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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사사군명 제2권
- 천중행·장삼 공저
- 차 례 -
◈ 第十一章 항주풍운(抗州風雲)
◈ 第十二章 인연난측(因緣難測)
◈ 第十三章 겁화소인(劫火燒仁)
◈ 第十四章 잠세암동(潛勢暗動)
◈ 第十五章 흑마지낭(黑魔智囊)
◈ 第十六章 격동징후(激動徵候)
◈ 第十七章 혈운중첩(血雲重疊)
◈ 第十八章 도강난사(渡江亂事)
◈ 第十九章 암운만천(暗雲滿天)
◈ 第二十章 표행혈로
◈ 第十一章 항주풍운(抗州風雲)
①
황대진은 믿을 수가 없었다.
비록 성미가 편협하고 조심성이 없다고는 하나 귀수문의 문주요 흑마방 항주
분타주인 나운을 누가 감히 살해할 수 있단 말인가.
다른 곳도 아닌 항주에서, 그것도 백주대낮에.
항주에서 나운 정도 되는 인물을 상대할만한 자는 세권표국주 석백송과 창해
문주 청운검객(淸雲劍客) 고태규(高泰奎)정도였다.
일단 석백송은 아니었다.
행여나 마음에 세권표국을 감시케 한 자의 보고에 따르면 석백송은 표행이 출
발한 후 표국을 한 발짝도 떠나지 않았다지 않은가.
창해문주 고태규는 사문인 점창(點蒼)의 장문인 추대에 관한 일로 항주를 떠
나지 열흘이 넘었으니 그 또한 아니었다.
세권표국의 표두 둘 정도가 연수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으나, 세권표국
에서 출발한 열 무리의 표행을 뒤쫓고 있는 수하들에게서 아무런 연락이 없는
걸 보면 그럴 경우는 생각하지 않아도 좋을 듯 했다.
"혹시?"
일순간, 그의 뇌리에 섬전처럼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이번 일의 당사자인 봉래도나 무적세가의 소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화물을 내린 봉래도의 배는 진작에 항주를 떠났고 그렇다고 무적세가의 인물
로 보이는 자를 발견한 것도 아니나 치밀하지 못한 나운이 제멋대로 설치다가
그들에게 꼬리를 잡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만일 봉래도나 무적세가에서 움직였다면 보통 일이 아니다."
황대진은 서둘러 보고서를 작성했다.
단서는 차후에 밝혀내더라도 더욱 큰 문책을 면하려면 보고가 급했다.
석백송은 서찰을 접었다.
그와 마음을 열고 지내는 벗 중의 하나이자 쌍검술(雙劍術)에 관해서는 무림
의 일절로 손꼽히는 도룡객(屠龍客) 곽영(郭永)의 전갈이었다.
무자비한 살행을 일삼은 무림의 흉적 중주오살(中州五殺)을 저승 객으로 만들
고 홀연히 사라지기까지 그가 처단한 강호의 흉적은 한둘이 아니었다.
하나 중주오살은 지위나 대우문제만 남겨 놓았을 뿐 흑마방의 식구가 되기로
약속한 상태였으니 곽영은 벌집을 건드린 꼴이 되고 만 것이다.
결국, 흑마방과의 시비를 피해 안휘성(安徽省) 무호(蕪湖)로 낙향해 한가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곽영.
함부로 무림의 일에 개입할 수 없는 처지임에도 도움을 요청하는 오랜 벗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연락을 보내온 것이다.
석백송의 신표를 가지고 오는 자에게 성심껏 편의를 제공하겠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연락을.
"곽영이 나선 준다면 최소한 무호 일대 삼백 리는 별 탈없이 지날 수 있으리
라……."
사군명이 지나갈 길마다 이제껏 닦아온 인맥을 동원하고 자금을 풀어 도움의
손길을 배치해 놓으려는 석백송의 노력은 필사적이었다.
곽영을 비롯해 항주에서 북경까지 그에게 도움을 약속한 무림인의 수는 일곱
명. 그가 도움을 청한 사람들 모두 승낙해 온 것이다.
그들은 제각기 남다른 무공을 지녔거나 만만치 않은 세력을 이끌고 있어 자신
의 근거지에서만큼은 두려울 것이 없는 실력자들이었다.
무림이 넓고 영웅호한들이 많다 하나 천하를 장악하겠다는 야욕을 지닐 만큼
대단한 위세를 떨치고 있는 흑마방에 등지는 행위를 기꺼이 감당할 자가 얼마
나 될 것인가.
만약 사군명 일행이 적들에게 발각되어 쫒기는 상황이 닥친다면 지친 몸을 쉬
고 마필이라도 갈아탈 수 있는 안식처를 얻기도 힘들 터였다.
하나 그에게 회신을 보내온 벗들은 보기 드문 소수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흑마방과 전면적으로 싸우는 일이 벌어진다면 몰라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사군명 일행을 도와줄 만한 의리도 능력도 있는 소중한 벗들.
물론 상황에 따라 사군명이 선택할 문제이긴 하지만 그로서는 최선을 다했다
는 만족감이 들었다. 사군명에게 한 약속을 지키게 되지 않았는가…….
곽영의 서찰을 담은 목함을 벽장 속에 소중히 보관하는 석백송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격을 느끼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다.
창문에 드리운 휘장이 소리 없이 펄럭인 것은 석백송이 벽장문을 닫을 때였다
"으응?"
벽을 바라보고 서 있던 석백송은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끼고 재빨리 몸을 돌
렸다.
"누구신가?"
