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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장문인의 최후 비류신과 홍부용은 동시에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비류신은 휘둥그런 눈으로 물었다. “당신들이 정말 구대문파의 장문인 들이오?” “그렇소. 우리가 십오 년 전에 돌연 행방불명된 장문인 들이오. 나는 소림문파의 해동선사 (海東禪師)요.” 비류신과 홍부용은 강호에 떠도는 소문을 들어 구대문파의 장문인이 실종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홍부용은 강호에 대한 견식이 다소 있었으므로 구대문파의 내력과 장문인의 실종에 얽힌 비밀을 대충 알고 있었다. 구대문파 장문인 모두가 실종된 일로 강호 무림은 일대 혼란을 겪었으며, 이미 십오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후유증이 남아 있어 항상 암투가 그치지를 않았다. 비류신은 제일 궁금해 여기고 또 물어보고 싶었던 실종 비밀을 이렇게 뜻하지 않은 기회와 장소에서 알게 되니 오히려 어안이 벙벙할 정도였다. “마침 잘 되었습니다.여러 선배님께서 저를 못 믿고 계시니 그 증거를 보여 드리겠습니다.사부님께서 작고하시면서 여러분께 드리라고 하시며 저에게 맡긴 물건이 있습니다. 이것으로써 저희들이 간사한 놈과 내통하지 않았다는 것이 증명될 수 있다면… …” 그의 품에서 나온 것은 노란 비단에 쌓인 상자였다. “사부님의 말씀으로는 이 안에 구대문파의 대표적인 보물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창살 안에 있는 아홉 사람은 눈빛을 번쩍이며 비단에 쌓인 상자를 바라보았다. 십오 년 동안이나 갇혀 있었으면서도 보물 이야기가 나오자 신기하게도 눈에서 광채가 발산되는 것이었다. 비류신은 그 상자를 해동선사에게 건네주었다. 해동선사는 떨리는 손으로 비단을 풀고 상자를 열었다. 각각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은 제각기 자기 문파의 보물을 찾아들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나무로 정교하게 만든 것도 있었고, 또 다른 것은 금이나 은으로 조그맣게 만든 것도 보였다. 잠시 후 누군가가 미친 듯이 웃었다. “흐흐흐… 이제야… 이제야 찾았구나. 이것만 있으면 우리 문파의 제자들도 다시 강호 무림에 나타나… 흐흐흐… 이 원한을 꼭 갚고 말겠다. 하늘은 정녕 우리의 정성을 저버리지 않았구나. 이것이… 이것이… 오늘에서야 다시 손에 들어오다니… …” 그의 웃음은 끝에 가서 울음으로 변했다. 그러자 구대문파의 장문인 모두가 어린애처럼 보물을 가슴에 안고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공포가 가득 서린 지하실에서 그들의 울음소리는 더욱 처량하고 음산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비류신과 홍부용은 숙연히 고개를 숙이고 동정어린 표정을 지었다.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은 한차례 기쁨의 눈물을 흘린 후 무엇인가 서로 상의를 했다. 잠시 후 해동선사가 창가로 다가 왔다. 그의 눈은 오랜 동안의 울음으로 붉게 충혈이 되어 있었고, 뺨에는 눈물자국이 역력했다. “시주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소.” 비류신은 창살 가까이 다가갔다. “무엇인지 거리낌 없이 물어보십시오.” “고맙소. 시주는 우리 구대문파의 보물이 어떻게 해서 시주의 사부에게 들어갔는지 알고 있소?” 비류신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모릅니다. 사부님께서는 단지 이것을 선배님들께 갖다드리라고만 당부하셨습니다. 물론 저는 그 안에 무슨 물건이 들어있는 지도 모르며 또 이것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 물건인지도 모릅니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다음 말을 이었다. “사부님께서는 운명을 하시면서도 그 물건을 수중에 넣으신 것을 후회하셨습니다. 저는 제자의 몸입니다. 만약 사부님께서 그 물건을 수중에 넣으신 것이 여러 선배님께 잘못이 된다면 대신 제가 용서를 빌겠습니다. 사부님께서 당하셨던 운명은 지금 선배님들께서 당하신 운명과 거의 비슷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소대호가 구대문파의 보물을 지니고 있었던 이유를 몰랐지만 분명 많은 비밀이 깃들어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해동선사가 또 다시 한숨을 내쉬며 말을 받았다. “이미 지나간 과거를 이야기하자면 더욱 가슴이 아프오. 