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리만자로 정상 우후르피크를 가는 길.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으면 흘러가지 않는다. 천천히 pole pole
스스로를 다짐한다. 산에서 겸손하자. 자신감을 가지고 도전하자 그리고 즐기자. 내 머릿속에는 내려놓으라는 반성적의미의 헤밍웨이의 소설 <킬리만자로의 눈>과 채우고 욕망을 북돋우라는 조용필의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 그 중간에 서 있다.
죽음을 어떻게 바라 볼 것인가?
<킬리만자로의 눈>에 등장하는 주인공 해리는 가시에 긁힌 무릎의 상처를 치료하지 않아 다리가 썩어가고 있다. 침상에 누운 그 앞에 독수리들이 몰려든다. 냄새 때문일까? 몰골 때문일까? 치료는커녕 삶을 포기하며 죽기를 바란 것이다. 밤이 되자 텐트 밖에는 하이에나가 소리를 내며 울부짖고 있다. 하나의 생명체가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해리는 여전히 구조보다는 죽음을 원하고 있다. 세상사 다 내려놓고 지나온 길 반성하며 조용히 삶을 마무리하자는 의미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봉화바위에서 몸을 던지기 전에 “삶과 죽음은 자연의 한 조각”이라고 했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원래 삶이란 없는 것이다. 세상 대다수가 죽음이다. 단지 생명체가 부여되면서 잠시 삶을 살아갈 뿐이다. 해리가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삶을 살만큼 살았고 더 이상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 의미 없다고 보았다.
선각자들은 죽음 앞에 각자의 방식으로 죽음을 정의하였다. 자로가 스승 공자께 죽음을 묻자 “삶도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알겠느냐” 라고 했다. 귀거래사로 유명한 도연명은 죽음을 “새장 속에 갇혀 있다가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했고 알베르 까뮈는 “죽음이 다른 삶으로 인도한다고 믿고 싶지 않다. 그것은 닫히면 그만인 문이다.”고 했다. 현세의 삶에 충실하면 그 뿐 죽음이후 까지 생각할 필요 없이 덤덤히 받아들이면 된다. 반면에 소크라테스는 사약을 받은 날 인간의 몸은 죽을지라도 영혼은 불멸한다고 논증했다.
장자는 죽음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았을까?
장자의 아내가 죽자 혜시가 조문을 왔다. 장자는 그 때 두 다리를 뻗고 앉아 동이를 두드리면서 노래하고 있었다. 그를 본 혜시가 말했다. "부인과 함께 살았고, 자식을 길렀으며, 함께 늙지 않았는가. 그런 부인이 죽었는데 곡을 안 하는 것은 물론, 동이를 두드리며 노래까지 부르고 있으니 너무 심하지 않은가?" 장자가 말하였다. "그렇지 않네. 그가 처음 죽었을 때에야 나라고 어찌 슬픈 느낌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가 태어나기 이전을 살펴보니 본시는 삶이 없었던 것이고, 삶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시 형체조차도 없었던 것이었으며, 형체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시 기운조차도 없었던 것이었네. 흐리멍텅한 사이에 섞여 있었으나 그것이 변화하여 기운이 있게 되었고, 기운이 변화하여 형체가 있게 되었고, 형체가 변화하여 삶이 있게 되었던 것이네. 지금은 그가 또 변화하여 죽어간 것일세. 이것은 봄, 가을과 겨울, 여름의 사철이 운행하는 것과 같은 변화였던 것이네. 죽은 사람은 우주의 거대한 방에서 편안히 잠들고 있는 것일세. 그런데도 내가 엉엉 하며 그의 죽음을 따라서 곡을 한다면 스스로 운명에 통달하지 못한 일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에 곡을 그쳤던 것이네."
