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돈순(徐敦淳)
[진사] 헌종(憲宗) 15년(1849) 기유(己酉) 식년시(式年試) [진사] 2등(二等) 8위(13/100)
자(字) 백후(伯厚)
생년 기사(己巳) 1809년 (순조 9)
합격연령 41세
본인본관 대구(大丘)
거주지 수원(水原)
[관련정보]
[이력사항]
선발인원 100명 [一等5・二等25・三等70]
전력 유학(幼學)
사마시제 일시(一詩)
부모구존 구경하(具慶下)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서인보(徐麟輔)
관직 : 유학(幼學)
[처부(妻父)]
성명 : 이우필(李遇泌)【補】(주1)
본관 : 한산(韓山)【補】
[처부(妻父)]
성명 : 유익채(柳翼采)【補】(주2)
본관 : 문화(文化)【補】
[안항(鴈行)]
제(弟) : 서민순(徐敏淳)
제(弟) : 서휘순(徐徽淳)
제(弟) : 서치순(徐致淳)
제(弟) : 서정순(徐政淳)
제(弟) : 서교순(徐敎淳)
[주 1] 처부이우필본관 : 『대구서씨임자보(大丘徐氏壬子譜)』(1995) 권3, pp.319(徐麟輔)-徐敦淳.
[주 2] 처부유익채본관 : 『대구서씨임자보(大丘徐氏壬子譜)』(1995) 권3, pp.319(徐麟輔)-徐敦淳.
[출전]
『숭정기원후4기유식사마방목(崇禎紀元後四己酉式司馬榜目)』(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B13LB-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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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개요
서민순(徐敏淳)은 조선 말기인 1899년에 영해군수(寧海郡守)로 부임한 인물입니다. 그는 1901년경에 편찬된 『유교넷 고문서』에 "군수 서민순"으로 수록되어 있으며, 함평 향교 등에서 그 행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1900년에 발간된 대한제국 관보에서 안동부 참서관 오세광의 자수와 관련하여 그의 처분 여부가 언급되기도 했습니다.
주요 행적
1899년 영해군수 부임:
1899년 영해군수로 부임하여 순흥군수의 역마 4필 현황에 대한 지령을 내리고, 청하군 역도전 미납액 목록을 보냈습니다.
1901년 유교넷 고문서 수록:
1901년에 간행된 『유교넷 고문서』에 "군수 서민순"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함평 향교 관련 기록:
함평 향교지에는 함평 전 군수 서민순(徐候敏淳)이 함평 향교의 교궁 수리 및 운영을 위해 기금을 기부한 기록이 있습니다.
출신 및 가문
안동 김씨의 김영한(金寗漢)은 그의 어머니 서민순(徐敏淳)의 딸이라는 기록이 있어, 서민순이 안동 서씨 가문의 인물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순흥 안씨의 심종순과 함께 순흥군 역마 현황에 대한 지령을 내린 기록이 있어, 그의 행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함평향교지(咸平鄕校誌) - 호남 국학 종합DB
... 徐候敏淳視. 事本郡有意於興化捐廩二百金付校宮而殖之以爲興學之需用越明. 年又議校宮之修理堂廡垣門各得其完而財用...
호남 국학 종합DB
김영한(金寗漢)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기오(箕五). 호는 동강(東江). 아버지는 군수(郡守) 김홍진(金鴻鎭), 어머니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물 유형 항목 리스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개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기오(箕五). 호는 동강(東江). 아버지는 군수(郡守) 김홍진(金鴻鎭),
인물 유형 항목 리스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영해군읍지』 - 디지털영덕문화대전
관적 편은 1899년 영해군수로 부임한 서민순(徐敏淳)까지 수록하였다. 1871년 편찬 『영남읍지』 인물 편...
디지털영덕문화대전
각사등록 근대편 < 한국 근대 사료 DB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寧海郡守 徐敏淳. 순흥군 창락역 역마 4필의 현황 건 등에 대한 지령. 1899년 11월 03일. 起案 農事...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유교넷 고문서 상세보기
군수 서민순 君守 徐敏淳. 수급자, 이연발(45세) 李鉛發(45세). 간행세기, 1901. 문서크기(cm),
유교넷
조선·대한제국관보< 한국근대사료DB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前安東府參書官吳世光自現就囚및被告徐敏淳에대한처분상주. 분야분류. 彙報>司法·警察. 관보분류. 彙報>司法. ○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AI 답변에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자세히 알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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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향교지(咸平鄕校誌) - 호남 국학 종합DB
... 徐候敏淳視. 事本郡有意於興化捐廩二百金付校宮而殖之以爲興學之需用越明. 年又議校宮之修理堂廡垣門各得其完而財用...