그 중에서도 원한이나 은혜를 생각하면 소대호에게 전적인 잘못을 지울 수도 없는 것이오. 이제는 잊었던 보물을 찾고, 또 소대호도 저 세상으로 먼저 갔으니 더 이상 그 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말기로 합시다. 죽은 그도 아마 떳떳하게 눈을 감았을 것이오. 그리고 우리들도 제자들한테 떳떳하게 얼굴을 들 수 있게 되었소.” 그는 고개를 돌려 다른 장문인들을 바라본 후 부드럽게 말을 계속했다. “시주에게 몇 가지 부탁할 것이 있는데 들어주겠소?” “무엇이든 부탁하라고 했지 않습니까?” “정말 고맙소. 설령 시주가 우리 부탁을 들어주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시주의 정성은 저승에서도 잊지 않을 것이오.” 비류신은 채찍을 뽑아 앞으로 내밀었다. “대사님, 이 채찍은 쇠를 자를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선배님들을 그 곳에서 나오시게 하겠습니다.” 그러자 왼쪽에서 세 번째 사람이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괜찮소. 우리는 이제 곧 죽을 몸이오. 시주가 빈도 이외에 여덟 사람의 뜻을 존경한다면 우리 부탁을 들어주시오. 우리는 그것으로써 웃으며 최후를 끝마치겠소. 그런데 시주의 이름은 어떻게 되는지… 죽더라도 시주의 이름만은 잊지 않겠소. 나는 무당파를 이끌고 있었소.” “아, 무당의 장문 무문이시군요. 불초는 비류신이라고 합니다. 선배님들은 어째서 이곳에서 빠져나갈 생각을 하지 않으십니까? 제자들을 다시 모은다면 구대문파가 일시에 지령보를 함락시킬 수도 있지 않으십니까? 선배님들은 오늘까지 쌓이고 쌓인 원한을 풀지 않으시려는 것 입니까?” 해동선사가 말을 받았다. “비 시주, 우리들의 이런 비참한 모습을 보시오. 이대로 더 얼마나 살 수 있다는 것이오? 더군다나 십오 년 동안 햇빛을 못 보고 지낸 우리가 이제 밖으로 나간다면 햇빛을 보자마자 눈이 멀게 될 것이오. 아니 지금 생각 같아서는 몸 전체가 녹을 것 같소.지금 우리는 무공도 상실했고 몸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소. 그러니 비 시주는 우리 부탁을 꼭 들어주시오.” 해동선사는 말을 끝내면서 손을 들어보였다. 그 순간 비류신과 홍부용은 깜짝 놀랐다. 해동선사의 앙상한 손목에 굵은 쇠사슬이 걸려 있는 것이 아닌가? 팔 목 뿐만 아니라 두 발목에도 그리고 어떤 장문인은 목에 까지 쇠사슬이 채어 있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상태에서도 오늘까지 살아온 것은 바로 오늘 같은 날이 찾아오기를 바랐기 때문이오. 우리는 이미 폐인이니 대신 제자들에게 이 비밀을 알려 원한을 풀어줄 사람을 기다렸다는 것이오. 우리는 정말 오늘 같은 날을 보지 않고 그대로 눈을 감을 수 없었소.” 비류신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사님, 그리고 여러 선배님들께서 오늘까지 받아오신 고초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선배님들의 원한을 제가 대신하여 갚아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선배님들께서 저에게 부탁할 것이 있으시면 무엇이라도 말씀하십시오.” 무당의 장문 무문이 입을 열었다. “우리 아홉 명은 그래도 행운이 있나 보오. 시주들에게 죽음을 당한 사람들과 비교한다면 우리는 그래도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소.” 비류신은 얼굴을 붉힌 채 뭐라 대꾸를 못했다. 홍부용은 다급히 말했다. “아니에요. 우리는 고의로 저 사람들을 죽이지 않았어요. 우리가 화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부득이했던 일이에요.” 해동선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두 시주들은 응당한 행동을 했을 뿐이오. 어느 누가 자신의 생명이 위급한데 손을 쓰지 않겠소? 어떻게 생각하면 오히려 좋은 일을 한 셈이오.” 비류신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대사님, 그게 무슨 뜻입니까?” “저 사람들은 모두 의기충천했던 강호 인물들이었소. 그들은 처음엔 지령보가 생겼을 때 아무 것도 모르고 가입했으나 차즘 악의 소굴이란 것이 밝혀지자 손을 떼려고 했소. 그러자 소대천이 그들 모두를 이곳으로 빠뜨렸다오. 그들은 시주의 덕분으로 고통스런 치욕에서 벗어나 천국으로 들어갔을 것이오.” 