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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남이 살았던 시기가 주류 실학자들과 큰 시간차가 있음에도 호남의 4대 실학자 대열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왜일까? 그것은 바로 가학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50여 년의 간격을 메워준 것도 가학이었고 오늘날 규남박물관을 통해 재조명받고 꾸준히 기억할 수 있게 된 것도 사실은 규남이 남긴 가학의 후광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규남은 이런 가학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기에 가학을 더욱 크게 일으키고자 했고, 또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려 했을까? 조선 말기 지방학인가(地方學人家)의 존재방식에서 가학의 역할에 대한 연구는 매우 흥미로운 주제이다. 가학의 맥락 “이 사촌(沙村)의 옛터는 실로 복천(福川)의 명승지라네, 상서롭고 신령스런 기운이 모인 곳에 옛날 금사옹(錦沙翁, 河潤九)이 집을 지었고, 시서(詩書)로 교육한 것은 곧 우리 병암공(屛巖公, 河永淸)이 끼친 바이네, 예전에 소과·대과에 영광스럽게 급제했으니 지금까지 고향에서 공경할 만한 일이네. 누추한 집이 무너진 지 이미 오래되어 오늘에야 특별히 재건을 도모하네.”1) 이는 규남이 쓴 사촌 살림집 상량문의 일부분이다. 사촌은 그가 태어난 야사리(野沙里, 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를 가리킨다. 여기서 진양 하씨가 사촌, 즉 야사리에 뿌리를 내리는 데는 규남의 7대조인 하윤구(河潤九, 1570∼1646)와 증조부인 하영청(河永淸. 1697~1771)의 역할이 컸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이들을 통해 하씨가의 가학이 틀을 잡았고 규남이 이를 다시 일으킴으로써 그 명맥을 이을 수 있었다.2) 하윤구는 문과에도 합격하고 관료도 지내 중앙에 이름을 알릴 수 있었고 아울러 지역에도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특히 하윤구는 정두원(鄭斗源, 1581~?)과 친교가 두터웠다. 정두원은 북경에 사신으로 가서 서양 과학기술의 산물인 자명종, 천리경, 그리고 『이마두천문서(利瑪竇天文書)』, 『직방외기』, 『만국전도』 등을 얻어 온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이런 친교 관계가 하씨 집안의 학문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증조인 하영청에 이르러 가사(家事)에 힘쓴 덕에 하씨가는 가산도 늘고 문중기반도 공고해졌다.3) 나아가 인근 사족과 저명한 학인 및 산림처사들과 교유(交遊)하면서 향촌의 유력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만년에는 선친의 묘소와 가까운 곳에 병암정사(屛巖精舍)를 지어 연구하고 사색하였는데 거기에는 책들이 벽에 가득하였다. 당호는 수졸헌(守拙軒)이었다. 그는 당시 석학으로 윤봉구(尹鳳九), 김원행(金元行), 송명흠(宋明欽), 권진응(權震應)과 같은 제현들과 종유하였으며, 특히 신경준, 황윤석, 홍대용 등 당시 저명한 실학자들과 교유하면서 실사구시의 가학을 수립하였다. 이들은 우리나라의 언어·지리·역사·풍속에 대한 학문적 연구와 당시 서양 과학기술의 영향을 받은 천문학·수학 등의 연구에서 업적을 남겼다. 하영청도 마찬가지였다. 한편, 이웃마을에 살았던 나경적(羅景績, 1690~1762)과의 관계도 중요하다.4) 나경적은 병암정사에 자주 들러 시문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기형혼천의(璣衡渾天儀), 자전수차(自轉水車) 등을 제작할 때 하영청과 함께하였다. 이런저런 영향으로 하영청의 학문은 유학보다는 실용학이나 이용후생학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가져 상수학이나 성력(星曆), 갑병(甲兵), 전곡(錢穀), 음양 등을 탐구하였다. 아들 하정철(河廷喆, 1727∼1771) 역시 부친 하영청의 곁에서 나경적이 혼천의를 제작하는 것을 지켜보았고 홍대용이 찾아왔을 때 친교를 맺을 수 있었다. 홍대용은 1765년(영조 41) 북경에 가기 전에 두 차례나 하정철에게 편지를 보내, 동복에서 일어나고 있는 과학적 성취를 지지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도 하였다. 동복의 야사리에서는 하영청, 나경적이 있었고, 거기에 더해 홍대용과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통천의(統天儀)를 만드는 특별한 경험이 남아 있었다. 이런 경험은 하정철을 거쳐 규남에게 이어졌다. 