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신라 말엽, 여름 안거를 마치고
10여 명의 제자들과 함께 만해길에 오른 혜린선사는
험한 산중에서 하룻밤 노숙하게 됐다.
『스님, 아무래도 심상치 않습니다.』
『무슨 일이냐?』
『나라 안에 번지고 있는 괴질이 이 산중까지 옮겨졌는지
일행 중 두 스님의 몸이 불덩이 같사옵니다.』
『날이 밝는 대로 약초를 찾아볼 것이니
너무 상심치 말고 기도하며 잘 간병토록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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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혜린선사는 약초를 뜯어 응급처치를 취했으나
효험은커녕 환자가 하나 둘 더 늘어나 털썩털썩 풀 섶에 주저 않았다.
『모두들 내 말을 명심해서 듣거라.』
아무래도 예사롭지 않은 질병임을 느낀 혜린스님은
엄숙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우리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서원한 출가 사문임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무릇 출가 사문은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극기력이 있어야 하거늘
이만한 병고쯤 감당치 못하고서야 어찌 훗날 중생을 제도하겠느냐.
오늘부터 병마를 물리치기 위해 정진에 들것이니 전원이 한마음으로 기도토록 해라.
필시 부처님의 가피가 있을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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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로써 병마를 이겨야 한다고 생각한 혜린선사는
적당한 기도 처를 찾기 위해 주변을 살폈다.
『아니 이럴 수가….』
스님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바로 가까운 곳에 연잎이 무성한 연못이 있는가 하면
못 가운데 문수보살 석상이 우뚝 서 계시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뜻밖의 발견에 스님은 기뻤다.
『문수보살님께서 우리를 구하러 오셨구나.』
문수보살을 향해 정좌한 일행은 기도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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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기도를 마치던 날 밤,
『이제 모든 시련이 다 끝났으니 안심해라.
그리고 이 길로 새 절터를 찾아 절을 세우고 중생 구제의 서원을 실천토록 해라.』
비몽사몽간에 부처님을 친견한 혜린선사는
감격 또 감격하여 절을 하다 눈을 떠보니 부처님은 간 곳이 없었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핀 혜린스님은 또 놀랐다.
『스님! 저희 모두 질병이 완쾌됐습니다.
스님의 기도가 극진하여 부처님의 영험이 있으셨나 봅니다.』
다 죽어가던 제자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환호하는 광경을 본 혜린대사는
다시 눈을 감고 앞에 의연히 서 계신 문수보살님께 감사했다.
『저희들을 사경에서 구해주신 문수보살님, 참으로 감사하옵니다.
보살님의 거룩하신 자비심으로 저희들의 앞길을 인도하여 주옵소서.』
기도를 마치고 눈을 뜬 혜린스님은
마치 꿈을 꾸는 듯 어안이 벙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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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오셨는지 노스님 한 분이 미소를 지으며
스님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헛것을 보고 있나?
아니면 문수보살 석상이 생불(生佛)』로 화현하셨나?
혜란스님은 못 가운데로 눈을 돌렸다.
분명 그곳엔 문수보살님이 서 계셨다.
잠시 마음을 가다듬은 스님은
정중히 합장 배례한 뒤 노스님에게 물었다.
『어디서 오신 스님이신지요?』
『소승은 석가 세존께서 스님에게 전하라는
귀중한 선물을 가지고 왔으니 너무 놀라지 마시오.』
노스님은 붉은 가사 한 벌과 향내음 그윽한 발우,
그리고 세존 진골의 일부분인 불사리를 건네주었다.
혜린대사는 감격하였다.
『이런 불보를 감히 소승이 받을 수 있겠습니까?』
『사양 말고 수지하십시오.
그리고 대사! 소승이 전하는 말을 꼭 명심하여 실천토록 하시오.』
『예, 명심하겠습니다.』
『제자들을 데라고 전라도 남쪽 땅으로 가시오.
그곳에 가면 송광산이 있는데 거기가 바로 이 불보를 모시고
불법을 전할 성지입니다.
이는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니
대사께서 어서 가서 절을 세우고 중생교화의 원력을 실천하시오.
그것만이 부처님의 가피에 보답하는 길입니다.』
노승을 통해 부처님의 부촉을 받은 혜린대사는
너무 기뻐 눈물을 흘리며 삼배를 올렸다.
절을 마치고 보니
노스님은 간 곳이 없었다.
☆☆☆
혜린대사 일행은 전라도로 발길을 옮겼다.
여러 날이 지나 지금의 승주군 송광면 마을 어귀에 다다랐을 때
일행은 백발이 성성한 촌로를 만났다.
노인은 반색을 하며 정중하게 합장 배례를 한 후 궁금한 듯 물었다.
『무슨 일로 이 마을에 오셨는지요?』
『예, 송광산이 영산이라기에 절을 세우려고 찾아왔습니다.』
『참으로 잘 오셨습니다.
옛부터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장차 이 산에서 18공이 출현,
불법을 널리 홍포할 것이라 하여
18공을 의미하는 「송」자에
불법을 널리 편다는 「광」자를 더하여 「송광산」이라 불렀다 합니다.』
그래서인지 마을 사람들은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이 산에서 성인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답니다.
☆☆☆
이때였다.
송광산 기슭에 오색 무지개 같은 영롱한 서기가 피어올랐다.
『오! 저기로구나.』
맑은 계곡울 따라 서기가 피어오른 곳으로 향하던 혜린선사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석장을 꽂았다.
그날부터 절 짓는 일이 시작되었다.
나무를 베어내고 잡초를 거두고 터를 닦으니
고을에서 뿐 아니라 먼 곳에서까지 사람들이
구금처럼 몰려와 속히 성인이 출현하길 기원하면서 불사에 동참했다.
절이 완성되어 진골 불사리를 모시던 날 밤,
절 안에서 교룡이 나는 듯 상서로운 기운이 가득했다.
선사는 절 이름을 길상사라 칭하니
이 절이 바로 16국사를 배출하고 선풍을 진작시킨 조계총림 송광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