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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 Christmas Seal 모음 1932년~1979년
결핵 퇴치 기금 모금을 위해 크리스마스마다 발행, 판매되는 봉인표이다. 우표와 유사한 형태로 발행되지만 우편 요금과는 관련이 없으며, 크리스마스철에 주고받는 우편물에 우표와 함께 붙여 기부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1904년 덴마크의 우체국 직원이던 아이나르 홀벤이 처음 발행하였다.
한국에서는 1932년 12월 황해도 해주 구세결핵요양원장으로 있던 캐나다의 선교의사 S.홀에 의하여 처음으로 발행되었고,1940년 일제에 의해 추방당할 때까지 9차례에 걸쳐 실을 발행하였다. 실이 결핵과 싸운다는 광고 내용을 보고, 한 무지한 여인이 가슴에 붙여도 차도가 없다고 하여 실을 산 돈을 되돌려 달라고 하는 등의 에피소드를 낳기도 하였다.
8·15광복 이후 문창모 박사의 주도로 1949년에는 한국복십자회가, 1952년에는 조선기독교의사협회가 실을 발행하였으나 커다란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그뒤 1953년 11월 대한결핵협회가 창설되면서 본격적인 발행이 시작되었다.
1932년 한국 최초의 크리스마스실 우리나라에서 발행하는 최초의 실 도안은 한국인에게 좋은 호응을 얻을 수 있는 그림이어야 한다고 셔우드 홀은 생각했다. 그래서 임진왜란 때 용감히 왜군을 물리친 거북선을 소재로 하였으나 당시 일제치하였으므로 거북선의 그림으로는 당국으로부터의 발행 허가가 불가능하리라는 한 일본 외교담당자의 암시를 받고 마음에 내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서울의 상징물인 남대문으로 소재를 바꾸어 발행하였고 1937년에 재판되었다. 첫 해의 실 모금 총액은 당시 화폐로 850원이었다.
1932년 크리스마스실첩 초판
1933년
1934년 1934년도 발행 실의 도안은 영국 왕실 가족 그림을 그리던 여류 화가인 영국의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가 그렸다. 소재는 어머니가 어린이를 보호하듯이 결핵병으로부터 보호받고 있는 것을 묘사한 추상적인 표현이었다. 실 모금을 위해 활동하였다는 1934.11.9 조선일보 기사가 있다. 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는 우리나라 크리스마스실 도안을 세 번(1934년, 1936년, 1940년) 맡아서 작업했다.
1935년 크리스마스실 발행 4년째에 들어서면서, 실과 결핵예방에 대한 홍보에 주력하였던 시기이다. 실은 최신영씨가 널뛰기를 하는 장면을 소재로 도안하였다. 일부 기록에 1935년 실 도안을 김기창씨가 한 것으로 되어있으나 그것은 착오이며 다른 몇가지 자료에 의하면 Mr.S.Y.Choi가 했다는 기록이 분명히 있다.
1936년 1936년도 크리스마스실은 1934년도의 아기업은 여인을 그렸던 영국의 여류화가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가 두 번째로 도안하였는데, 도안은 연싸움을 즐기는 소년을 바라보고있는 소녀의 장면을 소재로 하였다. 엽서 등을 발행하여 실 운동 확산에 많은 노력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37년 크리스마스실 판매 대금은 첫째 결핵예방과 홍보자료, 둘째 무료진료와 환자의 후원, 셋째 결핵에 관한 검사와 연구에 사용되고 있음을 강조한 실첩 표지가 인상적이다. 젊은 조선의 예술가였다. 그때 김기창씨는 24세의 나이로 제16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하여 일약 유명해졌다. 소재는 우리나라의 어린이들이 즐겨하는 팽이치기를 묘사하였다.
1938년 1938년도의 크리스마스실은 팔각정을 배경으로 하여 소년들이 제기차기 놀이를 하고 있는 소재로 운보 김기창씨가 1937년에 이어 두 번째로 도안을 하였다.
1939년 산천이 푸르름으로 싸인 길목의 고목에서 처녀들이 그네뛰기를 즐기고 있는 장면을 소재로 도안한 1939년도 실은 그 당시 조선에 건너와 선교활동을 하고있던 호주의 장로교 목사인 에스몬드 W.뉴가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9년도 실 도안에 대해서는 앞으로 규명이 되어야할 의문점이 있다. 실의 그네 하단의 풀속에 필기체로 Esmond W. New 라는 이름이 좌측 하단 나무옆에 가로로 류영완이란 이름과 낙관까지 있다. 이는 우리나라에 와 있는 외국인이 한국식 발음표기로 한글이름을 즐겨 썼으므로 Esmond도 한국식 이름 류영완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할수 있다.