이렇듯 규남의 선조들이 대대로 실학자들과 교유하는 동안에 실학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깊어졌고 그것이 가학처럼 이어졌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규남 역시 아들들에게 “너희는 힘써 고가(故家)의 전통을 실추시키지 마라”5)라거나 “우리 가문엔 시례(詩禮)의 청전(靑氈)6) 전해왔으니”7)라 하는 데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가학을 무엇보다 강조하였다. 가학의 요소들- 가학을 유지하는 방법 자신의 경험을 통해 무엇이 필요한지 느꼈고 이를 자식들에게 전해주고자 했다. 그는 선비가 되기에 필요한 조건을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대개 명색이 유자(儒者)는 경술(經術)에 밝지 않으면 안 되고, 사학(史學)에 해박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필찰(筆札)과 사율(詞律) 따위 일은 비록 유자의 본업이 아니지만 그것도 함부로 보아서는 안 된다. 거기에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나라의 고사(故事)에 매우 어둡다면 또한 무식함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것들 하나의 일도 내 몸에 긴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선비가 이런 것을 하는 것은 반드시 행세하려고 그러한 것이 아니라 이와 같지 않으면 선비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 집안의 서적도 부디 아끼고 보호하여 유실되지 않게 하며, 임의대로 남에게 빌려주지 말거라.”8) 선비가 되기에 필요한 기량을 꼽으면서 자식들이 이를 꼭 배우도록 가르치고 있다. 즉 경술은 기본이고, 사학, 특히 우리나라의 고사, 그리고 필찰[또는 簡札]과 사율을 꼽았다. 그리고 그 바탕으로 서적의 관리를 부탁하였다. 교유를 위한 필찰과 사율 규남은 큰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현재 세상에서 실행해야 할 급한 일은 거의 다 필찰과 사율을 첫 번째로 삼고 있으니 너희 형제도 꼭 유념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지금부터 시작하되 반드시 더욱 힘쓰도록 하여라.”9) 라 하였다. 필찰은 편지이고 사율은 운을 맞추어 짓는 사와 율시를 뜻한다. 필찰과 사율에 대해서는 “비록 유자의 본업이 아니지만 그것도 함부로 보아서는 안 된다”거나 “사율과 간찰의 공부를 아울러 꼭 열심히 해야 함을 유의해야 한다. 내가 너희들에게 가르치려는 것이 바로 세간의 지엽적인 재주[行世之末技]라 가소롭고 부끄럽구나.”10) 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점은 아들에게 보낸 편지 곳곳에서 수차례에 걸쳐 강조하고 있다. 왜 이렇게 필찰과 사율에 대해 강조하였을까? 먼저 편지는 당시 소통의 수단으로는 으뜸이었다. 아니 그것밖에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규남이 필찰을 강조했던 데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는 필찰을 인문(人文)의 단서로 여겼다. 그는 평천옹(平泉翁, 李秉中의 호)이 쓴 『최근유식(最近類式)』에 붙인 서문에서 편지를 “안부를 묻는 예법”으로 전제하면서 “일이 생기면 함께 언급하여 소식을 주고받았고 크고 작은 일들을 이를 통해 처리하였다. 이는 인간사를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고 또한 인문이 발생하게 된 하나의 단서이다.”11) 라 하여 편지는 인사의 필수적인 일이고 인문의 단서이니 결코 말기(末技)로서 하찮게 여길 수 없다고 하여 그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나아가 편지는 “경전의 말과 사서(史書)의 일은 모두 옛사람이 나에게 준 편지이니, 어찌 꼭 안부를 묻고 기거를 살피는 것만 편지가 되겠는가”라 하여 편지의 의미를 폭넓게 해석하여 인문의 요체가 거기에 있음을 말하였다. 편지쓰기가 갖는 의미에 대한 인식이 독특하다. 한편, 편지는 인문이란 관점에서는 내용이 우선이겠지만, 눈에 띄는 것은 글씨였다. 그래서 “이번에 너희들의 편지에서 자획이 가늘고 약하여 걱정스러웠다”,12) 또 “너희들이 보낸 서찰은 줄곧 거칠고 졸렬한데, 글자와 조어(措語)도 너무나 서툴러서 매우 걱정이다”라 하여 자식들의 필찰의 수준이 떨어짐을 우려하면서 “너희 형제는 부디 간찰에 유념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비록 보잘것없는 일이나 세상을 살아가면서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13)라 하여 거듭 주의를 주었다. 이를 이렇게까지 강조한 것은 스스로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교유를 위한 수단은 편지로부터 시작한다. 