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라디아서의 그리스도의 法(6:2) Ⅰ. 갈라디아서 개관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신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 해방시켜 주신 그 자유 안에(갈 5:1), 율법에서의 자유 안에, 그리고 죄와 죽음과 특히 자아로부터의 자유 안에(롬 6:7-11, 14; 7:24-8:2) 굳건히 서 살도록 한다. 그렇지만 자유의 완전한 향유는 종말에 가서야 가능하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릴 영광스런 자유"를 기다린다(롬 8:21). 따라서 종말이 오기까지 "그리스도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자유인"(고전 7:22)으로서, "그리스도의 법 아래"( , 고전 9:21)있는 자로서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법은 사랑의 법이다. 이 사랑의 법은 "서로의 짐을 지는 것"(갈 6:2)으로서 兄弟的 矯正을 논하는 의미이다. 로마서 13:8-10에서 바울 사도는 보다 명시적으로 십계명 중 5, 6, 7, 8 계명을 반복하고 그 계명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이웃 사람을 여러분 자신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사랑이 율법을 완성한다."라고 결론을 짓는다. 이 법은 물론 "성령의 법"이다. 1. 受信者 성경 본문에는 최초의 독자들이 '갈라디아의 여러 교회들'( : 갈 1:2) 또는 '갈라디아인들'( 3:1)이라고 되어 있다. 이 서신이 '여러 교회들'에게 보내진 바울의 유일한 서신다. 이러한 내용으로 말미암아 본서의 수신처가 북쪽 갈라디아 설과 남쪽 갈라디아 설로 나누어진다. 갈라디아라는 명칭과 위치는 바울 당시에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첫째 민족적 의미에서 갈라디아는 소아시아의 북부, 즉 앙키라(Ancyra)와 페시너스(Pessinus), 타비움(Tavium) 등을 중심으로 정착한 고울족(켈트족)의 거주지를 가리킨다. 둘째, 행정적으로는 그러나 갈라디아서를 받은 교회들은 전혀 본래적인 갈라디아 지방에 위치하지 않았다. 갈라디아는 오늘날 앙카라(Ankara)로서, 그 당시에는 앙카라 주위에 있는 소아시아 켈트인들의 주거지역이었다. 갈라디아라는 명칭의 기원은 유럽 켈트(Celts)족속인 고울(Gauls)족이 소아시아 중부지역으로 대거 이동하여 정착하게 되자, 이 고울인들이 헬라어로 '갈라타이'( )라고 표기한데서 유래되었다. 편지를 받은 곳은 갈라디아 지방의 남쪽에 있는 교회들이 중심이다. 그 교회들의 설립은 사도행전 13-14장에 언급되고 있다. 그곳의 도시들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사는 곳은 아니었지만, 일반적 견해로는 남부 갈라디아설 또는 지리적(영토적) 가설에 학자들은 대개 찬성하고 있다. 사도 바울이 첫 번째 선교여행을 하는 동안 이 교회들을 세웠을 것이며, 두 번째 선교 여행시에 그들을 재차 방문하였을 것이다. 사도행전 13장-14장에서 발견되는 명칭으로서 로마령 南갈라디아(Galatian)의 여러 지역, 즉 안디옥(Antioch), 이고니온(Iconium), 루스드라(Lystra), 더베(Derbe, Lycaonia) 등에 있는 교회들에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행정적(정치적)으로는 같은 총독관구에 속해 있었다.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갈라디아 교회들의 지역에 관한 논쟁을 더 이상 알려지지 않은 장소에서 찾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2. 年代 갈라디아서는 사도 바울이 처음으로 영감을 받아서 쓴 저술이다. 바울은 그의 제1차 전도 여행(행13장-14장) 이후와 예루살렘 총회(행 15장) 이전에 갈라디아서를 기록했다. 예루살렘 총회가 A.D. 49년에 열렸으니까 A.D. 48년이 이 서신의 기록 연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3. 背景 갈라디아 지방의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개종 이후 처음으로 겪었던 반대는 그들 사이에 살고 있던 유대인 불신자로부터 받았던 박해였다(행 13:45-50, 14:21-23). 바울은 제1차 여행에서 갈라디아를 떠난 후 곧 유대인들이 와서 새 개종자들에게 그들은 아직 완전한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이라고 말했다(갈 1:6-7). 유대인들의 오랜 전통인 율법의 신봉은 그리 쉽게 고쳐지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바울의 가르침을 그들은 받아들이기에 난관을 겪은 것이다. 바울이 1차 선교여행에서 갈라디아를 떠난 후 곧 유대교도들이 와서 새 개종자들에게 그들은 아직 완전한 복음을 듣지 못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 煽動者들의 말에 의하면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오지만, 그 위에 유대인의 의식, 즉 예를 들어 할례의식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다시 말하여 갈라디아의 이방 개종자들이 완전히 유대인처럼 되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하였다. 