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천지쟁패 제2권 사마달 지음 ◈ 第 十一 章 再會 ◈ 第 十二 章 運命의 結合 ◈ 第 十三 章 天琴魔獄 ◈ 第 十四 章 請負殺人 ◈ 第 十五 章 敵과의 동침 ◈ 第 十六 章 血風의 시작 ◈ 第 十七 章 사마덕조의 죽음 ◈ 第 十八 章 血肉 ◈ 第 十九 章 誘惑 ◈ 第 二十 章 남궁사의 재기 ◈ 第 十一 章 再會 빠지지직! 번쩍! 밤하늘에 때아닌 번갯불이 폭산했다. 콰콰콰콰쾅! 곧바로 뇌성벽력(雷聲霹靂)이 그 뒤를 따랐다. 작렬하는 뇌성벽력 속에서 북파무림맹은 여전히 태산같은 웅자를 과시하고 있었다. 쏴아아아아! 마침내 장대 같은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천향소축(天香小築)이란 편액이 걸린 아담한 전각의 지붕 위에도 장대비는 어김없이 내렸다. 작은 연못과 뛰어난 조공의 솜씨로 만들어진 각종 조형물이 잘 조화를 이룬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이다. 후원에 자리잡은 이곳은 외인의 출입이 절대 불가한 북파무림맹의 밀지(密地)다. 활짝 열린 소축의 창가에서 연해월은 우수 어린 표정으로 서 있었다. 꽃 문양이 수놓아진 화려한 의상과 우아하게 궁형으로 틀어 올린 머리에는 옥과 귀금속 등 각종 장신구를 장식하여 그녀의 모습을 한층 더 고귀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연해월은 먹장구름이 뒤덮인 비오는 하늘을 우울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오늘이 보름인데……!' 벌써 몇 번째 보름이 지났는지 모른다. 그는 오지 않는다. 어릴 적 손에 잡히지 않던 그 바람처럼 사랑은 그녀의 가슴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어요!'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연해월은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시비였다. 그녀는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연해월에게 공손히 예를 취하며 대부인의 명을 전했다. "치장이 끝났으면 속히 대전으로 드시라는 분부이옵니다." 마침내 그 날이 오고야 만 것인가? "알았다." 연해월의 음성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시녀는 재촉하는 눈빛으로 연해월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연해월은 쉬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보름달은 뜨지 않았다. 처마를 두드리는 폭우의 소리만이 요란하게 귓전을 두드리고 있었다. 쏴아아! 마음을 훑는 장대비 소리! 거친 빗줄기를 바라보는 연해월의 봉목이 짙은 우수에 잠겼다. '그래. 오늘은 아닐 거야!' 콰콰콰쾅! 하늘은 온통 뇌성벽력으로 뒤덮여 있었다. 수많은 갈래로 파생되는 푸른 번개에 휩싸인 산정. 한 사람이 그 장대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우뚝 서 있었다. 꽈지직! 섬뜩하게 작렬하는 번갯불의 역광에 비친 사내의 모습은 이십대 초반의 준수한 사내였다. 위지강, 그였다. 죽립을 깊이 눌러쓴 그의 턱선을 타고 빗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오지 않는다.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든다. 오로지 그녀만을 생각한 세월이었지만 그 세월은 결국 혼자만의 것이었던가? 아니다. 그녀는 절대로 그를 잊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를 기다리는 건 굳이 사랑 때문만은 아니다. 복수의 정점에 서 있는 한 사람, 북파무림맹의 맹주의 죄 역시 간과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복수의 검을 들기 전에 그녀를 보아야 한다. '해월, 이렇게 간절히 너를 부른다. 와라.' 대부인은 평소와 다르게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주전자의 뜨거운 물을 찻잔에 붓는 그녀의 정숙한 태도는 그 신분의 귀함을 능히 알 수 있게 한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수증기를 따라 고아한 천지차의 향이 방안으로 번져나갔다. "요즘 같아선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겠다는 생각이 드네. 혼례 날이 발표되자마자 어찌나 사람들이 몰려드는지." 