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바논(베이루트, 사이다, 수르, 바알벡, 트리폴리)
시리아(홈스, 하마, 다마스커스, 보스라)
요르단(제라시, 암만, 마다바, 케락성, 페트라,, 와디럼, 아카바)의
일정이었습니다.
시리아 [하마]의 수차(Norias):
우리나라와 몇 안되는 미수교국으로 사회주의 이슬람 국가인 시리아.
미국과의 관계가 좋지 않아서 우리까지 한없이 색안경을 끼고 보아
온 나라이다.
우리나라와 축구경기를 한 알레포와 다마서커스 사이에 위치한
조용한 마을 하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최고의 매력포인트이다.
도시 한가운데를 흐르는 오론테스 강의 물을 끌어들이는데 쓰였던
수차가 아름답게 자리하고 있다.
비잔틴 시대부터 시작된 12개의 수차 중 최대의 것은 마을 중심에서
1km 정도 하류에 있는 알-무함마디야라고 하는 이름의 수차로
직경이 20m나 된다.
모스크:
누군가 여행에 대해 명쾌하게 말했다.
서양의 구경거리는 '성당'이고 동양은 '절'이라고...
그렇다면 중동의 구경거리는 자신있게 '모스크'라고 말할 수 있다.
모스크의 색깔과 모양이 너무나 예뻤고, 안에서는 숙연하게
무슬림들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우리가 자주 접해보기 힘든 모스크의 내부는 중앙에 카페트가 깔려있고,
대부분의 벽은 정교한 무늬로 인간이나 동물 등을 형상화할 수 없는
단점을 극복하고 있다.
기도에 방해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캠코더로 촬영을 한후 배낭여행을
한 학생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팔미라:
광대한 사막의 오아시스에 약 16만평에 달하는 유적이 펼쳐있는 신비의 도시.
오랜 역사의 시련과 지진을 거친 후 1930년대에 와서야 발굴과
복원작업이 시작되었으나 워낙 방대한 유적이라 아직도 복원작업은
계속되고 있다.
영국의 여성작가 아가사 크리스티는 이곳에 매료되어 "뜨거운 모래사막
한 가운데 땅속에서 솟아오른 듯한 환상적인 도시 팔미라"라고 묘사하였다.
팔미라:
벨 신전 건너편에 팔미라 유적이 남아있는데 거대한 기둥들의 숲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곧 무너질 것 같은 아치형의 문을 지나 당시의 낙타를 탄 상인처럼
기둥 사이를 걸어가다 보면 왼쪽으로 극장(THEATRE)이 나온다.
1950년까지 모래에 묻혀 있었는데 현재는 거의 재건을 했다 할 정도로
잘 만들어진 모습으로 남아있다.
극장앞 사거리의 18미터 넓이의 반석 위에 4개로 이뤄진 기둥이
4개가 있는데 TETRAPYLON 이라고 하며 시장(AGORA)과 다른 신적으로
연결하는 중요 교차로 역할을 하였다.
팔미라:
열지어 서있는 기둥들. 팔미라의 원래 도시 이름은 타드모르(Tadmor)라고
하는데 점토문서에는 기원전 19세기까지 거슬러 언급된다고 하니 역사가
아주 깊은 도시이다.
지중해와 페르시아만(지금의 걸프 만) 국가들을 연결하는 캐러밴의
중요한 기지로 활용되었고 중국, 인도와 유럽을 연결하는 옛 실크로드의
중요한 길목이었다.
요르단에 있는 페트라가 로마에 의해 멸망됨에 따라 페트라의 몫까지
팔미라가 대신하였다고 한다.
팔미라:
로마황제 하드리아누스(Hadrian)가 AD 130년 이곳 팔미라를 방문하여
"자유도시"로 선언하고 자체 세금을 걷어들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시리아 출신 어머니로부터 태어난 카라칼라(Caracalla) 황제는
AD 212년에 팔미라를 로마 식민지로 만들었고 따라서 팔미라 주민들은
로마 시민의 권리를 얻게 되어 캐러밴 중계 도시인 팔미라가 번성하게
되었다.
로마황제 아우렐리아누스(Aurelian)는 로마의 권위에 도전한 제노비아
여왕의 군대를 AD 271년 안티오키아(현재는 터키)와 에메사(지금의 홈즈)에서
격파하고 팔미라를 공격함에 따라 결국 제노비아가 호위대와 함께
페르시아로 원군을 요청하러 가다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기 전에 로마 군에
붙잡혀 AD 272년 팔미라는 항복하게 된다.
제노비아는 로마 황제의 전리품이 되어 로마로 끌려가고 개선식이
끝난 후 한 원로원 의원과 재혼하여 티볼리에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오른쪽 아치 사이로 멀리 아침햇살에 빛나는 아랍성이 보인다.
보스라:
다마서커스 남쪽 140Km 에 위치, 검은 색 돌들이 많이 보이는 동네로
잘 보존된 거리와 웅장한 원형극장이 있는 중요한 고대 로마 유적지이다.
아직까지 팔미라 유적지에 비해 덜 알려진 탓인지 여행자들이
그리 많이 찾고 있지는 않지만 놓쳐서는 안될 여행지이다.
