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흥덕 /
지하철사람들(people in the subway)/ 1998 / 364 x 228cm / 캔버스에 오일
모처럼
평일에 쉬는 날 저녁, 평소 술을 잘 먹지 않는 최이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는 얼큰하게 취해서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는데, 이야기 도중에는
욕도 좀 섞여 흘러나오고 있었고, 음주 운전으로 나와 술을 마시기 위해 서울로 가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지난 몇 년 동안 이런 식으로 전화가
오면 이내 차일피일 미루거나 이런저런 핑곌 대고 나가질 않았는데, 그날은 왠지(그가 부르는 내 이름이 너무 처절하게 들렸기 때문인가?) 그를
만나 우리네 인생에 관하여 얘길 나누고픈 충동이 일었다. 나는 그가 사는 상계역 근처로 나가기로 했는데, 전차에 오르니 그보다 낮은 계급의
직장상사인 남과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지금 최이사와 함께 나를 만나러 가고 있으니 되도록 빨리 오라고 했고 나는 뭐 전차기사에게 빨리
가자고 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라고 대꾸하자, 그래도 빨리 오라며 그냥 전활 끊는 것이었다.
지하철은
만원이었는데, 퇴근시간이기도 했지만, 날씨가 너무 더워 더 그렇게 느껴졌던 것 같다. 꾸역꾸역 밀려들어오는 인파에는 땀 냄새와 그/그녀들의 향수
냄새가 괴괴하였고 꼭 이러고 살아야 하는가? 와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라는 생각들은 마치 이 냄새들의 궁극적인 효과인양 내 머리 속에 한참을
머물러 떠나지 않았고 다시 울리는 전화기의 진동소리로부터 전화를 받았을 때, 그들은 너 어디냐고 했는데, 나는 태릉입구라고 하자, 몇 분이나
걸릴 것 같냐고 했을 때, 나는 확 전활 끊어버리고 싶었지만 그저 잘 모르겠다고 했다.
노원역에
도착, 4호선으로 환승을 하러 가는 길은 너무 멀고 길었다. 에스컬레이터를 세 개인가 오르고 마치 낡은 SF영화에나 등장 할 법한 건조한
구조물의 복도를 한참 지나 간신히 떠나려는 전차에 오르니 다시 진동, 그들은 내게 우리가 기다리다 지쳐 택실타고 노원역으로 가고 있으니 그냥
노원역 근처에 서 있으라는 것이었다. 이 말을 마치고 보니 전차의 문이 열렸고 나는 내렸는데, 거긴 당연하게도 상계역이었다. 내가 상계역에 지금
도착했다고 하자, 그들은 허탈하게 웃는 듯했는데, 나는 굉장히 절망적이었다. 다시 반대편 플랫폼으로 뛰어 올라 전차에 올랐을 때 진동, 어디냐고
했고 아직 상계역이라 하자, 제발 빨리 좀 오라고 성화였다. 다시 건조한 복도와 에스켈레이터 3개를 달려-내려 3번 출구로 나가자 진동, 이제
어디냐고 했고 나는 롯데 백화점 앞에 와있다고 했다. 그러자 1번 출구로 5분 내로 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마치 성냥팔이
소녀처럼 1번 출구의 위칠 물었는데 다들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이미 내 상의 남방은 땀에 다 젖었고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고만 싶었다.
다시 역 안으로 들어가 안내표지판을 보니 1번은 다시 에스컬레이터를 3개를 올라야만 도착할 수 있게 설계되어 있었다. 즉 3번은 7호선
지하였고, 1번은 4호선 지상이었던 것이다. 기이한 것은 3번 건너편 출구는 8번이었고, 아무튼 진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그 자리에 한참
서서 대체 어디부터 잘못된 걸까? 와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루 하루가 진동, 진동...
1번
출구를 향해 미친놈처럼 달리기 시작했을 때, 나는 내가 대체 무얼 쫓아 살아가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잖아 하고 한 숨을 몰아쉬었고 가슴과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 잔인한 큐브에서 탈출하여 그들과 마침내 조우했을 때 나는 거의 울상이었고, 최이사는 나를 힘껏 안아주었다. 남과장은 야 다리
아파 죽겠다고 했고 빨리 가자고 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어디로 가냐고 했는데, 그들은 동시에 삼겹살이라고 했고 거리의 휘청한 네온 간판과
여기저기서 구워대는 돼지, 소고기 냄새로 온 거리는 내게 너 이래도 고기 안 구워 먹을거냐! 라고 소리치는 듯했다. 궁색한 테크노 음악이 몇
발자국 앞에서 들려오고, 신장개업의 그녀들, 도우미들은 귀신 삼발한 긴 머리를 8자로 휘감아 돌리며 춤을 추고 있었으며 그녀들의 비키니 복장은
그녀들의 묵묵한 표정만큼이나 쓸쓸해 보였다. 그것은 그녀들의 얼굴화장이 땀범벅이 되어 흘러내린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들의 땀방울들은 도저히
손을 내밀어 교우할 수 없는 눈물이기도 하여서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사상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고, 우리네 존재에
빛나는 꽃은 과연 언제 피워 오를까라는 관념들이 그 고기들의 냄새들을 배반이라도 하려는듯 내 머리 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