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역사소설 태종 이방원 11
군인과 선비의 만남
역사에 첫 삽을 뜨다
소외계층도 더불어 살아야 할 백성이다
나주 회진현에서 귀양살이하던 정도전은 부곡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기층민들의 참상을 직접 목격했다.
백정, 유배자, 천출, 도망자 등 이 땅의 소외받은 사람들이 농사지을 땅 한 평 없는 농부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모습은 비참했다.
목숨이 붙어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경이로웠다.
그들을 바라보는 정도전은 개경에서 관직에 봉직하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이 무렵, 정도전이 농부와 대화하는 형식으로 남긴 그의 현실비판적인 글이 전해져 온다.
농부라는 화자를 내세워 문답형식으로 서술하고 있지만 망국병을 앓고 있는 고려를 바라보는 정도전의
시각이다.
국가의 안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사리사욕에 혈안이 되어있는 관료 집단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答田父/鄭道傳
寓舍卑側隘陋 心志鬱陶 一日出遊於野 見一田父 厖眉皓首 泥塗霑背 手鋤而耘 予立其側曰 父勞矣 田父久而後視之 置鋤田中 行原以上 兩手據膝而坐 頤予而進之 予以其老也 趨進拱立 田父問曰 子何如人也 子之服雖敝 長裾博袖 行止徐徐 其儒者歟 手足不胼胝 豐頰皤腹 其朝士歟 何故至於斯 吾老人 生於此老於此 이하생략 <三峰集卷之四>
농부에게 답함/정도전
우거(寓居)하는 가옥이 비스듬히 넘어갈 듯 하면서 비좁고 누추한데 마음마저 울적하여 하루는 바람을 쐬러
들판에 나갔다가 농부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희끗희끗한 눈썹에 호호백발을 지닌 늙은이로서 등에다 진흙을 잔뜩 묻힌 채 호미를 쥐고 김을 매고
있었다. 내가 그의 옆에 서서,
"어르신, 수고가 많으십니다"하고 말을 붙이자, 그는 한참 뒤에 나를 바라보더니 밭 가운데에 호미를
놓아두고 언덕배기로 올라가서 두 손을 무릎에 얹고 앉은 다음 턱짓으로 나를 불러 가까이 오게 하였다.
"그대는 어떤 사람인가? 그대의 옷은 비록 해어졌으나 긴 도포자락과 넓은 소매차림에 거동하는 품이
점잖으니, 아마도 유자(儒者)인 듯하다. 게다가 손발에는 못이 박히지 않았으며 뺨이 통통하고 배가
불룩하니, 아마도 조정의 벼슬아치인 듯하다. 무슨 연유로 여기에 왔는가? 조정의 벼슬아치로 죄를 입어
유배를 당한 사람이 아니면 오지 않는 고장이다. 그대는 혹시 죄를 뒤집어쓴 자가 아니겠는가?"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니,
"무슨 죄인가? 아마도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 끝없이 탐욕을 부림으로써 죄를 얻은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면 권력자에게 다가가고 세력가에게 빌붙어서 그들의 행차에 졸졸 따라다니다가 남은 술과 찌꺼기
안주를 얻어먹고 굽실거리는 태도로 아첨 떨다가 하루아침에 실세(失勢)하여 마침내 죄를 얻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였더니,
"정도(正道)가 아닌 방법으로 교제를 맺어서 작록과 직위를 낚아챈 다음, 국가의 안위와 백성들의 화복과
시정(時政)의 득실과 풍속의 선악(善惡) 따위를 까마득히 마음에 두지 않다가 공론(公論)이 물 끓듯이 일어나고 천도(天道)가 두드러지게 밝아져서 결국 속임수가 바닥나고 죄악이 드러나게 됨으로써 이곳에 이르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또 말하기를,
"그렇다면 그대의 죄를 내가 알겠다. 역량이 모자라는 것을 헤아리지 못한 채 큰소리치기를 좋아하고
시기가 적합하지 못한 것을 알지 못한 채 바른말하기를 좋아하는가 하면, 요즘 세상에 태어나서 고대의
문물을 사모하고 낮은 지위에 있으면서 윗사람의 뜻을 거슬렀을 터이니, 이것이 아마도 죄를 입은
연유일 것이다."<삼봉집, 4권>
원시적이나마 백성에 바탕을 둔 정치철학
정도전이 나주에서의 귀양살이는 그가 훗날 펴려했던, 민본(民本)을 추구하는 신권정치에 큰 자양분이 되었다.