이곳에서 고대 로마부터 비잔틴을 거쳐 이슬람 기간까지의 지나간
역사를 한눈에 들여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도시전체가 고대와 현재가 공존하는 모습이다. 지금은 잘 알려지지 않는
조그만 마을일뿐이지만 한 때는 무역의 거점으로 번영했던 곳이다.
보스라(Bozrah):
나바테안 족이 점령한 요지로 국경지대 도시였으며, 로마시대에는
대상무역(caravan)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Omar Mosque, Fatima Mosque 등이 미나렛을 길게 올리고 폐허 속에 서있으며
곳곳에 로마 시대의 유적들, 석주와 신전 등이 흩어져 있다.
대부분의 집들이 현무암으로 지어져 있는데 그 검은 색 돌들은 유적지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데 벽돌담, 집의 기둥 등으로 사용되고 있는 모습이
흥미롭다 못해 안타깝다.
보스라 원형극장:
고대 유적지의 하이라이트가 되는 곳으로 성채와 원형극장이 함께 붙어있다.
시리아의 뛰어난 건축미를 보여주는 건축물로 그 거대한 규모뿐만 아니라
완벽에 가까운 보존 상태로 유명하다.
AD 106년에 지어진 이 원형극장은 8세기말 우마이야 왕조의 첫 번째 요새로
사용되었다.
극장은 1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이며 구석에는 두개의 큰 탑이
세워져 있다.
과거에 원형극장은 벽면에 보석을 박고 입구마다 비단 천을 둘렀으며,
군데군데 향수를 뿌려 관객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게 했다.
이 원형극장은 거의 성이나 요새처럼 변형이 되어 있는데, 아홉 개의 탑이
세워져 있고 탑의 곳곳에 궁수를 배치하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으며,
극장의 바깥 둘레에는 해자가 파져 있다.
크락 데 슈발리에(Crac des Chevaliers):
한번쯤 달력의 아름다운 성 중 하나로 보았을 듯한 견고하고 보존이
잘된 성이다.
해발 750m 칼릴산 정상에 우뚝 선 이 성은 "기사의 성"이란 뜻이다.
800년간 이곳을 지켜온 이 십자군성은 세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잘
보존되어 있어 시리아의 주요 관광지로 빠지지 않는 곳이다.
원래는 유럽풍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성이지만, 1271년 맘룩왕조의
손에 들어가면서 이슬람풍의 내장도 갖춘 동서의 건축양식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성이다.
다마스쿠스의 우마이야드 모스크Omayyad Mosque:
이슬람 4대 모스크 중의 하나로 705년 경 고대의 신전 유적과 카톨릭 교회가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사방 구석 중 세 곳에 미나렛이 세워져 있고 중앙에 넓은 광장이 있으며,
광장의 좌우측으로는 모스크 내부로 들어가기 전에 손과 발을 씼는 곳이 있다.
무슬림이 아닌 사람은 북쪽 입구로만 들어갈 수 있고 실내와 실외 어디에서든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입구를 통해 광장으로 들어서서 오른 편에 보면 해시계가 있는데 모양이
우리나라의 해시계와 비슷하다.
실내는 넓은 공간인데 높은 천장에서 내려온 긴 줄이 머리 높이 쯤에 등을
매달고 있고, 바닥에는 카펫이 깔려있다.
여자와 남자가 따로 앉을 수 있도록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이 모스크는 3개의 미나렛이 있으며 그 중에는 예수의 미나렛(Minaret of Jesus)이
남동쪽 코너에 위치하고 있어 이슬람의 너그러움을 읽을 수 있다.
세례요한의 머리 무덤:
우마이야드 모스크의 안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세례
요한(John the Baptist)의 무덤이다.
왜 이곳에 요한의 머리 무덤이 있는가 하고 의아해 할 것이다.
원래 이곳은 아라무인의 신 하다드의 신전이 있었고, 로마시대에는
주피터신전로 바뀌었고, 이후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신전의 일부를
파괴하고 요하네 교회를 건축했다.
8세기에 들어 한층 더 개조했기 때문에 기둥은 코린트식 신전의 벽을
외벽으로 넣어버린다.
모스크가 들어서기 전 작은 규모의 교회가 있었는데 이 건물의 코린트식
기둥이 현재 사원의 외벽으로 남아있고 이 때 교회 지하 납골당에서
사도 요한의 머리가 발견되어 현재 사원 안에 보관 중이라고 전해진다.
제라시:
암만 시의 북쪽에는 자동차로 약 45분 정도 거리에 로마 시대 '제라사'
불리던 제라시가 있다.
제라시는 로마 - 그리스 시대의 10개 위성도시(DECAPOLIS) 의 하나로 보석,
비단, 상아 등의 판매가 이루어지던 사막 캐러밴의 경유지. 로마 제국의
멸망과 지진으로 인해 도시는 폐허가 되었으나 발굴 작업에 의해 복원되어
이탈리아 외에 로마 시대의 도시 흔적을 거의 완벽하게 갖춘 도시로서 유명하다.
