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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리
"나를 버리고 가겠다고?"
"그래"
"이럴 수 없는 거야. 가지 마. 제발 날 버리지 말아. 응? 나 사랑한다고 했잖어"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
"지수야 이렇게 가면 나보고 죽으란 소리야. 나 죽는 꼴을 보고 싶어?"
"네가 죽던 말던 그건 나와 관계없는 일이야. 이젠 그만해. 너의 얼굴 보는 것도 지겨워"
"다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 가지마! 나 이렇게 버리고 가면 네가 행복할 것 같아? 가지마!"
"네가 저주한다해도 난 그녀 옆에 있으면 행복 할 것 같아"
"재수 없는 년! 미친년! 또라이! 너 같은 년 필요 없어! 가! 가! 가!"
"잘 살아!"
"너를 지옥에 가서도 저주 할꺼야"
"마음대로 해"
새로운 사랑으로 5년을 함께 동고동락 한 그녀가 나를 버렸다.
그녀가 떠나고 난 집엔 나만이 남겨져 그녀와의 이별을 실감하고 있었다.
"지수야 행복해?"
"행복해"
그녀가 웃는다. 나를 버리고 간 그녀가 쇼파에 앉아 나를 보고 웃고 있다. 행복하냐 묻는 내게 행복하다고 답하고 있다. 더 이상 내 곁에 없는 그녀가 나를 보고 웃고 있다. 행복하다며 그녀가 웃고 있다. 더 이상 없는 그녀인데 그녀의 채취와 5년이란 시간이 집안 곳곳에 남아 나를 슬프게 한다.
그녀가 앉아 있던 쇼파에 앉아 보았다. 쇼파에서 그녀의 체온이 느껴져 그녀가 옆에 있는 듯 했다. 떠난 그녀가 간지럼 태우며 귓가에서 말을 한다.
"지금 어때?"
"......."
"그럼 그렇게 한다?"
"푸하하"
나를 번쩍 들어 안고 베란다로 향하던 그녀. 그녀와 밤새 사랑을 나누었던 베란다. 내 가슴을 간질이던 그녀의 머리카락. 투명하리 만큼 희고 깨끗했던 그녀의 피부.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이 곳곳에 닿던 촉감. 그녀와 함께 하던 살의 촉감이 살아나자 그녀의 부드러웠던 혀가 아직 내 안에 있는 것 같아 눈을 감으니 메마른 입술의 감촉만이 느껴졌다. 메마른 감촉에 따뜻하게 나를 어루만지던 그녀의 손길이 그리워졌다. 그녀가 그리워 눈물을 훔치고 있을 때 그녀가 내 곁으로 다가온다.
"우리 은혜 왜 울어?"
"지섭이랑 헤어졌어. 내가 싫어졌데. 지수야 나 어떡해? 나 이제 어떻게 사니?"
"울지마! 그런 녀석은 잊어버려. 나랑 살면 되지. 은혜야 나 너 사랑해"
눈물로 범벅 된 내 얼굴에 지수의 입술이 닿았다. 내 얼굴 곳곳에 입술을 대던 그녀의 입술이 내 입술에 맞닿자, 그녀의 부드러운 혀가 내 입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내 안에서 부드럽게 움직이는 그녀의 혀는 나에게 위안을 준다. 순간 그녀를 밀쳐냈다.
"이러지 마!"
"키스는 슬픔을 위로하는 힘이래"
다시 다가오는 그녀를 밀쳐내자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이러지 말라고! 왜 이래?"
"너도 나를 느끼고 있는 것 다 알아! 너도 내가 더러워 그래?"
"그런거 아니야. 그냥 갑작스러워서 그래"
지수는 단지 나에게 같이 사는 친구이며 같은 학부 동기 일뿐 그 이상은 아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우린 각별한 사이가 되어 갔다. 늘 함께 하며 사랑하자던 우리는 이젠 헤어졌다.
널 울리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고,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던 그녀는 새로운 사랑을 찾아갔다. 그녀는 이제 새로운 사랑에게 영원토록 함께 하자 약속하며 행복하겠지란 생각이 미치자 가슴이 터져 나갈 듯 했다. 터질 듯한 가슴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진 슬픔으로 숨쉬는 것 마저 힘들어졌다. 그 정점에서 키스는 슬픔을 위로해주는 힘이라며 키스하던 그녀의 말은 잊혀지고 않고 가슴속으로 파고들어 숨통을 조여왔다. 가슴속으로 파고든 그녀의 말보다 이젠 이 슬픔도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이 못 견디게 힘들었다.