1940년 한국 최초로 실을 발행한 이래 9년째 발행으로 중단이 되는 불운을 맞게 되는 해였다. 1940년도 실은 이미 1934년과 1936년도의 실을 도안한 엘리자베스 키스가 세 번째로 그렸는데 눈이 하얗게 쌓인 높은 산을 배경으로 색동옷을 입은 귀여운 두 아이를 소재로 하였다. 당국의 허가를 받아 인쇄를 완료하고 전국으로 보내려고 할 때 일제에 의해 압수되었다. 그 이유는, 배경의 산이 특정산(금강산)이며 발행년도인 1940의 서기년도를 삭제하라는 내용으로 압수의 구실을 잡았던 것이다.(당시는 일본식 연대 사용) 그래서 케이트양은 뒷 배경의 산을 원근법에 따른 축소모양으로 대문 안으로 들어오게 그렸으며, 1940 대신에 실 발행 9번째의 해이므로 9차년도(ninth year)로 수정하여 재발행하게 되었다. 태평양 전쟁 직전인 1940년 스파이 누명을 쓰고 강제 추방됨으로써 한국에서 최초로 실을 발행하고 9년간 발행을 계속하던 셔우드 홀은 자기가 태어난 정든 한국땅을 떠났으며 그 후 실 발행도 잠시 중단하였다. 1949년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어려웠던 혼란의 와중에서 결핵이 급격히 만연하는 것을 보고 결핵퇴치 기금을 확보하려는 일념으로 1949년에 문창모 박사가 한국복십자회 이름으로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하였다. 실의 도안은 어둠 속에서 광명의 촛불을 비치면서 밝은 미래를 나타내는 탁자위의 촛불과 향로로 그려졌는데 이것도 문창모 박사 자신의 작품이다. 이 무렵 실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전혀 없던 상태에서 한국인에게 실 판매는 아주 어려워 우리나라에 주재하고 있던 미군과 미8군 구내 매점에서 약간 판매되는 정도로 그쳤다. 실 발행에 주동이 되었던 문창모 박사는 해주구세병원 의사로 있으면서 1932년 우리나라 최초의 실 발행 7인 위원 중 한사람으로 평양지방 담당판매원으로서 큰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으며, 1949년 당시 세브란스 병원장을 역임하고 있었다.
1950년은 전세계를 놀라게한 6.25동란으로 51년까지 실 발행도 또다시 중단되었다. 그러나 1952년 휴전이 됨으로 다시 문창모 박사는 한국기독의사회를 새로 조직하여 그 명의로 크리스마스 실을 발행하였다. 그해 실의 도안은 당시 기독의사회의 조직을 위하여 모였던 의사들의 의견을 모아 한국을 상징하는 때때옷을 입은 소녀가 태극무늬가 있는 부채로 얼굴을 가리운 모습으로 하였다. 발행된 실이 전쟁을 치룬 직후였으므로 거의 팔리지 않아 인쇄비도 제대로 건지지 못하였다.
1953년 6.25동란으로 결핵이 급격히 만연하자 1953년 11월 6일 뜻있는 선각자들에 의해 대한결핵협회가 창립되었다. 창립과 함께 협회에서는 첫번째 크리스마스씰을 그해 12월에 보건부의 승인을 얻어 발행하였는데 색동저고리를 입은 소녀를 소재로 우편도안가였던 강춘환씨가 도안하였다. 색동저고리는 설빔으로 새해를 축하하는 의미를 두고 있다. 당시의 이 도안이 채택되었던 것은 우리나라의 남존여비 사상과 남아선호사상을 몹시 싫어하였던 셔우드 홀의 뜻을 따른 문창모 박사의 적극적인 추천에 의해 도안소재로 채택되었다고한다. 씰 전지 구성은 특이하게 18X10(180매) 이며 모금방법으로는 이미 유럽과 미주지역에서 실시하여 성과를 거두고 있던 우편모금 방법을 채택하여 학교와 교회를 중심으로 보건소, 의원, 단체등에 씰 모금 취지문과 함께 우편으로 발송하였는데 아직 국민들에게 씰이 전혀 인식되지 않은 상태여서 상당수가 봉투를 개봉도 하지 않은 채 반송하는 등 성과는 별로 없었다.
1954년 1954년의 크리스마스씰은 6.25동란이후 사회상을 반영한듯 도안도 폐허속의 소년을 소재로 하였다. 지난해의 부진했던 모금성과를 만회하기 위하여 결핵관계전문월간지인 "보건세계"지에 크리스 마스씰에 대한 소개와 신문과 라디오 방송망을 통해 씰을 홍보하였다. 또한 본국에서 씰 운동을 잘 알고 있는 주한미8군을 대상으로도 모금하였는데 미8군 의무감 로빈슨 준장의 도움이 컸으며 이 모금은 1968년까지 계속되었다. 1955년 1955년도 씰 도안은 현상모집을 하였다. 당선작은 변종하 화백이 도안한 "쌍학"이었고 그외에 안영훈, 최충, 이근홍, 김광배 등 4명의 작품이 가작으로 입선되었다.
