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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암집 제2권 / 시(詩)○오언절구보유(五言絶句補遺)
하서 김인후의 시에 화답하다 ‘상사일야매화발 홀도창전의시군’으로 운을 삼았다. 〔和金河西麟厚韻 以相思一夜梅花發 忽到窓前疑是君爲韻〕
1
종산은 천하의 궁벽한 땅 / 鐘山天下僻
모래자갈 날로 일어 자욱하네 / 沙礫日交相
십 년간 남음을 기다린 나그네 / 十載南音客
부질없이 고향 꿈만 꾸고 있네 / 空勞夢故鄕
2
북새엔 문안할 사람 없어 / 塞北無人問
난 하서만을 생각한다네 / 河西獨我思
새로운 시 삼백 글자는 / 新詩三百字
먼데서 부친 약간의 이야기 / 遙寄話毫釐
| 북새엔 문안할 사람 없어 / 난 하서만을 생각한다네->북새엔 문안해주는 사람 없고 / 하서만이 나를 생각해주네 *문장의 도치법을 이해 못한 오역/ 자기를 생각해주는 하서에 대한 감사의 표현 - 하서만이 나를 생각해주네 2 북새엔 문안할 사람 없어 / 塞北無人問 난 하서만을 생각한다네 / 河西獨我思 새로운 시 삼백 글자는 / 新詩三百字 먼데서 부친 약간의 이야기 / 遙寄話毫釐 하서 원운 아름다운 미암 친구여 / 有美眉巖子 어이해 그립게 만드는가 / 胡然使我思 언제나 한 자리에 어울려 / 何當共一榻 책 펴고 은미한 이치 밝힐까요 / 開卷析毫釐 |
3
산에 오르니 마음 자못 괴로워 / 陟屺思殊苦
친구 생각에 한번 읊은 것 아니네 / 停雲詠不一
뉘 말했나, 곤궁 속에 돈독해진다고 / 誰言窮裏增
서로 돕는 일 잃은 지 오래되었네 / 麗澤久相失
4
복천에서 봄날 잠시 만나고 / 傾蓋福川春
한양의 밤에 뜻을 함께 하였네 / 同調漢陽夜
금란처럼 마음이 자연히 맞았으니 / 金蘭契自然
명주와 모시옷은 가식 아니겠지 / 縞紵投非假
5
시문은 정절의 국화시와 같고 / 詩齊靖節菊
부는 광평의 매화부와 흡사했네 / 賦逼廣平梅
더욱 기쁘게도 도의 근원을 찾아 / 更喜探原本
한밤중에 벼락 맞은 듯 깨달았네 / 曾知夜半雷
6
신선의 재질은 이태백과 같아 / 仙才侔太白
맑은 물에서 연꽃 피듯 하였네 / 淸水出蓮花
나를 돌아볼 때 시원이 메말라 / 顧我詞源涸
망양의 탄식 끝이 없었네 / 望洋歎罔涯
7
비록 거문고 외롭게 타고 있지만 / 絃韻縱孤彈
궁상의 소리는 누구와 함께 낼까 / 宮商誰互發
먼지 낀 책 속에 천만 언 있지만 / 塵編千萬言
경 한 글자가 기본을 깨우쳐주네 / 一敬悟楨橜
8
나복에 문도들이 성하여 / 蘿葍盛門徒
봉마가 기대기는 잠깐이었네 / 蓬麻倚倏忽
모두가 김후지를 일컬어 / 共稱金厚之
별 속의 달 같다고 하였네 / 有似星中月
9
신재 선생의 두세 편의 부는 / 新齋兩三賦
동방의 옛 사람도 이르지 못한 것 / 東方古未到
지금도 그 넓은 마음 생각하면 / 祗今想廣襟
가을철 팽려호처럼 넉넉하였네 / 彭蠡秋正浩
10
새파란 빛 토옥을 둘러쌌는데 / 靑靑籠土屋
쓸쓸히 차가운 창에 기대었네 / 悄悄倚寒窓
어린아이 남에서 북으로 와 / 稚子南來北
단란하게 한 방에 둘이 되었네 / 團圝一室雙
11
스승 곁엔 많은 영재들 / 英才函丈上
문과 뜰 앞엔 즐비한 옥수라 / 玉樹戶庭前
그대의 끝없는 즐거움이 부러워 / 羨子無窮樂
도서를 다시 자리 곁에 두었네 / 圖書復坐邊
12
샘 파기를 자력으로 하더라도 / 掘泉雖自力
옥 다듬음엔 의혹이 없으리 / 琢玉乃無疑
비록 책 속의 즐거움은 알았지만 / 縱識書中樂
내 어진 벗과 헤어짐은 어쩌겠나 / 奈吾仁友離
13
겨울과 여름에 육반서 읽으니 / 裘葛六般書
밝고 밝은 도 여기에 있어라 / 明明道在是
답답한 마음 잠시 열렸으나 / 面墻雖蹔開
중도 포기 늘 부끄러워했다네 / 常抱半塗耻
14
이별의 쓸쓸함 나 같은 이 없으니 / 離索無如我
한가로이 지내는 이 그대뿐이로다 / 優游獨有君
맛있는 음식 맛 알고자 한다면 / 欲知芻豢味
자양의 문장을 씹어보게나 / 請嚼紫陽文
원운(原韻)
조용히 앉아 세월 보내려는데 / 端居歷歲月
어찌 다시 외물은 얽혀드는가 / 奈復物交相
기질은 변화하기 매우 어려워 / 氣質極難變
구습 따르다 촌티를 못 면했네 / 因循未免鄕
아름다운 미암 친구여 / 有美眉巖子
어이해 그립게 만드는가 / 胡然使我思
언제나 한 자리에 어울려 / 何當共一榻
책 펴고 은미한 이치 밝힐까요 / 開卷析毫釐
괴로워라, 세상 학문 갈래 많아 / 世學苦多端
