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구약성경 인용)
마태복음 21장 1-5절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선지자는 스가랴이다. 스가랴 9장 9절『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스가랴 9장 9절에서 선지자 스가랴는 예언적 암시의 말로 가까운 미래로부터 아주 먼 미래, 이스라엘이 억압자로부터 해방될 마지막 구원의 때로 눈을 돌린다. 예루살렘은 최후의 대적들과 그들의 침략으로부터 보호받을 것이다. 이것은 이사야 60장 18절과 에스겔 28장 24절에서도 나타난다.
스가랴는 무자비한 정복자 알렉산더의 활동을 생각하는데서 시선을 돌려, 장차 오실 이스라엘의 왕의 인격과 겸손하신 사역을 찬양한다. 민족을 대표하고 있는 시온과 예루살렘은 이 영광의 왕의 오심을 기뻐하고, 즐거이 부르라는 요구를 받는다. 알렉산더 대왕이 진격해 올때 열방들은 두려워 떨었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이신 메시야의 출현을 함께 기뻐했다. 왜냐하면 메시야는 이스라엘에 오시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하여 오시기 때문이었다. 알렉산더 대왕은 파괴와 파멸을 위해서 왔지만, 의로우신 메시야는 구원과 속죄를 위해서 오시는 것이다. 지상의 왕은 장엄하고 교만하게 오지만, 하늘에서 오시는 주님은 비천한 나귀를 타고 오시는 것이다.
마가복음 11장 5-6절에는『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제자들이 보니 나귀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있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묶여있던 끈을 풀려고 하니, 나귀새끼 주인인듯한 어떤 사람이 물은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주가 쓰시겠다”고 말한 것이다. “주가 쓰겠다”는 말은 이미 나귀새끼에 대한 스가랴의 말이 유대인들에게 다 알려진 이야기가 된다. 주가 쓴다는 말은 희생제물로 주님께 드린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벳바게와 베다니를 자주 들르셨으므로 그 지역의 지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으며, 주변에 누가 나귀를 가지고 있었는지 알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수님이 그 지역에 도착해서 주변을 다니셨을 것이다. 베다니에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에서도 등장한다. 문둥병 환자 시몬이 살고 있던 마을이기도 하다. 따라서 예수님은 자연스럽게 제자 둘에게 그런 지시를 한 것이다.
요한복음 12장 14-16절에서는『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제자들은 그들의 스승 예수가 스가랴가 말하는 너의 왕이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다는 말의 뜻을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야 깨닫게 된 것이다. 스가랴가 말하는 왕은 여호와를 의미한다. 그런데, 나귀새끼를 탄다는 말에 대해서는 다들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만왕의 왕이신 여호와께서 온 세상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육신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후에야 제자들이 나귀새끼의 의미를 깨닫게 된 것이다.
나귀를 타는 예수님은 많은 의미를 가지는 상징적인 표현이다. 나귀는 부정한 동물로서 제물로 사용되지 않았다. 그런데, 출애굽기 13장 13절에서『나귀의 첫 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네 아들 중 처음 난 모든 자는 대속할지니라』라고 말한다. 앞부분(나귀의 첫 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을 히브리어로 보면,
וְכָל־פֶּ֤טֶר חֲמֹר֙ תִּפְדֶּ֣ה בְשֶׂ֔ה
『웨칼(모든) 페테르(첫태생) 하모르(나귀의) 팁데흐(너는 대속할 것이라) 브세흐(양으로)』
나귀의 첫태생은 목을 꺽어 죽인다. 그런데, 나귀는 부정한 동물이므로 제물로 사용되지 않지만,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양을 대신해서 사용될 수 있다는 말이다. 출애굽 당시에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을 구하기 쉽지 않을 때, 하나님이 나귀 첫새끼를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나귀새끼의 주인은 어차피 죽여야 하는 동물인데,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하니, 흔쾌히 승낙하는 것이다.
초태생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사람이 손을 대거나 타거나 해서는 안되었다. 초태생이 태어나면 칠일 동안은 어미와 함께 있게 하다가 팔일이 되면 구별하게 된다. 그래서 목을 꺽거나, 제물로 바쳐질 때까지는 매여있게 된다. 출애굽기 13장 12절에서『너는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과 네게 있는 가축의 태에서 처음 난 것을 다 구별하여 여호와께 돌리라 수컷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초태생인 나귀새끼를 타는 예수님의 모습은 두가지의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초태생(장자)이라는 것이다. 장자는 죽음으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다. 모든 세상에 있는 자들은 이렇게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을 성경은 말해준다. 실제 출애굽 전에 죽음의 사자가 지나갈 때 문설주의 어린양의 피를 칠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제외한 애굽의 모든 장자는 죽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다 죽은 것이다. 희생 양이 대신 죽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도 죽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귀를 탄 예수님은 죄인(장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둘째, 나귀새끼는 어린양을 대신하여 대속의 죽음을 한다. 나귀새끼를 탄 예수님은 어린양으로서 죄인을 대신하여 대속의 죽음을 하시는 것이다. 나귀새끼가 곧 양이고, 나귀새끼를 탄 예수가 바로 어린양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린양이 대속의 죽음을 맞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가는 모습이다.
구약시대 당시는 어린양의 죽음은 한번으로 끝나는 영원한 제사가 아니었다. 죄인들이 죄를 지을 때마다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히브리서 9장 15절에서는『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첫언약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계명을 받고, 성소를 세우고, 제사장을 두어 율법에 따라 예물을 드렸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중보자라고 하시는 것이다. 첫언약 때 범한 죄는 율법에 의한 죄를 의미하는 것으로, 예수가 율법에 의한 죄를 속량하려고 죽으므로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했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9장 24-25절『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구약시대 대제사장은 해마다 다른 피로 제사를 드려야 했는데, 9장 28절에서는『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단번에 모든 죄를 담당했으며, 부활을 통해서 이를 증명하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의인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에서 신도들이 날마다 죄를 용서받기 위해 기도하고 애를 쓰는 것을 보지만,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인간적인 생각을 그 자리에 두기 때문이다. 육의 눈으로 육적인 자아(옛사람)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적 부활을 믿는 자는 영의 눈으로 영적인 자아(새사람)을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