한 참을 울고 일어났을 때 집안의 모든 사물이 죽은 듯 제 빛을 잃고 있었다. 밖은 캄캄한 어둠이 내려앉아 나트륨 불빛만이 희미하게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죽은 듯 제 빛을 잃은 집안 사물의 모습을 천천하게 둘러보니 그녀가 떠나 빛을 잃은 내 모습이 그와 같다 느껴졌다. 그녀가 어서 돌아와 예전과 같아지길 바라는 내 모습이 초라하고 비참하다 느끼면서도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내 모습이 서글펐다.
서글픔에 복받쳐 또 다시 울고 있을 때 내 모습이 거울 속에 비쳐졌다. 눈물로 범벅된 퀭한 두 눈과 바짝 마른 입술, 헝클어진 머리를 한 낯선 얼굴이 나를 노려보고 있다. 그녀가 이런 내 모습을 보고 있을 것만 같아 화장실로 달려가 얼굴을 연거푸 헹구고 헝클어진 머리를 감고 단정하게 빗어 내린 다음 핏기 없는 얼굴에 진한 화장을 덧 입혔다. 바짝 마른 입술에 붉은 립스틱을 바르고 가슴이 훤하게 보이는 푹 파인 검은 색 니트만을 걸치고 베란다로 갔다. 그녀와 마지막 사랑을 나누었던 우리 둘만의 장소인 베란다 바닥에 누워 천장에 붙은 북두칠성의 야광별을 보았다.
"지수야 뭐해?"
"블라인드 달어."
"그건 뭐하게?"
"여기서 하면 좋을 것 같아서."
"뭐? 창피하게"
"뭐가 창피해. 블라인드 치면 아무도 모를텐데. 여기에서 하면 하늘에서 하는 것 같을 거야 바람도 손에 잡힐 듯 불 테고 아파트에서 우리 층이 가장 높은데 누가 보겠어?"
"그래도 싫어! 누가 보면 어떻게?"
"그럼 우리 당장 실험해 볼까?"
"싫어"
"이리와"
달아나는 나를 그녀는 번쩍 들어 안고 베란다 바닥에 눕혔다. 천장엔 일곱 개의 야광의 별이 국자 모양으로 빛을 내고 있었다.
"어! 북두 칠성이네"
"진짜 하늘에서 하는 것 같겠지?"
"푸힛. 근데 왜 북두칠성이야?"
"너에게 가는 길의 지침이 되어줄 것 같아서"
"무슨 의미야?"
"야한 의미야!"
그녀의 가슴으로 내 가슴을 지그시 눌어오면 내 입술에 입맞추었다. 그녀가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뺐다를 반복하다 혀를 꼿꼿하게 세워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내 혀와 그녀의 혀가 맞닿자 그녀는 내 혀 위에 그녀의 혀를 포개곤 한참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입안 가득 그녀의 체온이 느껴졌다. 한참을 움직이지 않던 그녀의 혀는 내 안에서 가볍게 마찰시키며, 나와 그녀의 타액을 섞다, 그녀의 입술은 얼굴과 가슴, 귓가를 오가며 입맞췄다.
그녀의 손은 부드럽게 내 가슴을 감싸쥐다 다리 사이로 내려가 부드럽게 오고 내렸다. 나를 부드럽게 감싸며 내 안에서 움직이던 그녀의 손길은 한없이 다정하고 따뜻했으며 귓볼과 가슴을 오가며 간질이던 그녀의 입맞춤은 황홀한 달콤함이었다.
그녀를 떠올리며 누워 있는 베란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차가운 기운은 그녀의 따뜻한 손길이 닿던 감촉 마저 지워내고 있었다. 그녀의 손길이 지워질 것만 같아 니트 사이로 손을 집어넣고 애타게 가슴을 탐하다 국부로 향해 내려가 거칠게 움직였다. 거친 움직임 속에서 몰아쳐 나오는 것은 그녀를 향한 절규였다.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나는 더욱 거칠게 손을 놀렸다. 거칠게 놀리던 손가락을 멈춘 것은 가랑이 사이로 피가 흘러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였다.
