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 샹봉 이야기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또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하는 명령이니라, 하시니
마태복음 19:19절
(레위기19:18) 너는 원수를 갚지 말고 네 백성의 자녀들에게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주니라.
'르 샹봉 쉬르 리뇽' 지금은 휴양지로 유명한 프랑스 남부 작은 마을 이름입니다. 프랑스가 1940년 6월에 함락당했을 때, 독일은 프랑스인들이 비시(Vichy)시에 정부를 세우도록 허용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영웅인 필리프 페탱 장군이 정부를 이끌었고, 페탱은 독일에 적극적으로 협력했었습니다. 반유대주의를 금지하는 법안을 폐기해버린 그는 여러 가지 권위주의적인 정책을 밀어붙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에 따랐지만, 르 샹봉-쉬르-리뇽의 마을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르 샹봉은 프랑스 남중부에서 이탈리아, 스위스 국경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산악 지역인 비바래 고원에 있는 마을이었습니다.
이 마을은 프랑스 중부 지역에 있는 평범한 마을입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독일 나치주의자들을 피해 도망친 5 천여 명의 유대인 난민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그들을 보호했던 사실이 밝혀지면서 유명해진 마을입니다.

2차대전 당시 이 마을에는 개신교 목사 '앙드레 트레크메'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프랑스 개혁교회, 즉 위그노 교회의 목사였습니다.
그와 동료 목사 에두아르 테이스는 몇 년 전부터 르 샹봉에서 꼴레쥬 세브뇰이라는 학교를 운영하기 시작했었습니다. 비시 정부의 다음 단계는 모든 프랑스 교사들에게 국가 충성 서약에 서명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브뇰의 모든 교직원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1940년 겨울과 봄에 걸쳐 유럽 전역에서 유대인의 상황은 계속해서 나빠졌습니다. 한 여자가 트레크메 목사의 집 앞에 나타났는데, 자신은 유대인으로 생명의 위험에 빠져있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르 샹봉에서는 환영받을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많은 유대인 난민들이 르 샹봉으로 몰려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1942년 여름, 비시 정부에서 청년 업무를 맡고 있던 조르주 라미랑 장관이 르 샹봉을 공식 방문했습니다. 페탱은 라미랑에게 프랑스에 독일의 히틀러 청년단을 본뜬 청년단의 설립을 주문했습니다.
한 무리의 학생들이 라미랑에게 와서 전체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편지를 내밀었다. 이 편지는 트레크메 목사의 도움으로 작성됐습니다.
당시 초 여름에 비시 경찰은 나치의 요구에 따라 파리에서 12,000명의 유대인을 잡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체포된 사람들은 파리 남쪽의 벨로드롬 디베 자전거 경기장에서 끔찍한 환경 속에서 방치된 뒤,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르 샹봉은 이 편지에서 일부 유대인들이 있지만 우리는 차별하지 않으며, 만약 유대인들에게 추방 명령을 내린다면 그 명령을 거부하고 그들을 숨겨줄 것이라고 당당하게 선언했습니다.

당시 마을 주민들은 끊임없는 공습의 위험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 대단하거나 넉넉한 재산을 소유하지못했던 마을 사람들은 트레크메 목사의 권유와 호소에 참여하여 단시일에 마을의 크기를 두 배로 늘렸습니다. 그리고 프랑스가 독일에 함락 된 후 본격적인 유태인 박해를 본 목사님은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여 유대인들을 숨겨 주기 시작했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유대인 부부, 청소년, 어린이들을 받아들여서 자기 집에서 함께 생활하게 하고 학교에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구약성경 세권 왔습니다.'
구약성경은 유대인을 나타내는 그들 만의 암호 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을 숨겨 주는 것은 중죄였습니다. 유대인들과 같은 수용소에 끌려 가거나. 즉결
처분을 받을 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을 사람들의 집에서 문을 두드리고 목사님이 이야기 하셨을 때, 놀랍게도 아무도 거부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유대인을 숨겨 주었던 것이 발각이 되어서 목사님이 수용소로 끌려 갈 때도 목사님과 사모님은 체포하러 온 사람들에게 저녁을 권하고 식사 뒤에 잡혀 가셨다고 합니다.
