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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해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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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 게시판 스크랩 박목월 시, 김성태 작곡 - 이별의 노래
황용덕 추천 0 조회 65 13.11.10 11:5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소프라노 김윤자

 

 

수원시립합장단

 

 

난파소년소녀합창단

 

 

바리톤 황병덕

 

 

안산시립합창단

 

 


소프라노 이미경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아아~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한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아~ 아아~ 너도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이별의 노래 - 박목월 시,  김성태 곡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너도가고  나도 가야지

 

한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아~ 너도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쌓인 어느날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음악수업이 정상적인 교육으로 이루어지던 예전에 중학교 이상을 다녔다면 한번쯤은 불러보았을 우리의 가곡 이별의 노래입니다. 

이 가곡은 박목월님의 시에  작곡가 김성태님이 곡을 붙인 것으로 이 곡이 만들어진 과정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집니다. 

김성태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대구로 피난을 내려갔었습니다. 여기서  시인 박목월을 만났지요.  한사람은 당시 우리나라의 문학의 대부였고, 한사람은 음악가의 대표자로서 피난지에서 만남은 서로의 친분을 쌓아가기에 충분하였고, 그래서 둘은 잘 어울려서 술잔을 기울이기도 하였답니다.

당시 서울음대 교수로 제직하고있던 김성태는 부산으로 이사간 서울음대를 따라 부산으로 내려갔고, 부산에서 공군정훈군악 대장과 해군정훈군악대 지휘를 맡으면서 대구에서 맺었던 박목월과의  우정이 조금은 멀어진듯 하였습니다.

그러나, 피난 생활이 길어지고  객지생활에 고달파진 김성태는 불현듯 막걸리를 함께 기울이던 박목월이 그리워 대구로  내려와 박목월을 잠시 만납니다.

이때, 박목월은  한편의 시를 김성태에게 건네주는데 바로 이별의 노래이었지요. 이 시를 받아쥔  김성태는 너무도  심정을 울려주는 시제에 감격을 하고 그날 밤으로 누추한 여인숙 방에서 작곡을 하여 세상에 내놓은게 요즈음 우리가 애창하는 이별의 노래 입니다.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

여기서 시의 화자와 작곡가는 너무도 멀리 떨어진 고향과 사람들 그리고 조국의 앞날을 연상하게 되지요. 서러워 울어대는 그리고 구만리쯤 멀어보이는 현실 그래서 나도 가고 너도 가야하는 안타까운 오늘을 토로합니다.

이렇게 해서 이별의 노래는 만들어졌고 오늘날 우리에게 애창되고 있습니다.

한 때 김성태가  친일 음악 전위부대라 일컫는 경성후생 실내악단에서 활동을 하였던 사실로 인해 친일 논쟁의 중심에 서 있기도 하지만   이별의 노래에서만큼은  진정한 조국의 앞날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작곡하였으리라 짐작합니다.

 

 

 

 

이별의 노래(박목월사,김성태곡)

「청록파」의 시인으로 알려진 박목월(본명 영종.1916∼1978)의 「노래가 된 시」는 널리 알려진 가곡 「이별의 노래」.
나이 마흔의 문턱에서,처자를 거느린 족장의 몸으로, 그를 사랑하는 어느 여대생을 그 또한 목메이게 사랑하다  이승의 번다한 족쇄를 뿌리치지 못하고
끝내 서러운 이별을 해야 했던 시인의 아픔이 깊게 배어든 시편이다.
목월의 사랑은 전쟁의 참화,그 뒤끝에서 시작된다.
1952년 봄,대구. 시작은 목월의 시를 좋아하는 독자와의 만남이었다.
환도한 서울에서 E여대 국문과 학생이었던 H양은 목월에게 뜨겁게 다가선다.
이형기씨가 집필한 박목월 평전은 "아니 다가왔다기보다도 슬픔과 안타까움이 어린 애절한 시선으로 그녀는 거의 매일같이 목월의 마음의 문을 두드렸다"고 적는다.
1954년 초봄부터 전쟁의 상처가 아직 가시지 않은 서울의 밤거리를 그들은 함께 거니는 날이 많아졌다.
친구를 불러내 H양을 설득했지만 그녀는 소리없는 울음만 삼키며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죄가 아니겠지요』라고 반문한다.
목월과 그녀는 끝내 여름이 가고 가을바람이 불어왔을 때 제주도로 떠나가 이승의 피안에 작은 초막을 지었다.

