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장애인 자조집단의 주요한 두 가지 기능으로서 장애인의 역량강화를 위한 프로그램 및 서비스 제공 기능과 국가나 관련 단체에 대한 대변자의 기능으로 정리한 바 있다. 여기서는 이러한 기능에 따른 우리나라 장애인 자조집단의 현실에 대해 분석해 보고자 한다.
1) 역량강화를 위한 프로그램 및 서비스 제공
현재 우리나라 장애인 자조집단들이 제공하고 있는 프로그램이나 서비스로는 청각장애인을 위한 수화통역, 시각장애인을 위한 심부름 대행 사업, 장애인 전화 상담, 컴퓨터 활용 보급도 사업, 점자도서관 운영 사업, 중증장애인직업재활사업, 장애인생활체육 육성 사업, 복지관 위탁 운영 사업 등이 대표적인 것이다.
이상의 사업들이 부분적으로 장애인 개인의 역량을 강화시킬 수 있는 프로그램임에는 틀림없지만 프로그램의 운영과 프로그램의 포괄성이라는 측면에서 다소 한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먼저, 프로그램 운영 면에서 살펴 보도록 하자. 자조집단에 의한 서비스가 장애인의 역량강화를 목적으로 한다면 자조집단에 의한 서비스 제공은 장애인 당사자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 운영되어야 한다. 장애인 당사자들이 프로그램 전반의 운영에 대한 결정권을 행사하고 조절하는 과정에서 장애인의 역량이 강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시행되고 있는 이상의 프로그램들은 기본적으로 국가에서 세부적으로 규정된 내용에 의해 운영되고 있어 장애인 당사자들이 운영 전반에 관한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여지가 많지 않다는 것이 문제점이다. 또한 프로그램의 운영자로서 장애인 당사자들이 참여하는 비중이 낮다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할 수 있다. 일본 독립생활센터의 경우 운영위원의 51% 이상이 장애인이고 그 대표자도 장애인일 것을 규정하고 있으며,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로 대다수 장애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프로그램 운영 면에서 또 하나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서비스 공급자와 소비자간의 관계이다. 기존의 사회복지 서비스 모형에 대해 많이 지적되고 있는 지점은 공급자와 수급자 사이에 상하 관계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서비스를 지원 받는 이용자 측은 복지서비스를 권리로서 선택할 수 없고 서비스의 범위와 양은 공급자가 이미 정해 놓은 선별적이고 제한적인 것에 국한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장애인 당사자가 주체가 된 서비스 기관을 통하여 장애인이 필요로 하는 개별적인 서비스를 장애인 당사자가 제공함으로 보다 구체적인 당사자의 욕구에 맞추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아직 우리나라 자조집단에서 제공되는 서비스들은 기존의 상하간 위계 서비스 모형에 의해 제한적인 서비스가 제공되고 있다고 보여진다.
다음으로 서비스의 포괄성에 관한 것이다. 기존의 우리나라 자조집단에 의해 제공되고 있는 서비스는 매우 제한적이다. 국가에서 규정한 내용에 따라 정해진 서비스만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장애인 당사자의 자기결정권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제한된 서비스만을 제공해서는 안된다. 개별적인 욕구에 따라 다양한 서비스가 지원되고 제공되어야 하는 것이다. 미리 정해진 서비스를 이용할 사람들만 이용하게 한다면 장애인 당사자의 자기결정권의 의미는 많이 퇴색할 것이며, 사회참여를 위해 필요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장애인의 사회참여를 제한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장애인 당사자가 운영하는 기관에서 장애인 당사자에 의해 프로그램이 제공되며 장애인 이용자의 선택에 의해 포괄적인 서비스가 제공될 수 있는 새로운 모델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으며, 가장 적합한 대안으로는 서구나 일본에서 이미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는 독립생활센터가 아닌가 생각된다. 특히, 동료상담, 개호서비스, 이동지원 서비스 등은 장애인의 역량을 강화시킬 수 있는 필수적인 서비스라고 생각된다.