남궁사는 빙그레 웃었다. "대부인께서 고생이 많으십니다." 대답은 그녀를 향해 하고 있건만 그의 시선은 연해월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사랑하는 여인은 언제나 아름다운 것일 게다. 누군가를 생각하기에 저리 우수의 표정을 짓고 있을 테지만 그 자체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남궁사다. 사람의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진실한 사랑은 과거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함께 공유하는 것이다. 둘만이 자리하고 싶거늘 대부인은 좀처럼 자리를 비켜줄 마음이 없는 모양이다. "고생은 무슨! 천하에 다시없을 귀한 사윗감을 맞이하는 마당에……." 연해월에게는 대부인의 음성이 아득하게만 들렸다. 자신에게 닥치는 일이거늘 실감이 나지 않았다. 빗소리만큼이나 그들의 음성은 현실이 아닌 공음이다.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위지강만이 그녀에게는 현실인 것이다. '오늘은 아닐 거야. 행여 하고 기다린 보름이 열 번도 더 넘었어. 이렇게 비까지 오는데… 그분은 오늘은 오지 않을 거야.' 여인의 직감이 무섭다지만 사랑에 빠진 사내의 직감 역시 무서운 것이다. 남궁사는 분위기를 전환할 필요를 느꼈다. "맹주께선 바쁘신 모양이군요." 남궁사의 심정을 어찌 대부인이 모를 것인가? "갑자기 급한 손님이 찾아오셨네. 하지만 곧 이리로 오실 게야." 말을 마친 대부인은 연해월을 바라보며 자애스런 음성을 발했다. "넌 참으로 무심하구나. 이 궂은 날씨에 너를 찾아온 남궁공자께 차 한잔도 권치 않다니 말이다. 어서 한잔 권하거라." 권유지만 사실은 명령이다. 그러나 연해월은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다. '하지만, 하지만 만약……!' 넋을 잃고 생각에 잠긴 연해월을 보는 대부인의 눈빛에서 싸늘한 냉기가 흘렀다. 하나, 남궁사가 옆에 있기에 감히 큰소리를 치지는 못하고 다시 한 번 조용한 목소리로 명했다. "어미 말이 들리지 않느냐?" 싸늘한 냉기가 감도는 대부인의 목소리에 그제야 연해월이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대부인은 무서운 표정을 짓고는 연해월에게 주전자를 건넸다. 연해월은 고개를 저었다. 발딱 일어난 그녀는 대부인을 정시하며 또박또박 말했다. "잠시 바람 좀 쏘이고 오겠어요." 말릴 틈도 없었다. 휑하니 자리에서 일어나 급한 걸음으로 사라지는 연해월의 행동에 대부인은 당황하고 말았다. "어딜 가는 게냐?" 평소와 달리 연해월은 들은 체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밖으로 사라졌다. "저런 발칙한 것!" 대부인이 노해 고함을 지르며 일어서는 것을 남궁사가 얼른 제지했다. "그대로 두시죠. 답답했던 모양입니다." 대부인은 마지못한 듯 자리에 앉았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지만 내심은 흐뭇하기 그지없었다. '오호라. 네가 빠져도 단단히 빠졌구나. 그래, 혼례가 성사된다면 내가 저 어린것 때문에 굳이 노염을 탈 필요가 없겠지.' 빗속을 우장도 없이 걸었다. 몇 장 앞 사물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퍼붓는 빗줄기를 뚫고 연해월은 바삐 걸음을 옮겼다. 일단 산에 오르기로 하자 마음이 더할 수 없이 다급해지고 있었다. 막 어떤 건물의 모퉁이를 돌던 연해월이 흠칫하는 표정을 짓더니 걸음을 멈췄다. 건물 안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던 것이다. '아버님이……!' 일종의 별원이나 마찬가지인 곳이었다. 해서 사마덕조가 좀처럼 들지 않는 곳인데 그곳에서 사마덕조의 음성이 들린 것이다. 연해월은 조심스럽게 건물을 향해 다가갔다. 사방 창문을 활짝 열어놓은 건물의 대청에는 두 사람이 대좌해 있었다. "그 녀석의 이름이 위지강이라고 했나?" 가슴이 아리다. 빗물은 속옷까지 적시지만 위지강이란 이름은 그녀의 가슴속 깊은 곳까지 적시는 이름이 아닌가? 그러나 감정에 치우치기보다는 냉정해야 했다. '왜 아버님이 그 사람을 언급하는 것일까?' 과거의 그 일 때문에? 아니다. 천하를 경영하는 사람이 어찌 촌구석의 청년에게 마음을 쓸 정도로 한가하단 말인가? 필히 무슨 내막이 있을 것이다. 연해월은 소리나지 않게 좀더 가까이 접근했다. 사마덕조는 탁자에 앉아 맞은편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미간에 점이 박힌 인물, 일명 점박이가 앉아서 능글맞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제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잔결사흉을 황천길로 보낸 그놈의 검법은 틀림없이 천마검법이었습니다." 