창문가에 버티고 선 침입자를 향해 석백송의 눈길이 화살처럼 날아가 꽂혔다.
표사들이 떠난 표국을 지키고 이는 하인들이야 그렇다 쳐도 자신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방안으로 들어온 청년.
소리 없이 침입하긴 했으나 자신의 눈길을 피하지 않는 청년에게서 악의를 읽
을 수는 없었다.
옥색장삼을 떨쳐입고 범상치 않은 보검을 허리에 찬 준수한 청년. 그는 금사
익이었다.
정상적이지 않은 방문에도 호들갑을 떨지 않고 침착한 석백송의 응대에 금사
익은 내심 호감을 느꼈다.
집안의 어른들이 일을 맡길만한 인물이라는 수긍이 저절로 드는 것이다.
"이렇듯 불쑥 찾아오는 것이 무례인줄은 아나 주위의 이목을 피하는 게 좋을
듯 해서 절차를 밟지 않았으니 부디 해량해 주시길 바라오."
말과는 달리 청년은 전혀 미안한 기색이 아니었고 오히려 오연한 태도였다.
청년이 품속에서 작은 철패를 꺼낸 것은 석백송이 재차 청년의 정체를 추궁하
려 할 때였다.
"나는 금사익이라는 사람이오."
"금사익? 무적세가의 소가주……!"
어지간한 석백송도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듯 했다.
황망히 자리를 권하고 청년이 내놓은 육각철패(六角鐵牌)를 살피는 석백송의
숨소리가 가늘게 떨려 나왔다.
"무슨 일로 오셨는지?"
무적세가의 총관 금진후가 지니고 있었으며 일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몇 차례
본 적이 있는 세가의 신물 무적신패(無敵信牌)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석백송은 난데없는 방문의 목적을 물었다.
순간, 금사익의 검미가 꿈틀했다.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을 비롯해 세가를 방문하는 무림의 명숙들을 적지 않게
만나본 금사익이었다.
금사익을 대하는 순간 마치 오래 전에 헤어진 집안 사람을 만난 듯 과장된 친
근감을 드러내거나 때에 따라서는 비굴의 냄새가 풍기는 웃음을 지으며 연신
듣기 좋은 칭찬을 늘어놓던 그들. 그리고 그런 태도를 달리 생각할 이유도 기
회도 없이 당연하게만 여겼던 무적세가의 소가주.
담담하고 사무적이기까지 한 석백송의 태도가 금사익에게는 낯설었다.
동시에 어쩐지 자부심이 상하는 느낌.
곱지 않은 금사익의 음성이 그의 심중을 드러냈다.
"본 가로 향하고 있는 표물의 행방을 일러주시오."
"알려줄 수 없소."
"지금 알려줄 수 없다고 했소?"
의도하지 않은 살인으로 안 그래도 불편하던 심사가 더욱 틀어지며 말꼬리가
올라갔다.
그러나, 석백송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무적세가의 위상을 모르는 것도 아니오, 세가의 인물 중 그 누구보다도 뛰어
난 자질로 이미 절정의 무공을 이뤘다는 금사익의 얘기를 모르는 것도 아니었
다.
하나 지금 그에게 무적세가는 그저 고객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도 표국의 존
망을 걸어야 할만큼 위험한 일을 맡긴 골치 아프고 저의가 의심스러운 고객.
"내가 세가의 소가주 임을 인정하지 않는단 말이오?"
"무적신패를 보아 그건 인정하오. 하나 계약한 대로 표물이 약속된 장소에 도
착할 때까지 전권은 표국에 있소."
"당신들이 호송하고 있는 사람이 나와 어떤 관계인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요?"
"알아도 달라질건 없소. 본 표국에서는 계약대로 표물을 운송하면 그뿐이고,
안전한 표행이 우리의 책임인 이상 표물의 행방을 알려주고 말고는 전적으로
내 재량이외다. 위약금을 내고 계약을 파기한다면 모를까, 귀하의 요구는 받
아들일 수 없소이다."
처음 당해 보는 경우요 대접이었다.
그렇다고 석백송의 말이 잘못된 것도 아닌지라 금사익은 치미는 노기를 간신
히 억누르며 자신의 생각을 구구하게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내가 표행에 방해가 된다거나 위험을 불러올 사람으로 생각하는 건 아
니겠지요? 나는 내 부인될 사람의 안위를 염려해 도움을 주겠다는 거외다."
금사익 정도 되는 고수가 나서준다면 고마운 일이었다. 그러나 무적세가에서
힘을 보태려면 애초에 계약할 때 그 뜻을 밝혔어야 했다.
수많은 밤과 낮을 번민하고 애쓰며 자신의 모든 능력을 동원해 표행 계획을
수립했고 이미 일이 진행되고 있는 터에 금사익이 합세한다면 혼란만 가중시
킬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 표행을 일생일대의 승부로 받아들인 석백송이 금사익의
도움을 반가워하기에는 그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석백송은 단호했다.
"이제 와서 표물의 행방을 발설하는 건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소."
"이, 이런……."
입술을 깨무는 금사익의 얼굴이 수치심과 분노로 일그러졌다.
부친에게 폐관수련에 들어가겠다는 인사를 남기고 연무동(鍊武洞)에 들자마자
남몰래 세가를 떠나 이곳 항주까지 달려온 자신의 뜻이 꺾인다는 사실이 그
를 못 견디게 했다.
"지금 흑마방의 잡졸들이 총동원되어 표행을 뒤쫓고 있는 상황이오. 고작 표
사 나부랭이들이 내 신부 될 사람을 지켜낼 수 있을 거라 자신한단 말이외까!
