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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최한선 교수의 호남 시비^시심을 찾아서/해암 김응정 |
서산일락가(西山日落歌)
삼동(三冬)에 뵈옷 닙고 암혈(巖穴)에 눈비 마자
굴음 낀 벗늬랄 쬔 적은 업건마는
서산(西山)에 해지다하니 그를 셜워 하노라
추운 겨울에 삼베옷을 입고 살며
궁색한 집에서 눈^비까지 맞는 신세인 나
구름이 잔뜩 가려 햇볕이라고는 쬔 적이 없건마는
서산에 해가 졌다는 소식 들으니 그를 서러워하노라
위의 석 줄은 시조의 원문이며 아래 넉 줄은 그것을 현대어로 옮긴 것이다.
원래 시조는 제목이 없는 것이 많으므로 여기서 ‘서산일락가’ 라고한 것 또한 시조의 내용으로 보아 붙인 것이다.
<해암문집>에는 ‘문명묘승하작'( 聞明廟昇遐作) 곧 명종 임금이 세상을 등졌다는 소식을 듣고 지은 것이라고 되어있다.
위 시조의 지은이 김응정(金應鼎: 1527-1620)은 도강인(道康人)으로 자는 사화(士和), 호는 해암(懈菴) 인데 강진군 병영면 출신이다. 아버지 한걸(漢傑)과 어머니 해남윤씨 <상보(尙甫)의 따님>와의 사이에서 출생한 그는 태어난 월일과 같은 월일에 죽었던 탓으로 화제가 되었던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문정황후(명종의 어머니), 명종, 선조 등의 승하 소식을 접하고 각각 3년씩 9년상을 입었던 일로도 유명하거니와 임진왜란 때에는 창의격문을 띄워 곽기수, 조팽년, 김억추 등과 의병을 일으켰으며, 정유재란 시에는 자신의 전답과 노비를 팔아 군량미와 소금을 마련하여 고종후 장군에게 보냈던 충의지사로도 이름이 높았다.
위의 시조 외에도 명종의 승하 소식을 듣고 서글픈 마음을 드러낸 ‘과낙동강(過洛東江)’이란 한시가 인구에 회자되기도 하였다. 어버이를 위하여 먼 곳으로부터 집까지 쌀을 짊어지고 왔다는 자로(子路), 겨울날 물고기를 잡아다가 부모의 밥상에 올렸다는 왕상(王祥), 어머니를 위하여 겨울날 죽순을 구하여 정성껏 바쳤다는 맹종(孟宗) 등과 이름을 나란히 할 정도로 효자였던 김응정, 그는 부모를 위하여 몸소 농사짓고 고기 잡는 일을 게을리할 수 없다는 다짐에서 스스로 해암(懈菴)이라는 호를 지녔다.
송강 정철과 전라도 관찰사 최환 등의 건의로 충효의 사실이 나라에 알려져 경릉참봉, 사헌부지평 등의 벼슬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던 김응정, 그는 낭주최씨 용호(龍湖) 최극충과 더불어 ‘금릉쌍효자(金陵雙孝子)’곧 강진의 두 효자로 칭송되었다.
특히 선조에게 올린 ‘청이병영소(請移兵營疏 ㅡ병영성 이건을 청하는 상소) 네 가지는 시의 적절하고 애민적이며 우국충정으로 가득 찬 명문으로 알려졌는데 읽는 이의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
위의 시비는 강진읍 남성리 군민회관 뒤에 있으며 1985년에 세운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산다는 것은 어쩌면 누군가에게 신세를 진다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굳이 신세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의 삶을 혼자서는 영위할 수 없으므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음양의 도움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기에 세속을 떠나 고요한 신사나 수도원에 있는 사람조차도 세속의 일에 관심을 갖기 마련이리라. 왜냐하면 세속의 세상없이는 고요한 수도의 세계 또한 존재키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회고컨대 세상일엔 일고의 가치를 부여치 않고 홀로 저만의 세계를 만들며 지고지순하게 살았다고 큰 소리쳤던 사람들이 많았음에 새삼 놀라곤 한다.
위의 시조를 지은 김응정.
그는 시조에서 ‘구름 낀 햇볕도 쬔 적이 없다’고 했다.