1956년 이해의 씰은 "무궁화 피는 삼천리"를 소재로 하여 현 서울대의대 이부영 교수가 도안하였는데 바탕색이 미색과 흰색의 두 종류가 있다. 이교수는 그림도 잘 그리고 글도 잘쓰는 정신과의사로서 그 자신이 학생시절 결핵으로 투병생활을 한 경험이 있었다.
1957년 크리스마스씰 운동은 이제 "민중속에서 자란 착상은 민중사이에 지지를 받는다"는 진리가 한국에서 산 증거를 보여주는 단계에 접어 들기 시작했다. 특히 이 해부터는 이승만대통령 내외분이 솔선하여 씰을 구입하였으며, 대통령의 뜻에 따라 국무회의에서 크리스마스씰 모금을 범국민적으로 전개할 것을 결의 하여 전 공무원,육 해 공군장병,각급 학교,공공기관 그리고 일반국민에 이르기까지 정부의 행정적 지원아래 씰 운동이 급속히 확산되어 갔다. 도안은 중학교 미술교사이던 차익 씨가 그렸다. 1958년 민간결핵퇴치 운동의 상징처럼 굳혀진 크리스마스씰 운동은 정부의 적극적 지원하에 점차 기반을 잡아가면서 괄목할 만한 실적을 올리게 되었다. 또한 크리스마스씰 판매를 위한 판촉 봉투를 제작하여 판매를 촉진시키는데 사용하기도 하였다. 씰 도안을 협회 창립 이후 단종만 발행하던 형식에서 벗어나 손바닥 위에 돋아나는 새싹을 대칭형으로 배열하였는데 전년에 이어 차익씨가 도안하였으며 처음으로 조폐공사에서 인쇄를 하였다.
조폐공사 도안실장 강박 씨가 도안한 설빔을 입은 소년과 소녀를 소재로 제작된 59년도 씰은 53년이후 국호를 영문으로 표기 하였던 것을 한글 대한민국으로 바꾸고 영문표기는 작은 글씨로 축소시켜 우측 중앙에 작게 표기한 점이 특징이다. 1960년 이글거리는 태양과 구름,석탑을 대표하는 다보탑과 구름을 소재로 한 2종의 도안을 1952년 제2대 대통령 취임 기념우표를 비롯해 많은 기념우표를 도안했던 강박씨가 1959년에 이어 다시 그렸다.
1961년도의 도안은 나무둥지 위의 어린새와 먹이와 행운의 네잎 크로바를 물고 있는 어미새를 주 구성으로 하고 팔랑개비와 복십자 마크문양을 배치한 구성으로 하여 4종 복합으로 도안한 것이 특징이다. 도안은 전년에 이어 강박 씨가 그렸다.
홍익대 미대 한홍택 교수에 의해 그려진 1962년의 씰 도안은 한국적인 소재를 서양화풍으로 구성하였다. 소재는 모자,꽃,도자기,꽃가마로 한국적인 마음을 표현한 것이었다. 특히 이 해에는 결핵퇴치 특별모금 운동으로 극장에서 입장객의 입장료에 일정액을 첨가하는 극장모금이 시작되었는데 전국극장연합회에서 이일을 주관해 주었다.
1963년의 크리스마스씰은 소를 타고 피리부는 소년과 말,사슴,염소를 소재로 하여 같은 도안을 두가지 바탕색(청색과 황토색,녹색과 주황색)으로 홍익대 미대 유광열 교수가 그렸는데 변지의 도안자를 표시하던 디자인이 도안으로 변경되었다. 또한 결핵예방 특별 성금모금으로 고궁에 입장하는 입장객에게 입장료에 첨가하는 첨가모금이 시작되었다.
1964년 장고치는 여인, 풍물놀이의 꽹가리라는 상쇠, 태극방패연, 촛대 등 한국적인 소재를 배경으로 크리스마스트리를 기하학적인 삼각형으로 표현하여 서울대 미대의 민철홍 교수가 그렸다.
대한결핵협회에서 발행한 씰 중에서는 처음으로 씰첩을 발행한 해이다. 또한 "당신을 노리는 무서운 결핵 크리스마스씰을 사서 예방하자"라는 호소문을 넣어 포스터도 발행하였다.
1966년도 크리스마스씰이 특이한 것은 크기가 당시의 보통우표 만큼 소형화되고 1932년도 셔우드 홀에 의해 발행되었던 우리나라 최초의 크리스마스씰 도안이였던 남대문이 들어간 점이다. 도안은 민속놀이인 강강수월래와 한국고유 국보급문화재인 다보탑과 남대문을 소재로 하여 현 서울대 미대 권순형 교수가 그렸다.