2) 대변자 기능으로서의 자조집단
대변자 기능은 매우 중요하다. 장애인의 인권이 침해되거나 인권이 보장되지 않고 있는 영역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하고 해결책을 집단적으로 강구하는 사회행동이 본연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대변자의 기능은 집단의식화(collective consciousness)가 확보될 때 비로소 가능할 수 있다. 집단의식화란 사물과 존재에 대해 공통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게 하는 일종의 렌즈와도 같은 것이다. 집단의식화가 이루어질 때 장애의 문제는 개인적 아픔이 아니라 사회적인 불합리함에 그 원인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the personal is political)'라는 여성계의 주장이 유효한 것은 이와 같은 맥락 때문이다. 집단 의식화에 따라 장애인들이 문제를 새로 규정하고 해결책을 찾고 집단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중요성을 이해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정부는 장애인단체가 장애범주별·기능별로 민법 제32조에 의거 사단법인을 설립하도록 지원하고 있어 현재 법인격인 장애인단체만 66개에 이르고 있다. 장애인의 범주가 올해 15개로 늘어나는 등 지속적으로 확대될 방침이어서 장애인단체는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확대될 전망이다.
이와 같은 장애범주별 단체뿐만 아니라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지역별 총연합회 등 조직의 조직(umbrella organization)도 구성되어 있어 대변자의 역할들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집단 의식화에 대한 노력이 모자란다는 것이다. 장애인단체들이 결성된 역사는 오래되었지만 사회 속에서 문제의 원인을 발견하고 장애는 사회적인 것이다라는 의식화 노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많은 단체들에서는 아직까지도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예산을 확보하여 단체의 사업 수행을 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예산 배정을 둘러싸고 장애인단체들간에 서로 아귀다툼을 하는 사례들도 흔히 발견되곤 한다. 장애는 사회적 배제에 의한 것이며, 사회적 배제는 장애 영역 전반에 걸쳐 발생하고 있다는 인식을 공유한다면 장애인단체들간에 서로 다투는 현상은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몇 몇 상층부의 명망가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장애인 단체가 명실상부한 대변자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장애인 회원 중심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회원들간의 소모임 지원, 회원들의 직선에 의한 대표자 선출, 운영위원회에 의한 단체 운영, 회원들에 의한 평가 통로 활성화 등 일반 회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명망가 중심의 명령계통에 의한 사업수행이라는 전근대적 운영행태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운영 방식은 집단 의식화라는 가장 본연의 임무를 소홀히 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셋째, 장애인단체들간의 네트워킹과 교류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장애의 문제가 개인의 신체적·정신적 손상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차별과 배제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라면 장애인단체는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연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장애인단체들은 교류가 부족한 단계를 넘어 서로 적대시하는 관계까지 형성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과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간의 알력 관계이다. 장애인고용촉진법 개정 과정에서 불거진 두 단체 주축 세력들간의 알력은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으며, 서로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불필요한 다툼들을 하고 있다. 올 2월에 결성된 장애인차별금지법제정추진연대에 두 단체가 함께 합류하기로 함으로써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지만 두 단체의 적극적인 노력이 없다면 장애인단체의 한 목소리 내기는 요원할 수밖에 없다.
또한 연합 단체인 위 단체들이 연합에 속해있지 않은 많은 풀뿌리단체들을 지원하고 육성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소속 단체 중심으로 사업을 운영함으로써 장애인 단체들간의 광범위한 연대를 저해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넷째, 장애인단체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장애인들의 체감 실업률이 70%나 되는 상황에서 장애인단체 회원의 회비나 후원금만으로 단체활동을 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이로 인해 대개의 단체는 앞서 살펴 보았던 자조집단의 중추적인 기능들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으며, 전문인력의 부족, 시설의 부족 등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소규모 풀뿌리 단체들은 기본재산의 미달, 법적 요건의 미비 등으로 인해 공식적인 단체로 등록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로 인해 정부에서 인정한 법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산지원을 받지 못하는 사태까지 발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