 댁에 나누어 의탁하였다.
그리고 셋째 동생 최우정 바시리오는 진천 동골에 있는 친척집에 부탁하였다.
1849년 큰형 최양업이 신부가 되어 돌아왔다. 최 신부는 용인 한덕골 작은 아버지 최영겸 집에서 동생 사 형제를 만났다. 그때 페레올 주교가 최 신부의 거처를 진천 동골 공소로 배정하여 그곳으로 떠났다. 몇 년 후(1853년경 추정) 최 신부는 열심한 교우 송구현 도미니코(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의 장녀 송 막달레나, 차녀 송 아가타가 정숙함을 알고 두 동생과 결혼을 시켰다.
첫째 동생 최희정 야고보는 박해 기간 세 어린 동생을 데리고 많은 고초를 겪었으나 그에 대한 행적은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말년에 충북 진천군 바라산 교우촌에서 선종하였다는 기록만이 전해지고 있다. 최희정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막내아들 최유종의 손자가 원주교구 최기식 신부다.
둘째 동생 최선정 안드레아는 사람됨이 비범하고 성정이 걸걸하여 모친 이성례 마리아의 성품을 많이 닮았던 듯하다. 슬하에 딸만 둘 두었다. 후에 경기도 광주군 시어골 교우촌에서 선종하였다고 한다.
셋째 동생 최우정 바시리오는 송 막달레나와 결혼한 후 수년을 진천 동골에서 살다가 박해로 피해 다니며 묵주와 상본을 만들어 팔고 송 막달레나는 바느질로 어렵게 생활하였다. 그 후 집신 장수가 된 두 내외는 무사히 박해 시대를 넘겼다.
위로 딸 둘과 아들 둘을 두었는데 큰딸(아나타시아)에게서 박우철 신부를 배출하였고, 장남 최상종이 수기의 주인공 빈첸시오다. 병인박해 이후 10년 가까이 신발 장수를 하던 최우정은 블랑 신부(후에 제7대 교구장)의 복사가 되어 가정은 돌보지 않고 전국을 순회하다가 1886년 56세 정도에 당시 유행하던 악질로 7월 7일 고백의 기도 속에 숨을 거두었다.
막내 동생 최신정 델레신포로는 송 아가타와 결혼 후 최 신부를 모시고 광주 소리울에서 살다가 몇 해 후 최 신부의 권유로 다시 안양의 담뱃골 옛 고향으로 이사하였다. 종종 최 신부가 그곳에 들르면 부친 묘에 올라가 묵주 기도를 바치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나중에 심해지는 박해를 피해 광주군 함박동에서 살다가 포졸들이 들이닥쳐 피신하고 구걸을 하면서 유랑 생활을 하였다. 장사를 시작하려고 빚을 내었지만 실패하고, 어느 날 읍내 저자에 다녀오겠다고 나간 후 소식이 끊겼다.
[자료: 《한국 초기 천주교회의 여정》(장영돈 편저)에서 발췌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