흐르는 피를 닦아낼 때 그녀와 함께 했던 첫날밤 일이 떠올라 씁쓸해졌다. 그녀의 처녀성을 조심스럽게 닦아내는 내게 수줍게 웃어 주던 그녀는 나와 영원히 함께 하리라 했었다. 그런 그녀가 내 곁을 떠났음에도 그녀를 안고 싶어하는 밤이란 사실이 더욱 나를 처량 맞게 만들었다.
이젠 미련을 버리고 잊을 것을 다짐하면서도 나는 그녀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란 어리석은 미련을 부여잡고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에 그녀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그녀의 전화에 나는 혹시라도 그녀가 내게 잘못을 빌고 돌아오지 않을까란 희망으로 경쾌하게 전화를 받았다.
"지수야!"
"잘 지냈어?"
"그걸 왜 물어? 잘 지냈을 것 같니?"
"아파트 혼자 살기 힘들어. 월세도 혼자 감당하기 힘들다는 것 알어. 룸메이트 구했어 오늘 중으로 갈 꺼야. 알아두라고"
"너 그 말하려고 전화했니?"
"잘 지내"
"지수야"
전화기에선 뚜뚜 신호음만이 들려왔다. 그녀의 전화는 또 한번 나를 절망하게 했다. 이젠 모든 것을 절대 되돌리 수 없는 비애감만이 나를 누르고 있었다.
그녀의 전화를 끊고 한 시간 후쯤 차임 벨이 울려왔다. 차임 벨이 그녀가 아닐 것임을 알면서도 나는 혹시나 그녀가 함께 오지 않았을까란 헛된 희망을 품고 문틈으로 확인을 했다. 그녀일리 오지 않았을 거란 걸 알면서도 가진 헛된 희망은 그대로 내게 아픔이 되어 가슴 한구석을 싸하게 만들었다.
문 앞에 서 있는 여자의 모습은 말이 아니었다. 외소 한 몸에 눈에 드리워진 깊은 음영은 깊은 슬픔을 지닌 듯 했다.
"누구세요?"
"저 룸메이트 구한다고 해서 온 사람입니다. 은혜씨 집 아닌가요?"
"맞지만 일단 들어오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눈에 드리워진 음영보다 더한 슬픔을 지니고 있는 듯 했다. 그녀의 짐이라고는 여행용 가방 하나 뿐이었다.
"제가 쓸 방은 어디입니까?"
"저 저랑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차는 뭘로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할 이야기란 것이 무엇입니까? 같이 쓰는 사람으로서 서로 지켜야 할 예절과 규칙에 관한 이야기라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런 이야긴 아니에요. 저는 룸메이트를 구한다고 한 일이 없어요. 다른 누군가와 같이 살 생각도 없어요. 죄송하지만 다른 곳을 알아보시는 것이 좋겠어요......."
"지수씨의 연인 이셨죠?
낯선 여자에게서 그녀의 이름이 울려 퍼져 나오는 것에 순간 놀랐지만 그녀가 룸메이트를 구한다고 광고를 냈고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왔으니 낯선 그녀가 당연히 그녀를 알고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지수와 어떤 관계죠?"
"아무 관계 아닙니다."
"그럼 이곳에서 나가주세요 이곳은 지수와 저만의 공간이었습니다"
"......"
정말이지 나는 그녀와 함께 나누었던 공간을 타인과 나누고 싶지 않다. 내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 지수가 원망스럽기만 하다. 어째서 나를 이토록 비참하게 만드는 것인가에 대한 생각으로 지수에 대한 원망이 극으로 치 닫고 있는 때에 그녀는 내 생각을 알아 챈 듯 영원한 사랑은 없다며 당분간 거실에서 지낼 것이라 말하며 짐을 내려놓는다.
나는 멍하게 그녀가 하는 요량을 지켜보다 그녀가 이 집에서 나가리란 기대를 버렸다.
그녀와 나는 마찰 없이 한 달을 함께 지냈다. 한 달을 함께 한 그녀와 첫 대면이래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그녀도 말을 하지 않았으며, 나 또한 그랬다.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으며 보냈다. 그녀에겐 걸려오는 전화도 없었고, 외출도 하지 않았다. 단지 새벽이면 새벽바람을 쐬며 맥주를 마시는 것 이외는 별 다른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한 그녀의 행동은 숨만 쉬고있는 벽과 같게 느껴질 정도였다.