석백송은 씁쓸하게 웃었다.
제 아무리 무적세가의 후계자요 절정의 무공을 지닌 고수라 해도 미숙한 풋내
기였다.
세상을 만만히 보고 자신의 능력과 배경으로 못 이룰 것이 없다고 믿고 있는,
한 번도 좌절을 겪어보지 못한 풋내기.
석백송은 자신과 표국을 무시하는 금사익에게 분노는커녕 연민마저 느꼈다.
"허허헛. 귀 세가의 가주와 중신들이 의논하여 일을 맡긴 것으로 알고 있소.
본 표국의 역량을 총동원했음은 물론, 가장 믿을 만한 표사들이 표물을 운송
하고있으니 틀림없이 약속한 날에 맞춰 목적지에 도착할 거외다. 귀공의 말대
로 흑마방이 뭔가 냄새를 맡았음에도 아직 표물의 정체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
이 그 증거요."
더 이상 석백송과 실랑이 해봐야 자신만 꼴이 우스워질 거라는 판단이 들자
금사익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당신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했소. 내 더 이상 부탁하지 않겠소."
올 때와 마찬가지로 창문을 넘은 금사익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싸늘한 한 마
디를 던졌다.
"자신 있다는 얘기. 내 깊이 새겨 두리다……."
찬바람이 돌도록 냉기를 흩뿌리며 사라지는 금사익의 뒷모습에서 귀공자의 철
없는 투정을 읽은 석백송의 눈에 한 인물의 모습이 겹쳐져 어른거렸다.
오갈 데 없는 고아로 표국에 들어와 이제는 범같이 날래고 사나운 그의 수하
들 중에서도 가장 믿음직한 표사가 된 사내.
지금 이 순간에도 흑마방의 이목을 피해 표행을 이끌고 있을 사군명의 모습이
②
샛별이 유난히 초롱한 이른 새벽.
사군명은 열 한 필의 말이 매어진 마구간 앞에 서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표국에서 오랜 세월 마구간지기로 일한 까닭에 명마를 구별하는 안목이 남다
른 그는 지금 이제껏 없던 눈 호강을 하고 있는 것이다.
굵고 단단해 보이는 다리에 비해 어깨가 넓으며 짧고 억센 갈기가 눈에 띄는
네 필의 말은 대완구(大玩駒)가 틀림없었다.
지구력과 힘이 좋아 중무장한 병거(兵車)를 끌고도 가파른 산등성이를 평지처
럼 달린다는 대완구.
뿐인가.
나머지 일곱 필은 몽고족이 자랑하는 명마 쾌재풍(快哉風)이었다.
체장(體長)이 길고 속보능력이 뛰어난데다 주인의 뜻을 읽는 영특함이 있어
마상 전투에 더없이 적합한 품종으로 원 황실(元皇室)에서 엄격히 관리하여
유출을 통제했다는 쾌재풍이 그의 눈앞에서 기운차게 콧김을 뿜어내고 있는
것이다.
사군명이 믿어지지 않는 표정으로 소중하게 말을 쓰다듬는 것을 보며 위사무
가 입을 열었다.
"이틀전 국주가 보낸 거지."
남모르게 항주 일대의 마방을 뒤져 명마를 구하고 상허촌까지 보내느라 애쓴
석백송의 노고는 적지 않았다.
"외진 마을에서 이런 명마나 고급스런 마차는 눈에 뜨일 텐데요……?"
쥐눈을 반짝이며 말꼬리를 흐리는 서수림의 걱정은 타당했다. 흑마방의 이목
을 피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흐흐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마을사람들에게는 절강성 도독부(都督府)에
서 마구(馬具)를 주문하며 말에 꼭 맞도록 해달라는 명을 내렸기에 보관하고
있다고 했지. 마차바퀴 축을 갈아 달라는 일거리도 함께 말이지. 이래봬도 솜
씨 좋은 대장장이로 소문난 덕에 관부에서도 종종 일을 맡기는 편이거든."
결코 허튼 소리가 아니었다.
상허촌 출신으로 도독부의 부장(部長)으로 출세한 자가 자신의 상관에게 천거
했을 만큼 위사무는 솜씨 좋은 대장장이였다.
"이러다가 날이 밝겠습니다."
마음이 급하기는 고승후뿐이 아니었다.
넋을 잃고 이리저리 말을 살피고 쓰다듬던 사군명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출발
준비를 서둘렀다.
"마차에 말을 매고 짐을 꾸려주십시오. 준비가 되는 대로 출발하겠습니다."
사군명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내들의 움직임이 부산해졌다.
제각기 마음에 드는 말을 골라 짐을 실었고 마차를 몰기로 한 구태열은 명마
가 끌기에 격이 떨어지지 않는 마차에 네 필의 대완구를 능숙하게 맸다.
준비를 점검한 사군명이 안채로 걸음을 옮기려 할 때 해연을 앞장세운 설운경
이 문을 열고 앞마당으로 나왔다.
"……."
다소곳이 목례하는 설운경에게 일행의 눈길이 쏠렸다.
그들은 문제의 표물을 처음 보는 것이다.
"흐, 흐음……."
"허어, 참!"
어스름한 미명을 받고 서 있는 설운경의 미모를 확인한 사내들이 당황한 기색
을 감추지 못하고 헛기침을 한다, 공연히 서 있는 말고삐를 잡아챈다 하며 수
선을 피웠다.