사마덕조는 상대방을 유심히 살폈다. 정보의 거간꾼이라 할 수 있는 이들 말의 신빙성은 거의 절대적이다. 정보를 팔아 먹고 사는 그들에게 한번의 실수는 바로 패망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럼에도 점박이의 말이 쉽게 믿어지지 않는 것은 그가 언급한 내용이 너무도 놀랍기 때문이다. "목숨을 걸 수 있나? 천마검법은 항간에 유출된 적이 없어 그 진위를 판별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네." 점박이가 비릿하게 웃었다. "천마검법에 관해서는 이 풍모도 조금은 알고 있소이다. 결코 화려하지 않은 대신 실낱같은 허점조차 찾아볼 수 없는 고금최강의 검법이 천마검법이죠! 바로 그것을 직접 보기 위해 거금 십만 냥을 투자했다는 얘기 아닙니까?" 점박이는 술잔을 들어 음미하듯 천천히 한잔 들이켰다. 그런 연후 술잔을 탁자에 놓으며 음침한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생각하시오? 지금까지 말씀드린 정보만 해도 오십만 냥의 값어치는 충분히 된다고 생각하오만." 그렇다면 점박이가 잔결사흉에게 십만 냥을 주기로 하고 그들로 하여금 위지강을 공격토록 한 이유가 바로 천마검법을 알아내려는 수작이었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렇다면 잔결사흉은 결국 돈 구경도 못하고 위지강에게 애꿎은 목숨만 잃은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위지강을 잡아오는 조건으로 십만 냥을 주기로 했으니 잔결사흉이 모두 죽은 지금 점박이는 돈 한푼 안들이고 그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매우 치밀하고 교활한 인간이었다. "그는 지금 어디 있나?" 사마덕조는 점박이의 째진 눈을 정시했다. 풍소는 내심 헛바람을 들이켰다. 듣기로는 호랑이를 대하면 먼저 그 안광에 질려 오금이 저리고 그래서 꼼짝도 하지 못한다더니 사마덕조의 눈길이 그랬다. 흥정을 붙이려는 생각이 싹 가시게 하는 무서운 눈길이었다. 풍소는 내심 이를 악물었다. 물건이 클수록 배짱은 필수다. 사망유자(死亡幽子)라는 호를 얻으며 강호를 종횡한 그에게 정보를 싼값에 팔아치우는 건 바로 죽음이었다. 상대가 아무리 범같이 무서운 사마덕조라 해도. "오십만 냥. 그 돈을 먼저 받기 전에는 절대로 그의 종적을 말할 수 없소!" 사마덕조는 무심한 눈길로 사망유자 풍소를 바라보았다. 풍소에게는 참으로 죽음처럼 긴 시간이었다. "사망유자, 간덩이가 부었군!" 마침내 사마덕조의 입에서 묵직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죽음의 상인으로 불리는 그대지만 감히 내 앞에서까지 이렇게 턱없는 배짱을 부릴 줄이야. 허나……." 사마덕조는 품속에서 전표 한 장을 꺼내 탁자에 척 놓았다. 거금 백만 냥짜리 전표였다. "그 배짱이 마음에 들었다." 저승에서 황금을 건진 격인가! 사망유자 풍소는 전표를 집으며 황홀한 기분을 맛보았다. "듣던 대로 과연 화끈하시구려!" 풍소는 전표를 접어 품속에 깊숙이 갈무리했다. "몇 군데를 놓고 고심했소이다. 북파무림맹, 무적검맹, 환희천, 남극벌 중 어디를 찾아갈까 하고 말이오. 역시 이곳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돈을 쥔 흥분 때문에, 아니면 자신에 대한 만족감 때문에 떠벌리는 말이다. 그 말을 듣는 사마덕조의 안색은 돌덩이처럼 굳었다. "놈은 어딨나?" 순간 사망유자의 신형이 푸스스스 뿌옇게 흐려지면서 실내에서 사라졌다. 사망유자가 사라지고 난 직후 허공에서 그의 음침한 음성이 들려왔다. 죽음으로부터의 도주, 그것이었다. "북산(北山)!" 이때 창문 밖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연해월의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북산이라면, 북경에서 가장 높은 산……! 아, 그분이.' 가슴이 저린다. 이 폭우가 내리는 날 위지강은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곳엘 가 있는 것이 아닌가! '가야 해!' 사마덕조는 딸의 움직임을 세세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빗소리에 들리던 딸의 숨결은 그에게 적지 않은 아픔을 불러일으켰다. '북산이라면 바로 지척지간!' 사마덕조는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봉황이라. 