목월은 경북 경주시 경주군 서면 모량리 571 단석산 기슭 아래 초가집에서 태어났다.
집 앞으로는 낮게 엎드린 산맥들이 아늑하게 흘러가고 그 사이로는 들녘과 사과밭과 구릉들이 자리잡은 유순한 지세의 고장이었다.
모량리의 인텔리이자 유지였던 부모 슬하에서 2남2녀의 맏이로 자라난 목월은 인근 건천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대구 계성학교에서 고등교육을 마친다.
일찍이 계성학교 시절에는 서울의 아동잡지에 동요가 게재 돼 급우들 사이에서 별명이 「시인」으로 통했다.
계성학교 졸업후 경주의 동부금융조합에 취직하고 유익순 여사와 결혼한 그는 「문장」지에 목월이라는 필명으로 시를 투고하고 1939년 「연륜」이 정지용의 추천을 받으면서 본격적인 시인의 길로 접어들었다.

비슷한 무렵에 같이 추천을 받은 박두진 조지훈 등과 더불어 한국현대 시사에 획을 그은 「청록집」을 발간한 것은 1946년.
목월은 이 시기를 그의 산문 「나와 청록집 시절」에서 이렇게 밝힌다.
『「청록집」이 나오자 의외로 반향이 컸다.
좌익진영에서는 공격의 화살을 그것에 집중했다.
그런만큼 민족진영의 두둔도 지나칠 정도로 두터웠다.
「순수시를 지향하는 혜성처럼 나타난 신예 3인 시집」이라는 것이 조풍연씨가 붙여준 광고문의 캐치프레이즈이지만, 우리 자신들도 그야말로 신예 시인으로 자처하였던 것이다』
목월의 자술처럼 해방공간에 나온 청록집은 이처럼 좌우익 문단의 치열한 대결구도 속에서 탄생, 분단 이후 한국 문단의 주도권을 장악했던 「우익」들에 의해 그 시사 가치가 대대적으로 선전된 측면도 간과할 수는 없다.
어쨌든 목월의 시편들은 자연과 고향의 질박한 아름다움을 압축된 시행 속에서 드러내는 뛰어난 작품들이었다.
작고할 때까지 40여년 시인의 외길을 걸었던 목월의 작품세계는 크게 초기와 중기 후기로 나눌 수 있거니와 그 초기는 시집 「청녹집」「산도화」 시절로 구분된다.

이 시기 그의 시세계는 「자연」과 「향토적 정서」가 핵심이었다.
조지훈이 한글학회사건으로 신변에 위험을 느끼고 도피하면서 목월에 보낸 편지 중에 삽입한 「완화삼」이란 시편에 화답한 「나그네」는 이 시절 목월의 시세계를 상징한다.

『강나루 건너서 / 밑밭길을 // 구름에 달가듯이 / 가는 나그네 //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 술익는 마을마다 / 타는 저녁놀 //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그 뒤로 전쟁이 있었고 그 사랑이 있었다. 목월의 부인 유익순 여사는 그 해 가을이 다 저물무렵 남편이 다른 여인과 사는 제주도 집을 방문한다.
그녀는 목월과 H양이 겨울을 지낼 한복 한 벌씩과 생활비를 담은 봉투를 조용히 내밀고 돌아선다.
그녀 뒤에서 H양은 통곡을 한다. 결국 목월은 제주도생활 4개월만에 서울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는 그동안의 격정을 채 추스르지 못하고 아내와 자녀들이 있는 집의 반대방향인 효자동 종점 부근에 하숙을 정했다.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
  한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날 밤에 / 촛불을 밝혀 두고 홀로 울리라 /
   아아 너도 가고 / 나도 가야지』(김성태 작곡,「이별의 노래」 전문)

드디어 마흔 고개를 넘기고 중기로 분류되는 「난.기타」와 「청담」시절에 목월은 범박한 생활로 돌아와 난숙한 경지를 보여준다.
가족을 거느린 족장의 애틋한 사랑과 생활의 냄새가 묻어난다.
그는 「나는 우리 신규가 / 젤 예뻐. /
아암 문규도 예쁘지. / 밥 많이 먹는 애가 / 아버진 젤 예뻐.」라고 「밥상 앞에서」 노래한다. 곤궁한 시절을 끝내고 한양대 국문과 교수도 되었다.
후기시는 「경상도의 가랑잎」과 「무순」으로 대표되는 세계다.

고향사람들의 순박한 인정을 되살리는 향토회귀의 정서와 죽음에 대한 달관과 허무의식이 교차되는 세계다.
목월은 평생을 시를 붙들고 이 분야에 일가를 이루었다.
교수로 시인협회 회장으로, 후배들을 위한 시전문지 「심상」 창간의 주역으로,그리고 가장으로 줄기차게 달려갔다.