바울 당시에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교리가 왜 많은 유대인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는가에 대해서 '2000년간의 유대인의 전통이 그들의 뼈 속까지 사무쳐 있기 때문'이다. 4. 目的 바울이 이 서신을 쓴 중요한 목적은 다음과 같다. 1) 새 개종자들이 신앙을 해치고 있던 유대인들의 가르침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밝히고자. 2) 이 유대인들 때문에 의심받았던 바울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 함. 3) 구원은 믿음에 율법을 더함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오직 믿음을 통해서 온다. 4)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가 가져다 준 자유(갈 5:1) 안에서 살고,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갈 5:22-23) 권하기 위한 것임. 5. 特徵 사도회의는 갈라디아의 위기의 배경을 형성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의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의 상황이다. 공식대표자들은 사과하였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무리 속에는 사도회의 전이나 사도회의 후에도 여러 가지 흐름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갈2:4). 단호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모든 사람들을 위한 구원의 조건으로 율법준수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개별적인 논거나 선동방법, 그리고 청중의 동향에 대해서는 전승되고 있지 않다. 다만 구약성서가 성서로 인정된다면, 예수의 아버지가 구약성서의 하나님과 동일시된다면, 그토록 중요한 내용이 무효라고 할 수 있는 권한이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의 한계는 어느 정도인가? 심지어 도덕률도 폐기되어야 하는가? 그렇게 함으로써 생활태도의 원칙이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가? 바울의 가르침의 결과는 벌거벗은 부도덕, 즉 자유방종주의인가? 이 서신의 두드러진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많은 대조: 바울 사도의 다른 어떤 서신보다 더 많은 대조를 하고 있다. 2) 강력한 어조: 바울 사도는 선동자들의 파괴적인 행위에 대하여 정당한 격론을 펼쳤다. 제1장에서 그는 두 번이나 "저주를 받을 지어다"(갈 1:8, 9)라고 쓰고 있다. 갈라디아서는 靈的인 다이나마이트여서 그것을 폭발시키지 않고서는 다루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이 서신의 저자는 일찍이 날카로운 마음을 가진 사람, 통렬한 논쟁가, 두려움을 모르는 靈的使徒, 그의 생애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숨겨진 사람 등으로 묘사되었다. 3)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믿음과 행위 사이의 분명한 구별: 이 서신은 하나님께서 루터와 웨슬리 같은 사람들을 영적으로 일깨우는 데 쓰여졌다. 루터는 갈라디아서와 약혼했다고 하였으며, 이 갈라디아서는 나의 아내라고 하였다. 4)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전형적인 논법: 이 서신은 일찍이 영적 해방의 대헌장이라고 하였다. 5) 인사말이 없다: 위급한 상황에서 쓰여진 서신이라 축하나 칭찬이 없다. Ⅱ. 갈 6: 2-5의 주해 1. 본문 (1) 개역: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 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니라 (2) NASV: 2 Bear one another's burdens, and thus fulfill the law of Christ. 3 For if anyone thinks he is something when he is nothing, he deceives himself. 4 But let each one examine his own work, and then he will have [reason for] boasting in regard to himself alone, and not in regard to another. 5 For each one shall bear his own load. (3) KJV: 2 Bear ye one another's burdens, and so fulfil the law of Christ. 3 For if a man think himself to be something, when he is nothing, he deceiveth himself. 4 But let every man prove his own work, and then shall he have rejoicing in himself alone, and not in another. 5 For every man shall bear his own burden. 2. 本文 註解 (1)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라"(갈 6: 2; 6: 5) 본문에서는 2절과 5절을 서로 대조하기 위하여 중간의 말씀을 생략하였다. 