호남 국학 종합DB
김영한(金寗漢)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기오(箕五). 호는 동강(東江). 아버지는 군수(郡守) 김홍진(金鴻鎭), 어머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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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유형 항목 리스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개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기오(箕五). 호는 동강(東江). 아버지는 군수(郡守) 김홍진(金鴻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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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해군읍지』 - 디지털영덕문화대전
관적 편은 1899년 영해군수로 부임한 서민순(徐敏淳)까지 수록하였다. 1871년 편찬 『영남읍지』 인물 편...
디지털영덕문화대전
각사등록 근대편 < 한국 근대 사료 DB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寧海郡守 徐敏淳. 순흥군 창락역 역마 4필의 현황 건 등에 대한 지령. 1899년 11월 03일. 起案 農事...
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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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수 서민순 君守 徐敏淳. 수급자, 이연발(45세) 李鉛發(45세). 간행세기, 1901. 문서크기(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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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대한제국관보< 한국근대사료DB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前安東府參書官吳世光自現就囚및被告徐敏淳에대한처분상주. 분야분류. 彙報>司法·警察. 관보분류. 彙報>司法. ○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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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개요
서정순(徐政淳, 1859~1933)은 조선 말기 대한제국에서 활동한 학자이자 관료이며, 임헌회·전우의 제자입니다. 그는 성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여러 학자들과 교류하며 경전, 예설, 성리설 등에 관한 논의를 진행했습니다.
주요 내용
학문적 배경:
서정순은 임헌회와 전우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으며, 특히 전우의 제자로 꼽힙니다.
교유 활동:
김평묵, 유중교 등 이항로학파의 학자들과 교류하며 심성, 이기론 등 성리학의 주요 주제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대한제국 활동:
대한제국 시대에는 육군에 복무하는 등 학자이자 관료로서 활동했습니다.
관련 인물:
윤치성, 윤치중, 김평묵, 김평묵 등 여러 인물들과 함께 학문을 논하고 교류하며 활동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생애
충청남도 출신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학문을 익혔고, 임헌회가 죽을 때까지 그의 곁에서 학문 연마에 힘썼습니다.
유학을 다녀와 대한제국 육군에 복무하는 등 학문적, 사회적 활동을 펼쳤습니다.
정윤영(鄭胤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우(田愚)·신두선(申斗善)·심의윤(沈宜允)·윤치중(尹致中)·서정순(徐政淳) 등과 교유하였으며, 이항로학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윤치성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야우 서정순(野愚 徐政淳), 간재 전우(艮齎 田愚)의 문인이다. 충청남도 출신. 목차. 1 생애. 1.1 생...
위키백과
고산문집(鼓山文集)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徐政淳)·윤치중(尹致中) 등과 주고받은 것으로, 주로 경전·예설(禮說)·성리설·태극·심성(心性)·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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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