방향 잡기가 한결 같지 않구려 / 所趨宜不一
어찌하면 놓쳐버린 마음 구하여 / 如何求放心
잠깐이라도 잃지 않게 하오리까 / 勿使須臾失
부끄럽지 않아야 욕됨이 없으니 / 不愧爲無忝
마음가짐 밤낮으로 힘써야겠지요 / 存心當夙夜
하늘을 섬겨 순하고 편안하나니 / 事天順以寧
이 본성은 다른 데서 빌릴 수 없네 / 此性非他假
주염계의 뜰에는 풀이 가득하고 / 庭滿濂溪草
소강절의 매화에는 봄이 깊어라 / 春深康節梅
사랑홉다, 저 원기 모여 있다가 / 憐他朴未散
천지간에 우렛소리 내누나 / 起處一聲雷
머리털 이미 온통 눈빛이니 / 已分頭全雪
어찌 눈꽃인들 감당하리요 / 那堪眼欲花
아침에 도 듣지 못할까 두려워 / 朝聞恐不及
조심스런 맘으로 한평생 보낸다오 / 臨履度生涯
덕성 기르려 해도 방법 모르고 / 德性養迷方
총명도 절로 나타내기 어려워라 / 聰明難自發
종신토록 백록동규 지키려는데 / 終身白鹿䂓
누가 마음속 잡목 제거해 줄까 / 誰爲除株橜
구름 낀 하늘 넓고 고요한데 / 雲天曠寥寥
아스라이 보이는 길 멀기만 해 / 極目路超忽
훌륭한 아들 북풍 거슬러 가니 / 驥子遡北風
한 조각달 보며 서로 생각 하리 / 相思一片月
맑은 시 절로 잊혀지지 않으니 / 淸詩自不忘
뜻 간절하나 이치는 깨치지 않네 / 意切理未到
방 한 구석에서 취하여 읊조리니 / 一室醉吟中
이내 정신이 호연히 넓어지네 / 神期入浩浩
가느다란 연기 초가집에서 나니 / 微烟生草屋
푸른 솔 한가한 창에 떨어지네 / 松翠落閒窓
지저귀는 새소리 예전 같은데 / 鳥語渾依舊
닭 울음은 쌍으로 나질 않구려 / 鷄聲不作雙
마음은 만 리 밖에 매달려 있고 / 心懸萬里外
얼굴은 십 년 전에 막혀버렸지 / 面隔十年前
도리꽃에 봄바람이 불 즈음에 / 桃李春風際
강호에는 밤비만 내리고 있네 / 江湖夜雨邊
견문이 적어 고루함 부끄러운데 / 聞寡徒慙陋
그 누가 진리 알아 의혹 풀어줄까 / 知眞孰解疑
부럽네, 그대 힘써 날로 진보한다지 / 羨君勤日進
병든 이내 몸은 홀로 지리하다네 / 衰病獨支離
한 터럭도 그름은 따르지 말고 / 一毫莫徇非
온통 다 옳음만 구하라 했지 / 十分須求是
이 뜻을 일찍이 들었건만 / 此義早聞之
실행이 어려워 항상 부끄럽네 / 行難常自耻
구곡도가를 노래하니 / 棹歌歌九曲
사람들 무이군이라 말하네 / 人說武夷君
재거시를 반복해 읊으니 / 反覆齋居詠
하늘은 사문을 망치지 않으리라 / 天應未喪文
[주-D001] 김인후(金麟厚) : 1510~1560. 조선중기의 문인으로 본관은 울산(蔚山),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 또는 담재(湛齋)이다. 열 살 때 김안국(金安國)에게서 《소학(小學)》을 배웠고, 1531년(중종26)에 사마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입학, 이황(李滉) 등과 친하게 지냈다. 1540년에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 홍문관 저작(弘文館著作), 홍문관박사 겸 세자시강원설서ㆍ홍문관 부수찬이 되어 인종(仁宗)이 세자 시절 보도(輔導)의 임을 맡았다. 그러나 인종이 죽고,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자 칭병(稱病)하고 고향 전남 장성(長城)으로 돌아가 명종 때 여러 차례 벼슬을 제수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문장과 도학(道學), 절의(節義)를 두루 갖춘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유희춘과는 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에게서 함께 수학한 동문(同門)이면서 사돈간으로 특별한 인연이 있다.[주-D002] 상사일야매화발 홀도창전의시군(相思一夜梅花發 忽到窓前疑是君) : 당나라 노동(盧仝)의 〈유소사(有所思)〉 구절로 “임 그리던 중 어느 날 밤 매화가 활짝 피어, 문득 창 앞에 이르니 아마도 임인가 하노라.”로 풀이된다.[주-D003] 종산(鐘山) : 작자의 유배지인 함경도(咸鏡道) 종성(鐘城)을 이른다.[주-D004] 남음(南音)을 기다린 나그네 : 남음은 남쪽 초(楚)나라의 음악으로, 전하여 고향을 그리워함을 비유한 말이다. 