봉래도의 군주라는 말에 어지간한 미인은 되리라 예상했지만 미인이 많다는
항주에서 적지 않은 세월을 보낸 그들이 보기에도 설운경같은 미인은 처음인
까닭이었다.
하나 아쉽게도 그들의 어색하고도 황홀한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흥!"
최소한 왕충삼이 안달하는 금연루의 기녀 수련(水蓮)이 만큼은 아름답지만 지
금은 보름달 앞에 반딧불에 지나지 않는 해연의 냉랭한 코방귀가 사내들의 가
슴에 때아니게 불어닥친 훈풍을 멀리 쫓아낸 것이다.
"군주님, 아직 바람이 찹니다. 어서 오르세요."
도착하던 날부터 정성껏 쓸고 닦은 마차를 가리키며 해연이 설운경을 안내했
다.
표물의 정체를 알게된 석백송이 급하게 수소문해 구한 마차였다. 절강성을 다
스리는 안찰사(按察使)의 내당에서 쓰던 물건답게 명장의 솜씨가 녹아있는 든
든하고 고급스러운 마차는 해연의 정성덕에 대갓집 규방 못지 않은 안락함까
지 갖추게 된 것이다.
밉지 않은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거리고 마차 안으로 들어가는 해연을 향해 버
릇없는 자손을 혼내듯 짐짓 두 눈을 부라린 위사무에게 사군명이 깊숙이 허리
를 숙였다.
"일을 마친 후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허허, 글쎄다. 무슨 일이든 기약할 수 없다는 게 세상사는 재미일 수도 있지
……."
뜻 모를 소리에 사군명이 의아한 표정을 지을 때 위사무가 길쭉한 보자기를
건넸다.
"받거라. 네가 쓰는 청강검보다는 나을 게다."
무심결에 건네 받아 흰 무명으로 둘둘 말아놓은 물건을 꺼낸 사군명이 탄성을
발했다.
"아……!"
검이었다.
다소 투박해 보이는 검신에 서늘한 한광(寒光)을 흘리는 한 자루의 장검.
"그 검으로 하고자 했던 일이 있었으나 검은 제 모양을 갖추었으되 마음이 변
했으니 내게는 쓸모 없는 물건이다."
패배의 좌절이 불러온 방황을 끝내고 다시금 금천후에게 도전하기로 마음먹은
후 제일 먼저 구한 것이 한철괴(寒鐵塊) 한 덩이였다.
작은 목침(木枕)만한 쇳덩이를 밤낮으로 달구고 두드리며 씨름한지 오 년.
마침내 쇳덩이는 예리한 검이 되었지만 날선 검처럼 외곬이던 위사무의 집념
은 거꾸로 무뎌지고 말았다.
승부의 덧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무도를 이루는 길이 내 마음에 있으니 누구와 겨루고 승부를 내는 일이 무상
하다는 깨달음.
그런 사연을 알리 없는 사군명은 위사무의 혼이 서린 듯 맑게 빛나는 검을 들
고 어쩔 줄 몰랐다.
무인된 자로 어찌 명검을 아끼지 않겠는가.
은자 일곱 냥짜리 청강검을 사들고 천하를 얻은 양 기뻐하던 것이 불과 몇 달
전이었다.
"제게는 과분한 검입니다."
"암, 과분하지! 한때는 하늘을 베려했던 검이거늘……."
아쉬움인가, 초탈함인가.
위사무의 주름진 얼굴에 의미를 알 수 없는 잔잔한 웃음이 번졌다.
마음을 베는 것이 하늘을 베는 것보다 어려운 까닭이리라.
"검법이 서투르니 검이라도 좋은 놈을 써야지 않겠느냐? 크흐흐흐."
위사무는 일행을 재촉했다.
"뭣들 하는 게냐? 이 마을의 농부들이 얼마나 부지런한지 네 놈들이 모르는
게로구나. 어물거리다 사람들 눈에 띄면 좋을 일이 없을 테니 어서들 떠나거
라."
사군명은 더 이상 사양하지 못했다.
검을 전하는 위사무의 뜻을 헤아리며 고마운 정을 가슴깊이 새길 뿐.
"그럼……."
백 마디의 인사, 천 번의 절보다 진실한 감사의 염이 담긴 깊은 눈길을 보낸
사군명이 날렵하게 말 등에 올라타고 손을 쳐들었다.
"출발!"
촉촉이 이슬이 내린 황톳길로 말을 달리는 사군명 일행이 멀리 산모퉁이를 돌
때까지 석상처럼 서 있는 위사무의 전신을 서늘한 새벽안개가 어루만졌다.
③
"어이, 자네 이리 좀 와보게!"
언뜻 보기에도 험상궂은 얼굴이 예사롭지 않은 사내들이 지나가는 청년을 불
러 세웠다.
나운이 시신으로 발견된 이후 요란스럽게 성내를 뒤지고 다니던 흑마방의 무
사들이 먹이 감을 발견한 것이다.
왜소한 체구에 얼굴마저 곱상한 청년이 봉변을 당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
다.
"이런, 발칙한! 이리 오라는 어르신의 말씀이 안 들리느냐?"
짐짓 모른 척 지나가려는 청년을 향해 소리치는 장한의 얼굴에 길게 패인 흉
터가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발걸음을 멈춘 청년이 흉흉한 기세로 인상을 쓰고
있는 세 명의 장한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무슨 일인데 그러시오?"
"무슨 일이나마나 네놈이 차고 있는 칼은 어디서 난 거냐?"