겨울이면 속옷은 커녕 삼베옷을 입고 지냈음은 물론, 눈비조차 가리지 못하는 누추하기 짝이 없는 집에서 산다고 한 뒤에 내뱉은 말이니 그 원망의 정도가 매우 심각할 수 있음을 짐작하겠다.
응당 자신의 굶주린 배를 채워주고 시린 등을 따뜻하게 해주어야 마땅한 임금이지만, 자신이 받은 은혜는 전혀 없다는 말로 서두를 삼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산에 해졌다고 하니’ 곧 임금이 승하했다고 하니 눈물이 나도록 슬프다는 것이다.
조선 시대적 사유로 말한다면 임금은 곧 아비요, 백성은 자식이니 어찌 자식이 그 아비로부터 받은 것이 적다고 하여 아비의 죽음을 애도치 않겠는가 마는, 위의 시조는 그런 관계에서 말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슬픔의 성격은 사적인 감정의 차원으로 이해되어선 곤란하리라.
사적이 아닌 공적인 감정의 슬픔,<시인 김응정>은 바로 그런 점에서 명종의 죽음을 슬퍼한 것이었으며
그렇기에 낙동강에서 뱃놀이하는 사람에게 ‘낙동강에 떠 있는 신선 같은 뱃놀이여/ 피리와 젓대 소리 바람에 펄럭이네/ 지나는 길손이 듣기가 거북스러워하니/ 나무와 산들도(부끄러워) 구름 속에 묻히네' 라고 노래하지 않았겠는가?
요즘 들어 우리 주위에선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죽음이 잇따르고 있다.
거대한 회사를 책임진 전문 경영인의 죽음과 국가의 동량을 양성하는 교육자의 죽음에 이어 도정을 책임진 도지사의 타계는 그들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적잖은 충격을 안겼을 것이다.
죽음의 원인이 어디에 있건, 지도자의 상실은 우리 모두의 슬픔이요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모두가 살아서 존경받음은 물론 죽어서도 추앙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이겠는가? 해는 자꾸 서산으로 가는데 세상에 뿌린 죄 값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고 또 돌아볼 일이다.
세상 사람들의 지도자에 대한 반응은 대체로 다섯 유형으로 대별할 수 있다.
ㅡ첫 번째는 시일해상(時日害喪)형이다.
곧 ‘요놈의 해는 언제나 없어질고?’라는 원망형인데 중국 하(夏)나라 걸왕(傑王)이 어찌나 못되고 포악했던지 백성들이 왕을 ‘해’에 비유하여 어서 빨리 없어지기를 바랐던 데서 나온 말이다. 김응정이 '해’가 진다고 서러워한 것과 비교해보면 걸왕의 초라함이 자꾸만 커 보인다.
ㅡ다음은 심의자득(心意自得)형이다.
순임금이 선권(善卷)이란 자에게 왕 자리를 권유했을 때, 선권이 거절하며 했던 말에서 유래한다.
봄이면 밭갈이할 만한 몸뚱아리가 있고, 가을이면 수확하여 몸뚱이를 먹일 만할 뿐만 아니라, 해가 뜨면 일어나 일하고, 해가 지면 집에 누워 잠자는 등 내 마음대로 좋은 곳을 오가며 살면 그만이지, 임금이 내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형이다.
다시 말해서 임금이 누구건 그가 무엇을 하건 상관없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산다는 것이니 곧 임금의 죽음을 알 수도 없고 또한 알 필요도 없이 세상의 수레바퀴 도는 것에 무관심한 경우이다.
ㅡ세 번째는 고려 말 정몽주가 보여준 불사이군(不事二君)형이다.
이른바 `명심보감'에 나오는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 열녀불경이부(烈女不更二夫)를 실천하고자 한 사람들의 모습인데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며, 열녀는 두 남편을 따르지 아니 한다’는 신념 아래 왕의 죽음과 함께 자신의 목숨도 버리는 매우 극단적인 행동을 결행하는 경우이다.
ㅡ네 번째는 공환난 불가공처락(共患難 不可共處樂)형이다.
어려움은 같이 할 수 있어도 즐거움은 같이할 수 없다는 말이다.
