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이라는 낱말 속에는 많은 기억이 떠오른다. 덩실 덩실 춤을 추며 즐거게 노는 모습, 직장인들의 화기 넘쳐나는 회식 모습, 각종 잔치자리, 술잔을 기울이며 친구들과 담소하는 모습 등 셀 수없이 많은 그림들이 연상된다. 그만큼 술은 우리 생활과 밀접하다는 뜻일 게다. 문학에 뜻을 둔 나는 의도적으로 많은 술을 마셨다. 그것이 마치 문인의 길에 놓인 필수 과정이라도 되는 듯이 술을 가까이 했다. 심지어는 술잔을 기울이며 담론하는 문인들의 모습을 흠모하기까지 했다. 고희가 넘어선 나이에 절실히 깨닫는다. 그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어리석은 생각인지를 깨닫기 까지 너무나 많은 폐단의 세월이 흫렀다.
만취 상태가 되면 뇌가 쪼그라든다고 한다. 문제는 다시 원래 크기로 돌아오는데 3주정도의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술은 백해하고 무익하니 지금이라도 버리라고 한다면 서운해 할 사람들이 많음을 느낀다. 그러니 만취하지 말고 술은 반주로 일주일에 1~2잔만 하자고 권유하면 반란의 술잔이 광화문 집회장에 모인 사람들 숫자보다 많을지도 모른다.
술로 인한 폐단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무엇보다 술은 먹을 땐 즐거움을 주나 뇌에 엄청난 오작동을 불러 온다고 한다. 컴퓨터의 주기억장치나 각종 제어장치에 과부하가 걸리는 것과 같다고 하니 술을 마시는 방법과 횟수 등에 본인만의 노하우가 필요할 듯하다. 그러나 애주가들 가운데 이 문제로 심각하게 고민하는 술꾼을 아직은 만나보지 못했다.
은유적으로 술꾼들을 빗대어 회자되는 표현으로 ‘시작은 두 발로 나중엔 네 발’이라는 말이 있다. 네발의 모습은 사람의 모습이 아니다. 네발의 모습 속엔 온갖 추태가 담겨져 있다. 그 가운데 특히 어린 자녀들이 겪는 고통은 필설로 헤아리기 어렵다.
아버지는 체격이 왜소했다. 체격이 왜소한 사람들은 법이 멀고 주먹이 가깝던 시절에 많은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동네의 모든 놀이 문화는 아버지의 손끝과 혀끝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선소리, 지신밟기, 앞잡이는 늘 아버지의 몫이었다. 어릴 때 기억은 사물놀이에 필요한 도구는 늘 우리 집 농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술과 농악 등 놀이 문화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으니 아버지 대한 기억 가운데는 술을 먹지 않은 날은 거의 없었다. 밀린 농사일을 일소 없이 여자의 힘으로 혼자 감당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술을 마신 날이면 날마다 어머니의 잔소리는 이어졌고 술이 취해 이성을 잃은 아버지의 불똥을 우리는 고스란히 맞고 자랐다.
절제하는 술은 즐거운 인생의 시작이라고 하면 내어 놓고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고개를 끄덕일 사람이 많을 것이다. 술은 마시는 사람에 따라서 약도 되고 독도 되고, 즐거울 수도 불행할 수도 있다. 아름다운 노을 같은 인생황혼에 좋은 벗들 만나 미주 한잔 나누는 재미가 쏠쏠함을 경험한 사람은 안다.
술 문화에 대한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 혀가 꼬부라질 때까지 벌컥 벌컥 술잔을 들이키며 비틀걸음을 걷는 것은 더 이상 낭만이 아니다. 체력에 따라 건강에 맞게 술을 마시는 습관이 필요하다. 대화를 즐기고 담론을 즐기는 술잔이 되자. 술잔 숫자와 우정은 비례하는 것이 아니다. 술잔을 나누되 친구의 건강까지도 걱정하고 의견을 존중하는 술잔의 미학을 적극 추천한다. 절제에서 오는 품위는 영국신사 다운 멋스러움이 있다. 좋은 술맛은 명주나 술잔 숫자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술을 음미하고 사랑하는 문화에서 만들어진다. 술꾼들이 아니더라도 술이 백해무익하다는 말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는 것은 술은 정직한 친구처럼 좋은 벗이 될 수 있음을 알기때문이 아닐까?
마신만큼 취하고 한번 만난 친구도 한잔 술 나누면 좋은
친구가 되고 아내의 잔소리도 꽃노래로 들리게 하는 아름다운 술의 이름은 명주중의 명주 절주다. 술이 무익 하다는 논리에 반하여 열변을 토하는 애주가들이 있다. 무일푼 백수도 한잔하면 백만장자가 되고 내일 산수갑산에 갈망정 마시는 순간만큼은 세상시름 다 잊는다는 것이 예찬론자들이 생각하는 진리인지도 모른다.
예찬론에 반하는 옛사람들의 글 또한 만만치 않다. 팔만대장경에는 "술은 번뇌의 아버지요 더러운 것들의 어머니" 란 구절이 나온다. 탈무드에는 “사흘에 한 번 마시는 술은 금” 이라는 말도 있다. 이를 종합하여보면 술이란 시도 때도 없이 마시면 마냥 신나고 즐겁고 행복한 것만은 아니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벗과 어울려 한 잔 하는 재미는 그 무엇과도 견줄 수가 없으며 그 낙으로 인생을 즐긴다는 것을 누구라고 탓하고 힐난할 것인가? 그러나 인생은 혼자서는 살아 갈 수가 없다. 매일을 함께하는 가족들이 음주로 인하여 괴로움을 겪는다면 이는 술이 아니라 독이 든 성배 이거나 마약이다. 향기를 음미하고 절제하는 주도(酒道)로 남은 인생의 또 다른 즐거움이 더하여지기를 기다려 본다.
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
한비수필학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