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단상
정경희
5월이 되면 기념일이 참 많다. 어린이 날, 어버이 날, 스승의 날 등이다. 게다가 결혼기념일과 아들 생일까지 있는 달이니 가정의 달이라는 말이 걸맞기도 하다. 바쁘게 살아가는 세상에 이런저런 날 다 기념하기는 힘 든다. 스승의 날은 특히 더 그러하다. 스승을 향한 고마움과 그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 선생님이 제자들을 기억할까 싶기도 하고 감사하고 사랑한다는 표현이 쑥스럽기도 하다. 근처 초등학교 앞을 지나는데 스승의 날 노래가 흘러나온다. 아, 이번에도 나는 스승의 날을 챙기지 못 하였다. 숙제를 다 못한 어린애마냥 마음이 무겁다. ‘선생님, 축하드립니다.’ 혼자 중얼거린다.
때마침 손에 쥐고 있는 휴대폰은 진동음을 계속 울리고 있다. 초등학교 육학년 반창회 일정 짜는 친구들의 수다를 알리는 소리이다. 시원한 맥주 한 잔 마시고, 앞 다투어 선생님 이야기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근처 시장에 들렀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시장 한 바퀴 돌면서 찬거리 몇 가지를 구입하였다. 가는 곳마다 현금 내고 잔돈 받아 주머니에 꾸겨 넣느라 전부 얼마를 썼는지 알 수 없다. 더하기, 곱하기, 빼기, 머릿속으로 암산이 시작된다. 속으로 간단한 계산을 하거나, 서울에서 지하철 갈아타느라 안내 표시 따라 걸을 때는 초등학교 선생님 생각을 하곤 한다. 아무것도 모르고 눈만 반짝이던 우리들이 한글 읽고 수를 알게 되었다. 어릴 때 잠깐 배운 지식으로 지금까지 사회생활 잘하고 있다. 젊은 선생님들이 어떻게 많은 아이들을 가르치고 이끌어주었는지 신기하고 고맙다.
일학년 담임은 짧은 커트머리에 얼굴 피부는 계란 속껍질마냥 깨끗하였다. 웃을 때마다 살짝 드러나는 덧니와 우아한 걸음걸이는 선녀 같았다. 가끔은 우리 이웃동네인 선생님 댁에 심부름을 다녀오기도 하였다. 커다란 고목이 있는 기와집이다. 얼마 전 추억 따라 가보니 고목만 앙상하게 남아있다.
이학년 담임은 다부진 성격의 여선생님이다. 음악시간에는 책상위에 걸터앉아 박자 맞추고 잘못하면 앙칼진 목소리로 꾸중을 하였다. 우리는 못되었다고 험담을 많이 하였다.
삼학년 담임은 도서실 담당하는 문예부 선생님이다. 교실이 부족한 시절이라 우리는 도서실을 일반 교실로 사용하였다. 큰 책상에 둘러앉아 정면 선생님 쳐다보느라 고개가 아팠지만 대출 절차 없이 마음대로 책 읽는 호사를 누렸다. 지금도 운전해서 터널을 지날 때면 제목도 모르는 동화 한 구절이 떠오른다. ‘어두운 굴을 지나니 대궐 같은 마을이 눈앞에 나타났다’
사학년 담임은 멋쟁이 총각이다. 이름도 유명 연예인과 비슷하다. 쉽게 가까이하기 어려운 분이었는데 학생들 사랑하는 마음은 각별했던 모양이다. ‘사학년 공부가 앞으로 바탕이 되는데 성적이 떨어지는 것 같더라, 열심히 해야지’ 그 이후로도 공부하기 싫을 때마다 선생님의 다정한 음성을 떠올리며 힘을 얻었다.
오학년 담임은 체육을 잘하고 인간미 넘치는 선생님이다. 20대 초반 직장 친구들과 해인사에 놀러갔다. 자가용 없던 시절이라 버스타고 걸어서 힘들게 계곡에 도착했다. 먼저 온 단체 중 한 명이 나를 알아보며 반가워한다.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데 선생님이 나를 기억하였다. 이름은 물론이고, 내가 사는 동네, 남동생까지 알고 있었다. 맛있는 음식으로 포식하고 선생님 자동차로 버스정류장까지 태워주었다. 친구들은 재미있다고 깔깔대었지만 나는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였다.