로마는 2천년전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를 만들었는데 여기에 사는 현재 사는
사람들은 이를 복원할 능력도 잃고 널려있는 돌들이 언제 제자리를 찾을지
모르고 기다리고 있다.
아마 이런 기둥이 미국이나 영국에 하나라도 있다면 벌써 건물을 복원하지
않았을까 하는 망상에 젖는다.
베드윈:
요르단의 사해( Dead Sea)를 보고 척박한 산등성이를 넘다가 만난
사막의 주인 원조 베두윈 족이다.
간신히 자라는 풀을 뜯어 먹고 있는 양떼를 보기 위해 택시를 세웠더니
담배를 달라기에 한 갑을 통째로 다주었다.
아마 자기 생각에는 한개피를 생각했던 모양인데 무척 고마와 했다.
강렬한 햇볕에 그을려 나이를 알아볼 수 없으나 그렇게 많이 들어
보이지는 않는다.
황량한 벌판에 천막을 치고 살며 양떼를 키우지만 아무런 근심이나
걱정없어 보이는 표정이 무척 부럽다.
아! 페트라:
붉은 사암으로 이뤄진 거대한 바위틈새가 형성되어 있는가 하면,
갑자기 협곡 가운데 웅장한 건물이 나타난다.
요르단 최고의 관광지인 페트라는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마지막 성배'의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많은 여행자들이 찾고 있다.
협곡을 지나 카즈네에 도착하는 순간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다른 곳에서의
기억은 모두 사라질지도 모른다.
사방을 둘러싼 장미 빛 절벽고 불가사의할 정도로 현란한 색채의 암석들은
찾는 이를 황홀하게 만들기에 충분한다.
2천년이라는 시간을 거슬러 폐허의 유적으로 나타난 페트라의 매력은
그 어느 유적과도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아름답다.
바위산을 통째로 깎아서 만든 이 건물은 AD1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하리스 4세의 무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 학자들은 후에 신전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믿는다.
2층을 이루어진 높이 43m의 이 건축물은 전형적인 코린트 나바테안
양식으로 전면에 6개의 코린트식 기둥이 바치고 있다.
로마 원형극장(Roman amphitheatre)
암만에서 가장 볼만한 유적지로 시내 중심에 있다.
이 원형극장은 암만(고대 필라델피아) 유적 중 가장 잘 보존된 건축물로
거의 완벽하게 남아 있다.
한때 공동묘지로 사용되었던 언덕을 깎아서 AD169~177년경에 건설한 것으로
6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현재도 각종행사가 열린다고 한다.
이런 극장에 앉아 오페라를 감상할 수 있다면 얼마나 감동적이겠는지
다음 여행 때는 사전에 이런 정보를 알고 간다면 여행의 맛을 더할 것이다.
내가 본 고대 로마 도시에 있는 원형극장 중 가장 예쁘다는 생각이 든다.
* 여러분들의 궁금증을 위하여 간략한 여행 후기를 올립니다.
여행기간은 2월 3일부터 18일까지로 레바논(베이루트, 사이다, 수르,
바알벡, 트리폴리)-시리아(홈스, 하마, 다마스커스, 보스라)-
요르단(제라시, 암만, 마다바, 케락성, 페트라,, 와디럼, 아카바)의
일정이었습니다.
중동지역이 우리가 언론에서 보고 교실에서 배운 교과서의 편견이나
선입견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처럼 위험하거나 불안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이것은 서울 광화문에서 투석시위나 촛불시위를 한다고 대한민국 전체가
외국인 여행 못하겠느냐는 정도의 인식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외국인이 우리를 바라본다면 북한과 대치하고 아직 휴전국에
북핵문제로 자주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는 대한민국이 더 불안하지 않을까요?
시리아는 미수교국으로 미리 초청비자를 받거나 국경에서 비자를 받아야 합니다.
과거에는 국경에서 비자를 받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기도 했느나 요즘은
상당히 수월해졌다는 정보를 가지고 무작정 레바논의 트리폴리에서 4명이서
택시를 타고 국경으로 갔습니다.
국경의 공무원에게 공손하게 대하고 시리아를 방문하는 목적을 설명하니
25분만에 비자를 받았습니다.
아마 내가 선생이고 학생들과 시리아의 역사와 전통문화를 느끼기 위해
왔다고 한 것이 비자를 빨리 내주는데 도움이 되었다고도 생각됩니다.
비용은 어떻게 먹고 자느냐에 따라 편차가 심하지만 시리아의 물가는
엄청나게 저렴한 편입니다.
미화 1인당 50달러면 상당히 깨끗한 고급호텔에서 잘 수 있고,
배낭여행 학생이라면 1인당 15달러면 그런대로 난방되고 따뜻한
샤워할 수 있는 방에서 지낼 수 있습니다.
시내 택시타도 웬만한 거리면 우리돈 1000원 이내 입니다.
3천원이면 부페 형식의 레스토랑에서 배불리 먹을 수 있습니다.
서방 중심의 세계에서 시야를 넓히고자 한다면 아직까지는 생소한
중동의 향기를 맡아보는 것도 값진 경험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