꼭 필요한 순간에 유력인들에게 자신을 알리고 나아가 뭔가 청탁할 때 그 수단은 편지가 효율적이면서도 어쩌면 유일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사율도 교유관계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재능이었다. 당시 선비들 일상의 만남에서 시를 짓는 것은 다반사였다. 시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또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수단으로 많이 활용되었다. 규남 역시 수많은 시를 지었는데 그 대부분은 상대가 있는 시였다. 시가 소통의 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나의 졸렬한 문장과 졸렬한 필치도 도성 안에 와서 쓰다 보니 다소 부끄러운 점이 있는데, 너희들은 이처럼 거칠고 서툴러서 어찌 세상에 쓰이길 바랄 수 있겠느냐? … 지금 세상에서 과거 문자에 힘쓰지 않을 수 없으나 서간문, 시문의 격률(格律) 등의 공부와 우리나라 고사[書札詞律等事及東方故事]에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14) 라고 하는 데서 필찰과 사율, 그리고 고사에 대한 지식이 교유관계에서 매우 중요함을 증언하고 있다. 문장이나 필치는 남에게 드러나며 평가받는 단초가 되고, 시는 그 사람의 인품, 지적 수준을 겉으로 드러내 보이는 표현물이었다. 자신을 인정받기 위한 수단이었다. 형이상학적인 고담준론도 필요하겠지만, 세상살이에서 정말 필요한 것이 사율과 간찰이라 느꼈던 것이다. 만권택(萬卷宅)이라 불린 수졸헌(守拙軒)의 서적 가학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무엇보다 책이었다. 그는 책을 수집하고 이를 지키는 데 집요하게 집착하였다. 그 책들을 보관하는 도서관 역할을 했던 곳이 수졸헌이었다. 그가 「수졸헌 《장서록》에 붙인 서문」에서 “우리 집은 서적이 많기로 일찍이 남방에 알려져 고을 사람들이 ‘만권택’이라 불렀다”고 하여 많은 책을 자랑한다.15) 그 책들은 하윤구 이후 수집, 축적한 것으로 거의 집을 가득 채울 정도였다고 한다. 하윤구가 어떻게 책을 모았는지 사례를 들고 있는데 재미있다. “책 파는 사람을 만나면 아끼지 않고 사들였다. 일찍이 『주자어류(朱子語類)』를 구하지 못하였는데 마침 팔려는 사람이 있었으나 그 값을 지불할 수 없었다. 한창 봄 농사철이어서 소가 들녘에서 밭갈이를 하고 있었는데 공은 곧바로 보습을 벗겨내고 소를 주었다. 책을 빌려보기를 청하면 난색을 표하지 않았으나 책을 돌려받을 때에 반드시 편마다 고강하여 그가 부지런히 읽었는지 게으름을 피웠는지를 확인하였다.”16) 생업에 필수적인 소까지도 팔아 책을 구할 만큼 적극적이었고 책의 관리도 철저했다. 이렇게 애지중지했던 책들이 그 후 불타 겨우 두어 상자만 남았다. 다시 하영청이 온 힘을 다해 수백 권을 사들였다. 병암정사를 지어 사방의 학자들과 교유의 장소로 삼았는데, 만년에 하영청이 병암정사에 있는 모습을 그리면서 “도서가 벽에 가득하였으며” 이를 벗삼아 연구하고 사색하느라 늙어가는 줄도 몰랐다고 하였다. 다만 이 책들은 그후에 또 불타거나 자손들이 팔기도 하는 등 곡절이 많았다. 그러다가 규남 때에 와서 입는 것을 절약하고 먹는 것을 줄이고, 또 직접 베끼기도 하고 꾸미기도 하여 천여 권에 이르렀다. 그래서 “아, 이 정도라면 그래도 읽을 만하였다”라 할 정도였다.17) 이렇게 서둘러 책을 모은 뜻은 지식을 넓히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책을 축적하여 ‘만권택’이라는 호칭을 회복한다면 또한 어찌 우리 집안의 계술(繼述; 선조의 뜻을 이어받아 발전시키는 것)하는 한 가지 일이 아니겠는가”라는 데 있듯이 가학을 잇는 토대를 만드는 데 있었다. 그래서 더욱 “장부를 만들어 보관함으로써 흩어져 없어질 것에 대비”하게 하였다. 순릉(順陵) 재실에서 큰아들에게 쓴 편지를 보면, 『산학계몽(算學啓蒙)』을 친구에게 찾아온 것은 다행이라고 하면서 “부디 항상 살피고 검사해서 혹여 한 권도 낙질이 없었으면 정말 좋겠다. 그리고 경솔하게 남에게 빌려주지 않았으면 좋겠고, 늘 부모님이 불허한다는 명령을 내렸다며 남이 빌려달라면 사양하는 것이 좋겠구나”18)라고 하였다. 또 “아버지의 명령을 핑계로 결코 밖으로 내보내지 말고 흩어지거나 잃어버리지 않으면 좋겠구나”19)라 하여 거듭 당부하였다. 단 한 권의 책이라도 흩어지거나 분실될까 봐 남에게 빌려주는 것도 극구 꺼려 하였고 빌려주었으면 반드시 찾도록 하였다. 이는 빌려 간 사람의 지위가 어떠하든, 누구든 가차 없었다. 그 한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즉 동복현감을 지낸 이인원(李寅元, 1833년 6월 부임, 1837년 5월 永川郡守로 옮김)이 권상하(權尙夏)의 문집인 『수암집(遂庵集)』을 빌려 가 돌려주지 않은 채 영천으로 가버렸다. 