1841년 전주부 청석리(靑石里)[현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다가동]에서 전재성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853년 13세에 오서오경(五書五經)을 섭렵하고 1854년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사하여 부친의 명에 따라 과거 공부를 시작하였다. 1858년 18세에 박효근의 딸 밀양 박씨와 혼인하였다. 1860년 『퇴계집(退溪集)』을 읽고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두었다. 1861년 이름난 유학자 신응조(申應朝)[1804~1899]의 권유로 아산의 신양(新陽)에 살고 있던 전재(全齋) 임헌회(任憲晦)[1811~1876]를 찾아가 사제의 의를 맺었다. 이후 임헌회가 죽을 때까지 아산·전의·연기·진천·상주·문천 등지를 따라가 살면서 그의 문하에서 20여 년간 학문을 닦으며 윤치중(尹致中)·서정순(徐政淳)[1831~1905] 등과 함께 임헌회의 수제자가 되었다. 1882년(고종 19) 8월 홍순목(洪淳穆)의 천거로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 전설사 별제(典設司別提), 강원도도사, 사헌부 장령, 순흥부사, 중추원 찬의(中樞院贊議)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전우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자 1895년(고종 21)에 박영효(朴泳孝) 등이 전우를 ‘수구(守舊) 학자의 우두머리’로 지목하고 개화(開化)를 실현하기 위해 사형에 처할 것을 여러 번 청하였으나 고종이 허락하지 않았다. 1895년 12월,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지자 자손과 문인(門人)에게 심의(深衣)와 복건(幅巾)을 착용하고 의리(義理)를 지킬 것을 명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부안
| 고종 | 3 | 1866 | 병인 | 同治 | 5 | 56 | 3월과 6월, 公州 明剛洞에 사는 門人 徐政淳을 방문하다. ○ 9월, 명강동으로 이사하다.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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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영(鄭胤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우(田愚)·신두선(申斗善)·심의윤(沈宜允)·윤치중(尹致中)·서정순(徐政淳) 등과 교유하였으며, 이항로학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우 - 디지털세종시문화대전
그 후 임헌회가 죽을 때까지 아산·전의·연기·진천·상주·문천 등지를 따라가 살면서 학문을 연마하여 윤치중(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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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성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야우 서정순(野愚 徐政淳), 간재 전우(艮齎 田愚)의 문인이다. 충청남도 출신. 목차. 1 생애. 1.1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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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문집(鼓山文集)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徐政淳)·윤치중(尹致中) 등과 주고받은 것으로, 주로 경전·예설(禮說)·성리설·태극·심성(心性)·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 KRpia
... (徐政淳) 등과 교유하였으며, 이항로학파(李恒老學派)의 김평묵(金平默)·유중교(柳重敎)·유시수(柳始秀...
한국학중앙연구원 - KRpia
성씨총람 - 초계정씨(鄭氏) - 인물 소개 : 네이버 블로그
2007. 5. 26. — 임헌회(任憲晦)의 문인이다. 전우(田愚)·신두선(申斗善)·심의윤(沈宜允)·윤치중(尹致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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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
| 田愚 |
| Jeon U |
| 전경륜(田慶倫),전경길(田慶佶),자명(子明),구산(臼山),추담(秋潭),간재(艮齋),고옹(蠱翁),양하왕인(陽下尫人) |
| 역사/근현대 |
| 인물/문인·학자 |
| 전라북도 부안군 계화면 계화리 |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 이선아 |
[상세정보]
[정의]
근대 부안에서 활동한 학자.
[가계]
전우(田愚)[1841~1922]의 본관은 담양(潭陽)이며, 자는 자명(子明), 호는 구산(臼山)·추담(秋潭)·간재(艮齋)·고옹(蠱翁)·양하왕인(陽下尫人)이다. 초명은 전경륜(田慶倫) 또는 전경길(田慶佶)이라 하였다. 아버지는 전재성(田在聖)이고, 어머니는 남원 양씨이다. 부인은 박효근(朴孝根)의 딸 밀양 박씨이다.
[활동 사항]
전우는 1841년 전주부 청석리(靑石里)[현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다가동]에서 전재성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853년 13세에 오서오경(五書五經)을 섭렵하고 1854년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사하여 부친의 명에 따라 과거 공부를 시작하였다. 1858년 18세에 박효근의 딸 밀양 박씨와 혼인하였다. 1860년 『퇴계집(退溪集)』을 읽고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두었다. 1861년 이름난 유학자 신응조(申應朝)[1804~1899]의 권유로 아산의 신양(新陽)에 살고 있던 전재(全齋) 임헌회(任憲晦)[1811~1876]를 찾아가 사제의 의를 맺었다. 이후 임헌회가 죽을 때까지 아산·전의·연기·진천·상주·문천 등지를 따라가 살면서 그의 문하에서 20여 년간 학문을 닦으며 윤치중(尹致中)·서정순(徐政淳)[1831~1905] 등과 함께 임헌회의 수제자가 되었다.