춘추 시대 초나라의 악관(樂官)인 종의(鍾儀)가 일찍이 정인(鄭人)에 의해 진(晉)나라에 잡혀가서 갇혀 있을 때, 진 혜공(晉惠公)이 그를 불러다가 여러 가지 일을 물어보고 그에게 거문고를 주었더니, 그는 그곳에서도 자기 고향인 남방 초나라의 관을 쓰고 초나라의 음악을 탔다는 이야기가 있다. 《春秋左氏傳 成公9年》[주-D005] 산에 …… 괴로워 : 본문의 ‘척기(陟屺)’는 《시경》 〈위풍(魏風) 척호(陟岵)〉에 “저 민둥산에 올라가서 어머님 계신 곳을 바라본다. 어머님은 아마도 이렇게 말씀하시겠지. ‘아, 내 막내아들이 부역에 나가서 밤낮으로 잠도 자지 못할 터인데, 부디 몸조심해서 죽지 말고 살아서 돌아오기만 해라.〔陟彼屺兮 瞻望母兮 母曰嗟予季行役 夙夜無寐 上愼旃哉 猶來無棄〕’”는 말 가운데에서 나오는데, 효자가 부역을 나가서 어버이를 잊지 못하는 심정을 노래한 것이다. 여기서는 유희춘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아울러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걱정을 담았다.[주-D006] 친구 생각 : 정운(停雲)은 친구를 그리워한다는 뜻으로 동진(東晉) 때 시인인 도잠(陶潛)의 〈정운(停雲)〉 시에서 유래하였다.[주-D007] 서로 돕는 일 : 본문의 ‘이택(麗澤)’은 서로 붙어 있는 두 개의 연못이라는 뜻으로, 친구 사이에 서로 도움을 주며 학문을 토론하고 덕을 닦아 나가는 것을 말한다. 《周易 兌 象辭》[주-D008] 복천에서 …… 만나고 : 본문의 ‘경개(傾蓋)’는 ‘경개여고(傾蓋如故)’의 준말로 수레를 멈추고 일산을 기울인다는 뜻으로, 길에서 잠깐 만남을 뜻한다. 《사기(史記)》 권83〈추양열전(鄒陽列傳)〉에 “흰머리가 되도록 오래 사귀었어도 처음 본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고, 수레 덮개를 기울이고 잠깐 이야기했지만 오랜 벗처럼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白頭如新 傾蓋如故〕”라는 말이 있다. 복천(福川)은 동복현(同福縣)의 다른 이름으로 유희춘과 김인후가 최산두(崔山斗)를 스승으로 모시고 강학했던 곳이다.[주-D009] 금란처럼 …… 맞았으니 : 아주 돈독한 우정을 뜻한다. 《주역》 〈계사(繫辭)〉에 “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하니, 그 단단함이 쇠를 끊을 만하도다. 마음이 서로 같은 말은 그 향내가 난초와 같도다.〔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라고 하였다.[주-D010] 명주와 모시옷 : 친구 사이에 선물을 주고 받음을 뜻한다. 《춘추좌씨전》 양공(襄公) 29년 조에 오(吳)나라 계찰(季札)이 정(鄭)나라 자산(子産)에게 흰 명주띠를 선사하자 자산이 그 답례로 모시옷을 보냈다는 고사가 전한다.[주-D011] 정절(靖節)의 국화시 : 정절은 진(晉)나라 때의 문인인 도잠(陶潛)을 가리키며, 그의 〈음주(飮酒)〉시에 “동쪽 울타리 국화꽃 꺾고, 유연히 남산을 바라보도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라는 국화와 관련된 구절이 있다.[주-D012] 광평(廣平)의 매화부 : 광평은 광평군공(廣平郡公)의 봉호(封號)를 받은 당나라 문장가 송경(宋璟)을 말하는데, 매화를 읊은 그의 〈광평부(廣平賦)〉는 당시에 청편염려(淸便艶麗)하다는 호평을 받았다.[주-D013] 한밤중에 …… 깨달았네 : 갑작스럽게 도의 근본을 깨달았음을 뜻한다.[주-D014] 이태백(李太白) : 701~762. 당(唐)의 시인으로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이고, 두보(杜甫)와 함께 ‘이두(李杜)’로 병칭되는 중국 최대의 시인이며, ‘시선(詩仙)’이라고 불린다.[주-D015] 망양의 탄식 : 《장자(莊子)》 〈추수(秋水)〉에 나오는 내용으로, 넓은 바다를 바라보고 감탄한다는 말로, 다른 사람의 위대함을 보고 자신의 미흡함을 부끄러워한다는 뜻이다.[주-D016] 나복(蘿葍) : 전라도 동복현(同福縣)의 옛 이름인데, 여기서는 최산두를 일컫는다. 