홍부용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말을 받았다. “저 사람들은 모두 의인이었군요. 그렇다면 제가 큰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네요. 저 사람들이 비록 지옥과 같은 곳에서 생활하고 있었으나 삶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잖아요? 시체를 뜯어 먹고 뼈를 갉아 먹는 것만 보아도 삶의 지속을 위한 수단의 일종이었으니까요. 이제 생각하니 새삼 후회가 앞서는 군요.” 비류신도 같은 뜻으로 말을 이었다. “정말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지만 그래도 선인을 살상했다는 것이 자꾸만 마음에 부담을 줍니다.” 해동선사는 고개를 힘없이 가로저었다. “괜찮소, 그들은 이미 이성을 잃은 지 오래 되었다는 것을 시주도 알고 있지 않소? 만약 그들에게 한 가닥의 이성이 있었다면 시주들에게 무자비한 공격을 하지 않았을 것이오. 소대천은 그들을 이곳에 빠뜨리기 전에 이성을 빼앗는 독약을 먹였던 것이오. 때문에 그들이 살아서 밖으로 나간다고 하더라도 사람 구실을 할 수 없소.” 무당의 장문 무문이 입을 열었다. “그들은 먹을 것이 없을 때는 서로 잡아먹으려고 싸움을 하기도 했었소. 그런 사람들을 죽인 것은 죄가 될 수 없으니 과히 상심하지 마시오. 그것을 본 것은 우리들 뿐 이고 또 우리는 시주들의 부득이했던 사정을 이해했으니 모든 것은 원만히 끝난 셈이오.” 홍부용은 굳은 표정을 풀며 물었다. “선배님들의 부탁은 무엇인가요?” 해동선사가 천천히, 그리고 처량하게 말을 꺼냈다. “두 시주는 우리들의 보물을 갖고 각 대문파의 제자들을 찾아가 주시오. 그들에게 보물을 주면 틀림없이 시주들을 믿을 것이니 염려할 것은 없소. 그리고 우리가 이곳에서 십오 년이 지난 후에야 최후를 마쳤다고 전해주고, 장문인을 뽑아 각대문파를 부흥시키라고 일러 주시오.” 비류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라면 어렵지 않게 성사시킬 수 있습니다.” 해동선사는 다른 장문인들에게 각 대문파의 보물을 거두어 비류신에게 건네주었다. “비 시주, 이 보물은 품속에 넣을 수 있을 만큼 작지만, 그 뒤에 있는 여러 제자들의 목숨과 직결된 것이오. 각 대문파의 제자들만 생각하더라도 엄청난 인원이 비 시주의 손에 죽음과 삶을 맡기는 것이오. 더군다나 중윈 무림의 멸망을 막을 수도 있으니 진정 백 명의 목숨보다 귀중한 것이오.” 가운데 있는 장문인이 애걸조로 말했다. “꼭… 꼭 전해 주시오 그리고 우리들의 억울한 죽음도 상세히 전해 주시오.” “틀림없이 선배님들의 분부를 이행하겠습니다. 저도 무림의 인물로서 동료들이 화를 입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일은 사부님께서도 당부하셨으니 제 힘이 닿는 데까지 목숨이 붙어있을 때까지 기필코 선배님들의 뜻을 전하겠습니다.” 해동선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내가 사람을 분별할 줄 안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소.” 무당의 장문 무문이 말을 꺼냈다. “둘째는 우리들 구대문파 장문인이 지니고 있던 절기를 어느 한 사람에게 전수시켜 이후에 생기는 각 대문파의 새로운 장문인에게 골고루 물려주도록 하는 것이오. 그렇게 되면 각 대문파의 새 장문인 모두가 똑같은 무공을 지닐 수 있을 것이오. 우리들의 절학을 한데 모은 무공이라면 천하무적이 될 것이오.” 비류신은 대뜸 고개를 갸웃했다. ‘무림 각파의 저마다 독문 절기가 있어 그것으로써 문파를 지키고 또 상대를 제압하기도 하므로 웬만해서 절기를 내놓지 않으려 하는데… 더군다나 구대문파라면 정도(正道)로써, 산천이 다 알고 있는 것인데 그 문파의 모든 절기를 한 사람에게 전수시키다니 정말 이상하군.’ 왼쪽에서 두 번째에 있던 종남파의 장문인이 물었다. “비소협은 이상하게 생각하나보구려?” 비류신은 피식 싱거운 웃음을 웃었다. 이제 그에게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저는 정말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럴 만도 할 것이오. 그러나 지금의 중원은 서로 암투를 벌일 때가 아니오. 사도나 녹림이 날로 기세를 높여 가며 정도를 위협하고 있소. 더군다나 우리까지 없으니 정도의 세력은 아주 미약할 것이오. 우리가 독문 절기를 숨김없이 내놓고 한 사람에게 모두 전수시키려는 의도는 정도 중에도 고강한 인물을 길러내기 위함이오. 그가 앞에 서고 그 뒤에 구대문파 제자들이 따르며 사도와 녹림을 제거하자는 것이오.” “그 한 사람은 누구로 정하셨습니까?” 비류신은 물으면서도 가슴이 쿵쿵 울림을 느꼈다. 해동선사 대답했다. “지혜가 뛰어나고 지금까지 정도를 따라 지내온 인물이어야 되오. 