일행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애꾸 대신 칼자국이 선명한 사내가 청년의 허리께
를 보며 대뜸 반말을 날렸다.
크고 작은 두 자루의 도를 쓰는 사람이 모두 봉래도 출신이라고는 할 수는 없
었다. 게다가 가무잡잡한 피부에 초롱한 눈망울이 별처럼 빛나는 기생오라비
같은 자가 변변히 칼이나 쓸것으로 여겨지진 않았지만 상황이 상황이었다.
한 지역의 패권을 다투는 문파와 전면전을 벌이다 전사한 자는 있어도 분타주
쯤 되는 인물이 이렇듯 허무하게 당한 것은 흑마방을 통틀어 나운이 처음이었
다.
청년은 울컥 치미는 화를 애써 삼키고 순순히 대답했다.
그 역시 항주 땅에 발을 디딘 이후로 속이 타는 나날이었지만 공연히 일을 벌
여서 좋을 게 없었다.
"대대로 내 집안에서 내려오는 물건이오 만……."
가는 목소리에 공손한 대답. 하나. 두려움은 찾을 수 없는 태도였다.
마구잡이로 칼을 휘두르던 시절부터 제법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는 지금에 이
르기까지 험난한 강호에서 굴러먹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청년의 태도에서 자
기들을 그다지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흐흐흐, 꼴에 가전무공이라도 익혔다는 말이로구먼."
"글쎄 말입니다. 저런 주제에 닭모가지나 칠 수 있으면 장한 거 아니겠습니까
."
"닭모가지도 과하지. 상판이 반반한 게 계집깨나 후리고 다니는 생겼는데, 결
정적인 순간에 앙탈부리는 계집년 치마끈 자를 때나 쓰겠는 걸요?"
청년의 안색이 검붉게 상기됐다.
"별 다른 용무가 없으면 이만 가보겠소."
"이런 싸가지하고는. 오는 것도 가는 것도 이 어르신의 승낙이 있어야 된다는
걸 모르겠느냐!"
가까이서 보니 범상치 않은 내력이 있을 것 같은 칼이었다.
잘하면 적지 않은 은자가 생길 판인데 순순히 청년을 보낼 수는 없었다. 성내
만병점(萬兵店)의 주인 영감은 오래된 도검을 비싸게 쳐주기로 유명하지 않
은가.
"그 칼, 이리 내놓아 보거라."
청년의 얼굴이 찰나간에 굳어졌다.
"아주 귀하신 어른을 살해한 흉수를 찾고자 하는 일이니 순순히 말을 듣는 게
좋을 거다."
"난 아직 사람을 죽여본 일이 없소!"
"이놈 말하는 것 좀 보게. 사람을 살해할 능력은 있으나 일을 치른 적은 없다
?"
"마음대로 생각하시오."
실랑이가 길어지자 흑마방의 무사들이 무서워 슬슬 피했던 행인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자고로 동네 개들도 말리면 더 싸우고 변변치 못한 인간들일수록 구경꾼 앞에
선 기세 등등해 지는 법.
만만한 상대를 만난 김에 자신의 무용을 뽐내고 싶어진 칼자국의 사내가 점점
더 패악을 부렸다.
"어디 네놈이 무슨 재간을 지녔는지 한 번 봐야겠다. 어서 칼을 뽑아라!"
날이 시퍼런 도끼를 움켜쥐고 윙윙 바람을 가르는 모양이 야차가 따로 없었다
난감한 기색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청년의 모습에 칼자국 난 사내는
더욱 길길이 날뛰었다. 이 정도 했으면 잘못했으니 제발 목숨만 살려달라고
사색이 되어야 할텐데 건방진 애송이가 고개를 모로 꼬기만 할 뿐 전혀 위축
된 기색이 아닌 것이다.
"좋다! 네 놈의 모가지가 이리도 뻣뻣하니 날 원망 말거라!"
바람을 가르던 도끼가 청년의 허리춤을 노리고 내리쳐졌다.
아마도 멋지게 바지자락을 베어 청년을 혼내주고 구경꾼들에게 자신의 무공을
자랑하려는 의도로 보였다.
"저런!"
흉측스럽게 커다란 도끼가 금방이라도 청년의 뼈를 부서뜨릴 것으로 보였는지
구경꾼들 틈에서 안타까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하나 안타까움은 이내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청년이 낭랑한 일갈을 토하며 가볍게 몸을 피한 것이다.
"어딜!"
휘익!
허리끈만 끊어놓을 의도로 공력을 조절했음에도 갑작스런 청년의 대응을 예상
치 못해 그만 중심을 잃은 사내의 몸이 휘청 앞으로 쏠렸다.
"나는 당신들이 찾는 사람이 아니니 그만 둡시다."
분노와 수치심으로 씨근덕거리는 사내에게 그 말이 들릴 리 없었다.
"네놈이 믿는 구석이 있어서 함부로 설쳤구나!"
뭐 뀐 놈이 성낸다고, 정작 막무가내로 설친 사람이 누군데 오히려 되는 대로
지껄이며 다시금 도끼를 휘둘렀다.
흉성이 폭발했는지 조금전과는 다른 기세로 청년의 목을 노리고 쇄도하는 도
끼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말이 통하지 않는 인간이구먼."
상대의 공세에도 전혀 위축되지 않은 청년이 허공으로 솟구치더니 무방비로
열려있는 사내의 어깨를 발꿈치로 찍었다.
퍼억.
"아이쿠……!"
벽에 몸을 기댄 채 느긋한 마음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애꾸는 그제야 상대에
대한 경계심이 일었다.