2절은 자신이 마땅히 지어야 할 짐 외에도 형제의 짐을 질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법은 모세의 법보다 우세하며(요 7:23), "하나님의 법"(롬 7:22-25)을 능가한다. 그리스도의 법은 사랑의 법이며(요 15:12), 다른 사람이 진 짐을 도와주는 것도 그 일부이다. 지금까지 가장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죄의 짐을 진 분이며(사 53:3-10), 그분은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마 11:30)고 말씀하셨다. 2절에서의 '짐'( )을 지는 용법으로서의 "바스타제테"( , '지다','짊어지다')와 갈라디아 5장 10절에서의 용법은 다르다. 5:10에서는 그 단어가 首位의 유대주의자에게 사용되었다. 이 때는 무거운 심판을 받는(bear, 의무적 부담) 용법임에 반하여, 2절에서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데 사용된다. 본문의 전후를 살펴서 판단할 때, 2절의 짐은 범죄자의 죄와 거기에 따르는 고통일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거기에 국한될 이유는 없다. 그것을 포함하여 이웃의 고통을 나누어지어야 한다. 따라서 이 때의 짐은 좋은 짐, 책임과 배려의 짐을 지을 때의 바스타제테( )의 용법이다. 또한 바스테제의 용법이 5절에서 "포르티온"( , burden)과 함께 사용될 때는, 그 의미가 좀더 가볍고 짐꾼이나 행상인들처럼 '짐 꾸러미를 짊어지다'는 것과 좀더 비슷해진다. (2) 그리스도의 법( , The Law of Christ) 그리스도의 법은 그의 사랑의 계명이다(요 13:34). 그것은 율법적 개념에서가 아니라 그의 창조적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생활의 원칙이다. 여기의 '法'( , Law)이라는 낱말에는 풍자적인 뜻이 있다. 즉 이전에는 모세의 율법이라는 짐을 졌으나 이제는 그 짐을 벗고 그 대신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이라는 짐을 지라는 뜻이다. 이 구절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법과 모세의 법을 가장 극명하게 대조시킨 대목이다. 노모스( , Law, 律法)는 바울과 그의 대적자들이 아주 직접적 관심을 가지는 유대인의 토라(Torah)이다. 히브리어의 토라와 희랍어의 노모스는 영어의 Law(법) 보다 훨씬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토라는 하나의 교훈(instruction)을 의미하고 노모스는 관습적인 법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의미를 갖는다. 바울이 사용한 법이라는 말은 명령어로서의 성격이 다분하다. 그리고 이 말은 당시 갈라디아 사람들의 독특한 문제의 상황에 있어서 사용된 것이 아니었다면, 그가 그것을 그렇게 무뚝뚝하게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 바울이 여기서하고 있는 것은 주님께서 요한 복음서 13: 34에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라고 하신 것 이상은 없다. (3)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 "아무 것도 아니면서(nothing) 무엇이라(something) 생각하면" 이라는 의미이다. 참으로 된 사람은 자신을 되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되지 못한 사람은 된 줄로 생각하는 법이다. 자신을 무엇인 것처럼 생각하고 범죄한 자를 억압하고(짐 진자를 억압하고) 그 고통을 더해 주는 사람은 되지 못한 사람이요, 스스로를 속이는 자이다. 도케이( , 보이다)는 온( , 실제로 이다)과 그리고 티스( , 어떤 사람)는 메덴( , 아무 것도 아닌)과 대조되는 대목이다. 별것 아닌 사람일지라도 바울 사도께서는 그 사람의 영적 빈곤을 채워주기 위한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속임이니라"( ) 이 말은 신약성서에는 유일하게 사용된 말이다. 뿐만 아니라 70인 역이나 고전어에서도 나오지 않는 단어로서 바울 사도가 만들어 낸 말로 추측된다. 다만 같은 어원의 명사형으로서 프레나파테스( , 속이는자)가 디도서 1:10에 나온다. 마음을( ), 속이다( ), 생각하면( , 보이다)이라는 말을 연관시키면, 주관적인 속임을 뜻하는 말이 된다. 바울 사도가 여기서 이 말을 택한 것은 그런 자는 소위 너무 똑똑하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그는 비록 다른 사람은 속이지 않았지만, 자기 자신을 속이는데 성공한 것이다. (4) 자기 일을 살피라... 자랑할 것이 자기에만 있고(... ... ...) 본 절과 다음절에는 앞선 절들과 모순되는 말들이 있다. 남의 짐을 지는 것과 자기의 일을 살피는 것, 되지 못하면서 된 줄로 생각지 말라는 말과 자기에게 자랑할 것이 있다는 말, 짐을 서로 지라는 것과 각각의 짐을 지라는 것 등이다. 그러나 문자적으로는 대립이 되고 모순되는 듯이 보이면서도 신앙생활의 체험에서는 조화가 되고 일치되는 일들이다. 逆說을 피하면 眞理를 구하지 못한다. 바울이 각 사람이 그 자신의 에르곤( , 업적)을 살펴보도록( )한 것은 製鍊所에서 純金을 골라내는 것을 뜻한다(벧전 1:7). 거기에서 참과 거짓을 구별해내는 것이다. 후반부의 카우케마( , 자랑하다)는 바울의 용어로서 그의 서신에 35회나 사용되고(바울 이외에 야고보에서 단 2회 사용됨), 기쁨을 동반하는 자랑이고 큰 말로 승리적인 자랑인 것이다. 