규남은 이때 순릉직장으로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큰아들에게 편지를 보내 다음과 같이 질책하였다. “산수헌(山水軒) 권공[權震應]이 인쇄한 『수암집』은 우리 하영청 증조부에게 보내준 것이고, 증조부의 손때가 남아있는데, 너는 취하여 가져가는 것을 내버려 두었느냐? … 만약 올해 안에 돌려주지 않으면 상황을 보아 영남 밖으로 심부름꾼을 보내 기어코 찾아오는 것이 좋겠구나.”20) 아들을 사정없이 질책하면서 증조부의 손때가 묻은 『수암집』을 어떻게든 찾으려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이어서 다시 편지를 보내, “『수암집』일은 매우 놀랍고 걱정스러운데, 장차 언제 다시 보내줄지 모르겠다. 이제 이곳에서 영천 관아로 편지를 보내 돌려주기를 재촉할 것이나 새해가 되기 전에 만약 돌려주지 않으면 심부름꾼을 보내 찾아오게 할 것이다.”21) 라 하여 다시 다짐하였다. 다만 끝내 돌려받았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여기에 덧붙여 “광주에서 가져간 『주자어류(朱子語類)』는 돌려받았느냐? 그밖에 각처에서 가져간 책 또한 일일이 돌려받아야 한다”22)라 하였다. 이런 예는 편지글에 너무 자주 보인다. 그중에서도 경기전령일 때 보낸 편지에서 “집안의 서책은 유실된 것이 없느냐? 나는 한쪽에서 사들이는데 너희들은 한쪽에서 잃어버리면 어떻게 되겠는냐?”23)라고 하는 질책에 그 안타까움을 가장 잘 담아내고 있다. 사환과 유배를 마치고 마침내 집으로 돌아오며 남긴 시에 “시렁엔 여전히 책 가득하니/ 남은 생애 가난하지 않겠군”24)이라 하여 책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강학과 과거공부 규남은 경(澋), 석( “너(큰아들 경)는 장차 어디에 응시할 생각이냐? 봄철에는 사이사이 남은 시간을 틈타 부디 독서를 하고, 여름부터 공부는 반드시 많이 짓고 빨리 익히는 것이 괜찮을 것이다.”26), “너희 형제(석과 익)는 요즘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 헛되이 놀지는 않느냐?”27), “근래에 읽고 있는 책은 어떤 책이냐? 한가롭게 놀고 있는 것은 아니냐?”28) 등등 귀에 못이 박힐 만큼 반복하고 있다. 거기에는 “학조와 응손은 모두 빠른 진보가 있느냐? 조카 옥이도 함께 공부하느냐? 부디 나태하지 말라고 하여라”29)라 하여 손자와 조카도 빠지지 않았다. 왜 이렇게 자식들의 공부에 연연했는지? 그리고 그 공부의 내용은 무엇이었는지? 모두 ‘가학’과 관련되어 있어 주목할 만하다. 앞서 보았듯이 선비가 되기에 필요한 공부로 편지쓰기와 시짓기, 그리고 우리나라의 고사(故事)에 관한 내용들이 많았다. 그러나 한편 과거에 대한 이야기도 끊임없이 나온다. “과거는 어느 쪽으로 결정되든 결국에는 으레 실망하게 되는 법이라 탄식할 만하다. 다만 합격 여부는 운수에 달려있어 사람 힘으로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이후로는 결코 곡경(曲逕, 세력을 구하는 데 부정한 인연을 말한다)에 마음을 쓰지 말거라.”30) 라 하여 과거에 급급하지 말라고 위로하고 있다. 손자들에게도 “과거에 흥미가 없는 점은 깊이 탄식할 것이 못 되지만 학조와 응손이 부지런히 공부하지 않는다니 크게 근심스럽구나”31)라 하는 정도였다. 과거에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과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는 못했다. 거기에는 당연히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과거가 아무리 부정하더라도, 아무리 모순 많은 제도라 해도, 과거를 통해 관료로 진출하는 것은 가문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핵심적 변수였다. 따라서 과거 공부는 가학을 위해 피할 수 없는 과제였다. 큰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번 대정(大政)에서 초사(初仕)는 10여 자리가 되고 수령은 56자리인데 호남 사람이 낙점된 자리는 거의 없다. 오직 무관 수령 한 명뿐이더구나”32)라 하여 호남 출신이 없음을 한탄하였고, 또 “올해 정시(庭試)에 5인을 선발하였는데 모두 볼 만한 자들이 없으니 세도(世道)와 관계되지 않은 게 없구나”33)라 하여 과거의 타락도 지적하였다. 이처럼 당시 세도 때문에 호남 출신은 과거에 합격하기도 어렵고 수령과 같은 관직에 나가는 것 또한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다. 이런 현실은 규남 스스로가 평생에 걸쳐 경험한 바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선뜻 과거를 마냥 포기할 수만도 없었다. 그래서 그런 상황에서도 누군가 공부를 열심히 해 과거에 합격하여 가학을 잇고 가문을 키워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런 뜻에서 구구절절 편지마다 공부, 또 공부를 강조하였다. 물염정(勿染亭)과 적벽(赤壁)이 있는 동복 화순 동복은 서울·경기지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변방이었지만, 의외로 하윤구, 하영청, 하백원이 당대의 주류 학인들과 교유하면서 흐름을 같이 했고, 대를 이어 가학을 지켜갔다는 점이 놀랍다. 