칼자국의 사내가 고수는 아니라 해도 아무에게나 농락 당할 만큼 헐렁한 솜씨
도 아니지 않은가.
"놈을 포위해라!"
세 명이 함께 다니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고 최소한 그들은 지나는 행
인에게 위세를 부릴만한 능력이 있었다.
벽 쪽에 있던 애꾸와 또 한 사내가 재빨리 좌우로 벌어지며 검을 빼드는 사이
, 바닥에 엎어졌던 칼자국의 사내가 일어나 청년의 뒤를 막아선 것이다.
졸지에 높은 담벼락을 등지고선 청년은 세명에게 포위당한 형국이 되었다.
일단 뜻한 바대로 청년의 퇴로를 막은 애꾸는 황대진의 명령을 떠올렸다. 나
운이 제때 향전만 쏘아 올렸어도 변을 당하지 않았을 거라며 수상한 자를 발
견하면 무조건 신호를 올리라는 황대진의 말이 귓가에 울린 것이다.
눈앞의 청년이 그들이 생각한 대로 만만한 애송이가 아니라 황대진이 말한 이
상으로 충분히 '수상한 자'임에 틀림없으니 쓸데없는 여유를 부릴 이유가 없
었다.
"쳐라!"
수하들에게 소리침과 동시에 애꾸는 소매속을 더듬었다.
피유우……!
애꾸의 판단과 행동은 기민했으나 옳은 것은 아니었다.
하늘높이 솟구친 향전이 발하는 날카로운 음향이 청년에게 조급증을 불러왔고
조급증은 애써 억누르고 있던 분노를 격발시킨 것이다.
순간적으로 방심했다가 애꾸의 행동을 막지 못한 청년의 안색이 굳어지며 양
손이 허리에서 엇갈리는 순간, 눈이 부시게 번뜩이는 도광이 춤을 추었다.
"차핫!"
땅을 박차고 사선(斜線)으로 튕겨져 나간 청년의 오른 손이 성난 황소처럼 거
세게 달려드는 칼자국난 사내의 겨드랑이를 훑으며 비스듬히 치켜졌고, 상대
의 몸에 부딪친 탄력을 이용해 몸을 돌린 청년의 왼 손은 미처 내리친 검을
다시 들어올리지도 못한 또 다른 사내의 가슴을 향해 직선으로 뻗어갔다.
"크아악!"
"커헉!"
하늘 높이 솟구치고 있는 향전의 요란한 소리가 끊이지도 않은 짧은 시간에
두 사내의 몸을 헤집은 청년의 쌍도.
애꾸라고 예외가 아니었으니, 수하들의 몸에서 솟은 핏줄기가 땅에 떨어지기
전에 예리한 칼날이 살갗을 파고드는 강렬하고 후끈한 감촉을 목줄기에 느끼
게 된 것이다.
"끄으―윽."
눈 깜짝할 사이에 흉악한 흑마방의 무사 셋이 시신이 된 마당에 일이 어떻게
되는지 끝까지 지켜보겠다는 배짱 좋은 구경꾼은 없었다.
"으아악, 살인이다!"
"사람이 죽었다!"
사방으로 소리치며 흩어지는 행인들의 발걸음은 웬만한 무림 인이 펼치는 경
공보다 느리지 않았다.
따스한 봄볕에 잎을 틔우는 초목만큼이나 활기찼던 거리는 순식간에 적막에
휩싸였다.
하나 잠깐의 적막은 태풍전의 고요였다.
삐익, 삑 삑!
"저기다! 저놈이 흉수다!"
무려 열 무리로 분산한 세권표국의 표행을 뒤쫓느라 수백의 인원이 빠져나갔
지만 흑마방의 무사들은 여전히 많았고, 체계는 조직적이었다.
메마른 땅바닥을 흥건히 적시며 흐르는 핏줄기를 멍하니 내려다보던 청년이
끔찍한 악몽을 떨치듯 부르르 몸을 떠는 순간, 뾰족한 호각소리가 들리며 대
로를 메우고 달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요란해진 것이다.
청년의 악몽은 이제부터 시작인지 몰랐다.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쌍도를 움켜쥐고 신발을 적시는 핏줄기를 피해 두어 걸
음 옮기기도 전에 청년의 주위는 숨막히는 살기로 채워졌다.
제각기 다른 얼굴만큼이나 다양한 무기를 들고 청년을 노려보는 수많은 눈동
자들.
중간중간 복면을 뒤집어 쓴 자나 맨 얼굴을 드러낸 자 모두 다르지 않았다.
한 동안 계속된 일급경계령에 신경이 곤두서고, 뜻하지 않은 나운의 죽음에
긴장한 흑마방의 인물들은 마침내 발견한 적을 찢어발길 듯한 기세였다.
오 장 여의 거리를 두고 겹겹이 포위하고 있는 오십여 명의 무사들 가운데서
복면을 쓴 사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 본분인 황대진과 그의 수하들이 구차하게 복면을
하고 나설 만큼 상황은 엄중했다. 정작 문제가 되는 표행은 이미 출발했건만
전혀 예상치 못한 돌발 사태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대가 본 방의 분타주를 살해했는가?"
황대진은 조심스러웠다.
생긴걸 보면 영락없는 글방도령 같지만 결코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상대였다.
나운을 살해한 범인인지는 몰라도 향전이 오르고 달려오기까지 그 짧은 시간
에 분타의 제팔 순찰 조를 모두 죽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긴장해야할 상
대인 것이다.
"……."