그러나 둥지를 잘못 틀었으니… 해월의 앞날을 위해서라도 놈을 처리해야 한다." 그때였다. 벽면이 소리 없이 열리며 한 사람이 귀영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흑의를 걸친 깡마른 사내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의 손에는 아직도 피가 떨어지고 있는 사망유자 풍소의 수급이 들려 있었다. 풍소의 그 마지막 말이 죽음을 불러온 것이다. "고생했다. 흑월(黑月)." 흑월, 본명인지 모르나 그가 풍기는 분위기와 완벽하게 일치되는 이름이었다. 치렁치렁한 검은 흑발, 검게 그을린 얼굴 한 중앙에 자리한 냉혹한 눈빛! 검은 색의 동공이나 그의 눈동자가 회색으로 보인다. "어려움은 없었더냐? 풍소가 동영의 닌자술에 정통하다고 하던데!" 흑월은 대답 없이 희미하게 웃었다. 사마덕조는 빙그레 웃었다. "하긴 너에게 어떤 일이 힘들 것이겠냐." "달리 하명하실 분부가 없다면 이만……." "멋진 사냥감이 나타났다. 지금 즉시 백팔혈영대(百八血影隊)를 소집하도록 하라! 이번 일은 본좌가 직접 처리할 것이다." 백팔혈영대를 소집하라. 그 말을 들은 흑월의 회색 빛 동공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천하사세의 주인이라도 제거하는 일이란 말인가? 의문이 일었지만 묻지 않는다. "명을 받듭니다." 흑월이 사라지고 사마덕조는 홀로 방안을 서성였다. 하늘이 자신을 돕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궁세가와의 혼사가 잘 이루어진 이때 천마비록을 지닌 위지강의 행방을 이렇게 쉽게 파악할 줄이야. '십칠 년 전의 실패를 되풀이하진 않겠다.' 쏴아아! 산 전체가 젖어 있었다. 폭우는 안개를 파생시키고, 거센 빗줄기는 그 안개를 마치 검처럼 베며 지면에 박히고 있었다. 절정의 무공을 지닌 그에게 어찌 풍우가 문제가 될 것이랴만 이렇게 오한이 드는 데는 이유가 있다. 오지 않는다. 그녀는 오지 않는다. 연해월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슴의 눈을 닮은 맑고 커다란 봉목으로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그녀는 천진하게 이렇게 말했었다. ― 나를 사랑하나요? 그 모습은 세상의 어떤 용어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사랑스러웠었다. 위지강은 무릎 위에 놓여진 두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온다. 반드시!' 그때였다. 스스슥! 미세한 인기척이 그를 향해 밀려들고 있었다. 그 속도는 가공할 정도로 빨라 감지하는 순간 벌써 백 장 안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누가! 연해월은 이렇게 가공할 경공술을 펼치지 못한다. 반사적으로 돌아선 위지강의 두 눈에 뚜렷하게 잡히는 한 사내. 빗줄기가 그의 몸에서 튀고 있었다. 원형의 강막에 자리한 그 사내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주위 십여 장의 물체들이 빗속에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칠척의 거구! 태산처럼 장중한 기운! 사마군이었다. "오랜만이군!" 낮게 울리는 사마군의 저음에 실린 뜻을 위지강은 능히 파악했다. "……!"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서 실망했나?" 어느새 위지강의 안색은 무표정하게 변해 있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고, 연해월 대신 사마군이 이곳에 온 것은 결코 좋은 뜻이 아님을 안 것이다. 그가 북파무림맹의 정체를 파악했듯이 그들도 그의 정체를 파악한 것일 게다. 연해월이 발설했을까? 아니다. 그녀는 아닐 것이다. "내가 나온 것이 의외인 모양이군. 해월이 매달 보름만 되면 어김없이 이곳에 오르는 이유를 알고 있었지. 솔직히 남궁가의 그 기생오라비보다는 자네가 더 마음에 들어. 그렇지만 어쩌겠나. 자네도 알다시피 섞일 수 없는 두 가문이 아닌가!" 모든 건 확연해졌다. 사마군이 검을 뽑았다. 스릉! "천추군림가의 후예라 들었네. 검의 전설을 이룬 그 가문의 후인과 이렇게 검을 논할 수 있음은 무상의 영광, 최선을 다하겠네!" 중단세를 취한 사마군의 전신에서는 가히 태산같은 기운이 폭산하고 있었다. "연해월은, 그녀는 어디 있소!" "포기해라!" "방법이 없다는 말이구려. 좋소, 직접 연해월을 찾아가지." "직접 찾아간다? 후후, 기개가 좋군. 내 검에 오 초만 견딘다면 해월을 아예 네 아내로 만들어주지!" 스르릉! 위지강의 허리에 두른 검이 용음을 울리며 빠져 나왔다. "장부일언(丈夫一言)은 중천금(重千金)이라 했소. 