그래야 구대문파의 절기를 모두 전수받을 수 있소.그러니 내가 보기에… 비 시주가 제일 적격자일 것 같소이다.” 비류신은 그런 말은 들었지만 너무나 뜻밖이라 순간 대꾸를 하지 못했다. 무당파 장문 무문도 그의 눈치를 보면서 말을 이었다. “비 시주가 큰일을 맡아야 할 것 같소.” 비류신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런 재주도 없는 제가 감히 어떻게 그런 중책을 맡을 수 있겠습니까?” 소림파 장문인 해동선사가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 “비 시주, 우리들의 권고를 거절하지 마시오. 비 시주라면 능히 중책을 처리할 수 있다고 믿소.” 무림 각 대문파의 흥망에 관한 중책을 맡은 비류신의 심정은 매우 착잡했다. 앞으로 어떤 혈겁이 자신은 물론 전 무림에 퍼질지, 그것은 예측하기 어려운 일이 아닌가? 그러나 비류신은 저 무림을 위하는 일이라면 자신에게 어떤 위험이 닥쳐도 좋다고 생각했다. 소림파 장문인이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비 시주, 다시 말하지만 각대문파 사람들의 생명이 모두 비 시주의 손에 달렸소. 그러나 만사에 신중을 기하여 아무쪼록 착오가 없길 빌 뿐이외다.” 비류신이 의아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제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해동선사가 비류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서 말하시오. 비 시주.” 비류신의 표정이 더욱 심각해졌다. “저도 이야기를 들어서 대강은 알지만 그 두 진인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소림파 장문인 해동선사는 그런 질문에 약간 의외라는 듯한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 “무림 쌍진들은 비급과 영단 때문에 결과적으로 목숨을 잃었다는 게요. 그 후 비급과 영단의 행방을 찾으려고 많은 사람들이 암암리에 노력했소.” 비류신은 결국 그런 것들 때문에 혈겁이 일어나 아직도 무림이 시끄럽게 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말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런 보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소림사 해동선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들이 합심하여 그 신단과 비급이 묻힌 곳을 찾던 중 결국 이런 낭패를 당했소.” 비류신은 그제 서야 모든 일을 완전히 파악할 수 있었다.무림에서 기인이라고 불릴 만큼 명성이 대단한 두 진인들이 남긴 무학비급인 현기현청비록(玄機玄淸秘綠) 그리고 양기혼원신단(陽氣混元神丹) 때문에 명문 구대문파 장문인들까지 감금된 상태로 오랫동안 낭패를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류신의 심정은 착잡했다. 구대 문파 장문인들을 구해야 함은 물론 혈겁을 제거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두 무림 쌍진들이 왜 동시에 죽었을까? 그것이 매우 궁금했다. 그는 심각하게 생각하다가 해동선사에게 물었다. “두 진인들은 누구의 손에 살해되었습니까?” 소림파 장문인 해동선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두 진인은 무공이 서로 같았기 때문에 결판을 낼 수가 없었다오. 물론 일시적인 욕심 때문에 싸웠지만 나중에 죽으면서 무척 후회를 했다오.” “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비류신은 아직도 의문점이 남아 있었다. “여러 노 선배님들은 어찌하여 그 보물이 있는 곳을 알게 되었습니까?” 소림파 장문인 해동선사가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두 진인이 각대문파 장문인들에게 알려 주었소.” 지금까지 듣고만 있던 홍부용이 나서서 말했다. “그런 두 진인께선 서로 싸우다가 목숨을 잃었나요?” 소림파 해동선사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두 진인들은 십 초를 겨루어 승자가 보물을 차지하기로 결정을 했다오. 한데 승부가 판가름 나지 않았지.” “그래서 어찌됐나요?” “결국 승부가 날 때까지 싸웠지만 여전히 결판이 나질 않았소.” 소림파 해동선사가 옛 일을 생각하면서 그 당시의 사정을 계속 이야기했다. 두 진인은 처음에는 장력으로 승부로 겨뤘었다. 