깊은 슬픔이 그녀를 감싸안고 있다는 생각이 들만큼 고독하고 외로워 보였지만 그러한 느낌만 줄뿐 확신을 주는 말과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가 지수 생각으로 눈물을 보이는 모습에도 동정하지도 또 위로하려 하지도 않았으며, 나의 어떠한 태도에도 그녀는 무표정하고 무관심했다. 그녀의 이러한 태도가 사랑을 잃은 슬픔에 잠길 수 있게 도와줬지만 나를 더욱 쓸쓸하게 만들었다. 내 슬픔에 내 눈물에 위로해주는 이 없는 고독함이 지수와의 이별의 느낌을 자극하곤 했다.
나는 지수와 이별 이후 친구들과 만나는 시간을 자주 갖으며 그녀를 잊고자 했지만 친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지수의 이름엔 눈물이 먼저 반응했고, 지수의 안부를 묻는 물음엔 입 밖으로 울음이 터져 나와 지수와의 이별을 더욱 실감해야 했다. 지수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는 내 태도에 다른 이들은 지수와 나의 관계를 어림짐작하며 나를 위로하려 했지만 모두 쓸데없는 말로 들려 친구들과의 만남도 피하게 되었다.
토요일 오후 친구와 있었던 약속을 취소하고 문을 열고 들어가자 향기로운 냄새가 코 끝에 퍼져왔다. 향긋한 향기와 함께 그녀가 집안으로 들어서는 나를 보고 빙긋 웃으며 반겨 준다. 한 달을 함께 하며 보아온 그녀이지만 웃음을 보이는 일이 단 한번도 없었다. 늘 무표정하여 타인의 눈물 앞에서도 예의 그 표정을 보일 것 같은 그녀가 내게 웃어 보이는데 그 웃음이 야릇하여 기분 나빠졌다.
그녀의 웃음에 쓴웃음만 짓고 있는데 그녀가 손에 든 투명한 머그잔을 보이며 자스민 차인데 함께 할래요?라 물었다. 그녀의 물음에 대꾸하지 않고 고개로 대답하니 그녀는 또 다시 빙긋이 웃으며 자스민 차는 우울증에 좋아요, 한번 마셔봐요. 라며 그녀가 들고 있던 투명한 머그잔을 손에 쥐어줬다. 어서 마셔보라는 그녀의 눈빛에 못 이겨 한 모금 마시자 집안에 들어 올 때 맡았던 향기가 입안 가득 퍼졌다.
"어때요?"
"좋네요"
"이젠 좀 괜찮아졌습니까?"
"......"
그녀의 물음에 모르는 척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지수는 어땠어요? 집안에 있을 때?"
"아무 관계도 아닌 사람이 이름을 참 다정하게도 부르네요"
어떤 관계이였길래 그녀가 지수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는 것인가? 란 생각이 들자 화가 터져 나왔다. 순간적으로 폭발 한 화를 억누르려 했지만 화는 삐죽하게 솟아올라 내 상태를 그대로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아! 지수는 내 동생입니다"
"지수에게는 언니가 없어요."
그녀와 나는 5년을 연인이란 이름으로 함께 해왔다. 지수의 가족사항뿐 아니라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데 그녀의 거짓말이 지수가 나와 함께 하면서도 사귀던 사람이 아닐까란 의심을 낳게 했다. 그 의심이 짙어질수록 지수에 대한 배심감도 짙어져 날카롭게 반응했다. 그녀를 노려보는 내 눈에 그녀는 전에 없이 활짝 웃으며 "사실이에요" 라는 말로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지수보다 두 살 많은 언니입니다"
"난 단 한번도 지수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 했어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언니란 말 같지 않은 말 마시고 솔직하게 이야기 해 봐요. 지수와 어떤 관계였어요? 아니 지금 어떤 관계인가요? "
폭발 할 듯 치미는 화에 배신감 마저 머리 속을 뒤흔들어 놓아 눈이 파르르 떨리다 눈물이 고여 왔다. 이 감정을 진정시키려 노력했지만 내 눈은 그녀의 입 모양을 주시했고 귀는 그녀의 목소리에 듣기 위해 신경이 곤두섰다.