1882년(고종 19) 8월 홍순목(洪淳穆)의 천거로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 전설사 별제(典設司別提), 강원도도사, 사헌부 장령, 순흥부사, 중추원 찬의(中樞院贊議)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전우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자 1895년(고종 21)에 박영효(朴泳孝) 등이 전우를 ‘수구(守舊) 학자의 우두머리’로 지목하고 개화(開化)를 실현하기 위해 사형에 처할 것을 여러 번 청하였으나 고종이 허락하지 않았다. 1895년 12월,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지자 자손과 문인(門人)에게 심의(深衣)와 복건(幅巾)을 착용하고 의리(義理)를 지킬 것을 명하였다.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고종 황제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사건]의 소식을 듣고 괴산 화양동에 들어가 머물다가 이듬해 전국을 유람하며 강회를 개최하였다. 1904년(고종 41) 전주, 태인, 순창 등지에서 강회를 열고 1905년 부안에 있는 아들 전경구(田敬九)의 집에 머물며 강학을 이어나갔다. 이때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소를 올려 ‘을사조약에 서명한 대신들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07년(고종 44) 섬으로 들어갈 계획으로 태안(泰安)에 갔는데, 7월 이준(李儁) 열사(烈士)의 소식을 듣고 자손과 문생(門生)에게 목숨을 걸고 의리를 지키겠다는 결심을 천명하였다.
1908년 나라가 극도로 혼란에 빠지자 부안군 북왕등도(北暀嶝島)에 구인암을 세우고 도학(道學)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하겠는 뜻으로 학문에 전념하며 자신을 따라 들어온 학생들을 가르쳤다. 1909년 신시도로 옮겨 안양서실과 완고당을 세웠다. 1910년(순종 4) 8월 경술국치의 소식을 듣고 비분을 참지 못하고 제자들과 상의해 ‘마침내 도가 행해지지 않으면 뗏목을 타고 바다로 들어간다’는 공자의 뜻에 따라 군산도에서 왕등도로 들어가 의리를 고수하였다. 1911년 일제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문집을 간행하지 말라는 유훈을 남겼다.
1912년 부안군 계화도에 정착한 후 가묘(家廟)의 신주(神主)까지 계화도로 옮겼다. 이후 계화도(界火島)의 지명을 딴 ‘계화재(界火齋)’가 아닌 ‘중화를 잇는다’는 뜻의 ‘계화재(繼華齋)’로 편액한 강사(講舍)를 지어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고 토론하던 강학소로 삼았다. 계화도에서 300여 명의 후학을 양성하고 저술 활동에 힘쓰다 1922년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전우의 학문은 스승인 임헌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임헌회는 홍직필(洪直弼)의 문인으로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인간과 마찬가지로 동물도 오상(五常)의 성(性)을 구비한다는 주장], 즉 낙론(洛論) 계열의 학자이다. 또한 전우는 의리 정신을 숭상하며 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송시열(宋時烈)을 동방의 오현(五賢)이라고 칭송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문집 가운데서 발췌하여 『근사록(近思錄)』의 체재를 모방한 『오현수언(五賢粹言)』 편찬에 참여하였다. 특히 전우는 이이와 송시열의 사상을 계승하는 데 힘썼으며, 심본성설(心本性說)을 주제로 성존심비(性尊心卑) 또는 성사심제(性師心弟)의 설을 주장하였다.
제자로는 오진영(吳震泳)·최병심(崔秉心)·이병은(李炳殷)·송기면(宋基冕)·권순명(權純命)·유영선(柳永善)·김병준(金炳駿)·김택술(金澤述) 등을 비롯하여 3,000여 명을 양성하였다. 저서로는 『안자편(顔子篇)』·『연원정종(淵源正宗)』·『간재집(艮齋集)』·『간재사고(艮齋私稿)』 등이 있다. 한편, 글씨를 잘 써서 힘찬 필력으로 골기(骨氣) 있는 강건한 필체를 구사하였으며, 강한 필획에 기개 높은 학자로서의 면모와 문기(文氣)[문장의 기세]가 서려 있다는 평을 받았다.
[묘소]
묘소는 전라북도 익산시 삼기면 기산리 산3에 있다.