그러나 내외공이 같았기 때문에 결판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다시 검으로 전력을 다했지만 여전히 허사였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판가름을 낼 수가 없었기 때문에 마지막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두 진인은 최후 수단으로 서로의 몸을 부딪쳐 승부를 내기로 했다. 각기 손을 뒤로 묶고 가슴과 가슴을 정면으로 부딪치며 승부를 내려 했었다. 처음에는 두 진인 모두 벌떡 일어섰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동시에 피를 토하며 죽었다고 했다. 비류신은 옛 부터 전해내려 오는 말을 듣고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으나 직접 그 신단을 눈앞에서 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그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그럼 그 두 알의 영단은 양기혼원신단이란 말입니까?” 종남파의 장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바로 그것이오.” 홍부용이 긴장으로 상기된 얼굴을 빤히 쳐들고 물었다. “무림에서 이제까지 전해내려 오는 말에 의하면 아직까지 그 신단 두 알을 먹은 사람이 없고, 또 신단의 행방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물론 두 진인이 생사의 결투를 벌였던 장소를 모르기 때문에 자세한 것을 모른다고 들었습니다.” 해동선사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여튼 무림의 귀보라고 하면 모두가 불길한 일이 뒤따르고 있소.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사람, 그리고 뒤에서 훼방을 놓아 자신이 나서려는 사람 등등 때문에 항상 살생이 뒤따르는 것이오. 우리들이 지금 이런 신세가 된 것도 모두 두 진인의 결투 장소를 찾다가 당한 일이오.” 종남파의 장문인이 뒷말을 이었다. “무림 쌍진은 어느 깊은 산골 무덤 앞에서 함께 죽어가는 순간에서야 후회를 했다 하오. 그래서 두 진인은 자신들의 절기를 수록한 현기현청비록과 양기혼원신단을 함께 묻어 놓고 인연이 있는 사람이 찾아가도록 했다는 것이오.” 소림파 장문인 해동선사가 다시 말을 꺼냈다. “그들은 결투를 했던 장소와 두 보물이 묻혀 있는 곳을 지도로 그려 그것을 아홉 조각으로 잘랐소. 그리고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에게 한 장씩 나눠 준 것이오. 물론 장문인들은 뛸 듯이 기뻐했소. 그러나 그것이 우리들의 명을 재촉했고, 오늘 같은 운명을 초래하게 될 줄이야 그 누가 알았겠소?” 그는 잠깐 말을 끊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도 바로 우리들 전대의 장문인들이었소. 그분들도 역시 지도를 빼앗으려고, 또 빼앗기지 않으려고 서로 싸움을 하다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마치셨소. 그분들 뒤를 이어 우리 아홉 명이 장문인으로 추대되고 지도 조각도 물려받았소. 우리들 역시 지도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고심하고 있었소.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우리들이 방심한 틈을 이용하여 복면인이 나타나 각 대문파의 보물을 훔쳐갔던 것이오.” 비류신이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그 복면인은 혹시 저의 은사가 아닙니까?” 해동선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복면인은 소대호가 아니었소.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각대문파의 보물은 그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고, 또 시주에게 전해진 것이오.” 무당의 장문 무문이 말을 이었다. “우리는 처음에 소대호가 무림칠절 중에 으뜸인 진검독자(眞劍獨子)란 사실을 몰랐었소. 그래서 그에게 정식으로 보물을 돌려 줄 것을 제의 했소.그러나 그는 한마디로 교환 조건을 내놓았던 것이오. 우리가 갖고 있는 아홉 장의 지도와 보물을 맞바꾸자고 말이오.” 해동선사가 나직이 코웃음을 쳤다. “흥, 그는 무슨 자신을 가졌었는지 각 대문파의 보물을 찾아가지려면 우리 아홉 명이 한꺼번에 덤벼 자기를 쓰러뜨리라고 했소. 우리는 그와 삼 년 후에 지령보에서 결투를 하자고 약속을 했소. 