상대의 침묵에도 황대진의 질문이 이어졌다.
"무슨 이유로 본방의 인물들을 살해했는가?"
대부분 나운의 수하들인 사내들은 당장이라도 상대를 칠 기세였지만 황대진은
마안기무전 소속이었다.
싸움의 성패는 정확한 정보에 달려있다고 훈련받은 마안기무전의 분찰주.
상대가 어떤 대답을 하든 입에서 나오는 모든 소리가 정보였고, 침묵 또한 나
름의 의미가 있었다.
황대진은 바로 핵심을 찔렀다.
"그대는 봉래도 사람인가, 아니면 무적세가의 인물인가? 쌍도를 들고 있는 것
으로 보아 봉래도 사람인 듯 싶은데……."
"……!"
여전한 침묵.
그러나, 움찔하고 놀라는 상대의 표정을 놓칠 황대진이 아니었다.
묵묵히 황대진을 노려보던 청년이 움직인 것은 황대진이 또 다른 질문을 던지
려 하는 순간이었다.
휘이익!
"막아라!"
우두머리를 먼저 치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을 했는지 아니면 뭔가를 알고 있
는 듯 보이는 복면 인을 없애야겠다고 결심했는지 황대진을 향해 쏘아 가는
청년의 움직임은 신속하기 그지없었다.
하나 잔뜩 긴장하고 청년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피고 있던 흑마방의 무사들도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막아랏!"
"어디서 발광을 하느냐!"
오른손에 움켜쥔 청년의 장도가 황대진의 전면에 이르기 전에 유성추(流星鎚)
가 날고 절혼삭(切魂索)이 펼쳐졌다.
촤르르르!
사사삭!
지면에서 발이 떨어졌으니 쉽사리 몸을 틀지도 못할 상황.
황대진이 더 많은 정보를 캐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할 정도로 청년이 목숨을
잃은 것은 분명해 보였다.
하나 황대진의 아쉬움이 경악으로 바뀌는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
다.
"차아핫!"
싸움터만 아니라면 상쾌하게 들렸을 기합성을 토한 청년의 신형이 갑자기 오
그라들며 머리를 으깰 기세로 날아드는 유성추를 피했고, 몸을 움츠리며 휘두
른 도는 도끼로 내리쳐도 흠이 생기지 않는다는 절혼삭을 끊어 버렸다.
"이, 이런……!"
약간 주춤했을 뿐, 여전히 맹렬한 기세로 쏘아오는 청년의 신형이 눈앞에 닥
치자 황대진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고 그 틈을 옆에 있던 수하의 장검
이 메웠다.
"길을 비키면 죽이지 않는다!"
순식간에 거리를 없애고 흑마방 무리 중에 뛰어든 청년의 말이 그다지 믿을만
한 소리로 들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커다란 반원을 그리고 있던 포위망이 좁은 원형으로 바뀌며 전후좌우에서 온
몸을 노리고 쇄도하는 살기 띤 도검이 대답을 대신한 것이다.
"나를 원망 마라!"
어딘가 체념한 듯한 청년의 음성과 함께 무자비한 살육전이 시작되었다.
휘익, 스슥!
도무지 그 왜소한 체구에서 무슨 힘이 솟는지 청년의 칼이 바람을 가르는 것
과 뼈와 살을 가르는 속도가 다르지 않았고, 전신을 엄밀한 도막으로 감싸면
서도 공격 권에 들어오는 상대의 몸뚱이를 가차없이 유린했다.
"으아악!"
"내 팔, 내 팔이……."
피가 솟구치고 끊어진 팔다리가 이리저리 튀는 지옥도가 펼쳐졌다.
비록 일류고수들은 아니라 해도 수많은 실전을 통해 싸움이라면 빠지지 않는
흑마방의 무사들을 상대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는 청년의 무공은 놀라운 것
이었다.
일방적인 살육이 일각쯤 진행됐을까.
십여 명의 동료가 쓰러졌지만 흑마방의 무리들은 물러설 줄 몰랐다.
용감하다기보다는 짙은 피 냄새가 이성을 마비시켜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원인은 분타주를 죽인 흉수로 의심되는 자가 그들의
앞마당에서 날뛰는데 이대로 물러선다면 죽는 것보다 더 두려운 상부의 문책
이 기다린다는 사실이었다.
"죽여라!"
"놈이 지쳤다. 조금만 더 버티자!"
이미 주위 일장 여에 맨땅을 찾지 못할 만큼 적을 쓰러뜨린 청년은 과연 지쳐
갔다.
스슥, 카강!
사람이든 무기든 거침없이 베어나가던 청년의 도가 거북한 마찰음을 내며 멈
칫거리기 시작했고, 허점을 노리고 파고드는 공세를 막아내는 동작이 매끄럽
지 못했다.
"아악!"
탁하고 굵직한 이제까지의 비명과 달리 뾰족한 비명이 장내에 울렸다.
전면과 우측에서 동시에 베어드는 검을 쳐내느라 앞으로 쏠린 청년의 몸이 채
중심을 잡기 전에 좌측에서 대감도를 휘두르는 자의 뒤에서 튀어나온 장창이
마침내 청년의 어깨를 찌르는데 성공한 것이다.
흑마방의 무사들은 기세를 올렸다.
"죽이지 마라. 놈의 정체를 밝히고 나서 죽여도 늦지 않는다!"