사마형의 그 말을 믿도록 하겠소!" 전신에서 허연 김을 무럭무럭 피워 올리며 두 사람은 대치상태를 이루었다. * * * 두두두두두두! 흙탕물을 튀기며 한 필의 준마가 빗줄기를 뚫고 맹렬히 치달리고 있었다. 마상에는 비에 흠뻑 젖은 연해월이 앉아 연신 채찍을 휘둘러댔다. "이럇, 이럇!" 두두두두! 준마는 질척하게 젖은 땅거죽을 힘차게 박차며 무서운 속도로 내달렸다. 마차가 향하는 곳은 북산이었다. * * * 저벅저벅! 검은 가죽신에 검은 가죽 피풍의(皮風衣), 챙이 넓은 흑립을 쓴 사마덕조는 대전의 어둡고 긴 복도를 걸어나오고 있었다. 이곳은 북파무림맹에서도 매우 비밀스런 장소 중 하나, 바로 북파무림맹의 핵이라 할 수 있는 백팔혈영대가 언제나 출동준비를 갖추고 있는 장소였다. 사마덕조는 두 명의 수하가 시립해 있는 복도 끝 철문으로 다가갔다. 철컹! 이윽고 그가 문가에 이르자 육중한 철문이 활짝 열렸다. 사마덕조는 문밖으로 척 나섰다. 쏴아아아아! 밖에는 억수 같은 폭우가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사마덕조가 서 있는 대전의 계단 밑에는 흑월이 그의 말고삐를 잡고 대기 중이었다. 그리고 그의 뒤쪽, 성벽에 둘러싸인 비밀스런 분위기의 광장엔 백팔혈영대가 말을 타고 도열해 있었다. 그들은 모두 검은 죽립에 검은 우의를 두른 매우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도 그들의 얼굴은 냉혹하고 무심하기만 했다. 사마덕조는 도열해 있는 백팔혈영대를 쭉 둘러본 뒤 만족한 미소를 떠올렸다. 히히힝! 그때 사마덕조의 애마가 요란한 투레질을 터뜨렸다. 그 순간 번뜩인 일검! 대완의 명마, 능히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는 그 거마의 목이 단 일검에 잘려나갔다. "한 사람을 처치한다. 아울러 오늘의 이 일은 절대 비밀로 남아야 한다." 백팔혈영대는 대답조차 없었다. 흑월이 새로 끌어온 말을 향해 사마덕조의 몸이 가볍게 날아올랐다. "가자!" 백팔혈영대가 일제히 박차를 가했다. 사마덕조를 중앙에 포진한 채 그들은 절묘한 기마술을 발휘해 바람처럼 이동하고 있었다. 한 사람이 망루에 서 있었다. 빗줄기를 뚫고 사라지는 백팔혈영대를 주시하는 그 인물, 남궁사였다. '좋지 않아. 이 비도, 그리고 사마덕조의 느닷없는 출정도!' * * * 검법은 태산을 벨 듯 위맹하고, 그 속도는 섬전 같았다. 허공에서 자유자재로 방향을 전환하며 공격을 가하는 사마군의 검법은 이미 극점에 도달한 노회한 검수의 그것이었다. 피할 수 없다. 피함은 죽음이다. 연해월이 가장 따른다는 사마군이었다. 정면승부를 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초절정의 고수를 애초에 제약을 받고 펼치는 승부라니! 사마군의 공격은 목전에 임박하고 있었다. 피할 수 있는 모든 방위를 철저히 점하며 압박해 오는 공세였다. 위지강은 다시 한 번 천마용등보를 펼쳤다. 찰나간에 사마군의 공격은 그를 스치고 목표를 잃은 검은 광풍을 일으키며 사방 십여 장을 휩쓸었다. 바위가, 초목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날아올랐다. 공격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사마군의 신형이 허공에서 가볍게 돌았다 싶은 순간 검극은 벌써 삼십육 방위를 점하고 있었다. 츠츠츠츳! 전신을 덮쳐오는 검영을 바라보며 위지강의 안색이 굳어졌다. '피해서만 될 일이 아니다.' 원수의 아들이다. 연해월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검을 뽑았을 것이다. 그에게 검을 들이대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함에 울컥 울화가 치민 위지강의 신형이 공간을 갈랐다. "헉!" 사마군이 다급성을 토했다. 위지강이 정면으로 짓쳐드는 것이다. 즉, 검날을 향해 무방비 상태로 달려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위지강의 검이 긴 호선을 그릴 줄이야! '뭐야, 정면승부라 이건가?' 피하지 않는다. 그게 사마군이었다. 쿠카카캉! 카캉! 파란 불꽃이 사방으로 난무했다. 사마군의 검과 위지강이 펼쳐낸 검세가 충돌하자 북산의 산 정상이 폭발이라도 하듯이 터져 나갔다. 빗줄기가 억수같이 퍼부음에도 불구하고 누런 황진이 북산 전체를 휘감는 가운데 두 사람의 신형이 맹렬히 허공으로 치솟았다. "위지강, 제법이구나. 허나, 각오해라." 촤차창! 검이 격렬하게 격돌하면서 두 사람은 허공에서 서로 엇갈렸다. 