거기에는 물염정과 적벽이 있는 동복이란 장소도 한몫했다. 먼저 물염정을 보자. 규남은 “좋기도 해라 비 갠 뒤 산천경개/벼슬아치들 맑은 가을에 모여드네/속된 관리도 신선 연분이 있더니/명승지도 세상 인정을 맛보누나”34) 라는 시를 남겼는데 그 시의 제목이 「광주목사 조운명, 옥과현감 홍진연, 화순군수 서미규 승순, 창평현감 이중흠 화우, 동복현감 이혜백 원길과 함께 물염정을 유람하다가 이중흠이 시를 짓자 이를 차운하다」이었다. 물염정이 동복의 지역 선비들이 광주를 비롯해 인근 지방관들과 서로 만나는 교류와 소통의 장소였음을 알 수 있다.35) 하영청도 광주목사로 있던 이병상(李秉常)이 찾아와 함께 물염정을 유람하고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36) 물염정은 ‘화순 적벽’ 상류에 세워진 정자로 물염적벽의 건너편에 자리 잡고 있으며 무염소(無染沼)가 또 근처에 있다.37) 규남이 나무송(羅茂松, 1577~1653)의 영당(影堂) 상량문에서 “저 물염정을 돌아보니 실로 아름다움을 뽐낸 지역이네, 신묘하게 다듬어진 절벽은 두 손을 잡고 절하는 기이한 모습을 드러내고, 맑은 구슬 소리를 내며 흐르는 시냇물은 산천을 휘감아 도네, 여기는 송(宋) 금산(錦山, 宋庭筍으로 나무송·나무춘의 외조부이다)이 은거한 곳으로 비로소 선장(仙庄, 신선이 사는 별장)을 두어, 마침내 주회옹(朱晦翁)이 외손자에게 사자 그림을 전한 것처럼 택상(宅相, 집터의 풍수상으로 나무송·나무춘이 송정순의 외손자가 되었다는 말)을 이루게 하였네.”38) 라 하여 그 유래를 적었다. 즉 물염공 송정순이 관직에서 물러나 이곳 복천의 무염소 뒤에 터를 잡고 정자를 조성하였고, 이를 외손자인 나무송·나무춘 형제에게 물려주었다는 것이다. 그후 정자가 퇴락하자 나무송이 새로 옮겨 짓고 물염정이라 이름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물염정은 2004년 7월에 광주·전남 8대 정자 중 제1호로 지정되었다. 규남은 또 나무송의 영정 족자가 오랜 세월로 낡아 알아볼 수 없게 되자 그 후손의 청으로 이를 보수해주기도 하면서 물염정과의 인연을 이어갔다.39) 한편 화순적벽 그중에서 노루목적벽은 또한 지적 교류의 장소로서 독특한 역할을 하였다. 이는 『적벽삼유록(赤壁三遊錄)』40)이란 기록이 있어 잘 알 수 있다. 『적벽삼유록』은 규남과 증조 할아버지인 하영청, 4대조 할아버지인 하성구(河聖龜, 1654~1706)가 각각 중심이 되어 여러 선비들과 함께 60년 단위로 세 번에 걸쳐 적벽을 유람하며 지은 시 모음집이다. 왜 이렇게 60년 단위로 적벽 유람을 기획하고 관련 기록을 남겼을까? 이에 대하여 한 연구에서41) 그 지향하는 바를 네 가지로 정리했는데, 그중 첫째, 계지술사(繼志述事)를 통한 가문의 결속력 강화, 둘째, 세교(世交)하던 가문들 및 향촌 사족 가문들과의 유대감 강화 등을 꼽았다. 이 두 가지가 가학과 직접 관련된 지향이었다. 이중 1802년(순조 2) 세 번째 유람에서 눈에 띄는 점은 규남의 역할이었다. 그는 당시 22세 약관의 나이로 그보다 어른 격에 속하는 다른 이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임의 전면에 나서 가문을 대표하여 서문을 쓰고, 시도 5수나 남기는 등 그 역할이 두드러졌다. 이는 하씨가의 가학 전승의 임무가 일찍부터 규남에게 지워지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그래서 그가 생애 내내 가학의 전승에 그렇게 매달렸는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동복의 물염정과 적벽은 하씨가의 가학을 유지하는 매개 장소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하씨가의 가학을 지키고 키우려는 노력과 의지가 있었기에 그런 역할이 가능하였다고 볼 수 있다. 18∼19세기에 지방학인의 입지는 좁아졌지만, 그렇다고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동복 지방 하씨가의 사례를 통하여 볼 때 비록 경화학계와 차이는 있었지만 시대의 변화에 뒤떨어지지 않는 모습을 잘 보여주었다. “그러나 끝내 명(命)이 때와 함께 막혔고 불우하게 아랫자리를 전전하느라 경륜을 펼 수 없었으니, 뜻있는 선비의 한탄이 영원히 그칠 수 있겠는가”42)라는 말처럼 규남의 지역적 한계는 스스로 넘을 수 없을 만큼 뚜렷했다. 1) 「沙村居第上梁文 代仲父作」(『규남문집』 제7권), 467쪽. 『규남문집』은 2017년 4월, 규남박물관·전남대학교·호남문화사상연구원·화순군에서 간행한 번역서를 활용하였다. 2) 이하 진양 하씨가의 사정은 이종범, 「조선후기 同福 지방 晉陽 河氏家의 學問과 傳承」(『전남사학』 24, 2005.06)을 참조하였다. 