남을 평하고 남과 비교하여 얕은 교만에 잠기는 상대적 자랑이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고 살피는 중에 얻어지는 내심의 자랑이며, 절대적인 자랑이다(cf. 고후 12:9-19). 바울이 의미하는 카우케마는 다가오는 그리스도의 날(V-DAY)에 각자는 스스로 대답을 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각자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이와 같이 주님 앞에서 개인의 책임의 이러한 선언과 본문의 제2절에서 짐( , 무거운 짐)을 지라는 권면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 3. 그리스도의 법과 짐의 관계 본문에 제시되어 있는 내용은 그리스도인의 보편적인 생활상의 윤리적 원리이다. 우리는 모두가 짐을 지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짐을 홀로 지고 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전제가 이 명령에 선행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이를 홀로 지려고 한다. 그들은 자신의 짐으로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않는 것을 堅忍의 禮로 여긴다. 실제 그러한 견인은 장한 일이다. 그러나 성서의 가르침은 서로 돕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따라서 그것은 基督敎 倫理가 아니라 차라리 禁慾主義的이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우리에게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그리하면 너를 붙드시리라"(시 55:22) 및 수고하고 짐 진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안식을 주시겠다고 하신 주 예수님의 약속(마 11:28)을 상기시킨다. 그러면서 그들은 우리에게 고유하게 예정된 거룩한 負擔者(burden bearer)가 있으며,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인간적 도움을 구하는 것은 연약한 증거라고 論斷한다. 이것 역시 심각한 오류이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와 짐을 지실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십자가의 구속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다른 짐들, 즉 근심, 걱정, 의심, 유혹 등의 경우는 달리 취급되어야 한다. 우리의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길 수 있음은 그가 우리를 권고하시기 때문이다(벧전 5:7). 그러나 그가 우리의 짐을 담당하는 가운데 하나는 인간의 유대를 통하는 것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서로 짐을 져주는 인간적 유대관계는 성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의 짐을 홀로 지려고 할 것이 아니라 다른 그리스도 안의 친구로 하여금 그것을 우리와 더불어 나누어지게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서로 짐을 서로 져 줌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수가 있는 것이다. 본문의 구절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짐'과 '법'의 연관을 음미해 보면, 바울 사도가 암시적으로 유대주의자들을 경계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신약성서 안에서 몇 가지 율법의 요구들은 분명히 짐으로 비유되었다(눅 11:46, 행 15:10, 28). 그런데 유대주의자들은 하나님께 용납되기 위해서 준행 해야 하는 율법이라는 짐을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부과하려고 하였다. 바울 사도는 결과적으로 그들을 향해 다른 사람들에게 율법의 짐을 지우려하지 말고 오히려 어려운 짐을 서로 져줌으로써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말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법은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주신 새로운 계명(요 13:34, 15:12)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이미 갈라디아 5:14에서 언급하였듯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우리가 율법을 성취하는 길이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과 '서로 다른 사람의 짐을 지라'는 말과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같은 내용의 서로 다른 표현일 뿐이다. Ⅲ. 본문의 논리적 분석 "서로 남의 무거운 짐을 져줍시다. 그리하면 그리스도의 법을 이룰 것입니다"(갈 6:2). 서로 사랑하라는 사도의 말씀은 가장 중요한 사랑 실천의 구절이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내 몸을 불 속에 던져서 비록 남을 도와주었다 할지라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다만 어떤 의무감에 의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남의 짐을 지어 주라"라는 指示語는 世俗的 法律 條項에서 前提部(또는 條件部)라고 한다. 