"나 호적 상 언니 맞아요. 지수가 그런 부분까진 이야기 할 순 없었군요. 우리 부모님께선 제가 어릴 때 이혼했어요. 그리고 지수네 아빠와 우리 엄마가 만나 재혼을 하셨지요. 그때 지수 나이가 13살이라 상처가 컸었지요. 그땐 감수성이 예민할 때잖아요. 엄마 아빠가 결혼 한 후 매일 밤마다 울었어요. 그렇게 한 달을 우는 지수를 지켜보며 무엇이 저리도 서러울까 생각했었지요. 한 달을 울던 지수는 한 달이 지나고 나서부턴 울지 않았더군요. 처음엔 어떤 마음으로 그런 것인가 했는데 조금 지나자 곧 알게 되었어요. 가족들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이었지요. 집에서는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어요. 어떤 일에 지수는 무관심과 무표정으로 일관했어요. 전 그런 지수가 안타까웠어요. 그 애 마음속에 드리워진 슬픔을 치유해주고 싶은 마음에 늘 바라보게 되었어요. 슬픔을 품은 고독한 지수를 보면서 지수를 사랑하게 되었어요. 하지만 지수는 나의 사랑에 냉담했어요. 지수가 이런 날 경멸하지 않을까 했지만 지수는 그렇지 않았어요. 나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어 냉담했을 뿐 나의 사랑을 경멸하진 않았지요. 지수가 사랑을 경멸한 것은 아니었더군요. 그 배경엔 은혜씨가 있었고. 지수는 은혜씨를 정말 사랑했어요. 지수가 집에서 처음으로 웃었던 때가 20살 때였던 것 같아요. 집에 잠시 내려 왔을 때였는데 지수 방에서 깔깔 웃는 웃음소리가 들려오지 뭐예요. 난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어요. 지수 웃음소리의 정체가 궁금해 지수 방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는데 은혜씨의 이름이 흘러나오더라고요. 지수가 은혜씨의 이름을 부르며 전화통화를 할 때는 집안에서도 시종일관 웃었어요. 무표정과 무관심으로 무장한 지수가 말이죠. 지수의 웃는 모습에 은혜씨를 질투할 만도 한데 난 은혜씨에게 감사했어요. 어떤 사람이길래 우리 지수를 웃게 만들었을까란 생각이었지요. 꼭 한번 만나보고 싶다. 분명 아름다운 사람일 것이다란 생각이 들었어요. 지수의 운명과 함께 해줄 아름다운 분이리란 생각이 들어 지수에게 은혜씨를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을 때 지수가 빙긋이 웃더군요. 지수가 나에게 보여 준 미소로 얼마나 감격했는지 몰라요. 은혜씨가 보기엔 이런 내가 우스울지 모르지만 집안에서의 지수는 무표정과 무관심으로 무장하고 있어, 감정이 모두 죽은 사람 같이 보였어요. 그런 모습이 보는 사람에게 섬뜻한 슬픔을 줬어요. 지수의 운명이 슬퍼서 섬뜻하게 느껴졌지만 이제 지수는 그 운명에서 자유로워 보여요."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믿을 수 없었다. 지수가 단 한 번한 가족 이야기는 가족은 내 가슴속에서 죽고 없다는 이야기였다. 가슴속에서 가족이 죽었다는 말로 지수가 가족에 대한 상처가 뼈아프게 새겨져 있으리란 짐작은 했지만 그녀의 말이 모두 사실로 와 닿지 않았다. 여름 햇살처럼 싱그럽게 웃는 그녀가 시종일관 함박 웃는 그녀가 집안에서는 무표정하고 무관심했을 모습이 연상되지 않았다. 못 믿겠다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자 그녀가 싱긋 웃는다.
싱긋 웃는 그녀의 웃음에 소름이 끼쳐왔다.
"당신 정체가 뭐죠?"