그러니까 지금부터 십오 년 전이 바로 그와 결투를 약속한 날이었소.” 종남파의 장문인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우리와 결투를 벌이기로 했던 소대호가 자기 동생에게 암습을 당해 밀실에 갇혔던 것이오. 우리가 지령보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그가 밀실에 갇힌 지 삼 년이나 되었던 것이오. 처음에 우리는 아무 영문도 모르고 있었는데 소대천의 암습을 받은 것이오.” 이 말이 나왔을 때 아홉 장문인은 모두 한숨을 내쉬었다. 비류신이 해동선사에게 물었다. “대사님, 그럼 각 대문파의 보물을 훔쳐 간 복면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까?” “알고 있소. 그 복면인은 소대호의 무공에 뒤떨어지지 않고 또한 소대호와 원수지간이오. 그러나 어떻게 해서 그가 훔쳐 간 보물이 소대호의 수중에 들어갔는지를 모르겠소.” 해동선사는 잠깐 침묵을 지킨 후에 말을 계속했다. “그 복면인은 도장맹주(刀將盟主) 선우휘(鮮于煇)라오.” 비류신은 대뜸 전날 소대호가 들려주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렇다면 필시 은사님께서 말씀하신 일남일녀의 상대 중에서 남자에 속하나보구나. 그들 중 남자의 무공을 제압하지 못한다고 했었는데… …’ 해동선사는 품속에서 낡은 비단 조각을 꺼냈다. 흰 바탕에 붉은 실로 무엇인가 수를 그려 놓은 것이었다. 그는 그 손수건 모양으로 생긴 것을 비류신에게 건네주면서 심각하게 말을 하였다. “비 시주, 이것에는 비록과 신단이 숨겨져 있는 장소가 지도로 그려져 있소. 그것은 지령보 근처에 있는 묘지이니 찾기도 쉬울 것이오. 끝으로 새삼 부탁하겠소만, 각 대문파의 보물과 우리들의 절기가 담긴 비급을 꼭 문하생들에게 전해 주시오. 그리고 고화룡을 찾아 자세한 이야기를 전해 주기 바라오.” 종남파의 장문인도 역시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비소협의 수중에는 몇 가지 보물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설령 천지가 개벽을 한다 해도 그것만은 버리거나 빼앗기지 마시오. 만약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빼앗긴다면 수많은 무림인들과 강호 무림이 종말을 고하게 되는 것이오. 강호에 간사한 무리들은 언제라도 그 보물을 노리고 있소. 그들의 간계에 빠지지 말고 될 수 있으면 속히 각 대문파의 문하들에게 전해 주시오. 우리 아홉 명은 오직 비소협과 홍 낭자만을 믿고 눈을 감겠소.” 무당의 장문인이 뒷말을 이었다. “비 시주, 되도록 그 채찍을 남에게 보이지 마시오. 잔금섭혼신편에 얽혀 있는 미묘한 이해 관계를 비 시주는 은사에게 들었을 것이니 더 긴 말은 않겠소.” 비류신은 공손히 예를 올렸다. “무문님의 교훈에 감사드립니다. 은사님께서도 이 채찍에 얽힌 이야기를 해주시면서 주의해서 취급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분은 무림 인물들이 모두 깜짝 놀랄만한 비밀이 담겨져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해동선사가 나직이 한숨소리를 내고 입을 열었다. “잔금섭혼신편 때문에 이미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또 지금도 죽음을 가리지 않는 암투가 계속되고 있을지도 모르오. 시주가 그것을 갖고 강호에 나타나면 또 다시 큰 풍파가 일어나 많은 사람의 피를 보게 될 것이오. 물론 시주의 생명 역시 언제 어디서 암살을 당할지 모를 위험 속에 놓여 있소” “깊이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은사님이 어떻게 하여 동생인 소대천에게 암습을 당했는지 알고 계십니까? 그리고 은사님의 평소 원한은 무엇이었습니까?” 해동선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대호는 당세의 기인이었소. 그가 강호를 많이 유랑했으므로 자연 원한을 맺게 될 일도 생겼기 마련이오. 그러나 우리 구대문파와는 별로 깊은 관계가 없어 비 시주의 물음에 대답할 자신이 없소.” “그럼 은사님과 자웅을 겨룰 수 있는 두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은 선우휘이고 또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 사람은 분명 여자일 것인데요?” “그렇소, 여인이오. 그러나 그 여인의 자세한 내력은 모르겠소. 다만 외호가 황천선구라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이오.” 