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 힐탑트레져
힐탑트레져는 과거에 외인아파트 즉, 외국인을 위해 지어진 아파트였다. 1960년대부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하면서, 정부가 초청한 기술자와 사업가 등 한국을 찾는 외국인이 날이 갈수록 늘어나자 이들이 머무를 숙소는 턱없이 부족해지기 시작했으며 특히 장기간 국내에 체류해야하는 각국 대사관직원, 주재원들에겐 호텔같은 숙소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장기체류 외국인을 위한 외인아파트 건립을 계획했고 외인아파트를 통해 외국인 주택난 해결과 동시에 임대운영으로 외화도 벌어들일 수 있게 되었는데, 그 시작이 바로 힐탑아파트다.
주로 UN 관계자 및 미군들과 그 가족들을 거주시키기 위해 외자를 유치해서 지어진 아파트였으며, 대한주택공사(현 LH)의 주도로 1967년 3월 13일 착공하여 1년 7개월 간의 공사 끝에 1968년 10월 10일 완공되었으며 시공자는 현대건설이었다.
힐탑아파트는 지상 11층으로, 당시 10층을 넘긴 대한민국 최초의 고층아파트였으며 동시에 아파트에 처음으로 엘리베이터를 설치했다. 덕분에 저층 고층 가릴 것 없이 집에 출입 하는 것이 편리해진 것은 물론이고 옥상에 정원과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를 만들어 공간을 더 알차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참고로 옥상에 정원과 놀이터를 만든 것 역시 국내 최초라고 하며 지금도 최신사례를 잘 찾아보기 힘든 상당히 선진적인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사평원과 사평장터
1925년 대홍수로 인해 상업의 맥이 끊겼지만 최근 강남의 관문으로 과거의 영화를 되찾게 된 사평원 즉 사평리(砂平里)는 현재의 신사동 일대 즉 한강을 사이에 두고 한남동과 마주 하는 곳에 있다. 이곳은 서울과 남부지방을 연결하는 큰 길의 길목이었고 나루가가 있어서 예전부터 교통의 중요한 길목이었다.
고구려가 남진정책을 펼 때도 이곳을 지나갔고 신라가 북진정책을 펼 때도 이곳을 지나갔 다고 한다.
고려시대부터 이곳에 사평도라는 나루가 있었다. 조선시대 때 사평도는 한남동의 한강나루 와 이어지고 그 길목에 사평원이 세워져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사평원은 조선시대에 공적인 임무를 띠고 지방에 파견되는 관리나 상인 등 공무여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시설인 원(院)의 하나이다. 당시 원은 전국적으로 1,310개소가 설치 운영되었는데, 서울 지역은 5부, 지방은 수령이 부근의 주민 가운데 승려·향리·관리를, 대로는 5호(戶), 중로는 3호, 소로는 2호를 원주(院主)로 임명하였다.
이들에게는 원의 운영 책임을 맡기는 대신 나라에서 시키는 여러 가지 의무를 면제해주었다. 또 원의 운영경비로 원위전(院位田)을 주었으며 한성부와 관찰사가 이를 감독하였고, 30리마다 원과 역(驛)을 세우는 제도로 운영되었다. 이러한 원을 운영한 이유는 교통사정이 원활하지 못한 당시에 여행자를 도둑이나 맹수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지방의 원에서는 기로연(耆老宴: 조선시대 기로소에 등록된 전·현직 문신관료들을 위해 국가에서 베풀어주는 잔치)을 베풀기도 하였고, 진제장(賑濟場: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렸을 때 곡식을 내어 주거나 죽을 쑤어주던 장소)을 두어 굶고 병든 사람을 구제하는 역할도 하였다. 또한 공무여행자 뿐만 아니라 일반 행인에게도 휴식과 숙박을 제공하였다. 강남구 지역에는 조선시대 삼남지방으로 연결되는 양재역(良才驛)이 있었고, 한강 남안에 사평원이 운영되었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는 역원제의 변형 모습인 참점(站店: 여행하는 사람이 가다가 쉬던 장소)으로 신원점(新院店)과 율현점(栗峴店)이 운영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원의 관리가 철저하지 못하여서 공무여행자의 숙식을 관·역이나 민간업자에게 모두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임진왜란 후 파발제도(攝撥制度)의 실시와 함께 파발의 참(站)마다 참점이 설치되었는데, 이 참점은 후에 주점 주막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상업이 점차 발전하여 사평리는 민간숙박업이 크게 발달하게 되었다.
남쪽에서 서울이나 북쪽지방으로 가는 행인들은 양재역에서 한숨 쉰 뒤 사평리 주막에서 마지막 밤을 보낸 후 다음날 나루를 건너 도성에 들어갔다. 그로 인해 사평나루는 나룻배뿐만 아니라 고기잡이배, 상인들의 배까지 모여 들면서 경제나 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물건도 함께 모였고 민가들이 길가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사평리는 수로와 육로의 교통 핵심 지역인데다가 배후지(背後地) 면적이 커서 농산물의 유통이 편리했기 때문에 중간도매상들이 많이 모였으며, 특히 18세기에는 상업 활동이 부각
되면서 상업의 중심지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 예로 영조 31년(1755)에 병조판서 홍상한(洪象漢)의 상소를 보면 "사평, 광진, 누원, 금엄 등의 상업 활동은 1월에도 6차에 걸쳐 송파에까지 행하여 졌다. 이것은 이곳 주민들이 서울 밖의 중도아(中都兒: 시전에서 물건을 떼어다가 판매하는 일종의 중간상인)와 난전(亂廛: 허가 없이 길에 함부로 벌여 놓은 가게)의 무리들을 유인하여 벌어진 일로 충청도 및 북도 그리고 영동의 상고(商賣: 이윤을 목적으로 물건을 파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까지 상업 활동이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사평의 교역시장(交易市場)은 삽시간에 텅 빈 모래 벌로 변하였고 이곳 주민들은 다시 새말부락을 형성하여 살았다. 6.25전쟁 이후 북한의 피난민이 남쪽으로 내려와 이곳에 정착하면서 반농반상업의 마을로 변모하여 갔으나 농업이 대다수를 이루고 있었다.
한편 인조 2년(1624) 2월 이괄의 반란군이 서울까지 침입해오자 인조는 밤에 몰래 도성을 빠져나와 한남동 한강나루에 도착하여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이곳 사평원에 도착하여 죽으로 겨우 끼니를 때웠다고 한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사평리는 새말과 합하여 신사리(新寺里)가 되었고, 1963년 서울특별시 성동구로 편입되면서 신사동이 된 후, 1975년 강남구가 생기자 여기에 속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