다음 "그리하면 그리스도의 법을 이룬다"라고 하는 후반부는 結果部라고 한다. 이것은 일정한 조건이 만족하게 되었을 때, 일정한 결과를 歸屬시킬 수 있다는 논리이다. 따라서 결과부는 전제부를 전제하여야 하고 또한 전제부는 결과부를 선행시켜야 한다. 좀 더 논리적인 표현을 부가한다면, 自然法則이란 A가 있으면 B가 '있다'(is)라고 하는 취지의 언명인데 반하여, 道德律이나 法律에서의 行爲의 準則은 A가 있으면 B가 '있어야 한다'(ought to)고 하는 논리이다. 이것은 存在(is)와 當爲(ought to)와의 相違, 因果性과 規範性과의 相違이다. 어떤 型의 인간행동을 명하는 일반적인 규범을 전제한다면 그 전제한 규범에 적합한 것은 정당한 것으로, 적합하지 않은 것은 부당한 것으로 특징 지울 수 있다. 이러한 언명을 우리는 價値判斷이라고 하며 이 규범이 일반적인 규범임을 전제 할 경우에는 객관적 의미에서의 가치이다. 가치란 평가되는 대상에 고유한 것이 아니라 전제된 규범에 대해서 그 대상이 갖는 관계인 것이다. 가치는 자연의 사실에서 연역할 수 없기 때문에 무엇인가 있다고 하는 사실로부터 그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도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법은 원인과 결과를 따지는 자연학이나 인과의 원리가 아니라, 도덕률 또는 법률의 권위자가 행위 하는 의미에서 당위라고 하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 사도가 말하기를,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있으니 그것은 사랑의 의무라고 했다"(cf. 롬 13:8). 우리 그리스도인에 있어서 본문의 명제는 바울 사도의 가르침의 최종적 결론이자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의 정의론의 기초를 이루고 나아가서, "사랑에 뿌리를 박고 사랑을 기초로 하여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의 신비를 깨닫고, 우리가 완성되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계획이 완성되는 것이다"(cf. 옙 3:17-19). 본문의 구체적인 내용은 후단의 결과부에서 논의되겠지만, 본문의 구조는 오늘날 神學하는 일(doing theology)의 大命題가 된다. 우리가 신학을 한다는 것의 궁극의 목표는 하나님을 본받는 과제이다. 그것은 추상적인 과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현실을 우리의 삶과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 나가는 것을 가리킨다. "나는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 33:19)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正義의 행함이 추상적으로 여겨질지 모르나, 여기서 제기되는 근본과제는 긍휼이 필요한 자가 누구인가를 밝혀야 하고, 누가 긍휼을 베풀어야 하는가 라는 이중적 과제를 안고 있다. 따라서 이 이중의 과제를 實踐(praxis)하는 일이 소위 '神學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약성서에서의 그리스도의 법의 구체적 지도원리가 사랑이며 그 사랑은 오늘에 있어서 신학함의 지도원리이기 때문이다. 태초부터 聖書의 法은, 그리이스-로마의 전통을 이어 받아 우리에게 부과하는 '中立的 仲裁'(neutral arbitration)에 의하여 부단히 도전하는 어떠한 상대도 강제적으로 저지하면서 기존 질서를 유지하는 國法秩序와는 다르다. 성서의 법은 이 땅위의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를 위하여 하나님의 정의를 성취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국법이 정의 수호를 위한 被動因이라면, 사랑은 하나님의 정의를 이 땅위에 실현하기 위한 能動因이다. 그 사랑의 實現態가 正義實踐의 基本構造가 되며 정의실현은 사실상 分配的 正義의 原理에 바탕 하여야 하는 것이다. 分配 즉, 나눔이란 신학상의 용법으로서는 성도가 서로 교통하고 교제하는 것을 일컫는다. 나눔이란 먼저 마음을 나누고 서로의 고통을 나누는 것이다. 그런고로 기쁨도 영광도 서로 나누어야 한다. 그러나 죄의 세상에서 나눔의 기본형태는 무엇보다 먼저 고통을 나누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전통이자 역사로서의 신학 함이다. 영광의 신학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고 오직 감추어진 십자가의 신학에 서있는 기독교의 전통은 실천적으로 행하여지는 나눔의 신앙이다. 나눔의 본령은 역시 상대방의 고통을 분담하는데 있다. 이때의 고통이 물질에서 오는 고통임은 물론이다. 삶의 기본인 물질의 분배는 구원의 커다란 축으로서 고통과 함께 하는 기독교의 나눔의 정신이야말로 오늘의 신학 함에 있어서 희망의 십자가임에 틀림없다. 시대의 이데올로기는 이른바 비례의 정의(능력 껏 가져감)에 의하여 고통받고 억압받는 자의 울부짖음으로 날이 지고 날이 새고 하였다. 그 결과 오늘과 같은 시대에 가장 고통받고 설음 받는 민중은 누구인가? 우리는 우리와 나누신 하나님 안에서 우리 와 나누어야 한다.