한낱 무지렁이로 여겨지던 시골의 촌부도 세상을 보는 눈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요순시대를 논하기 전에 참다운 정치는 백성(民)의 소리로부터 나오고 백성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정도전의 꿈이 다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조선조 초기 그가 열정적으로 추진했던 왕도 정치는 왕권이 조금
내려오고 민권이 조금 끌어올려지는 원시적이나마 삼권의 정치철학이다.
그 균형자 역할을 신권이 담당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정치 이념이었다.
이것이 왕도정치의 근저를 이루는 민본의 요체다.
정도전은 2년간의 유배가 풀리자 몸과 마음을 추스르기 위하여 고향으로 향했다.
4년간 영주에 머무르면서 후학 양성에 힘썼다. 개경으로 진출하려 했으나 그의 출입이 여의치 않았다.
그는 반체제분자로 낙인찍혀 개경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다.
개경에서 가까운 한양 삼각산 아래 삼봉재(三峰齋)를 마련하고 후학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 때 삼각산을 바라보며 정도전 스스로 지은 호가 삼봉(三峰)이다.
허나 이것도 잠시, 땅 주인이 터를 비워달라는 요구 때문에 부평으로 이주했다.
부평에서도 토지주의 강압에 못 이겨 김포로 옮겼다.
권문세족과 그들을 추종하는 자들은 강과 산을 경계로 땅을 가지고 있는 세상에서 땅 한 평 없는 설움을
톡톡히 당한 것이다.
이렇게 8년간을 유랑하던 정도전이 이성계를 찾아간 것이다.
정도전이 바라보는 고려 왕조는 절체절명의 중환자였다.
시급히 수술하지 않으면 쓰러질 것 같은 바람 앞에 등불이었다.
때가 늦었지만 수술을 시도해보고 회생불가능하다는 판단이 설 때는 <맹자>가 이른 대로 큰 칼이
필요하다고 정도전은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칼이 없었다.
중환자를 수술하려면 붓으로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정도전은 절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칼을 찾아 간 것이다. 작은 칼도 필요했지만 유사시에 사용할 수 있는 큰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찾아간 것이다. 수술하다 아차 실수하면 칼을 쥔 사람이 다칠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찾아간 것이 노련한 칼잡이 이성계였다.
여장부의 가슴에 불을 지피다
정도전이 함주 막사를 찾았을 때, 이성계의 제2부인 강씨는 연년생 두 아들을 기르고 있는 평범한 아낙이었다.
준수한 선비가 동북면 외진 곳까지 찾아온다는 것은 의외라 생각됐다.
강씨와 정도전은 첫 만남이었다.
지아비 이성계와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전이 참 멋있고 잘생겼다고 생각했다.
이성계 곁에서 정도전의 논리정연한 시국론을 듣는 순간 강씨는 가슴이 뛰었다.
잠자고 있던 야망이 꿈틀거렸다.
빨라지는 엄마의 심장 박동 소리에 품에 안겨있던 아기가 잠을 깼다.
강씨의 품에 안겨 있던 한 살 배기 갓난아기가 훗날 정도전이 용상에 밀어 올리려다 자신과 함께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한 방석이다.
군인과 선비. 이들의 만남은 고와 보이지 않았지만 두 사람에게는 의미 있는 만남이었다.
서로의 의중을 파악했고 공통분모를 찾은 것이다.
붓을 가졌던 사람이 붓을 잠시 내려놓고, 칼을 쥐었던 사람이 칼을 잠시 내려놓고 두 손을 맞잡으며
삽을 잡은 것이다.
장장 9년간의 역사적인 대역사(大役事) '조선건국사업'의 첫 삽을 뜬 것이다.
정도전이 함주 군영을 나서면서 이성계에게 나직이 말했다.
"美哉此軍, 何事不可濟?"
"훌륭합니다.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
<태조실록>
첫댓글 잘읽어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