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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관 (1040년 - 1111년) |
옛말에 한강의 이북에는 생거장단(生居長湍) 사거파주(死居坡州)요, 한강의 이남에는 생거진천(生居鎭川) 사거용인(死居龍仁)이라는 풍수(風水)의 속설이 있다. 살아서는 물 맑고 경치좋은 장단이나 진천에 정착해서 살고, 죽어서는 명당이 많은 용인이나 파주에 묻혀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지금도 경기도의 용인과 파주에는 이름이 꽤나 알려진 사람들의 무덤이 즐비하다. 고려에서 걸출한 장수로 널리 알려진 윤관장군의 묘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산5 에 위치하고 있다. (국가사적 323호).북진정책을 이 시대에 되살린다는 뜻에서 여충사(麗忠祠)를 짓고 묘역을 성역화하였다. 이 윤관 장군의 묘가 천하 명당이란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윤관의 자는 동현(同玄),시호는 문숙(文肅) 본관은 파평이며 윤신달(尹莘達-고려공신)의 5대손이며 윤집형(尹執衡-檢校小府少監)의 아들이다. 1074년 등제하여 추밀원 부사, 중서시랑평장사를 거쳐 여진정벌의 원수를 맡아 공을 세워 평융탁지진국공신(平戎拓地鎭國功臣)의 호를 받았다. 9성 환부가 결정되자 무리한 출정을 하였다는 질책으로 공산호를 삭제당하고 인종 8년(1111)에 세상을 떠났다.
우리 역사에서 침입하는 적군을 막는 영웅은 많지만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거나 적국(敵國)을 응징하기 위해 전투에 나선 장수는 의외로 적다. 을지문덕장군이나 이순신 장군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하나 우리나라에 쳐들어온 적군을 쳐부수는 소극적인 대응이라는 점을 우선 생각해야 한다.
국난이 예상되면 미리 화근을 제거하는 것이 병가(兵家)의 기본인데 5천년의 역사 속에서 하나의 장을 이룬 여러 장군들은 대비보다는 등장하는 현실에 급급한 대처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윤관장군은 병가의 기본에 따라 화근을 먼저 제거하기 위해 선제공격을 주창한 사람이다. 이점에서 어떤 장군보다 뛰어난 전략가이자 영웅으로 칭송받을 수 있다.
고려의 대외관계 한 부분을 차지했던 여진족은 시기에 따라 숙진(肅鎭) 또는 말갈(靺鞨)로도 불린 퉁구스계의 종족으로 크게 만주의 길림성(吉林省) 동북지방에 주거하는 생여진(生女眞)과 그 서남에 기거하는 숙여진(熟女眞)의 두갈래로 나뉘어 살았다.
전자는 대개 거란의 지배권 밖에서 산만하게 부락생활을 하였으며 후자는 대체적으로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에 복속되었다. 생여진은 신라말, 고려초에 이르러서는 점차 남으로 내려와 함경도 일대와 남안(南岸) 및 평북(平北) 일대까지 흩어져 살게 되었다. 거란족에게 복속되지 않은 생여진에 대해 고려는 무력응징과 회유책을 함께 쓰는 은위병용(恩威倂用)의 정책을 사용하였다.
여진족 역시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금(金-여진족)의 시조가 고려인이며 금의 태조(太組) 아골타(阿骨打)가 형제의 관계를 맺자고 요구하면서 보낸 국서중에서 여진은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정성껏 섬겼다.]는 기사를 통해서도 알 수 이다.
또한 여기에 현실적인 이해관계가 겹쳐 여진족은 토산물인 마필(馬匹), 궁시(弓矢)등을 바쳤고 고려는 그 답례로 식과(食科), 의류(衣類)등 생활필수품등을 주었다. 서로의 이해관계에 의해 우호적으로 지내오던 두나라는 북만주의 송화강 지류인 아르추카강 유역에서 완안부(完顔部)의 추장인 오고내가 그 세력을 동남으로 뻗어 두만강 지역까지 미쳐오게 되면서 심상치 않게 변하였다.