누군가의 몸에서 자욱한 핏물이 번졌지만 누구도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지면에 내려선 두 사람은 서로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두 사람 모두 상대의 무공에 놀랐지만 특히 사마군의 놀람은 상상을 초월했다. '불과 일년도 안된 사이에 이토록 강해질 수는 없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위지강을 쏘아보았다. "이제 보니 지난번에는 무공을 숨겼었군!" 위지강은 검을 늘어뜨린 채 담담하게 말했다. "그 이유는 당신도 잘 알 것인데?" 사마군이 차갑게 웃었다. "좋아, 좋아. 이제야 비로소 싸울 기분이 나는군!" 팟! 그의 신형이 위지강을 향해 쾌속하게 쏘아져왔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재간을 숨기고 있는지 몰라도 이제부턴 밑천을 모조리 털어놔야 할 거다, 애송이!" 그는 좌우로 검을 맹렬히 휘둘렀다. "용기가 있다면 이것까지 받아보아라!" 쿠쿠쿠쿠쿠! 지면을 쩍쩍 가르며 엄청난 검기가 무섭게 뻗쳐 나왔다. 그 무서운 기세에 위지강의 검미가 일순 꿈틀했다. '검기(劍氣)! 그렇다면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라는 얘기!' 위지강이 지면을 박차고 솟구쳤다. 허공에서 몸을 뒤틀며 휘도는 순간, 그의 손에 쥔 검이 가공할 기세로 공간을 갈랐다. 쿠쿠쿠쿠! 허공을 가르며 맹렬히 뻗어 나가는 검기, 두 줄기의 검기가 정면으로 마주쳐갔다. 쿠콰콰콰쾅! 검기가 충돌하면서 천번지복의 폭음이 울렸다. 충돌의 여파는 대단했다. 땅거죽은 거북이 등가죽처럼 쩍쩍 갈라졌고, 크고 작은 바위들이 부서지고 터져 나갔다. 뿐만 아니라 방원 십 장 안의 사물들이 충격의 여파에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우욱!" 미친 듯이 난무하는 낙진 속에서 사마군의 신형이 거세게 퉁겨져 나갔다. 퉁겨져 나가면서도 연속해 몸을 뒤집으며 지면으로 떨어져 내렸다. 쿵! 그러나 사마군은 제자리에 서지 못한 채 깊숙한 발자국을 찍으며 연거푸 뒷걸음질 쳤다. 턱! 마침내 그의 등이 커다란 나무에 부딪쳐서야 신형을 겨우 가눌 수가 있었다. 사마군은 앞쪽에 찍혀 있는 발자국들을 보며 불신과 경악이 뒤범벅이 된 얼굴이 되었다. "내, 내가 밀리다니!" 사마군의 두 눈은 불신으로 한껏 치켜 떠져 있었다. 슈아아아악! 그때 자욱한 낙진 속에서 섬전같이 쏘아져 오는 한 가닥 빛줄기가 보였다. 순식간에 목덜미까지 다다른 빛줄기를 보며 사마군은 두 눈을 있는 대로 부릅떴다. '강하다. 아버님조차 이렇게 강하진 못할 것이다.' 사마군은 눈을 감았다. "위지공자!" 이때 허공에서 터져 나오는 커다란 외침에 사마군을 공격하던 위지강의 행동이 멈칫했다. 그 음성!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그 음성! 푸욱! 검은 꼬리를 틀어 사마군 대신 뒤의 고목에 깊숙이 박혔다. '연해월!' 위지강은 천천히 돌아섰다. 쏴아아아아! 쏟아지는 빗줄기, 뿌옇게 서린 우막(雨幕)! 그 가운데 한 필의 말을 타고 서 있는 한 여인의 영상이 가슴을 치고 있었다. '왔구나.' 웃었다. 모든 걸 다 잊고 웃었다. 놀랍고도 반가운 마음은 연해월도 마찬가지.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렸다. 콰콰콰쾅! 사마군은 씁쓸하게 웃었다. 작렬하는 번개의 빛을 빌어 서로를 깊은 눈길로 마주한 두 사람을 본 것이다. 그건 묘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사랑이란 감정을 아직껏 지녀보지 못했으면서도 그는 문득 저런 것이 사랑이 아닐까 생각해 본 것이다. 아버지를 위해서라면, 아니 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객관적으로 사랑하는 누이동생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반드시 위지강을 죽여야 한다. 아니! 사마군은 고개를 저었다. 동생이 택한 사랑이었다. 십 몇 년을 외롭게 홀로 산 동생에게 멋진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에 위배된다고 해도. "이봐, 연해월을 행복하게 해줄 자신 있나?" 뜻밖의 말에 위지강은 사마군을 바라보았다. 태산이란 저런 것인가? 빗줄기 속에 자신을 보며 웃는 사마군에게서 위지강은 태산을 보았다. "자신이 없다면 그녀를 찾지도 않았을 것이오." 사마군은 자신의 검을 검집에 꽂았다. "하긴 남궁사 같은 바람둥이보다는 너 같은 무일푼이 제 계집을 챙기는 편이지." 사마군은 빙긋 웃으며 연해월을 쳐다보았다. "잘해봐라, 연해월!" 사마군의 신형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찰나간에 백여 장을 벗어난 사마군의 음성이 울림을 울리며 들려왔다. "두 사람. 