일찌감치 싸움판에서 뒤로 물러나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안절부절못하던 황대
진이 얼굴을 펴고 한가로운 소리를 할 정도로 전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한 번 헝클어진 청년의 손발은 점차 힘을 잃어 갔고 상처 난 호랑이에게 달려
드는 승냥이 떼처럼 빈틈을 파고드는 흑마방 무사들의 공세는 신랄했다.
"허억, 헉……."
상처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가쁜 숨을 몰아쉬는 청년의 분투는 머지 않아 끝
날 것으로 보였다.
하나 상황은 다시 돌변했다.
청년의 깨끗한 백색장삼이 동백꽃보다 붉은 빛으로 물들어 갈 때, 포위망 뒤
쪽에서 소란이 인 것이다.
"막아라!"
"저, 적이다!"
"당황하지 마라. 적은 한 놈이다!"
시시각각 목숨을 노리고 이어지는 공세를 막느라 고개를 돌릴 여유도 없었지
만 사방에서 조여오는 압력이 한결 느슨해지는 것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더러운 흑마방의 마졸들, 네놈들을 몰살시키고야 말겠다!"
화산처럼 터져 나오는 우렁찬 노성에 이어 처절한 비명이 연속적으로 이어졌
다.
"크허어억!"
"끄윽!"
무수한 희생을 치르고 기껏 잡은 승세가 속절없이 무너지는 사태를 보며 황대
진은 마침내 후퇴를 명령했다.
이미 피해가 막대하거늘 새로 나타난 자의 검에 남아있는 수하들마저 추풍낙
엽이 되고 마는 것이다.
"물러서라! 후퇴다!"
하나 급박하게 외친 황대진의 음성이 그의 죽음을 재촉했으니…….
처음 싸움이 시작될 때부터 복면을 하고 있던 황대진을 염두에 두고 있던 청
년이 황대진의 음성을 듣자 의식이 가물거리는 중에도 그를 베어야겠다는 마
음을 굳힌 것이다.
'저 자는 반드시 없애야돼. 저 자를 살려뒀다가는 자칫 내 정체가 드러날지도
몰라.'
흐려지는 눈에 힘을 주고 황대진에게 초점을 맞춘 청년은 혼신의 힘을 다리에
모았다.
"이야압!"
"어이쿠……!"
어느새 굳기 시작한 핏덩이 때문에 미끈거리는 땅바닥을 힘차고 박차고 뛰어
오른 청년은 맨 앞에 선 자의 머리를 밟고 허공에서 신형을 선회했다.
휘익, 핑그르르!
이미 흠뻑 피에 젖은 옷자락이 온몸에 휘감기건만 날렵한 붉은 매가 먹이를
노리고 쏘아가듯 군더더기 없이 신속한 몸놀림.
"받아라!"
수하들에게 후퇴 명령을 내리자마자 등을 돌려 장내를 빠져나가던 황대진은
살기 띤 일성과 함께 갑자기 눈앞에 떨어져 내리는 그림자를 느끼고 황급히
두 손을 내저었으나 허무한 몸짓에 그치고 말았다.
쉬이익!
공력을 모아 쭉 뻗은 양장이 허공만 때리는 순간, 날아오는 칼에 마주쳤고 그
의 두 팔은 더 이상 그의 피가 흐르지 못하는 물건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땅바닥에 떨어져 아직도 꿈틀거리는 두 손.
"으으으……."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그런지 고통은 없었다. 대신 입술을 비집고 새나온
절망과 공포가 기성(奇聲)이 되어 장내에 퍼졌다.
푸욱, 털썩!
청년의 왼손에서 뻗어 나온 소도에 가슴을 꿰뚫린 황대진의 시신이 땅바닥에
쓰러졌을 때, 이미 청년은 눈앞에 어른거리는 또 다른 적을 베어 넘기고 있었
다.
"끄어어억!"
사선으로 쓸어 내린 도를 힘겹게 치켜올린 청년은 마침내 더 이상 그의 도를
받을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오른 손의 장도를 지팡이 삼아 흔들리는 몸
을 지탱했다.
"이보시오, 많이 다치셨소?"
힘있는 굵은 목소리에 고개를 쳐든 청년의 눈에 전신(戰神)처럼 늠름한 사내
의 준수한 모습이 들어왔다.
"괘, 괜찮습니다……."
점점 흐려지는 눈에 힘을 주면서 청년은 힘겹게 말을 이었다.
"고맙소이다. 이 은혜를 어, 어찌……."
준수한 사내는 청년의 늘어진 어깨를 부축하며 시원스레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핫! 천하를 소란스럽게 만드는 흑마방의 더러운 개들을 없애는 일은
장부라면 마땅히 해야할 일. 인사를 받을 일이 아니지요!"
수많은 시신들이 처참하게 나뒹구는 지옥도 속에 우뚝 서서 호쾌한 대소를 터
뜨리는 사내의 모습이 더욱 늠름하게 보였다.
"형장의 상처가 위중하니 실례를 용서하시오!"
온통 피를 뒤집어 쓴 청년을 가볍게 들쳐업은 사내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탄탄한 등에 기대어 정신을 잃어 가는 청년의 귀에 사내의 음성이 아련하게
들려왔다.
"난 금사익이라는 사람이오. 모처럼 형장 같은 영웅을 만났으니 참으로 고맙
고 기꺼운 일이외다. 우선 상처를 치료한 후에 몇 날 며칠을 두고 장부의 교
분을 나누도록……."
항주에 온 후로 되는 일이 없는 금사익은 흑마방의 잡졸과 맞서 놀라운 무공
을 보인 청년을 만난 것이 더욱 반갑고 즐겁기만 한 모양이었다.
첫댓글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