3) 이하 하영청에 대한 사정은 「曾祖屛巖府君家狀」(1826)(『규남문집』 제7권, 家狀), 522∼524쪽 참조. 4) 나경적 관련 내용은 「호남학산책」 「풍경의 기억」에 게재된 필자의 「조선시대 3대 시계 제작자, 석당(石塘) 나경적」 참조. 5) 「示 6) 靑氈은 푸른 모포로, 선대로부터 전해진 귀한 유물을 가리킨다. 7) 「海上送瀷兒瀅姪」(『규남문집』 제1권, 詩), 184쪽. 8) 「寄 9) 「큰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1834년 8월),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12쪽. 10) 「寄 11) 「最近類式序」(『규남문집』 제6권, 序), 413쪽. “此人事之不得不然者 亦人文之一端也” 12) 「答三兒書」(1834년 9월),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18쪽. 13) 「奇兒書」(1836년 10월),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47쪽. 14) 「三兒同見」(1835년 4월),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29쪽. 15) 「守拙軒藏書錄序」(『규남문집』 제6권, 序), 407쪽. 16) 「曾祖屛巖府君家狀」(1826)(『규남문집』 제7권, 家狀), 522쪽. 17) 「守拙軒藏書錄序」(『규남문집』 제6권, 序), 407쪽. 18) 「寄兒書」(1837년 2월),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60쪽. 19) 「寄澋兒書」(1840년 1월),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107쪽. 20) 「寄子澋 丁酉六月」(1837년 6월),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67쪽. 21) 「寄兒書」(1837년 7월),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70쪽. 22) 위와 같음. 23) 「答三兒書」(1840년 8월),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112쪽. “吾則一邊貿得 而汝輩則一邊失之 則何如也” 24) 「還家」(『규남문집』 제1권, 詩), 194쪽. 25) 나상필, 「간찰로 본 圭南 하백원(河百源)의 仕宦期 양상 –자식에게 보낸 간찰을 중심으로-」,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145∼146쪽. 26) 「寄兒書」(1834년 12월),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22쪽. 27) 「寄 28) 「寄 29) 「答兒書」(1838년 6월),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85쪽. 30) 「寄兒書」1836년 9월),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45쪽. 31) 「寄兒書」(1839년 10월),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102쪽. 32) 「寄兒書」(1837년 12월),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76쪽. 33) 「寄兒書」(1839년 5월),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95쪽. 34) 「與光州牧 趙雲明, 玉果倅 洪晉淵, 和順倅 徐美揆承淳 昌平倅 李仲欽 和愚 及 縣候 李惠伯源吉 同遊勿染亭仲欽有詩仍次」(『규남문집』 제1권, 詩), 129쪽. 35) 이종범, 앞 글, 272쪽. 36) 「曾祖屛巖府君家狀」(1826)(『규남문집』 제7권, 家狀), 524쪽. 37)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에 따르면, 물염정은 송정순의 아버지인 宋駒가 동복현감으로 있을 때 그곳의 뛰어난 경치를 사랑하여 무염소(無染沼) 뒤에 지은 정자라고도 한다. 38) 「羅滄洲影堂上梁文」(『규남문집』 제7권), 479쪽. 39) 「書滄洲羅公影簇後」(『규남문집』, 제6권), 448쪽. 40) 『적벽삼유록』(이영숙·이태희·나상필 번역, 2018.11)은 규남박물관에서 2018 규남박물관 특별전을 개최하면서 원문과 함께 번역하여 발간하였다. 41) 이태희, 「규남(圭南) 하백원(河百源) 가문 소장 『적벽삼유록(赤壁三遊錄)』의 내용과 의의」(『코기토』 86, 2018) 참조. 42) 1943년 단오절에 鄭琦가 지은 「墓誌銘 幷序」(『규남문집』 제7권), 540쪽. 글쓴이 고석규 목포대학교 前 총장, 사학과 명예교수 | ||||
| 유교문화와 21세기 대응 2007. 2. 23. 13:56 https://blog.naver.com/kilokim/110014709484 |
유교문화와 21세기 대응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갑골학으로 박사학위을 받은 상명대학교 중어
중문학과 김경일교수가 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이색적인 책
을 출판하여 신선한 충격이 되고 있다.우리 사회의 기본사상의 뿌리인
공자의 도덕은 “사람”을 위한 도덕이 아닌 “정치”를 위한 도덕이었고,
“남성”을 위한 도덕이었고 “어른”을 위한 도덕이었고 “기득권자”를 위한
도덕이었고 심지어 “주검”을 위한 도덕이었다.