그러나, 잊었을까. 울며 몸부림치던 애틋한 지상의 사랑 하나, 가슴 속 무덤에 깊이 묻어둔 그 이승의 슬픔 하나를 그는 끝내 잊었을까.
30여년 이별의 세월이 흐른 뒤 목월은 고혈압으로 쓰러져 이승을 떠나기 얼마전 늙은 H양의 집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방문한다. 그리고 그날 밤 이렇게 쓴다.
『이제 / 그를 방문했다. / 겨우 / 쓸쓸한 미소가 마련되었다. / 겨우 / 그를 방문했다./
  이제 / 내가 가는 길에 눈이 뿌렸다 //(중략) /
  그의 눈에는 / 영원히 멎지 않을 눈발 이 어렸다./
  나의 눈에는 / 눈발이 내린다./ 사람의 인연이란 /
  꿈이 오가는 통로에 / 가볍게 울리는 응답』

(「방문­백발이 되고,이승을 하직할 무렵에
   한 번 더 만나보려니 소원했던 사람을 이제 방문하게 되었다.
   덧없이 흐른 세월이여. 끝없이 눈발이 내리는구나」중에서)

이별의 노래를 부르면 한 폭의 동양화가 연상된다.
여백의 미를 좋아한 박목월 시인의 눈물이 그 빈자리에 찰랑 거리는 듯 하다.
이 시의 클라이막스는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 두고 홀로 울리라" 하는 대목이다.
여기에 얽힌 시인의 아가패적 비련을 알고 나면 더욱 이 시의 뜻이 애틋하고 아름다워 진다.

박목월 시인의 수필집 '구름에 달 가듯이' 에는 이별의 노래에 얽힌 사연이 실려있다.
주인공의 신분과 이름, 만난 계기나 시기는 고백하지 않았으나, 그 여인에 대한 만나서 헤어질 때까지의 이야기가 서술되어 있다.

오월의 어느 날 오후, 그의 사무실에서 첫 대면을 하고 눈발이 내리던 거리에서 두 번째 만남을 가졌다.
그리고 그녀를 세 번째 해후한 날은 유달리 눈부시게 햇빛이 비친 맑은 날이었다.
저편에서 걸어오는 한 여인, 소복한 여인은 햇빛을 등으로 받으며 불꽃에 싸여 있었다.
석고처럼 창백한 그녀의 얼굴은 아름다웠다.
중병을 앓고 있던 그녀는 그 날밤 자신의 병실을 지켜주길 박목월 시인에게 청했다.

병실에서 두 사람은 건배를 들었다.
그리고 이듬해 가을 어느날 오후 , 그녀는 세상을 떠났다.
그는 비통한 심정으로 "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하며 이별의 노래를 조용히 읊었다.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날 밤에 촛불을 밝혀 두고 홀로 울리라"라는 표현은 낭만적인 것 같지만, 그는 "나는 햐얗게 재가 되어 삭아내린 기분'이라고 당시의

비애를 표현했다.

시인 박목월의 본명은 박영종이다. 1916년 경남고성에서 출생했으나, 부친이 전근하면서 경북 월성군 건천읍 모량2리로 이사했다.
그는 박두진, 조지훈과 함께 청록집을 발간했는데, 청록파 시인은 이 제목에서 유래한다.
빛나는 재질과 향토적인 서정으로 시의 형식과 내용에서 미학을 추구한 그는 시단에 금자탐을 세우고 1978년 3월 28일 눈을 감았다.

시 '이별의 노래'에 곡이 붙여진 것은 박목월 시인의 그 여인이 임종하고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서이다.
박시인이 대구에서 작곡가 김성태를 만난 날이었다.
당시 김성태씨는 해군 정훈악대를 조직해 지휘를 맡고 있었는데, 박목월 시인을 만나기 위해 대구에 온 길이었다.

두 사람이 어스름한 저녁 술집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박 시인이 새로 지은 시라면서 '이별의 노래' 가 적힌 쪽지를 김씨에게 내밀었다.
속으로 그 시를 읽는 순간 김성태씨의 가슴에는 뭉클하는 감동이 솟았고, 너무나 아름답고 깨끗한 시상에 빨려들어갔다.

작곡가 김성태씨는 그 날 박 시인과 헤어져 여관에 돌아온 즉시 시의 감흥을 멜로디로 옮겼다.
오선지도 없어서 백지에 줄을 긋고 악보를 그렸다. 1952년 11월의 일이었다.
이 곡은 작곡 후 많은 성악가들이 다투어 독창회에서 불렀고, 특히 가을 독창회에서는 빠지지 않는 레파토리가 되었다.

작곡가 김성태 선생은 1910년 11월 서울 광희동에서 태어났다.
조부가 세운 교회에 다니면서 합창단원으로 음악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훗날 연희 전문학교 상과에 진학한 후 홍난파, 현제명, 채동선 등에게서 본격적인 음악수업을 받았다.
그는 연전 졸업 후 도쿄 고등음악학교(현 일본 국립음대) 작곡과에 유학했다.