되도록 이 자리는 빨리 벗어나는 게 좋을 거야," 엄청나게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위지강과 연해월은 마주섰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말할 수 없는 감회가 서려 있었다. 특히 요 몇 달 동안 연해월이 겪은 마음 고생이란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연해월의 꽃잎 같은 입술이 바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위지강은 그런 연해월의 모습에 쓸쓸한 미소를 떠올렸다. "내가 너무 늦게 왔소?" 위지강의 그 한마디에 마침내 연해월의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연해월은 눈물을 감추려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니에요, 조금 늦긴 했지만, 아주 늦은 건 아니에요."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위지강을 그리워하고 만나고 싶어했던가! "오늘이라도 와주신 걸 신께 감사하고 있어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위지강은 자신의 가슴에 안겨 작은 새처럼 떨고 있는 연해월을 내려다보았다. 연해월도 눈물을 흘리며 위지강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한데 뒤엉키며 무수한 언어가 오갔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 수가 있다고 그 누군가 얘기했던가! 위지강은 연해월을 껴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쏴아아아아! 폭우는 하염없이 내리고 있건만 두 사람은 떨어질 줄 몰랐다. 여기저기 뒤집힌 지면과 부서진 바윗덩이들, 그리고 꺾어진 나무 등 격전의 흔적이 역력한 현장. 이곳은 바로 위지강과 사마군이 대결했던 바로 그 장소였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이 격전의 현장에 사마덕조가 서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백팔혈영대가 예리하게 주변을 살피며 늘어서 있었다. 사마덕조의 안색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어떤 놈이 선수를 쳤습니다." 혈영대주인 비영사(飛影士)가 주위를 둘러본 뒤 싸늘한 눈빛을 발하며 말했다. 비영사는 냉혹한 기도를 풍기는 사십대의 중년인으로 가슴에는 붉은 글씨로 혈(血)자가 새겨져 있었다. "싸운 흔적으로 봐선 대단한 무예를 지닌 자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만!" 사마덕조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그는 자신보다 그 누군가가 먼저 선수를 쳤다는 사실에 내심 대단히 분노했다. '어떤 놈이 감히……!' 이때 무엇을 발견했는지 한쪽에서 백팔혈영대의 무사 하나가 그를 다급히 불렀다. "여길 보십시오, 맹주님!" 사마덕조는 재빨리 그곳으로 달려갔다. 무사는 손가락으로 어지럽게 찍혀 있는 조그만 발자국들을 가리켰다. "여기 이렇게 여자 발자국이 찍혀 있습니다!" 사마덕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뒤이어 달려온 비영사와 그의 수하들도 얼굴이 굳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사마덕조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월아. 네가 다된 밥에 재를 뿌렸구나!' 그는 분노에 휩싸인 채 고개를 홱 돌렸다. 무서운 불꽃이 그의 눈에서 일었다. "아직 멀리 가진 못했다. 제사대(第四隊)까지는 빨리 흩어져서 놈을 찾아라!" "존명!" 파파파팟! 우렁찬 대답과 함께 혈영대의 무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비산했다. 백팔혈영대의 인원은 일백, 일대(一隊)는 이십 명이다. 사마덕조는 돌아서면서 비영사와 남은 혈영대의 무사들을 향해 차갑게 외쳤다. "나머지는 나를 따라오도록!" 그가 막 수하들을 이끌고 움직이려는 찰나였다. "내 짐작이 옳다면 한천애(恨天崖) 쪽을 뒤지는 것이 가장 빠를 겁니다." 문득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에 사마덕조는 흠칫했다. 그는 음성이 들려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억수같이 퍼붓는 빗줄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남궁사가 수림 속에 서 있었다. 