나만 슬퍼 소리 내어 운다는 것,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울기를 그만두었네
莊子妻死 惠子弔之 莊子則方箕踞鼓盆而歌 惠子曰與人居長子 老身死 不哭亦足矣 又鼓盆而歌 不亦甚乎 莊子曰不然 是其始死也 我獨何能無概然 察其始而本無生 非徒無生也 而本無形 非徒無形也 而本無氣 雜乎芒芴之間 變而有氣 氣變而有形 形變而有生 今又變而之死 是相與為春秋冬夏四時行也 人且偃然寢於巨室 而我噭噭然隨而哭之 自以為不通乎命 故止也<지락편>
장자처사 혜자조지 장자즉방기거고분이가 혜자왈여인거장자 노신사 불곡역족의 우고분이가 불역심호 장자왈불연 시기시사야 아독하능무개연 찰기시이본무생 비도무생야 이본무형 비도무형야 이본무기 잡호망홀지간 변이유기 기변이유형 형변이유생 금우변이지사 시상여위춘추동하사시행야 인차언연잠어거실 이아교교연수이곡지 자이불통호명 고지야
아내의 죽음 앞에 잠시 슬퍼했다.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결코 슬퍼 할 일이 아니었다. 삶이란 원래 없는 것이다. 세상을 떠도는 먼지에 기운이 생기면서 형체가 만들어지고 형체에서 생명이 부여되면 삶이 된다. 삶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기운이 사라지면서 죽음이 된다. 그 죽음은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순환과정일 뿐이다. 삶은 잠시였고 죽음은 우주의 거대한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니 드디어 속박에서 풀려난 것이다. 결코 슬퍼할 일이 아니다.
진정한 자유란?
가수 조용필은 <킬리만자로의 표범>에서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수 없다”고 외친다. 자고나면 위대해지는 헛된 꿈, 자고나면 초라해지는 현실의 세계. 그러나 산기슭을 썩은 고기를 찾아다니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산정높이 올라가 굶어죽는 야성에 찬 표범의 삶을 찾아 나서기로 결심했다. 비록 현실적인 삶은 추잡한 하이에나 일지라도 생기가 돌고 야성미가 넘치는 짐승 같은 상남자의 길. 위대해지고 싶은 꿈. 필부의 희망사항이다. 그러나 낙타가 바늘구멍을 뚫고 나와야 하듯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꿈에서 깨어나 보니 그저 그런 인생이다. 야성에 찬 표범을 지향하지만 하이에나 축에 들기도 힘들다.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수는 없다는 절규. 내가 이 세상에 왔다간 흔적이라도 남겨야 한다. 처절한 발버둥이다.
존재의 흔적을 남기고 싶다는 의미다. 존재의 흔적은 동물도 남긴다. 동물의 발자국,화석이 그렇다. 여기서 머물러서는 안된다. 인간은 창조의 흔적을 남겨야 한다. 우리 선조들이 돌도끼를 만들면서 영장류가 되었듯이.이렇듯 창조는 변화다. 비록 한줄기 연기처럼 가뭇없이 사라질지라도 빛나는 불꽃으로 타오르려는 욕망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 자유를 얻을 수 있다.
북쪽 바다에 물고기 한 마리가 있는데, 이름을 곤(鯤))이라 한다. 곤의 둘레의 몇 천 리 인지 알지 못할 정도로 컸다. 곤이 변해서 새가 되는데, 그 새의 이름은 ‘붕’(鵬)이다. 붕의 등은 몇 천 리 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붕이 가슴에 바람을 가득 넣고 날 때, 그의 양 날개는 하늘에 걸린 구름 같았다. 그 새는 바다 위에서 용솟음치는 파도를 타고 남쪽 바다로 날아간다.
北冥有魚 其名爲鯤 鯤之大 不知其幾千里也 化而爲鳥 其名爲鵬 鵬之背
不知其千里也 怒而飛 其翼若垂天之蕓 是鳥也 海運則將徙於南冥
북명유어 기명위곤 곤지대 부지기기천리야 화이위조 기명위붕 붕지배
부지기천리야 노이비기익약수천지운 시조야 해운즉장사어남명 <소요유 편 1>
대붕은 바람의 부피가 크지 않으면 육중한 몸으로 날 수 없다. 그래서 때를 기다리다가 태풍 같은 큰 바람이 불어올 때 구만 리를 날아갈 수 있다. 대붕이야기를 보면 몇 천리 크기의 곤이 붕이 되는데 붕의 등은 몇 천리인지를 알지 못할 정도로 크다. 하지만 너무 커서 날개 짓을 하면 산에 걸리고 나무에 걸려 스스로 날아오르지 못한다. 그래서 일 년에 한 번씩 오는 태풍을 타고 올라 하늘로 날아오른다. 여기서 우리의 자유는 절대적 자유가 아닌 조건적 자유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절대적 자유는 존재할 수 없다.