오고내를 도와 완완부의 성장에 발판을 마련한 해리발의 장자인 오이속(吳雅束:치세 1103-1113)때에, 이들은 더욱 세력을 길러 기마병을 양성하고 농업이나 생업에 종사하는 것 뿐만 아니라 침략을 전문으로 군사 행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오아속은 그 기마대만 번득이면 당할 방법이 없을 정도로 강대해지자 고려국경에 대대병력을 집결시키기 시작했다. 고려는 이를 가만히 앉아 보고만 있을 수 없었기에 양국 사이네는 무력충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숙종은 처음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임간(林幹)을 보냈으나 오히려 여진족의 기습공격에 정벌군 태반을 잃고 실패하여 천리장성 이남으로 퇴각하였다. 고려조정은 이에 임간을 파직시키고추밀원사 윤관(尹瓘)을 동북면행영병마도통(東北面行營兵馬都統)으로 삼아 싸우게 하였으나 그 역시 패배하고 말았다.
패배의 치욕을 안은 윤관은 여진을 기필코 물리쳐야 되겠다는 신념으로 높지도 않은 관직으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는 군사조직법률을 거론하여 왕에게 아뢰었다. "신 윤관이 정주에 나가 싸워 패한 까닭은 적은 기병이요, 우리는 보병이라 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특별부대로 별무반을 설치할 것을 건의합니다."
윤관의 이 직언은 조정에서 선뜻 받아 들여졌다. 별무반은 기병인 신기군(神騎軍)과 보병인 신보군(神步軍)에다 승병으로 조직된 항마군(降魔軍)과 도탕변궁(跳탕便弓), 정노(精怒), 발화(發火) 등의 특수병을 포함하고 여기에다 양반과 백정, 농민을 중심으로 하여 승려와 상인, 노예까지도 동원한 거국적인 조직이었다.
1105년 10월에 숙종(肅宗:재위 1095-1105)이 별세하고 어린 예종(叡宗:재위 1105-1122)이 왕위에 오르자 고려 조정은 동북방면에 병력을 증강하고 여진에 대한 공세를 준비하였다. 이에 놀란 여진족의 오아속이 이듬해 1월과 3월에 사신을 보내 "영원히 배반하지 않고 조공을 바치겠다."는 맹세를 보내와 잠시 보류되었다.
여진족의 완안부는 고려조정을 안심시킨 후 소규모 병력을 국경지대에 보내 고려의 전력을 탐색했다. 고려조정은 이에 윤관을 원수(元帥)로,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로 삼고 17만 대군을 출전시켰다. 이때가 1107년 10월의 일로서 역사상 유명한 여진토벌전쟁의 막이 올랐다.
17만에 이르는 여진정벌군은 동북계의 장춘(長春)에 본영을 설치하고 12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장장 6개월에 걸쳐 정주성 전투, 동음성 전투, 석성 전투, 이위동 전투, 웅주성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며 북진을 거듭하였다. 여진정벌군은 두만강 이북 7백리의 선춘령(先春嶺)에 이르러 비(碑)를 세워 여진과 경계를 구분짓고 정복한 지역에 9성을 쌓아 백성을 그곳에 살게끔 이동시켰다. 이후 7월부터 양측은 진지를 구축하고 소모적인 전투만 치루었다.
여진족의 공세를 어느 정도 막았다고 판단한 고려는 1109년 2월에 요(遼)에 사신을 파견하여 9성지역이 고려의 영토에 편입된 사실을 통보하였다. 9성지역은 고려의 주(州), 진(鎭)에 편성되었고, 이는 고려의 전통적인 북진정책의 실현이며 동시에 농업사회의 내적팽창에 따른 적극적인 영토확장을 의미한다.
여진의 완안부는 무력으로 고려의 북방영토를 확보할 수 없다는 현실적인 판단과 요나라의 압박이 강화되자 고려에 외교적인 호소를 통하여 생업의 기반인 9성은 돌려 달라고 애걸하였다.
1109년 6월에 완안부의 추장인 오아속이 고려에 보낸 서신에는 "엎드려 비옵건데 우리를 불쌍타 여기시어 9성을 돌려주시고 이곳에 편안히 살 수 있도록 해주신다면 우리는 자손만대로 정성을 다하여 조공을 바칠 것이며 감히 상국(上國)을 향하여 돌멩이 하나라도 던지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라고 하였다.