Ⅳ. 그리스도의 법은 무엇인가? -결론에 갈음하여- 그리스도의 법이 무엇이라는 것을 지적하기에 앞서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의 법은 다른 법과 무엇이 다른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먼저, 그리스도의 법은 크리스챤이 그의 삶의 정황(situation)에 맞는 어떤 규율을 정해주는 하나의 법전이다. 예를 들어 재산권 분쟁이 있는 어떤 사람에게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눅 12:14)라고 예수는 말했다. 그리스도의 법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산상수훈에서조차 우리는 행위에 관한 잘 정리된 어떤 규율의 법전을 찾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행동할 때 어떤 정신으로 행해야 할 것을 현저하게 예시하여 주는 내용을 보여 줄 뿐이다. 그리스도의 법은 決疑論(Cauistry)자들이 만들어 놓은 어떤 도덕적 규칙의 법전으로 환언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안식일에 관한 규칙과 같은 법전에서 예수는 사도 바울과 같이 오직 위험만을 발견하였다. 그리스도의 법은 오히려 사소한 규칙을 넘어 위대한 이상과 근본적인 원리를 바라보도록 인도하는 삶에 대한 하나의 전망이다. 다음으로 그리스도의 법은 다른 법과 같이 인간의 행위를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다룬다. 마태 복음 5장 후반부와 하나님 나라의 법이라고 말하는 산상수훈에서 이 사실은 명백해진다. 예수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온전한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온 것이다. 즉 단순히 외형적인 행동으로 명령된 것이 그리스도의 법에서는 내적인 태도의 일이다. 간음의 행위가 아니라 음탕한 생각에 대해서 예수는 주위를 환기시킨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은 인간의 마음을 정화하는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의 법에 순종하는 것은 실상 몹시 어려운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자신을 변화시키기보다는 외적 행동을 바꾸는 편이 더 쉽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법은 크리스챤에게 의무를 부과하는 영역에서 다른 법과 다르다. 우리는 유대인들과 같은 생각을 갖고 우리의 도덕적 책임을 같은 나라 사람에게만 한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법은 이 의무의 범위를 온 세상 끝까지 넓히고 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보듯이 우리가 원수로 여기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우리의 참다운 이웃임을 일깨워 주고 있다. 이상과 같은 내용을 요약하면, 그리스도의 법은 단 하나의 근본적인 원리를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롬 13:10)이라는 사도의 가르침이다. 크리스챤들은 그리스도의 법에 대하여 여러 다른 태도를 보여 왔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법으로써 "행동을 직접 제약할 수 있다"고 하여 필요하다면, 사법적 수단이나 징계의 수단에 의하여 강제로 실행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유대인 랍비들은 모든 환경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데 필요한 규율의 간단 명료한 수단을 이런 실천에 만들어 내고자 시도하였다. 그러나 결의론의 위험성과는 상관없이 기독교 신자에게 그리스도의 법을 강제로 실행할 아무런 제약은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법을 가지고 아무에게도 그것을 강행시킬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아무도 개인의 결단의 자유를 말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외형적 징계 수단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강제로 실행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에 대한 반대는 기독교가 지금까지 지켜온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하나의 極端은 그리스도의 법은 실천할 수 없는 하나의 이상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리스도의 법을 일상생활의 세계 안에서 인간을 인도할 실천적 지침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법은 일종의 하늘의 패턴(a kind of heavenly pattern)이므로 인간은 이것에 의해서 자기의 죄를 보게되고 거의 무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의 삶의 정황을 개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법은 크리스챤의 삶에 있어서 실제적으로 방향을 제시해주는 지침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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