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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다솜 울타리 원문보기 글쓴이: 우동인
05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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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政算內篇 上·中·下칠정산내편 상·중·하].[수시력]을 한양을 기준으로 교정한 우리나라 최초의 역법. 이것을 이용하여 한양의 일출·일몰시각과 주야의 길이를 구하여 한양의 동짓날 낮의 길이가 북경보다 위도가 낮은 한양이 북경에 비해 현대시간으로 14분 이상 긴 것을 밝혀냈다. 역원은 A. D. 1280년, 100진법, 원둘레는 365.2425도, 1태양년은 365.2425일, 1태음년은 354.36712일로 각각 정의 하였다. 이것으로 한양의 지방시를 구하였다.
인류는 예로부터 시간을 측정하면서 하루, 한달, 일년을 기록한 ‘달력’을 만들어 일상생활에 활용하여 왔고, 요즘과 같은 스마트폰 시대가 되면서 ‘캘린더’는 우리에게 더욱 더 가까워 졌다. 한국천문연구원에서는 매년 11월 중순에 다음 해의 ‘역서’를 발행한다. 지난해 발행한 《2012 역서》에는 올해의 양력 ‧ 음력날짜, 24절기, 요일, 공휴일, 기념일, 조수(潮水), 달의 모양 변화 등은 물론이고 태양과 달의 출몰시각, 천체위치 등 천체현상에 대한 방대한 과학정보가 총망라되어 있다.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보는 ‘달력’은 이《역서》를 기본으로 민간인들이 목적에 따라 만든 것이다. 한국천문연구원은 이러한 과학정보를 뉴튼(Isaac Newton)의 중력이론과 컴퓨터를 이용하여 계산한 천체역학 자료를 이용하여 역서에 담기는 과학정보를 생산하는데, 이것이 역법(曆法)이다.
우리 손으로 만든 역법 - 칠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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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이래 중국에서 역서를 수입해서 주로 사용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우리 실정에 맞도록 처음으로 만든 역법이 세종시대의 [칠정산]이다. 그러면 차용해 쓰던 역법은 조선시대에 어떻게 만들었으며, 얼마나 정확하였을까? 조선초기에는 서운관(관상감, 한국천문연구원은 서운관의 천문 ‧ 역법 등을 담당)에서 해마다 펴내는 역서, 예를 들면 [大明萬曆四十三年歲次乙卯大統曆대명만력사십삼년세차을묘대통력](광해군 7년, 1615년 역서)과 같이 이름이 제법 긴 ‘역서’를 ‘달력’으로 썼다. 역서 이름 끝에 나오는 ‘대통력’은 천체운동을 계산하는 방법을 제시한 역법(曆法)을 말하며, 이것을 이용하여 해당되는 해의 역서를 만들어 임금이 신하들에게 반사(頒賜, 임금이 녹봉이나 물건을 내려 나누어 주던 일)하였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현대 우리나라의 [2012 역서]와 같은 것이다. [칠정산]은 서운관에서 매년 [大明xxxxxx歲次xx大統曆]이라는 이름으로 발행하였던 역서의 제작지침서였다. [칠정산]은 내편(內篇)과 외편(外篇)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내편은 날짜, 24절기, 한양의 일출 ‧ 일몰시각 등을 구하는데, 외편은 일식 ‧ 월식을 예보하는데 사용하였다.
관상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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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에서는 전통적으로 하늘의 명을 받아야 임금으로서 정당성을 부여 받았고, 하늘의 변화에 잘 부응해야 왕조의 권위를 인정받았다. 역서의 기원은 중국의 역사서인 [서경書經]의 [요전堯典]에 나오는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들에게 농사지을 절기를 알려 준다(欽若昊天 敬授人時).”에서 비롯되었으며, 천문 ‧ 역산학(曆算學)을 발전시키고 매년 역서를 반사하는 소위 관상수시(觀象授時)는 역대 동아시아 국가들에서 정치의 요체가 되었다. 역서는 국가적인 ‘시간의 통일’을 위한 도구(또는 장치)였으며, 통치자가 왕권을 보장 받고 백성에게 베풀어 주는 시혜였다. 전통시대의 역은 정치성을 내포하고 있어 지배자와 피지배자 간의 지배권에 대한 복종을 인정하는 고도의 정치행위였다. 이러한 행위의 매개체로서 역법이 갖는 중요성이 있다. 역서를 제작하는 중요 목적은 날짜와 절기를 알려주는데 있으며, 일식 ‧ 월식과 같은 천문현상을 예측하며, 부수적으로 일 ‧ 월 ‧ 5성의 위치를 정확히 예측하여 천문현상에 대응하는 목적도 있었다.