그는 챙이 넓은 은립을 쓰고 옆구리에는 검을 찬 모습이었다. "길은 좀 험해도 거기만 벗어나면 곧장 물길로 이어져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사마덕조는 남궁사를 바라보며 놀란 듯 물었다. "자네가 여길 어떻게 왔나?" 남궁사의 표정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허나, 당연하다는 듯한 어투로 대답했다. "아내 될 여자의 신상에 변고가 생겼는데 내가 오지 않으면 누가 오겠습니까?" 우르르르릉! 폭우로 잠긴 험악한 계곡이다. 계곡을 반쯤 메운 거센 물살은 굉음을 토하며 무서운 속도로 흘러가고 있었다. 물길이 미치지 않는 심산유곡 깊숙한 곳에 작은 동굴이 있었다. 암벽과 암벽 사이에 천연적으로 만들어진 동굴이었다. 자세히 살펴보지 않는다면 발견조차 하기 어려운 은밀한 동굴이었다. 동굴 속 깊은 곳에는 위지강과 연해월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마주앉아 있었다. 위지강은 모닥불을 쬐고 있는 연해월을 바라보았다. 불빛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녀의 희고 고운 양 볼은 모닥불의 열기로 인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더 아름다워졌소." 위지강은 그녀를 보고 빙긋 웃었다. 연해월은 짐짓 입술을 내밀며 뾰로통하게 말했다. "그럼 전에는 아름답지 않았단 말인가요?" 위지강은 그녀의 예상치 않은 반격에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 "하하하. 얘기가 그렇게 되나?" "호호호!"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까지 겪었던 두 사람의 마음 고생이 일시에 모두 날아가 버리는 그런 웃음이었다. 특히 연해월의 마음은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문득 생각난 듯 연해월이 물었다. "참, 할아버지는 어디 계시죠?" 갑자기 위지강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피를 토하며 죽어간 풍천양이 생각난 것이다. "작년에 돌아가셨소!" 연해월이 흠칫했다. 그녀는 이내 안쓰러운 표정이 되었다. "그랬었군요!" 잠시 두 사람은 우울한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그들의 귓전에 들려오는 것이라곤 폭우 소리와 거센 물살이 휩쓸려 내려가는 굉음뿐이었다.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연해월이었다. "이제 우린 어디로 가죠?" "우리?" 연해월은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이 그래요? 그럼 우리가 아니란 말인가요?" 위지강은 우수에 젖은 눈빛으로 연해월을 바라보았다. "그대의 혼인 얘기를 오다가 들었소. 처음엔 잘못 들은 줄 알았는데." 연해월의 희고 가는 손가락이 위지강의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그 때문에 그의 말은 다 이어지지 못했다. 연해월은 밝게 웃었다. 태양보다 더 눈부신 아름다운 웃음이었다. "거짓말이에요." 울지 않으려 했는데 자꾸만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녀의 봉목엔 또다시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렸다. "어디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다 잊어요." 마침내 눈에 고인 눈물이 양 볼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왠지 모를 서러움이 그녀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솟아올랐던 것이다. "전 그대로예요. 예전에도, 지금도, 또 앞으로도. 알아요?" 위지강의 전신에서 격정의 잔물결이 일었다. "해월!" 연해월은 흠뻑 젖은 몸을 애처롭게 움츠렸다. "나 추워요. 좀 안아줘요!" 그녀의 목소리는 떨려나왔다. 위지강은 미소를 지은 채 두 팔을 척 벌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연해월이 새처럼 그의 품안에 날아들었다. 위지강은 가슴에 안긴 연해월의 턱을 두 손으로 소중하게 받쳐들었다. 뜨거운 눈길이 마주치며 서로의 입술이 가까워졌다. 그리고 마침내 두 개의 입술은 살며시 포개져 하나가 되었다. 타오르는 모닥불의 열기보다 더 뜨겁게 두 사람은 서로의 입술을 탐하고 또 탐했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