육학년 담임은 불도그처럼 무서운 분으로 우리들이 너무 싫어하였다. 그 때는 공부 좀 잘하고, 가정형편 좋은 아이들은 밤공부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대부분 월급쟁이 부모를 두고 수준 높게 생활하는 아이들이다. 감히 엄두 못 내고 있는데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돈은 안 내어도 되니 오늘부터 밤공부하러 오라고 한다. 정말 열심히 다니며 공부했다. 수강료는 참외 한 봉지가 전부 이었다.
대구에 이사 온 어느 날 자동차 안에서 출근길 버스 기다리는 선생님을 언뜻 보았다. 여전히 불도그처럼 생기고 건장하였다. 수소문 끝에 근무처를 알아내고 통화도 하였다. 스승의 날 즈음해서는 어린 아들 손잡고 수박 한 덩이 들고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그간 마음의 빚을 갚을 기회이었는데 수박 하나로 끝낸 내가 한심하기 짝이 없다. 기회는 얼마든지 더 있을 것이라 여겼다.
부모님 못지않게 나를 있게 해준 스승의 고마움은 무궁무진하다. 친구들 만나 어린 시절 추억 펼치다보면 끝이 없다. 그러면서 일 년에 한 번 있는 스승의 날은 그냥 지나간다. 전화 한 번 하는 것도 잘 안 된다. 부모님이나 자녀처럼 가까이에서 생활하면 달라질 수 있을까?
남편은 스승의 날만 되면 친구들과 은사님 만나러 간다. 모두 가까운 지역에 살다보니 쉽게 만난다. 선생님과 제자가 둘러앉아 스스럼없이 술잔을 기울이고 섭섭했던 이야기도 털어놓는다고 한다. 평소에 전화기에 대고 큰 목소리로 안부 묻는 모습이 부럽다.
나는 무슨, 무슨 날을 정해두고 떠들썩하게 행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기본에 충실하면 된다고 여긴다. 사랑과 감사에 고마워하는 표현도 잘 못한다. 마음만 있으면 되었지 그렇게 형식을 갖추어야 하나 싶기도 하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저 멀리 선생님이 보이면 쥐구멍 찾던 젊은 시절에 내 사고가 멈춰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린 아들업고 길에 나섰다가 선생님이 보이면 바로 옆 빵집에 숨어버렸다. 생각지도 않은 빵 한 봉지 사면서 길을 흘긋거리던 내 모습이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시원한 공기 들이마시며 고마움 모르고 살고 있듯이 한글 읽고 쓰며 내 삶의 의미를 정리하는 지금도 글 깨우쳐 준 선생님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늘 시장에서 쓴 돈이 얼마이고 앞으로 명품 가방 하나 사려면 얼마를 모아야 하는지 궁리하면서 셈을 가르쳐준 이에게 고마워할 줄 모른다. 이제는 적당히 표현도 하면서 살아야지. 전화 한 통 할 줄 모르는 숙맥인 제자는 스승의 날에도 혼자 선생님을 그리워만하고 있다.
완숙한 어른이 된 친구들 만나면 밤새워 수다를 떨 것이다. 큰 목소리로 선생님과의 추억을 펼치며 가끔은 눈물 찔끔거리기도 한다. 이런 모습이면 꽃바구니 들고 찾아가지 않아도 선생님은 이해하실 것이다.
‘옛날에는 중간놀이 시간에 남녀 손잡고 메스게임을 하였다. 손잡는 것이 싫어 작은 꼬챙이를 서로 잡고 어설프게 동작하였다. 화가 난 선생님은 육학년 삼반 단체기합을 주었다. 남학생이 여학생 업고 운동장 한 바퀴 도는 것인데 우리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지금이라면 안 시켜도 손 잘 잡을 텐데.’
선생님을 추억하는 단골메뉴는 이번에도 우리를 하나로 뭉치게 할 것이다.
(20240624)
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
한비수필학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