고려조정은 이에 대해 '9성포기론'과 '9성사수론'이 팽팽하게 맞었으나 결국은 지키는데 병력과 물자를 무한정 소비하여 국력만 약화시키고 실효가 없다는 의견이 받아들여져 예종 4년(1109) 7월에 9성을 여진족에게 반환되었다. 그 후 무리하게 9성을 개척하였다고 하여 그 책임을 모두 윤관에게 돌려 파직시켰다.
그후 여진족은 고려로부터 9성을 돌려받고 착실하게 실력을 쌓았다. 이어 해리발의 둘째 아들인 아골타(雅骨打)는 오아속의 뒤를 이어 연맹장을 세습받아 주변의 부족을 신속하게 아루르며 회령(會寧)에서 금(金1115-1234) 나라를 세웠고 송과 연합하여 요나라를 멸하는(1125) 한편 고려에 압박을 가해 상국(上國)이 되어 매년 조공을 받는 강국으로 성장하였다.
여진족으로서는 고려의 북방에 근거지를 확보한 후 차근차근 실력을 쌓고 나서 북방을 도모한다는 원대한 이상을 이루었고, 고려의 지배층으로 성장한 신라계의 귀족들은 9성을 돌려주고 여진과 신속관계(臣屬關係)를 통하여 정치적인 안정을 이룬 대신에 북진정책이라는 국초(國初)의 이념을 포기하였으며 끝내는 금나라를 상국(上國)으로 모셔야 하는 수모를 받은 것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문치(文治)의 우위를 지나치게 강화하여 무신에게 권력을 빼앗기는 사태까지 불러 일으킨다.
9성의 반환이 얼마나 분통이 터졌으면 여진정벌군의 원수였던 윤관과 부원수였던 오연총이 2년후 나란히 죽었을까. 낭도정신을 고취시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군사와 말을 훈련시켜 17만 대군을 급속도로 양성한 그 역량, 힘, 지혜, 충심이 고금역사에 그 누가 있단 말인가!
고려는 이후 묘청의 서경천도론과 최영의 요동정벌 이외에는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이념을 버리고 신라를 계승하는 사관이 득세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고구려를 계승한 묘청의 봉기를 진압하고 곧 바로 신라를 주류로 하는 {삼국사기}를 써서 바친 김부식이다.
우리나라 역사학계는 얼마전까지만 하여도 윤관이 개척한 9성을 함경도에 비정하였다. 일본의 식민사학자인 지내굉(池內宏)이 함흥에 모두 비정한 것을 약간은 확대했지만 결국 그의 학설을 금과옥조처럼 믿었던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 이병도(李丙燾)의 주장이 당시는 정설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전남 해남의 윤선도 고택(古宅)에 소장되어 있는 윤두서가 그린 {동국여지지도}를 통해 선춘령이 두만강 이북 7백리에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고 1918년 일본총독부가 제작한 {통감부간도파출소가요}에도 똑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윤관장군이 개척한 동북 9성은 현재 중국과 영토협약을 맺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서쪽은 압록강을 경계로, 동쪽은 토문강(土們江)을 경계로 삼는다는 백두산 정계비는 윤관의 9성을 염두에 두고 청과 조선 사이에 맺은 국경조약이다. 일본이 불법적인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한 1905년 이후에 우리를 대신해 외국과 맺는 모든 조약은 국제법상 무효이므로 1909년 청과 간도협약을 맺고 토문의 동쪽을 청나라에 넘겨준 사실 역시 당연히 무효이다.
일본의 학자들은 적어도 간도가 명백하게 윤관의 9성개척과 백두산정계비에 의해 한국의 영토였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일본은 만주를 지배하기 위해 어용사가들을 동원하여 윤관장군이 개척한 9성을 함경도에 비정했고 실질적인 증거물인 백두산정계비를 없애버렸던 것이다.
지금도 우리나라 학계 일부에서는 안타깝게도 이병도의 학설을 수용하여(108쪽) 9성을 함경도 경내에 올망졸망 비정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가뜩이나 왜곡된 부분이 많은 현재의 우리 역사인데 알면서도 스스로 고치지 못함은 용기가 없는 것이리라. 이를 수정하여 다른 이들이 보았을 때 바로된 역사를 접할 수 있기를 바란다.
※ 자료제공: 고대사문제 연구소 [한국역사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