일찍이 최산두는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동복으로 유배를 가 나복산인(蘿葍山人)이라 일컬으며, 많은 문인들이 가서 강학하였다. 당시 18세였던 유희춘도 최산두에게 나아가 강학하였다.[주-D017] 봉마(蓬麻) : 곧은 삼 속에서 자란 쑥은 저절로 곧게 자라게 된다는 뜻으로, 훌륭한 사우(師友)의 감화(感化)로 선량한 사람이 됨을 이른 말로 여기서는 유희춘 자신이 최산두의 문인이 되었음을 뜻한다. 《순자(荀子)》 〈권학(勸學)〉에 “쑥이 삼밭에 나면, 붙들어 세우지 않아도 절로 곧아진다.〔蓬生麻間 不扶自直〕”라고 하였다.[주-D018] 김후지(金厚之) : 후지는 김인후의 자이다.[주-D019] 신재 선생 : 신재는 최산두의 호이다.[주-D020] 팽려호 : 강서성(江西省)에 있는 파양호(鄱陽湖)를 이른다. 《書經 禹貢》[주-D021] 어린아이 : 유희춘의 아들 경렴(景濂)을 지칭하는 듯하다. 김인후는 이 무렵에 자신의 딸을 경렴에게 시집보냈다.[주-D022] 옥수(玉樹) : 옥수경지(玉樹瓊枝)의 준말로 고귀한 가문의 자제를 일컫는 말이다.[주-D023] 겨울과 …… 읽으니 : 쉬지 않고 공부함을 뜻한다. 구갈(裘葛)은 갖옷과 갈건(葛巾)으로 동구(冬裘)ㆍ하갈(夏葛)의 준말이다. 이는 곧, 겨울옷과 여름옷이란 뜻으로 전(轉)하여 겨울과 여름이란 뜻으로 쓰이는 때도 있다. 육반서(六般書)는 육대서(六大書)로, 즉 전(典)ㆍ모(謨)ㆍ훈(訓)ㆍ고(誥)ㆍ서(誓)ㆍ명(命)을 일컫는다.[주-D024] 답답한 마음 : 면장(面墻)은 사람이 글을 배우지 아니하면 마치 낯을 담장에다 대고 선 것과 같이 답답하다는 말이다. 《서경》 〈주관(周官)〉에 “배우지 않으면 낯을 담장에 댄 것과 같다.〔不學墻面〕”는 말이 있다. 또한 《논어》 〈양화(陽貨)〉에 “공자(孔子)가 일찍이 아들 백어(伯魚)에게 이르기를 ‘네가 《시경》 〈주남〉 〈소남〉의 시를 공부했느냐? 사람치고 〈주남〉 〈소남〉의 시를 공부하지 않으면 마치 담장에 얼굴을 딱 대고 서 있는 것과 같으니라.〔女爲周南召南矣乎 人而不爲周南召南 其猶正牆面而立也與〕’” 한 말이 전한다.[주-D025] 이별의 쓸쓸함 : 본문의 ‘이삭(離索)’은 이군삭거(離群索居)의 준말로, 친구들 곁을 떠나 혼자 외로이 지내는 것을 말한다. 《禮記 檀弓上》[주-D026] 맛있는 음식 : 본문 ‘추환(芻豢)’의 추(芻)는 초식(草食)하는 가축이고, 환(豢)은 곡식 먹는 가축으로서 모두 육류(肉類)를 가리킨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이(理)와 의(義)가 내 마음을 즐겁게 함이 소ㆍ양고기와 개ㆍ돼지고기가 내 입을 즐겁게 함과 같다.”라고 하였다. 즉, 학문이나 이(理)ㆍ의(義)의 참맛이 고기가 내 입을 즐겁게 하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주-D027] 자양(紫陽)의 문장 : 주희(朱熹)의 글을 뜻한다. 자양은 자양산(紫陽山)을 가리키는데, 주희가 학당을 세웠던 산이다.[주-D028] 부끄럽지 …… 없으니 : 남이 잘 보지 않는 구석진 곳에서도 욕됨이 없어야 부끄럽지 않다는 뜻이다. 북송(北宋)의 학자 장재(張載)의 〈동명(東銘)〉에 “옥루에 부끄러움이 없게 함이 욕되게 함이 없는 것이다.〔不愧屋漏爲無忝〕”에서 취하였다. 본문의 ‘불괴(不愧)’는 불괴옥루(不愧屋漏)를 줄임 말로 《시경》 〈억(抑)〉에 “네가 네 집에 있을 때에 보니 옥루에 있을 때에도 부끄러움이 없었네.〔相在爾室 尙不愧于屋漏〕”라는 내용에서 유래하였다. 여기서 옥루는 집에서 가장 구석져서 사람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을 가리킨다. 또한 ‘무첨(無忝)’은 《시경》 〈소아(小雅) 소완(小宛)〉에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잠자면서 너를 낳아주신 부모에게 욕됨이 없도록 하라.〔夙興夜寐 無忝爾所生〕”는 내용에서 유래하여 욕됨이 없게 한다는 뜻이다.[주-D029] 순하고 편안하나니 : 북송의 학자 장재(張載)의 〈서명(西銘)〉에 “살아서는 내 하늘에 순응하고, 죽어서는 내 편안하리라.