때문에 공자의 도덕을 딛고 선 유교문화는 정치적 기만과 위선, “남성
적 우월” “젊음과 창의성의 말살” 그리고 “주검 숭배가 낳은 우울함”으
로 가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이방인의 문화는 조선 왕실의 통치
이데올리기가 되어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것은 사농공
상으로 대표되는 신분사회, 토론 부재를 낳은 가부장 의식,위선을 부추
기는 군자의 논리,끼리끼리의 협잡을 부르는 혈연적 폐쇄성과 그로 인
한 분열 본질,여성 차별을 부른 남성우월의식,스승의 권위 강조로 인한
창의성 말살 교육 따위의 문제점들을 오늘날까지 지속시키고 있다.
이것들은 오늘날 우리들 삶의 공간에 필요한 투명성과 평등,번득이는 창의력,맑은 생명들과 너무도 동떨어진 것들이다. 유교의 유효기간은 이제 끝난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간단하게 유교에 대한 기본사상의 이해가 이 책을 읽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같아 여러 자료와 집안어른의 도움을 토대로 하여 정리하였다.
유교가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삼국시대(三國時代) 부터 였지만은 그것이 국가의 지도 이념으로 자리잡고 사회제도를 지배한 것은 조선의 건국으로 부터이다. 중세에 와서 유학은 주자학(朱子學), 성리학(性理學)으로 이어지는 유교경전(大學,四書三經,孟子,春秋 등)을 중심으로 성명(性命)과 이기(理氣)의 관계를 논거하면서 발전시켜온 유교철학과 이에 반대하여 지행(知行)의 합일(合一)을 주창하는 양명학(陽明學)으로 크게 나누어 진다.
특히 주자학은 1300년대 초 고려 충렬왕때 안유(安裕) 라는 학자에 의하여 도입되어 주자가례(朱子嘉禮)의 예제(禮制)를 만들어 보급한 것이 오늘날 까지 지속 되고 있는 관혼상제의 예제이다.
그 뒤에 이성계 일파의 소위 역성혁명(易性革命)이 성공하여 조선국이 탄생되면서 고려의 국교이던 불교(佛敎)가 쇠퇴하고 예법을 중히 여기는 유학이 발달하게 되었고 따라서 조선은 유교철학이 나라경영의 중심사상으로 자리잡고 이에 따라 백성(百姓)도 양반(兩班)과 상놈(常民)으로 반상(班常)의 계급으로 구별되었다.
조선시대의 양반은 일반 벼슬아치인 문반(東班이라고도함) 과 무반(西班) 그리고 사대부(士大夫)를 일러 양반이라 하고 이 반열에 속하지 못한 백성을 상민이라 구별하였다.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일단 양반이 되고나면 현직에서 물러나도 온 집안이 양반으로 행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의 지배계급이었던 양반은 과거(科擧)시험 합격자를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니 양반에 있어 과거급제야말로 사활(死活)을 결정하는 인생의 중요한 문제였다.
이들 양반계급의 서생(書生)들은 유교의 학문에 매달려 한 평생 놀고먹는 처지였으니 나라의 산업발전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할뿐만 아니라 지역과 학풍의 연고자끼리 붕당을 지어 당파싸움이 여념 없고 정적(政敵)에 대한 온갖 모함과 조정에 상소(上疏)하는 일에 열을 올리는 형국으로 치달아 파당싸움은 심각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들 유림들이 모여 나라일에 불평을 토로하고 시도때도 없이 자기들 붕당을 위한 여론을 퍼뜨려 나가는 집결 장소가 주로 서원(書院)이었다.