그는 일본에서 작곡을 전공한 최초의 국내 작곡가이다.
집안이 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들은 음악공부를 반대해 돈을 주지 않았다.
그의 소망을 아는 부인이 부모 몰래 패물을 팔아서 준 돈으로 일본으로 떠났다.
그는 '아내가 아니면 오늘의 내가 없었을 것' 이라고 말하며 아내에게 감사해 한다.

참고문헌; 이향숙 저 '가곡의 고향(1988) 한국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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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목월

"사람은 사랑할 때 누구나 시인이 된다"고 플라톤은 말했고, 바이런은 "시인이 되려면 사랑에 빠지거나 불행해져야 한다"고 했다.
왜 인류는 시인을 낳고 시인은 시를 쓰며 사람들은 시를 읽는가라는 물음에 가장 가까운 대답은 "시 속에 사랑이 있으니까"일 것이다.

조국도 혁명도 종교도 가난도 배신도 모두 시 속에서는 사랑의 모습으로 꽃피워진다.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시인으로서 사랑에 빠지면 어떤 시를 낳는가를 우리는 박목월에게서 배운다.

목월은 '문장'지에 추천 받을 때 평소 좋아하는 시인 수주(樹州)변영로의 아호인 수자에서 나무목(木)자를 따고 소월(素月)김정식에서 달월(月)자를 따서 지은 것이 본명 영종(泳鍾)을 누르고 그의 이름으로 굳혀져 있다.

경주에서 태어난 그는 대구 계성중학3학년 때 열여섯살 나이로 잡지 '어린이'와 '신가정'에 동요 '통딱딱 통딱딱'이 당선되어 동요시인으로 이름을 내기 시작했고 경주에서 금융조합 서기로 일하던 때 기차 여행에서 만난 충남 공주 처녀 유익순이 우연하게 직장 동료의 처제여서 불국사에서 다시 만나는 기연으로 혼담이 싹터 결혼하게 된다.

시인이기 이전에 생활인이고 아홉식구의 가장이어야 했던 목월이 6.25 전쟁을 전후한 궁핍의 세월을 어떻게 넘어왔는가를 1964년 시 '가정'에서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19문 반의 신발이 왔다"고 차마 쏟아내기 어려운 아버지 숨은 얼굴을 드러낸다.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로 이 땅의 아이들에게 동심을 키워준 동요시인 박영종, 그리고 청록파의 3가시인으로 가장 많은 명편의 시들을 써냈으며, 문학지가 없고 더구나 시전문지가 없어 후배 시인들이 고통을 받을 때 재산가도 엄두를 못내는 월간 시전문지 '심상'을 발행, 세상을 떠난 뒤에도 오늘토록 30년을 이어오도록 큰 몫을 해낸 시인 박목월에게도 아름답고도 아픈 사랑이 있었다.

대구로 피란 내려가서 있던 53년 봄. 목월은 교회에서 서울의 명문여대생 H를 만난다.
시인과 시를 좋아하는 문학소녀와의 만남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다음해 환도와 함께 H가 서울로 올라오면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진다.
목월은 H의 태도가 존경을 넘어서 이성의 사랑으로 싹트는 기미가 있자 후배시인에게 H를 잘 설득할 것을 부탁한다.

명동 문예살롱에서 H는 목월이 보낸 시인에게 "나는 사랑 이상의 것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이런 무상의 사랑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막무가내였다.

그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올 때 목월은 어디론가 잠적하게 된다.
H와 제주에서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은 뒤에 알려지고 그 사랑의 도피생활이 넉 달째 들어섰을 때 부인 유익순 여사가 제주를 찾아간다.
새로 지은 목월과 H의 겨울 한복과 생활비로 쓸 돈봉투를 들고.
끝내 목월은 H와 헤어지고 서울로 돌아온다.
김성태곡으로 널리 애창되는 목월의 시 '이별의 노래'는 그 H를 두고 지은 것이다.

"한 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서울로 올라온 목월은 바로 아내와 아들, 딸이 기다리는 집으로 가지 못하고 효자동에서 두 달 동안 하숙생활을 하다가 귀가한다.

"사랑하느냐고/ 지금도 눈물어린 눈이/ 바람에 휩쓸린다"고
목월은 평생토록 그 사랑을 시 속에 심다가 붓을 놓고 갔다.
그 하늘 구만리 기러기 울어예는 뜻을 내사 알겠네.

이근배<시인.한국시인협회장>

출처 : http://cafe.daum.net/27289/MeNu/56?docid=1OCAC|MeNu|56|2011103116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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