〔存吾順事 沒吾寧也〕”는 대목이 있다.[주-D030] 주염계의 …… 깊어라 : 주염계(周濂溪)와 소강절(邵康節)을 들어 자신의 유학자적인 면모를 나타내었다. 염계는 북송(北宋) 유학자 주돈이(周敦頤)의 호이며, 강절은 마찬가지 북송 유학자 소옹(邵雍)의 시호이다.[주-D031] 우렛소리 : 남송(南宋) 주희(朱熹子)의 〈답원기중논계몽(答袁機仲論啓蒙)〉에 “홀연 야밤에 치는 우렛소리에, 만호 천문이 차례로 열리누나. 만약 없음 가운데 형상이 있음을 안다면, 그대가 복희씨를 친견했다 허여하리.〔忽然半夜一聲雷 萬戶千門次第開 若識無中含有象 許君親見伏羲來〕”라고 하였다.[주-D032] 눈꽃 : 눈이 어른어른하다는 뜻이다. 당(唐)나라 두보(杜甫)의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에 “하지장의 말 타는 건 배를 탄 듯이 흔들흔들, 눈은 어른거려 우물 속에 빠져 자기도 했다네.〔知章騎馬似乘船 眼花落井水底眠〕”라고 하였다.[주-D033] 아침에 …… 두려워 : 본문의 ‘조문(朝聞)’에 대해서는 《논어》 〈이인(里仁)〉에 “아침에 올바른 도리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夕死可矣〕”라는 말이 있다.[주-D034] 조심스런 맘 : 본문의 ‘임리(臨履)’는 항상 두려워하는 자세로 조심함을 뜻한다. 《시경》 〈소아(小雅) 소민(小旻)〉에 “매우 두려워하고 조심하여 깊은 못에 임한 듯, 얇은 얼음을 밟는 듯이 한다.〔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冰〕”라고 하였다.[주-D035] 백록동규 : 백록동 서원(白鹿洞書院)의 학규(學規)를 말한다. 백록동에는 당(唐) 이래로 국학(國學)을 두었고, 송초(宋初)에 서원을 두었다. 그 뒤에 황폐해진 것을 주희(朱熹)가 복구하고 교학(敎學)의 요령을 만들어 게시하였는데, 이것을 백록동 서원학규라 한다. 여기에는 오교(五敎)의 목(目), 수신(修身)ㆍ접물(接物)ㆍ처사(處事)의 요(要), 위학(爲學)의 서(序)에 관한 규모가 들어 있다.[주-D036] 훌륭한 …… 가니 : 유배지의 유희춘을 찾아가는 아들 경렴을 기자(驥子)로 표현하였다. 기자는 천리마 새끼라는 뜻으로 남의 훌륭한 자제를 일컫는다. 《북사(北史)》 권38 〈배연준열전(裴延儁列傳)〉에 “연준(延儁)의 종형 선명(宣明)의 두 아들 경란(景鸞)과 경홍(景鴻)이 남다른 재질을 지녀 하동(河東)에서 경란은 기자로 부르고 경홍은 용문(龍文)으로 불렀다.”라고 하였다.[주-D037] 理未到 : 《하서전집(河西全集)》에는 ‘理仍到’로 되어 있다.[주-D038] 구곡도가를 노래하니 : 〈구곡도가(九曲棹歌)〉는 남송(南宋) 주희(朱熹)의 무이구곡(武夷九曲) 도가시(棹歌詩)를 말한다.[주-D039] 무이군(武夷君) : 전설 속에 나오는 신선으로 무이산(武夷山)에 산다고 전한다. 전설에 따르면, 요(堯) 임금 시절에 팽조(彭祖)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은 팽무(彭武), 차남은 팽이(彭夷)였다. 당시 이들은 홍수로 피해 입은 백성들을 걱정하여 아홉 구비의 강을 파서 물길을 냈는데, 이를 ‘구곡계(九曲溪)’라고 부르게 되었고, ‘무이산’이라는 명칭도 팽무와 팽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주-D040] 재거시 : 남송(南宋) 주희의 〈재거감흥이십수(齋居感興二十首)〉를 말한다.[주-D041] 하늘은 …… 않으리라 : 유학이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말하였다. 《논어》 〈자한(子罕)〉에 “공자(孔子)가 광(匡)땅에서 환란을 당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 공자가 이르기를, ‘하늘이 사문을 없애려 하지 않으시는데, 광 땅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天之未喪斯文也 匡人其如予何〕’”라고 하였다.