그래서 뒷날 대원군(大院君) 이하응은 일평생 놀고 먹는 유생들의 집결 연락장소이던 백해무익(百害無益)한 서원의 철폐령을 내려 전국에 산재해 있던 650여개의 서원 중 서원구실을 제대로 하는 47개소만 남기고 모두 문을 닫게 하였다. 이들 유생들의 시비거리에서부터 작게는 예제(禮制)에 이르기까지 이론적으로 간섭치 않는 것이 없었다. 오늘날 제사때 음식차리는 순서에 어동육서(漁東肉西)니 조율이시(棗栗梨枾)니 하는 것도 지방에 따라 통일이 되어있지 않은데 이러한 사소한 문제도 시비의 대상이었으니 가소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기나 생선이 동쪽에 있거나 서쪽을 행했거나 무엇이 큰 문제일 것인가. 비생산적인 소위 예학(禮學)의 이론에만 치우쳐 갑론을박(甲論乙駁)하면서 자신은 땀흘려 일하기를 싫어하고 아랫것들만 시켜먹고 도포자락을 휘날리고 다녔으니 이런 양반근성으로는 절대로 사회와 나라가 발전할 수 없다.
대체로 양반은 활동하지 않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말엽에 미국공사들이 체력단련을 위하여 운동장에서 정구(庭球)놀이를 하고 있는 광경을 본 우리 조선의 대신들이 여름철에 땀을 흘리면서 뜀박질를 하고 있는 미국공사를 보고 한다는 말씀이 [대감께서 땀흘리며 뛸 것이 아니라 저 아랫것들에게 시켜놓고 구경이나 하시지요]라고 했다니 이것이 양반들의 사고방식이었던 것이다.
이와같은 사고방식(思考方式)이 다 유교문화에서 전래된 그릇된 교육방식이다.
그러나 조선의 주자학을 비판하는 지식인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정약용,홍대용,하백원 등으로 대표되는 실학파(實學派)들은 학문의 유용성(有用性)과 실용성(實用性)을 강조했다. 목민심서(牧民心書)로 대표되는 다산(茶山)선생의 사상은 나라의 발전을 유교의 경전을 암기하여 과거에 사활을 건 생활태도보다 백성을 편히 다스리는 목민의 정신에 그 가치를 두고 아는 것을 솔선수범하는 실학(實學)에 치중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지행(知行)일치의 생활태도를 본 보였다.
한편 호남지방의 삼대실학자의 한 사람인 규남(圭南) 하백원(河百源)선생은 조선의 지도를 위도와 경도를 참조하여 근대화시키고 백성들의 농사기구를 개발 보급하여 실용화 시키는 등 농업발전에 많은 업적을 남긴 지행(知行)의 일생을 보낸 사람으로 유명하다. 이들 실학파 실학자들의 간곡한 학풍쇄신 주장이 크게 대두되었으나 뿌리깊이 박힌 양반사상 때문에 정책에 반영되지 못한 것이 유감스러운 일이다.
오늘날 일본이 우리보다 앞서 있는 것은 우리가 유학에 있어 주자학풍을 받아들여 예의와 체면을 소중히 여기는 생활을 해오는 동안 일본은 양명학풍을 받아들여 실학에 힘쓰고 배우고 아는 지식을 그대로 실천하는 습성을 길러왔을뿐 아니라 일본은 계속 서구문화를 수입하여 실생활에 적용해 나가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장인(匠人)정신을 바탕에 갖고 모든 분야의 기술을 개발해 온 것이 오늘 일본발전의 근본 바탕이 되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우리는 양반근성과 체면의식 때문에 장인정신이 쌓이지 못한 것이 산업 및 문화창달에 있어 일본에 뒤진 원인이라 할 수 있다. 그 한 예가 우리의 고전인 불후의 명작 춘향전을 지은 작자의 이름이 전해지지 못한 점을 들 수 있다. 소위 잡문화에 속하는 소설 따위를 작품화 한다는 것은 양반의 체면상 있을 수 없다는 사고가 조선팔도에 팽배되어 있었던 유교사상 때문이었다.
배우고 알면 그대로 실천하는 지행(知行)일치의 지혜로운 생활방식을 실천해 나감으로써 국가발전에 이바지하는것이다. 유교의 종주국인 중국과 양명학을 받아들인 일본은 이론(理論)에만 치우친 유학을 버린지 오래 되었다. 다만 이론과 실천을 병행하는 실학(實學)이 남아 있을 뿐이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내용중 마지막 구절(인간중심이란 뭘까? 아리송……)
[서양이 동양을 압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한 물질적 힘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을 사랑하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하겠다는 휴머니즘과 합리주의적인 정신 때문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동양의 지성인들이 서구의 정신들을 만나면서 미련없이 유교를 내던질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농촌공사 경영전략본부 ERP추진단 표준화팀장 김홍근
(자문: 前 진주하씨 대종회 회장 고 하재규)
[출처] 유교문화와 21세기 대응|작성자 당근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