비류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심 몇 가지 생각을 했다. ‘은사께서 지니고 계신 원한은 그 누구도 자세히 모르는구나. 그렇다면 은사님과 백중의 무공을 지니고 있다는 두 사람에게서 알아야 할 것 같군. 그리고 소대풍이나 소대천에게 알아보아도 자세하게 알 수 있을 것 같다.은사님에 대한 일은 모두가 풀기 어려운 비밀들이며 무림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뿐이구나.’ 해동선사가 가벼운 헛기침을 하며 손짓을 했다. “두 시주는 철장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오시오.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을 가르쳐 주겠소.” 비류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선배님들께선 좀더 뒤로 물러서십시오. 채찍으로 창살을 끊겠습니다.” 그는 말을 하면서 채찍을 오른손에 움켜쥐었다. 마치 톱니같이 생겼으면서 금빛 나는 채찍이 큰 원을 그리는 것 같더니 돌연 쇠창살에서 불꽃이 튀었다. 쨍! 채찍은 금빛을 번쩍였다. 채찍이 한 번 내려쳐지자 한꺼번에 두 개의 창살이 끊어졌다. 비류신이 먼저 안으로 들어가고 뒤따라 홍부용이 긴장된 표정으로 들어갔다. 구대문파의 장문인이라면 호화호식도 할 수 있었고 일개 성을 장악할 수도 있는 신분이었다. 그런 인물들이 신체 곳곳에 쇠고랑을 차고 지하실에서 십오 년 동안이나 지냈다는 것은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비류신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선배님들께서 당하고 계시는 고통을 눈앞에 보니 더욱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홉 장문인들은 다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모두 움푹 파인 눈두덩이 가볍게 떨렸으며, 그 동안의 고난과 슬픔들을 이 순간에 풀어 놓듯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해동선사가 비통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비 시주, 우리는 이제 기맥을 끊어 자결을 하겠소. 죽기 전에 한 가지 더 부탁할 것은 이 쇠사슬을 끊어 달라는 것이오. 그래야 영혼이나마 마음 놓고 하늘로 오를 것 아니오?” 장문인들은 모두 손을 앞으로 들었다. 비류신이 쇠사슬을 끊기 좋게 일직선으로 잡아당겼다. 순간, 금빛이 번쩍이더니 연속적으로 쇠가 끊어지는 소리가 일어났다. 비류신은 장문인들의 발에 걸려있는 쇠사슬까지 끊고 나서 입을 열었다. “됐습니다.” “비 시주, 고맙소. 이 은혜는 할 수 없이 죽어서나 갚아야 될 것 같소. 우리 아홉 사람은 영혼이나마 시주의 일에 성원을 보낼 것이오.” 해동선사는 천천히 구석으로 다가갔다. “비 시주, 저 벽 위쪽에 사람이 빠져나갈 수 있을 만한 구멍이 있소. 물론 그곳에는 철장이 처져 있지만… 우리는 그곳으로 나가지 못했지만 가끔 차고 신선한 바람이 들어오는 것으로 보아 밖으로 이어졌을 것 같소.아마 이 지하실의 새로운 공기도 저곳을 통해 들어오고 있는 것 같소.” 그는 말을 끝내자마자 바닥에 정좌를 했다. 다른 장문인들도 그와 똑같은 자세를 하고 나란히 앉았다. 그들의 표정은 평온하게 보였다. 이미 죽음의 문전에 다다른 사람이라 두려움을 모르는 것이었다. 그들이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다면 벌써 십오 년 전에 소대천의 조건을 수락했을 것이다. 순간, 아홉 장문인들은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맥없이 앞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다시 움직일 줄 몰랐다. 홍부용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불쌍하고도 장렬한 최후로군요.” 그녀는 언제부터인지 나직이 흐느끼고 있었다. 장문인들의 참상을 보고 여자의 마음으로써 울지 않고 견딜 수 없었던 것일까. 아니, 어쩌면 장문인들 뿐 아니라 애매한 죽음을 당한 칠십여 명의 무림인들에 대한 위안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비류신과 홍부용은 커다란 무덤들 앞에서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멍청하니 서 있었다. 먼 곳에서부터 뒤쪽으로 이어져 있는 크고 작은 무덤들이 두 사람을 에워싸고 있는 듯했다. 홍부용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입을 열었다. “비 공자, 우리는 지금 귀신의 나라에 온 것이 아닌가요? 