1967년 1932년 셔우드 홀이 처음으로 씰을 발행코자 도안하였던 것이 거북선이었으나 일제가 허가하지 않아 남대문으로 바뀌어 발행되었는데 처음으로 거북선이 씰에 등장하게 되어 감회가 새로운 도안으로서 서울대 미대 김교만 교수가 그렸다. 그러나 셔우드 홀에 의해 도안되었던 거북선의 위용에 비해 너무 단순한 도안으로 거북선 안에 민속적으로 단장한 세사람의 인물을 그려넣고, 같은 그림을 색도를 달리하여 구성하였다.
1968년 1968년도 씰의 도안 소재는 닭과 학에 어린이가 올라 앉아 즐거운 듯 나팔을 부는 내용이다. 예로부터 닭은 새벽을 깨우쳐 주는 가금으로서 결핵에 대한 일반 대중의 각성을 촉구하고 천년을 산다는 학은 장수를 상징하여 결핵 없는 건강한 생활을 고취하고 있다. 도안은 64년에 이어 서울대 미대의 민철홍 교수가 그렸다. 1969년 1969년도 크리스마스 씰 도안은 새로운 소재와 좋은 작품을 위하여 현상모집하여 당선된 조병수의 "동심"이 채택되었다. 도안내용은 오른쪽과 왼쪽으로 새를 향하여 나르고 있는 소녀로 바탕색이 노란색과 청색이다. 과거 셔우드 홀이 크리스마스 엽서를 발행한 이후 결핵협회에서 처음으로 복십자엽서가 발행 되었다.
1970년도의 씰 도안도 현상모집하였는데 골목놀이라는 제목으로 조폐공사 도안실장 오동한 씨가 응모한 작품이 채택되었다. 동화속의 한 장면을 연상케하는 작품이었다.
1970년의 씰은 두 작가에 의해 도안되었다. 포도를 주제로 한 2종의 도안을 서울대 민철홍 교수가 그렸고, 한국민화를 주제로 하여 2매를 연속도안으로 하여 변동하 화백이 그렸다. 처음으로 다른 두 도안을 소재로한 씰이 발행되었다. 복십자 엽서도 계속 발행되었다.
1972년 씰 도안은 현상모집한 작품으로서 김 현 씨가 학생시절에 동생 김혜성의 이름으로 응모한 평화롭고 아름다운 시골풍경을 묘사하고 있는 4종의 도안이다. 김 현씨는 그때 그 상금으로 학교등록금을 내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소형시트(4x4)가 발행되었고 복십자엽서도 계속 발행 되었다.
한국고유의 전통혼례복을 입은 신랑과 각시를 소재로 하여 윤경호 씨가 응모한 현상모집 당선작이다. 국호 표시인 한글 대한민국 대신에 결핵협회가 들어가기 시작한 해이다. 특이하게 판매가액이 화폐단위 표기 없이 왼쪽 하단에 표시되어 있다.
1974년 1월에 정부당국의 모금방법 개선시책에 의하여 씰 모금은 대폭 축소된 반면에 결핵퇴치기금 첨가 우표모금이 실시된 해이다. 10원권 보통우표에 결핵기금 5원을 첨가한 우표 4,000만매를 체신부가 발행하였는데, 김용배 씨가 복십자 마크와 폐를 소재로 도안하였으며, 크리스마스씰은 크리스마스 트리와 한국건물의 고유한 선을 소재로 강박 씨가 도안하였고 4매짜리 소형시트도 발행되었다
이해도 1974년에 이어 크리스마스 씰의 발행이 축소된 상태가 계속되었다. 잉어와 학을 소재로 하여 건국대 미대 이명구 교수가 도안하였다.
1976년의 크리스마스씰 도안은 예년과 달리 전국 초등학교 아동을 대상으로 자라나는 어린이의 꿈이 담긴 아동화를 소재로 현상모집 하였다. 총 711점이 응모 하였고 특선(서울 반포초등학교 최석진) 1점과 입선(부산 남일초등학교 고지윤 외 9명)10점을 선정하였다.
자연보호 시리즈(Ⅱ)로 한국의 자생 꽃 10종(무궁화,철쭉,군자란,자목련,붓꽃,모란,수련, 도라지,국화,동백)을 소재로 하여 조폐공사 도안실장 강박 씨가 도안하였다.
우리나라의 어린이 민속놀이 10종(연날리기,재기치기,농악,그네뛰기,씨름,매미잡기,장고춤, 널뛰기,팽이치기,오뚝이)을 소재로 한 아름다운 씰을 민속화가 이서지씨가 그렸다. 우리 고유의 정서가 듬뿍 배여 있는 느낌을 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