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ㆍ조선대학교 고전연구원 | 박명희 안동교 (공역)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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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작품은 김인후(1510〜1560)와 유희춘(1513〜1577)이 마음을 주고받은 우정시이다. 두 사람의 나이를 따져보면, 김인후가 세 살 더 위니까 선배와 후배가 나눈 대화라고 할 수 있다. ①의 김인후가 지은 시 제목에서 말한 ‘종산’은 함경도 종성(鍾城)의 또 다른 이름이다. 유희춘이 종성으로 유배 가 있던 시절에 김인후가 시를 써서 보냈고, 이어서 유희춘이 김인후 시에 화답한 작품이 ②이다. 그런데 ①과 ② 시제에 모두 ‘화답’이란 말을 쓴 이유가 있다. 유희춘이 종성으로 유배 갔던 때는 1547년(명종2)이었다. 종성은 한반도의 북쪽 끝인데, 그 고된 유배기가 언제 끝날지 모르기 때문에 늘 갑갑하고 외로웠을 것이다. 특히, 자신을 잘 알아주는 친구 한 명도 없었으니,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삭막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유희춘은 유배 간 10년 뒤 어느 날 멀리 전라도 장성(長城) 고향 집에 있을 김인후에게 안부 편지를 써서 보낸다. 그러면서 그 끝부분에다 김인후의 주옥같은 장편시 10여 수를 받아 근심을 잊고 싶다는 내용을 적었다. 유배 가기 전까지 동문이요, 사돈 사이가 된 김인후. 유희춘이 생각했을 때 김인후는 어느 누구보다 자신을 잘 알아주는 진정한 사람이라 생각하였다. 때문에 시를 지어 보내달라는 부탁을 서슴없이 할 수 있었다. ‘장편시’는 아마도 율시(律詩)를 말한 듯하다. 유희춘의 편지를 받은 김인후는 유희춘이 바라던 대로 시 10여 수를 지어 보낸다. 비록 유희춘이 바라던 장편시가 아닌 절구(絶句)의 단편시에 불과했지만 아쉬운 대로 마음의 대화를 나누기에 부족하진 않았다. 두 시의 내용을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김인후는 유희춘을 가리켜 ‘아름다운 친구’라 말하며, 왜 이리 그립게 만드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지난 과거처럼 한 곳에 모여 학문을 논의할 수 있을는지를 또 다시 물었다. 이어서 유희춘은 북쪽에 문안할 사람이 없어 자신은 김인후만 생각하는데, 마침 부쳐온 단편의 10여 수는 터럭 끝과 같은 미세한 대화인 듯하다라고 말하였다. 오히려 서로 잘 아니까 긴 시를 주고받을 필요가 없었을 수도 있다. 짤막한 수창(酬唱)을 통해 우정을 표출한 작품인 것이다. 2. 김인후와 유희춘, 동문에서 사돈이 되기까지 김인후의 호는 하서(河西) 또는 담재(湛齋)이고, 본관은 울산(蔚山)으로, 전라도 장성 대맥동(大麥洞)에서 태어났다. 김인후는 어려서부터 영특한 아이로 소문이 났다. 김인후가 10세 되던 해 어느 날 당시 호남 관찰사로 부임해왔던 김안국(金安國)이 몸소 대맥동 집에까지 찾아왔다. 어린이 김인후가 영특하다는 소문이 진짜인지 알아보고 싶어서였다. 김안국은 조광조(趙光祖) 등과 함께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도학에 통달한 사림파의 선구자이다. 곧, 그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는데, 그러한 김안국이 김인후를 만나보러 직접 대맥동까지 간 것이다. 아마도 김안국은 김인후에게 학문에 관한 여러 가지를 물었을 것이며, 김인후는 김안국이 묻는 것에 대해 대답을 잘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김안국은 김인후의 학문적 수준이 여느 아이들보다 뛰어나다는 점을 알고 칭찬하며 “이 아이는 나의 소우(小友)이다.”라고 말하였다. ‘소우’란 나이가 어리지만 벗으로 삼을 만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같은 해에 김인후는 김안국을 찾아가 뵙고 『소학』을 배웠다. 『소학』은 인간이 일상생활을 하며 지켜야 하는 기본적 도덕을 내용에 담은 책으로, 당시 사림들이 중요시하였다. 