날짜와 절기를 일치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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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부터 중국에서는 해 ‧ 달 ‧ 별의 운행을 관찰하여 계산한 음력의 성분인 삭朔과 양력의 성분인 기(氣)를 절충한 태음태양력(太陰太陽曆)을 사용하였다. 역(曆)은 삭(날짜)과 기(절기)를 일치시키는 것이 기본이다. 이것은 농업생산을 위한 실용적인 필요성에서 나온 것이다. 1일과 보름은 달의 위상변화(삭망朔望)로 알아 낼 수 있지만, 농사는 태양의 운행에 따른 계절의 변화, 곧 24절기에 따라야 지을 수 있다. (어업은 달과도 관련된다) 태음태양력을 사용하려면 ‘달과 해’, ‘해와 별’의 운행을 파악하여 1삭망월, 1태음년(삭망월이 기본), 1태양년(회귀년이 기본이며, 사계절의 변화와 일치되는 주기)을 체계적으로 측정하고 이것들 간의 관계를 유기적으로 파악하여 절충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꼭 필요한 것이 태음력에 ‘19태양년 동안에 7개의 윤달을 넣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태음력과 계절의 주기(태양력)가 서로 일치 되어 농사에 필요한 날짜와 계절을 알 수 있었다. 중국에서는 수명개제(受命改制)의 전통에 따라 왕조가 바뀌면 역법도 바뀌어, 80여 회의 개력(改曆)이 있었다. 일찍부터 천문 ‧ 역법을 발전시킨 중국은 역서를 제작하여 외교관계를 갖는 국가에 반사(頒賜)하는 전통을 수립하였다.
[七政算內篇 乾 ‧ 坤(칠정산외편 건 ‧ 곤)]. [회회력]을 교정하여 이순지와 김담이 편찬하였으며, 일식 ‧ 월식의 예보에 탁월하였다. 명나라보다 70여 년 앞서 실용화 되었다. 역원은 A. D. 599년, 60진법, 원둘레 360도, 1태양년 365.242188일, 1태음년 354.3667일로 각각 정의하였다. 세종은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회회력]을 실용화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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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본국력 [칠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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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에는 명나라와 사대(事大)관계를 맺고 천자가 만든 역서를 받아서 사용하였다. 당시 매년 가을에 연경(북경)에 보냈던 동지사(冬至使)는 바로 다음해의 역서를 받아오기 위해 보낸 사신이었다. 세종시대 들어오면서, 왕조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우리 임금이 만든 역서에 따라 농사를 짓도록 하기 위해 역법개정에 착수하였다. 한양의 일출 ‧ 일몰 시간을 기준으로 우리 풍토에 맞는 역법을 개발하여 최초의 본국력(本國曆)이라 부르는 [칠정산]을 제작하여 명나라 [대통력]과 함께 사용하였다. [칠정산]은 글자 그대로 해와 달, 수성, 금성, 목성, 토성(이를 칠요七曜라고도 한다)의 운행을 계산하는 ‘일곱 천체의 운행 계산법’이다. ‘역’ 대신 ‘산’이 붙은 것은 천자가 만든 역서에만 역을 붙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칠정산내편]은 역의 원점인 역원(曆元)을 [대통력]의 홍무(洪武) 17년(1384)으로 하지 않고, 원나라의 지원(至元) 17년(1280)으로 정하여 사실상 [대통력]대신 [수시력]을 교정하여 천체운동을 나타내는 역을 계산하고 한양을 기준으로 상수들을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지방시(地方時)는 한양을 기준으로 일출 ‧ 일몰 시각과 주야시간을 계산하여 정해졌다. 우리의 과학기술로 직접 역법을 교정(校正)했다는 사실은 조선이 전세계에서 지방시를 시행한 몇몇 국가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역사적으로나 과학적으로 매우 큰 의의를 갖는다.