무슨 일을 도모할 때는 사람을 귀하게 쓰다가도 소기의 목적을 이루고 나면 옛날의 어려움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오직 자신의 안위와 출세를 위하여 위만 보며 매진할 뿐 아래를 보기는커녕 좌우조차 돌아보지 아니할 것에 대비하여, 미리서 그 곁을 떠나버리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는 장경오훼(長頸烏喙)형이라고도 하는데, 목이 길고 입술이 튀어나온 사람이 주로 그런 배신자형이라는 데서 유래한다.
우리 주위를 가만히 둘러보라. 이처럼 토사양구팽(兎死良狗烹) 곧 토끼 사냥이 끝나면 훌륭한 사냥개를 죽여 버리는 못된 주인(?)들이 어떻게 사는지… 진정으로 바른 길을 걸으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올바르게 이끌어야할 중요한 곳에서조차 이 같은 작폐가 허다한 현실, 이러고서야 어찌 능력 있고 어진 사람이 소신껏 일하며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겠는가?
ㅡ마지막 유형은 다름 아닌 <김응정형>이다.
궁벽한 시골 강진 병영에서 태어나 부모님상과 나랏님상에 시묘살이 실컷하고 서당을 열어 힘껏 제자를 기르다가 나라가 필요하면 몸을 던져 나라를 구했던 사람이 아니던가.
아닌 말로 임금의 은혜 입어 벼슬 한 번 살지 않았지만 그 임금의 죽음에 서러워할 줄 아는 사람, 오늘날 우리가 지도층의 죽음에 대하여 애도를 표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명예와 자존심을 중히 여기는 사람은 분명 존경받아야 마땅하지만, 잘나가던 때는 천장까지 기어오르더니, 좌절하면 마루바닥을 질질 기어 다니면서 굴종을 달게 여기는 그런 치사한 자의 ‘삶’에는 결코 박수를 보낼 수 없잖는가?
<해암 김응정>,그는 분명 효자였고 충신이었으며 나라를 구한 의병이었다.
뿐만 아니라 세간 일과는 초연한 채 고향에 들어앉아 처사(處士)로서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애민하는 일에 몸 바쳤다.
그러면서도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학자였으며 시조 백여 수를 지었던 훌륭한 시인이었다.
물론 그의 시조가 지금은 8수 정도만 남아 있어 아쉽기 그지없지만 편수가 적음에도 걸작이 남아 있어 그의 문학적 재능을 어렴풋이나마 짐작케 함은 불행 중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겠다.
그의 시조 가운데 효자와 충신으로 천거되어 벼슬이 내려왔을 때 거절의 뜻으로 지었다는 다음 시조는 오늘의 공직자는 물론 정치하는 사람들에게 일깨우는 바가 크다.
‘꿈에 흰 갈매기 되어 강물 위를 날아본다/날아서 계속 오르다보면 구중궁궐에도 다다를 수 있겠지마는/ 구름에 이슬까지 짙게 있으니 날개 젖을까 날지 못 하겠네’ 어떠한가? 벽촌의 시골 선비가 마음놓고 벼슬할 수 없던 조선 사회의 썩어 문드러짐이라니...
그러기에 시인의 경국제민(經國濟民)에 대한 꿈은 안빈낙도(安貧樂道)로 치환된다.
그렇다고 잘못된 나랏일에 나 몰라라 외면할 수 없음은 선비의 생리가 아니던가?
해암 김응정은 이이첨의 무리와 작당하고 선조의 정비인 인목대비를 죽이자는 부당한 글을 작성했던 사람들을 꾸짖고 그 글을 찢어버렸던 용기 있고 올바른 선비였다. 마음을 곱고 곧게 써서 장수했을까?
그는 94세까지 살았는데 그가 보였던 동체대비(同體大悲)의 큰 생각, 그것이야말로 빵과 밥그릇 때문에 사분오열된 이 시대를 바로잡을 방향타가 아닐런지…
ㅡ〈남도대교수^문학박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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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ㅡ앞에서 퍼와 소개해본 글이 너무 길고 자못 장황하여, 이번에는 <최인선 교수>글을 다시 퍼올려보았습니다.
ㅡ<해암 김응정 선생>은 강진이 널리 자랑할 만한 <남도의 인물>입니다.
혹시 탐진문화권에서 있었던 현대사(일제시대-2공화국때까지 정도) 자료를 탑재해 주실 수 있는지요?
인물위주면 좋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