"지수 이야기 더 해도 되죠? 지수는 10살 무렵에 교통사고로 엄마를 잃었다고 들었어요. 엄마와 지수 사이가 각별했다고 하더군요. 엄마와 딸 사이에 모두 있는 일이지만요.지수는 엄마를 교통사고로 잃고 실어증이 왔다는 이야길 들었어요. 그렇게 말못하고 지낸 시간이 6개월이라고 했어요. 6개월의 시간동안 지수는 말을 잃은 만큼 웃음도 잃어갔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어느 만큼 시간이 흐르자 지수는 잃었던 말도 하게 됐고 전처럼은 아니지만 웃음도 돌아왔다고 하더군요. 지수가 어느 정도 안정되는 모습을 보고 아빠는 엄마와의 결혼을 하게 된 건데 아빠는 철저하게 지수를 잃고 말았지요. 어린 지수에게 있어선 아빠에 대한 배신감이 컸던 것 같아요. 아빠가 엄마이외의 다른 사람을 만나 행복해하고 기뻐하는 모습에. 그래서 그런지 지수는 가족에게 있어서 철저하리 만큼 무표정과 무관심으로 일관했어요. 돌아가진 아빠 영전에서도 눈물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감정이 메말라 있었지요. 가장 기본적인 가족이란 관계에서 감정이 틀어져서인지 지수는 모든 관계에 있어서도 틀어져있고 메말라 있었어요. 근데 은혜씨에게만은 달랐어요. 은혜씨 앞에선 잘 웃고 잘 떠들고 그랬던 것 같아요. 은혜씨를 사랑하면서부터였던 것 같은데 어느 날은 술에 잔뜩 취해 저희 집엘 다 왔더군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이런 것인 줄 몰랐다면서 죄송하다고 죽을 만큼 죄송하다고 새엄마한테 죄송하고 돌아가진 아버지한테 죄송하다고 죽을 만큼 죄송하다고 제발 용서해 달라며 빌고 또 빌었어요. 용서해달라며 비는 지수의 모습에 심장이 저리더군요. 그동안 지수가 껴안고 있었던 죄책감으로 눈물 흘리는 지수의 모습이 안타깝고 그 죄책감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지수의 운명에 눈물이 났어요.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기뻤답니다. 메말라 버린 심장에 단비 내린 이가, 얼음 같은 심장을 녹여낸 이가 있구나 싶어서요. 우습게도 난 지수가 사랑한 은혜씨 마저도 사랑하게 된 것 같아요. 은혜씨 지수를 사랑했죠? 그럼 지수가 떠난 것에 배신감을 갖는다거나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지수는 은혜씨를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니. 지수는 마지막 가면서도 행복해했어요. 은혜씨를 대신 할 수 있어서 좋다고. 그러니 은혜씨 이젠 지수를 보내줬으면 좋겠어요. 지수가 떠난 한 달은 슬퍼해도 은혜씨의 평생은 행복하기를 바라는 지수를 생각해서요."
"난 당신의 말이 이해되질 않아요. 지수는 이미 날 떠나갔어요. 바보 같은 미련으로 아직도 지수를 잊지 못하고 있지만 지수는 이미 떠났어요. 지수의 마지막이라니요? 지수의 마지막이란 소리가 무슨 소리예요?"
목소리가 떨려왔다. 마지막이란 말은 곧 죽음이란 것과 연결되는 고정관념으로 절규에 가까운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내 절규에 그녀는 빙긋이 웃었다. 빙긋이 웃는 모습에 지수의 모습이 겹쳐지는 것은 분명 나만의 착각이리라 생각됐지만 지수가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여름햇살처럼 싱그럽게 빙긋 웃고 있었다.
"어어어......흑......지수야!"
그녀가 내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낸다.
"미안해. 먼저 가서. 은혜야 나 없어도 다른 사람 사랑하면서 지내야해. 사랑이란 건 참 아름답더라. 너를 사랑하고부터 세상의 모든 것이 사랑스럽고 아름답고 그러더라. 과장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그랬어. 빌어먹을 운명을 타고난 내 자신이 못 견디게 싫었는데 너를 사랑하니깐 이런 내 자신도 사랑하게 됐어. 나를 사랑하지 않고는 너를 사랑할 수 없었거든. 내가 귀하기에 다른 사람도 귀하다는 것을 너를 통해 알아갔어. 너를 사랑함으로 인해 나를 사랑하게 되고 또 다른 이의 사랑도 알아갔어. 너가 듣기엔 우습겠지만 그래. 사람은 오로지 사랑에 의해서 살아간다는 톨스토이의 말을 비웃었는데 사람이 사랑을 하기에 살아 갈 수 있는 곳이, 이 세상이지 싶어. 은혜야 나 이젠 좋은 곳으로 갈 수 있어. 바보 같은 미련이 남아서 2000일 채우고 떠나려고 네 주변에 머물러 있었는데 오늘이 우리가 함께 한지 딱 2000일이야. 이젠 가봐야 할까봐. 너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사랑하며 살어. 너와 내가 나눴던 사랑 네 가슴에만 품고 있지 말고 다른 이에게도 나눠주며 사랑하고 살어. 나 잊고 살고. 그래도 나와 함께 한 사랑 전부다 잊진 마. 때때로 생각하며 나를 추억해주면 안될까? 이 부탁이 무리한 부탁일지 모르지만 전부 잊지는 말아. 때때로 기억해조. 은혜야 사랑하고도 사랑해. 영원히 사랑해. 너를 만나 사랑하게 되어 행복했어."