결국 마을 주민 수가 5000명에 불과한 곳에서 아이들을 포함한 5000이 넘는 유대인을 목숨을 구할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럼 왜 나치는 르 샹봉으로 와서 주민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지 않았을까?
가장 좋은 대답은 한 마을, 한 사람, 또는 하나의 운동을 박멸하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르 상봉 마을 주민 대다수는 프랑스 개혁교회인 위그노 교회에 속한 신자들이엇습니다. 이들 위그노 교도들은 원래 프랑스 개신교 신자들의 후손인데, 프랑스는 예전에 이들을 박멸하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했었습니다. 종교개혁 시기에 위그노 교도는 가톨릭교회를 박차고 나왔고, 이는 프랑스 국가의 시각으로는 불법이었습니다. 공포정치는 한 세기 이상 지속되었고, 17세기 후반에 50만 명의 위그노 교도가 프랑스에서 탈출해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다른 나라로 흩어졌습니다.
위그노 교도들을 없애려고 시도하면서 프랑스 정부는 목적을 이루기는커녕 제거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지역을 만들어냈습니다.
라미랑 장관이 방문하고 난 이후 6개월 뒤, 트레크메 목사는 체포되어 수용소에 감금되었습니다. 한 달 뒤, 프랑스의 안전을 위해 페탱 장군의 명령에 복종하면 석방시켜 주겠다고 그를 회유했지만 그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결국 회유가 어려운 것을 안 수용소장은 그를 석방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
전후 30년이 흐른 후 [정신의 무기]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기록영화를 제작한 젊은 유대인 영화감독인 피에르 소바주는 이 마을을 다시 찾아가서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유대인을 도와주게 만들었는지 알아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를 포함한 그의 가족도 르 샹봉에 사는 한 그리스도인 가정이 숨겨 주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 마을에 가서 유대인을 도와주었던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한 것 입니다.
그들은 대부분 당시 70-80대 노인들이었습니다. 인터뷰를 통해 그들은 대단한 성품의 소유자들임이 드러났습니다.
그들은 지적 합리화.핑계. 옳고 그름에 관한 논쟁 등은 전혀 없었습니다. 시험이 닥치자 그들은 행동했을 뿐이었던 것 입니다.
그들은 왜 유대인들을 도와주었느냐는 질문에 대해 도리어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을 영웅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것 입니다.
"그들에게 도움이 필요했기에 도와주었을 따름입니다.
성경에는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아픈 자들을 문안하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건 당연히 할 일 입니다."
왜 자기 목숨을 더 염려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행동하지 않으면서 믿음에 대해 말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형제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는 사람은 비참한 영혼이지요. 그리고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할 우리의 이웃들은 길거리에 즐비하답니다. 강도를 만나 쓰러진 사람을 보고도 다른 길로 그냥 지나쳐 가는 제사장처럼 되지는 말아야지요. 유대인들이야말로 진정 강도를 만나 쓰러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우리를 벽에 한 줄로 세워 놓았다 하더라도 우리는 총에 맞아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지"
르 샹봉 쉬르 리뇽의 마을 주민들은 스스로를 전혀 영웅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교회의 강단에서 내려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순종하였을 뿐이라고 자신들의 행동을 설명했을 뿐입니다. 이 마을 주민 대부분은 프랑스의 위대한 신앙의 선조들인 위그노파 그리스도인들의 후손들이었습니다.
르 샹봉 주민들과 트레크메 목사님은 말씀을 단 마음으로 받아 순종하는 살아있는 믿음을 조용하게 자신들의 생활로 그리고 인격으로 후대 역사와 교회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참으로 이들의 삶은 그들의 선조들로부터 전수받은 '신앙고백적인 삶'이 어떠한 것인지를 이렇게 자신들의 생명을 드려서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이것은 그리스도 인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연히 실천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 인듯 합니다.
아래 사진은 홀로코스트 기간동안 샹봉 마을에 있었던 유대인 아이들 사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