[상훈과 추모]
전라북도 부안군의 계양사(繼陽祠), 전라북도 고창군의 현곡정사 내 용암사(龍巖祠), 전라북도 정읍시의 태산사(台山祠), 경상남도 의령군의 의산사(宜山祠),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의 덕성서원[구 숭덕사] 등에 제향되었다. 1941년에 전우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서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면 상왕등리에 전우 유허비가 세워졌다. 전라북도 부안군 계화면 계화로 569[계화리 8]에 있는 간재 선생 유지(艮齋先生遺址)는 1974년 9월 27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23호로 지정되었다. 부안군에서는 부안에서 활동한 조선의 마지막 유학자로 추앙받는 간재 전우의 숭고한 생애와 정신을 기리기 위해 간재전우선생선양사업회 주관으로 매년 계양사에서 향사 제례를 봉행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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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諱宜默。字景淵。自號四而齋。愼氏有曰修。以宋朝進士。隨海舶東來。爲高麗左僕射。貫居昌。是爲初祖。自是代承冠冕。累傳至諱幾。寶文閣提學。生諱先庚。蔭掌令。傳至諱潔。無嗣。取掌令公仲兄大諫諱後甲玄孫純善。爲子。工曹佐郞贈參議。參議公從姪左議政守勤之女。爲中廟王妃。及王妃廢。愼氏諸族。皆流落鄕曲。參議公。亦自京來。居隋城之貞松里。卽公六代祖也。曾祖諱由厚。贈左贊成。祖諱爾復。知中樞府事。以恬雅孝友著名。生二子。長諱師天。次諱師稷。正言。言議峭直。公以正言公之長子。出爲伯父後。妣鎭川林氏。鳳壽之女。其所生母全州崔氏。溥之女也。公以英廟戊子四月二十八日。生貞松之柏谷洞第。性度嚴毅而寬厚。剛明而仁恕。純廟辛酉筮仕。拜山陵參奉。歷司圃署直長。長興庫主簿。司憲府監察。義禁府都事。敦寧府判官。永禧殿令。甲子。出宰河陽。吏畏民懷。値己巳大侵。接濟得宜。秩滿當遞。方伯鄭公晩錫。奏請仍任。公日夜規畫。捐俸賙賑。無一人捐瘠。逮賦歸。齠白爭遮道。不能得。則設供張祖道以送之。歌頌恩德。刻板揭示。辛未。甄復瓦署別提。復拜禁都。遷中部令。是歲丁崔夫人憂。哀毁踰制。家距喪次稍遠。而日必晨往昏歸。不以祁寒盛暑而或廢。癸酉。服闋。仍居鄕廬。奉慈課兒。無復進取意。甲戌十月。石城有窠。命以十考十上人擬入。公低擬蒙點。感激圖報。政淸訟平。吏鄕不得售其奸。親知不敢干其私。方伯洪公奭周。每稱曰。石城倅。眞可任全州判官者也。蓋以全物衆地大。素稱難治故也。丙子夏。直指上其最。特遣政院吏。賚傳旨褒奬。有錫馬之典。戊寅七月。遭林夫人喪。卜葬公州地。不忍遽歸。買屋山下居之。逐日哭墓。庚辰外除。辛巳九月二十五日卒。壽五十四。葬于本州高行路。辛酉。遷于柏谷里明幕巖乾坐之原。配平山申氏。參議贈提學大龜之女。柔嘉孝順。事君子無違。御家衆有法。尤謹蘋藻。烹餁滌漑。不任婢使。前期齋素。至老如一。乙酉二月二十七日生。癸巳七月三十日歿。墓祔左。擧一男四女。男永弼。成均生員。女長適金炳龜。次適徐麟輔。次適李周鎬。次適孟欽耉。生員三男。芝秀,蘭九,英秀。金婿男。台均。徐婿六男。敦淳。進士。敏淳,徽淳,致淳,政淳,敎淳。孟婿三男。憲淳,寅淳,完淳。芝秀系子炳性。英秀男。炳性。出後。女適尹仁求。公容姿端潔。言論峻正。治家必以規矩。敎子必以義方。誠於奉先。友于諸弟。處宗黨和睦。交朋友信義。至於待臧獲。恩威並行。見鄰里貧乏者。惻然憂形於色。雖傾囷倒廩。無所惜。不言人是非長短。而至於淑慝之辨。辨之甚嚴。尤長於吏才。歷典二邑。咸有去後思。及歸。行李蕭然。人服其廉焉。噫。公之行誼才具。誰之不如。而棲遲郡紱。年又不遐。豈非命歟。上世位必稱德。今之世有德而無位者多矣。此於公。何所益損。而世道之不古。則可慨也已。然公內外後承蕃衍。又皆醇謹雅飭。爲人所稱。亦可謂遺贏也。永弼氏八耋之年。不遠數百里。來謁狀德之文。其懇苦切。不佞雖無文。有靡忍固辭。遂因其家傳而略加櫽括。以俟後之立言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