니체가 자유를 위해서는 ‘무모함에 가까운 용기’가 필요하다고 했다. 대붕의 자유를 쟁취할 것인가? 아니면 잡새의 자유에 만족할 것인가? 만약 후자라면 ‘잡새의 큰 뜻을 대붕이 어찌 알겠는가?’라고 이야기 하면 된다. 하지만 잡새가 그것을 깨닫고 위로 올라가려고 할 때는 대붕이 되어야 한다. 대붕으로 변하지 않으면 오를 수 없다. 고통을 견디고 대붕이 되었을 때 자유를 맞이할 수 있다.
자기 본성의 실현
아디스 아바바 공항에서 킬리만자로를 향해서 가는 기내에서 허브향이 나는 에티오피아 커피를 마셔본다. 에티오피아 커피가 최고라는 선입견일까? 깔끔하고 신선한 단백질을 섭취하는 기분이다. 킬리만자로 공항에 내려서 주변을 둘러본다. 끝없는 평원은 가슴이 탁 트이고 마음을 평온하게 한다. 그 웅장한 이름 킬리만자로 앞에 나타난 공항은 시골의 허름한 정류장 같다. 공항 검색대에서는 작은 체구에 숯덩이 같은 흑인들이 신발, 허리벨트까지 내려놓게 하고 매몰차게 관광객들을 몰아치듯 검색하고 있다. 숙소로 가는 길. 호텔까지는 왕복 8차로 쯤 되는 도로가 대평원을 가르며 약 1시간 30분 달린다.장난기가 발동한다. 차창 밖으로 손을 내밀며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반가움의 표시로 “하쿠나 마타타, 폴레폴레, 잠보 잠보”를 외친다. 일자형 낫으로 풀을 베는 사람들. 차량의 과속을 단속하는 경찰관들. 자연은 공존을 원하는데 인간은 질서를 요구한다. 자연은 이대로 ‘냅 둬’ 하는데 인간은 괴물 쇳덩어리 포크레인으로 땅을 갈아 엎고 있다.
순간 내 눈에 포착된 한 장면.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웅덩이를 메우기 위해 뭔가를 열심히 나르고 있다. 체격이 큰 사람이 회초리를 들고 의자에 앉아서 감독하고 있다. 약체의 아이와 거인 같은 감독관. 피지배자와 지배자의 모습이다. 대인은 감독해야 할 책임이 있고 소인은 책임을 완수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둘 사이가 주종관계가 되면 안 된다. 학생은 당당하게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감독관은 감독관대로 역할을 다하면 된다.장자는 어떤 집단이나 주어진 조건하에서도 스스로 주인이 되는 삶을 권한다.
매미나 작은 비둘기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후닥닥 있는 힘을 다해 날아올라 느릅나무나 다목나무 가지 위에 머무르되, 때로는 혹 거기까지도 못가고 땅바닥에 동댕이쳐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 무엇 때문에 붕새는 9만 리 꼭대기까지 올라가 남쪽으로 갈 필요가 있겠는가.”
蜩與鷽鳩笑之曰 我決起而飛槍楡榜 時則不至 而控於地而已 奚以之九萬里而南爲
조여학구소지왈 아결기이비창유방 시즉부지 이공어지이이 해이지구만리이남위<소요유>
매미나 작은 새가 대붕을 비웃으면 안 된다. 대붕은 대붕대로 삶의 기준에 맞게 살고 작은 새나 곤충은 자기 습성대로 살면 그뿐이다. 비교우위가 필요하지 않다. 차이를 인정하면 된다. 차이를 다름으로 인식하는 자체가 문제다. 자기 위치에서 자기 기준의 잣대를 대니까 타자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장자는 개성의 함양을 내세운다. 개체가 자신의 본성을 이상적으로 실현하길 희망한다. 능동적인 내가 있고 행동양식은 독립적이어야 한다. 시대를 이끄는 지도자들이 인생의 멋을 결정하는 생활 습관 중에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기’가 들어 있다. 자기만의 스타일과 자기만족에 최선을 다하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