따라서 김인후가 김안국에게 『소학』을 배웠다는 것은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겠다는 인생의 좌표를 알려준 것으로 주목할 부분이다. 이후 18세(1527, 중종22)가 된 김인후는 1519년 기묘사화를 겪고 화순 동복현에서 은둔 생활을 하고 있던 최산두(崔山斗)에게 찾아가 학문을 닦는다. 최산두는 그의 나이 18세 때 순천으로 유배 간 김굉필에게 학문을 익혔던 사림으로, 기묘사화 여파로 동복현에 유배 갔다가 그곳에서 은둔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김인후가 최산두를 찾아간 때는 기묘사화가 발생한 지 8년 정도 지난 시점이었다. 김인후는 이 무렵 최산두 문하에서 유희춘을 만난다. 다시 말해 김인후와 유희춘은 최산두를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했으니, 두 사람은 동문이 된 셈이다. 유희춘은 누구인가? 호는 미암(眉巖)이요, 본관은 해남(海南)으로, 해남에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는 최부(崔溥)이고, 아버지는 유계린(柳桂隣)이며, 형은 유성춘(柳成春)이다. 최부와 유계린, 유성춘은 모두 당대 잘 알려진 사림파의 일원으로, 또한 사림파의 한 사람인 최산두를 찾아가 학문을 익혔다는 것은 어떻게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으로 그 의미가 작지 않다. 이와 같이 김인후와 유희춘은 최산두를 같은 스승으로 모신 동문으로 끈끈한 우정을 간직하였다. 이후 김인후가 그의 나이 34세(1543, 중종38) 때 옥과 현감(玉果縣監)이 되어 현지에 머물러 있었다. 이때 유희춘이 서울에서 고향에 내려가다 옥과에 들러 주자(朱子)가 지은 『효경간오』 한 질을 보여주었는데, 김인후가 손수 베껴 두었다가 제자들을 가르치는데 활용하기도 하였다. 다시 말해 동문으로서 맺어진 우정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김인후와 유희춘은 이후 성균관에서 다시 만난다. 이때 겪었던 일과 관련해 다음의 미담(美談)이 전한다. 김하서가 급제하기 이전, 성균관에 있을 때였다. 그때 전염병에 걸려 위독하니 사람들이 감히 돌보지 못하였다. 미암 유희춘이 당시 성균관의 관원으로 있었는데 그의 사람됨을 애석히 여겨 자기 집에 메어다 두고는 밤낮으로 돌보아 끝내 다시 일어나게 되었고, 하서는 이를 감사하게 여겼다. 뒷날 미암이 종성으로 유배되었을 때, 하나 있는 자식이 매우 어리석었다. 하서가 그를 사위로 맞으려 하자 온 집안이 모두 찬성하지 않았지만 듣지 않고 끝내 혼인을 치르니, 사람들이 하서와 미암을 모두 훌륭하게 여겼다.(허균, 『성소부부고』 권23, 「성옹지소록 중(惺翁識小錄中)」. 한국고전번역원 번역 참조) 이 미담은 여러 책에 전하고 있는데, 다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김인후가 과거시험에 급제하기 이전에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그 무렵 김인후는 전염병에 걸려 위독한 지경에 이르렀으나 사람들이 자신에게 병이 옮길까 두려워 아무도 돌보지 않았다. 이때 당시 성균관 관원으로 있던 유희춘이 김인후를 불쌍히 여겨 자기 집에 데려다 간호를 하여 마침내 병이 나았다. 하마터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었던 김인후 입장에서 유희춘은 생명의 은인이었다. 따라서 이후 김인후는 유희춘에게 고마운 마음을 늘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1547년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 여파로 유희춘이 종성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을 때 김인후는 한 가지 일을 제안한다. 즉, 김인후 자신의 3녀와 유희춘의 아들 경렴(景濂)을 혼인시키자고 한 것이다. 김인후 입장에서 보자면, 경렴은 못나고 자신의 딸 3녀와 나이 차이도 상당하여 서로 맞지 않은 부분이 많았다. 