일식 ‧ 월식을 정확하게 예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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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정산내편]으로 구한 한양의 동짓날 낮의 길이는 39.13각(刻) ([수시력]에서 1각은 현대의 14분24초이다)이고 밤의 길이는 60.87각이었다. 원나라 [수시력]으로 구한 연경의 동짓날 낮의 길이가 38.14였으므로, 북경보다 위도가 낮은 한양이 연경에 비해 현대시간으로 14분 이상 동짓날 낮이 긴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이렇게 정밀한 내편도 세종 14년 7월 1일의 일식예보에 실패하는 등의 약점이 드러나 이순지와 김담이 일식과 월식을 예측하는데 장점이 있다고 알려진 [회회력回回曆]을 교정하여 외편을 편찬하였다. 이것을 합쳐 세종 24년(1442)에 [七政算內篇(칠정산내편)]과 [七政算外篇(칠정산외편)]으로 반포하게 되었다. 이 책들은 [세종실록]후기(後記) 권156〜163에 전문이 실려 있다. [칠정산]의 우수성은 세종 29년에 일어난 일식을 예보한 [丁卯年交食假令(정묘년교식가령)])에서 확인 되었다. 현대적인 계산 값과 1분에서 3분의 시간차이(오차범위 +-7.2분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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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卯年交食假令정묘년교식가령]. 세종 29년에 일어난 교식을 예보한 계산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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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일본에 앞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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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회력]은 일찍이 원나라 때 아라비아에서 중국으로 전래되어 회회사천감(回回司天監)에서 이슬람 학자인 마사이헤이(Mashayhei 중국명 馬沙亦黑) 부자가 한역(漢譯)하였다. 태종시대에 조선에 수입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칠정산외편]으로 교정되어 활용되었으나, 막상 명나라에서는 이보다 70년이나 뒤에 흠천감(欽天監)관원인 貝林(패림)이 계산법을 개발하여 비로소 활용하기 시작하였다. 세종은 [회회력]에 없는 “태양최고행도와 일중행도표” 등 중요한 도표들을 추가하여 편찬하도록 하였다. 근래 중국 천문학자들이 외편을 높이 평가하면서 아울러 세종대왕을 존경하는 이유의 하나이다. 일본은 1634년 조선통신사의 독축관 박안기(朴安期)에게 [칠정산]추보법(推步法, 계산법)을 전수받고, 이것을 연구하여 1682년 시부카와 하루미(澁川春海)에 의해 일본 최초의 역서인 [정향력(貞享曆)]을 완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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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정산]편찬은 훈민정음 창제와 더불어 세종대왕의 자주 ‧ 실용 ‧ 민본사상의 찬란하게 구현된 결정체이며, 당시 동아시아의 첨단과학을 일구어낸 위대한 업적이었다. [칠정산]은 단순한 역법의 의미를 넘어, 고대의 하늘과 땅을 여행하는 길잡이로도 유용하지 않을까? [칠정산]을 비롯한 조선시대 역법연구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음 ‧ 양력(lunisolar calendar)의 기원과 방법을 연구할 수 있는 소중하고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글 남문현 / 자격루연구회 이사장, 건국대학교 명예교수, 전 문화재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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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제어공학과 생체공학으로 공학박사학위를 받았다. UC버클리에서 박사후 과정을 이수하고 초빙교수를 지냈다. 1976년부터 건국대학교 전기공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그 동안 상허기념도서관장과 박물관장을 역임하였다. <한국의 물시계>로 1996년 한국출판문화상 저작상, 과학기술도서상 저술상(과학기술처)을 받았으며, 1999년에 사단법인 한국산업기술사학회를 창립하여 회장을 역임하였다. 미국전기전자학회역사위원, 산업자원부의 산업기술개발 및 기술기반조성사업 평가위원과 과학기술부의 국립과학관 추진위원회 전시전문위원으로 위촉되었으며, 문화재위원을 역임하였다. 현재 월간 문화재(한국문화재보호재단 발행) 고정 필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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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좋은 자료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