한기가 느껴진 순간에 착각처럼 보였던 지수의 모습은 간데 없이 사라지고 그녀가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며 그녀의 손을 치워내자 그녀는 슬픈 듯 말했다.
"지수는 이제 떠났어요. 은혜씨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지수는 태어날 때부터 슬픈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어요. 지수가 사랑하게 되는 세 사람은 세상을 떠나게 되는 운명을. 그런 슬픈 운명은 그대로 들어맞았지요. 지수의 엄마가 그러했고 아빠가 그랬어요. 지수 자신은 몰랐지만 아빠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는 사랑이었어요. 그래서 아빠도 돌아가신 것이고. 지수의 운명이 그럴 것이란 걸 처음 점친 사람이 저였어요. 지수의 그런 운명을 알았을 때 무척 힘들었어요. 점술인의 비애죠. 보아서는 안될 것을 보게되는 비애. 지수의 그런 운명은 빗겨가지 않고 이번에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어요. 그 죽음의 그림자를 본 전 지수에게 지수의 운명을 말해주지 않을 수 없었어요. 세 사람이 죽게 된 뒤의 지수는 죽고 싶어도 죽음을 택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운명에 처하게 되거든요. 그 세 번째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사람이 은혜씨였어요. 지수는 자신의 죽음을 선택했어요. "
"으.......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늘어놓지 말아요. 난 지금도 충분히 힘들단 말이에요.....으......"
이 현실이 이 말이 믿어지지 않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나를 대신해 떠난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머릿속이 백지처럼 하얗게 질려갔다. 그때 머릿속을 강타하며 전화벨이 울려왔다.
"여보세요"
"거기 윤지수씨 댁인가요?"
"네? 맞는데요 실례지만 누구시죠?"
"몇 시간 전에 교통사고가 났는데 이제야 연락이 됐는데. 윤지수씨가 운명을 달리했습니다. 급히 이곳으로......."
더 이상 전화를 듣고 있을 수 없었다. 무릎에 힘이 풀리며 정신마저 풀려갔다. 깨어났을 때 지수의 언니가 내 곁을 지키고 있었다. 빙긋이 웃으며.
"괜찮아요?"
"지수는요?"
"좋은 곳으로 간다고 했지요? 좋은 곳으로 갔어요. 지수의 슬픈 운명도 끝이 났죠. 내일 지수를 위해 제를 올릴 생각인데 함께 갈 거죠?"
"......."
그녀의 소리가 아득하게 들린다.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문을 열고 들어와 지수가 괜찮냐며 걱정스런 얼굴로 내 얼굴을 쓸어 볼 것만 같다. 아직도 생생하게 내 곁에 살아 있을 것 같은데 그녀는 이제 내 곁에 없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곳으로 만지고 싶어도 만질 수 없는 곳으로 나를 위해 떠났다. 지수야. 지수야. 불러도, 불러도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대답하지 않을 곳으로 갔다.
지수의 제를 올리기 위해 지수가 평소에 좋아하던 바다를 찾았다. 바다에서 그녀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대답 없는 그녀.
사랑해 지수야.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너 없으면 나도 없어.
어느 날의 아침 신문 귀퉁이엔 동해바다에서 여자의 변사체가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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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보아 주신 분들께 감사의 인사 전합니다. ^^
엉뚱한 생각속에서 엉뚱한 글이 나왔네요.
이 글이 다른이에게 상처가 되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상처가 되었다면 깊이 사죄드립니다.
첫댓글 오 등이오싹했다는..섬뜻했어요ㅋㅋ해피엔딩은아니지만 글을정말잘쓰신듯!
ㅜㅜ... 저는 슬픈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