그래도 김인후는 유배 길에 오르던 유희춘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멀리 귀양 가고, 처자식은 의지할 곳이 없으니, 그대의 어린 아들을 내 마땅히 데려다 사위로 삼을 것이네. 염려하지 말게.”라고 하였다. 이러한 제안을 하자 김인후의 온 집안사람들은 찬성하지 않았다. 유희춘이 기약 없는 유배를 가게 되었으니 가세(家勢)가 기울 것은 분명하고, 사위로 삼으려고 한 경렴은 나이도 딸보다 훨씬 많을 뿐 아니라 그리 똑똑한 편이 못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김인후는 집안사람들의 반대를 뒤로 한 채 그 혼사를 단행하였다. 위 인용 부분의 마지막에서 “사람들이 하서와 미암을 모두 훌륭하게 여겼다.”라고 말한 것은 아마도 우정이 계속 이어진 것에 대한 찬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써 김인후와 유희춘은 같은 스승 아래의 동문으로 만났다가 사돈의 인연까지 이어진 특별한 사이가 되었다. 3. 살아서의 우정이 죽어서도 이어지고 김인후는 그의 나이 51세(1560, 명종15) 1월에 생을 마감한다. 이때 유희춘은 아직 유배가 풀리지 않아 종성에 있었다. 유희춘은 유배지에서 김인후의 부음(訃音)을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흘러간 지난날을 떠올리며 김인후의 죽음을 위로했을 것이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늘 가까이 있었던 두 사람인데, 한 사람이 먼저 세상을 떠났으니 그 느낌은 남달랐을 것으로 생각한다. 유희춘은 종성 유배 시절에 자식과 손자를 위해 「경련을 보내고 아울러 계문에게 보이다〔送慶連兼示繼文〕」 라는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시 내용을 보면, 마지막 구에서 자신과 김인후의 근원을 이을 것을 주문하고 있는데,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유희춘 지음(『미암집』 권2) 1구에서 말한 ‘남으로 가는 아이’는 아들 경렴을 가리키고, ‘손자’는 경렴과 김인후 3년 사이에서 태어난 계문, 즉 광선(光先)을 말한다. 2구는 어느 정도 학문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뜻으로, 손자 광선에게 격려의 말을 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선물로 벼루와 먹을 주면서 마지막으로 두 할아비의 근원을 이으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한 ‘두 할아비’는 유희춘 자신과 김인후를 두고 말한 것으로, 사림으로서 후손들이 그 맥을 계속 이어갔으면 하는 바람을 말한 것이다. 유희춘은 그의 나이 55세(1567, 명종22) 때 유배에서 풀려 다시 벼슬에 올랐다. 근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유배 생활을 한 것이다. 유배가 풀리자 여기저기 가야하는 곳이 많았다. 그 중에 물론 김인후의 묘소에 가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미암일기』 1568년 1월 12일과 13일의 기록을 보면, 유희춘이 장성에 있는 김인후의 집과 집에서 2리쯤 떨어진 김인후의 묘소에 가서 음식을 차려 올리고, 제문을 읽도록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 제문이 전하고 있지 않아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으나 살아서의 우정이 죽어서까지 이어진 것이다. 글쓴이 박명희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강의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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