그 지하실이 바로 지옥 같군요?” 비류신은 빙그레 웃었다. “아니오. 이곳은 틀림없는 인간세상이오. 보시오! 이 신선한 공기를… 이제 그 지옥에서 빠져 나온 것이오.” 두 사람이 아홉 장문인이 가르쳐 준 구멍을 통해 얼마쯤 나온 곳은 바로 거대한 무덤 밖이었다. 몸이 꽉 끼일 듯한 통로 속에서 얼마의 시간을 보냈는지 몰랐다. 그저 몇 년 만에 보는 듯한 달빛과 신선한 공기가 들어오고 있는 곳으로 기어 나왔을 뿐이다. 출구는 거대한 무덤의 뒤쪽이었다. 홍부용이 희색을 띠며 다그쳐 물었다. “정말 그 지옥 같은 곳을 빠져 나온 것인가요?” “그렇소. 비록 이곳이 공동묘지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곳은 지옥이 아니오.” 홍부용은 주위를 자세히 둘러보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황량한 벌판과 무수한 무덤 뿐 이었다. 희미한 달빛에 보이는 무덤들은 침묵과 어울려 음산한 분위기를 느끼게 했다. 거대한 무덤은 지령보에서 오른쪽 후방으로 백여 장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무덤 귀퉁이마다 지옥의 사자 같은 모습을 한 석상이 서 있고 그 뒤에 소나무, 버드나무 등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주위는 너무나 조용하여 낙엽이 떨어지는 소리조차 들릴 정도였다. 어디서인가 여우의 울음소리와 올빼미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두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그 울음소리들이 점점 가까워지는 듯했다. 이렇듯 황량한 곳에서 외따로 떨어진 한 채의 집이 있었다. 거대한 무덤 왼쪽으로 조금 떨어져 있는 그 집은 앞쪽의 연못을 제외하고 삼 면이 모두 무덤이었다. 그 모양은 정말 귀신이 살고 있는 집 같아 근처에 가는 것이 꺼려졌다. 그곳은 거대한 무덤에 묻혀 있는 사람이 며칠 동안 안치되었던 곳으로 물론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다. 홍부용은 그 황폐한 집을 유심히 바라보는 비류신에게 가까이 다가서서 부드럽게 물었다. “비 공자, 이제 제 곁을 떠나실 작정인가요?” 그녀의 눈빛에는 강렬한 정이 듬뿍 어려 있었다. 비류신은 뭐라 대답할 수가 없어 재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홍 낭자, 우리는 벌써 몇 끼니를 굶었으니 어서 가서 요기나 합시다.” 지금 이 시각 그들에게 남녀 간의 정을 논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멀리 보이는 지령보의 음산한 건물이 자꾸만 이상하게 보였다. 너무도 허기에 지쳐 있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먹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비류신은 무덤 사이를 빠져나가며 우뚝우뚝 솟아 있는 비석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죽음이란 이렇듯 허무한 것인가? 천하를 한 손으로 휘어잡던 인물들도 죽으면 결국 이 한 개의 무덤으로 남을 뿐이니… 그런데도 천하의 사람들은 명예를 위해 아귀다툼을 하다니 정말 한심스럽구나.’ 그는 자신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홍부용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왜 한숨을 쉬시나요?” “인생의 허무함이 새삼스레 느껴지는 구려.” 홍부용은 무엇인가 결심한 것이 있는 듯 심각하게 입을 열었다. “비 공자가 개의치만 않는다면 나는… …” 홍부용의 눈에 어느새 눈물이 글썽거렸다. 비류신은 침통한 음성으로 말을 받았다. “홍 낭자, 우리는 언젠가 헤어져야 할 운명이오. 만약 이대로 지내다가는 우리 두 사람 사이에 끊을 수 없는 정이 들어 지금보다 몇 배 더한 마음의 고통을 받을 것이오.” “공자의 마음이 그토록 차가울 줄 미처 몰랐어요. 혹시 마음을 쏟고 있는 여자가 따로 있기라도 한가요?” “그렇소! 나에겐 이미 부인이 있소.” 순간 홍부용은 큰 신음소리를 내며 눈에서 원망의 불꽃이 튕겼다. “그렇다면… 공자는 어째서 나를 희롱했나요. 이제 보니 흉한이로군요.” 그녀는 말을 하면서 비류신의 뺨을 호되게 후려쳤다. 그러나 비류신은 피하거나 막지 않았다. 홍부용은 격한 감정으로 계속 두 대를 더 때렸다. 비류신의 뺨은 금세 불그스름해졌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재미납니다.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