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역순으로 동해안을 끼고 올라왔다. 동해안은 서. 남해안과 달리 섬이 거의 없지만 망망대해는 이것이 바다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해안선 주위의 바위들과 해안빈지 그리고 수평선에 떠 있는 배를 바라보면 “저 너머엔 무엇이 있을까”라는 호기심을 품었던 어린 시절이 생각나기도 했다. 오늘 일정은 여유가 있으므로 삼척의 새천년도로를 거쳐 오기로 했다. 이곳 삼척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군이었다가 지금은 태백시와 동해시를 분가시키고 삼척시로 조용히 살아가는 곳이다. 첫사랑이 제일 생각나듯이 전에 삼척에서 근무하던 날이 생각나기도 했다. 그 때 함께했던 사람들 중, 이미 고인이 된 사람도 있고 아직 열심히 일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들이 보고 푼 것은 나이가 들었기 때문일까? 버스는 정라진항을 지나 10여 년 전에 개통한 도로를 달리다 조각공원에서 휴식을 취했다. 역시 여행은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더 좋아했다. 멋있는 조각들이 버티고 서있는 공원 끝에는 펜스가 처져 있고 그 너머에는 화물선이 유유히 흘러가는 모습이 평화로워 보였다. 일행은 어릴 때 방에 걸어놓았던 아름다운 사진틀을 보는듯한 광경을 배경으로 추억을 남겼다. 선생님은 기념사진을 찍은 후, 조각들을 둘러보셨는데 특히 곰치 조각을 유심히 살펴보시는 것 같았다.
<새천년도로 조각공원에서 1>
<새천년도로 조각공원에서 2>
<새천년도로 조각공원에서 3>
<새천년도로 조각공원에서 4>
<새천년도로 조각공원에서 5>
<새천년도로 조각공원에서 6>
<새천년도로 조각공원에서 7>
강릉에 올라오자 벌써 점심시간이 되었다. 우리는 초당의 유명한 먹 거리인 초당순두부집을 찾았다. 나에게 식당을 안내하라는 부탁을 받고 버스를 주차할 수도 있는 곳을 생각했다. 초당에 순두부집은 많으나 버스를 주차할 수 있는 곳은 별로 없기 때문에, 강릉에 근무할 때 단골로 다니던 동화가든으로 갔다. 그곳에서 순두부백반에 모두부를 안주로 소주를 한 잔씩 마셨다. 특히 이 집은 가자미 식혜가 특식이었으나 이번에는 전에 먹던 맛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주인아주머니와 만나 반가운 인사를 나눴다.
<초당 동화가든 여주인과 함께>
<초당 동화가든 정원에서 1>
<초당 동화가든 정원에서 2>
초당은 소나무가 유명하다. 초당의 경포호수와 붙은 곳에 허균. 허난설헌기념관이 있었다. 내가 근무할 때는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생가만 있었는데 새로 기념관을 만들고 시비도 세워놓은 것이다. 이곳이 초당으로 불리게 된 것은 허균의 아버지인 허엽의 호가 초당(草堂)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는 먼저 허균. 허난설헌의 시비와 허난설헌의 동상을 둘러보고 기념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기념관은 작고 아담했으나 현대적 감각에 맞게 자료를 살펴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그곳에는 오누이의 사상과 문학작품을 중심으로 영상자료와 국조시산, 하곡조천기, 난설헌집, 석란유분 등을 전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화관광해설사가 다른 관광객들을 맞고 있어 그곳에 근무하는 직원으로부터 간단한 설명을 들었다. 교산 허균은 잘 아는 바와 같이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의 저자이다. 조선 중기 개혁사상을 펼친 사상가로 적서 차별문제, 지배세력에 대한 민초의 위력 및 왕도정치를 실현하는 이상 국가 건설 등을 주장했다. 허난설헌 허초희는 탁월한 감각으로 국내는 물론 중국과 일본에도 그 천재성을 인정받았다. 특히 그녀가 8세 때 신선세계인 상상의 궁궐인 광한전 백옥루의 상량식에 자신이 초대되었다고 상상해서 지은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 1605년 한석봉이 쓴 글씨가 탁본으로 남아있었다. 이어서 생가를 찾았다. 조선 선조 때 초당 허엽이 살던 곳으로 허난설헌이 태어났으며 허균이 살았던 집이다. 토담과 주변 솔밭이 조화를 이룬 곳으로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의 명당이라고 한다.
<허균. 허난설헌 기념관 간판>
<난설헌 허초희 동상>
<허난설헌의 시비, 아들딸 여의고서(곡자)>
<초당 허엽 시비, 고성 남산정에서>
<교산 허균 시비, 경포호 정자>
<허균. 허난설헌 생가에서>
<생가 방 안의 허난설헌 초상화>
<허균. 허난설헌 기념관 주위에서 고독을 씹는 가을 여인>
<허균. 허난설헌 기념관 주위에서 대화하며 거니는 여인들>
누가 연락을 했는지 강릉에 살고 있으면서도 하서문학회원인 조항순씨가 찾아왔다. 그녀는 함께 기념관과 생가를 돌아보았다. 이어서 강릉에서 커피축제를 하고 있다며 우리를 강문에 있는 커피전문점인 “커피스토리”에 안내했다. 전에는 이런 곳이 없었는데 새로 생긴 것 같았다. 2층 건물로 되어있었으며 대부분 거울로 설계되어 있어 2층에서도 1층의 모습이 보였다. 그곳에는 젊은이들이 커피를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우리도 각각 입에 맞는 커피를 마시고 대화를 나누다 바닷가로 나왔다. 파도가 심하지는 않았으나 해신이 하얀 포말을 자꾸만 내뿜고 있었다.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속까지 시원해지며 앞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이곳 강문은 늦가을부터 해변의 모래가 파여 나가는 곳이었으나 올해는 모래가 상당히 많이 쌓여 있었다. 그 위에는 갈매기들이 서로 사랑을 속삭이며 힘든 날개를 달래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걸어 나오면서도 이야기는 끝이지 않고...>
<맛있는 커피를 마신 커피스토리 전경>
<갈매기들과 흰 포말의 조화>
<강태공들을 지켜보는 갈매기들, 저들은 서로 무슨 대화를 나눌까?>
<해변까지 흰 포말은 밀려나오고...>
그녀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강문횟집골목을 빠져나왔다. 다리를 건너기 전에는 진또배기 여 성황당이, 다리를 건너면 남 성황당이 강문을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옛 어른들이 성황당도 남. 여를 함께 만들어 놓은 것을 볼 때, 음양의 조화를 많이 따졌던 것 같았다. 경포해수욕장은 비수기이지만 관광객 몇 사람이 늦가을 바다를 즐기고 있었다. 우리는 국도가 아닌 해변도로를 따라 사천, 연곡을 지나 주문진항에 도착했다. 이곳은 언제나 복잡한 곳이지만 오늘은 유난히 복잡했다. 상당히 큰 주차장이 있으나 벌써 만원이고, 길거리에도 버스들이 주차하고 있어 교행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어쩔 수 없이 주차장 중간에 차를 세우고 항구의 어시장으로 들어갔다. 버스들이 많이 왔는데 이곳이라고 한가로울 리가 있겠는가? 오가는 사람들 틈에 끼어 겨우 밀려다니는 꼴이었다. 그러나 나름대로 필요한 해산물을 구입한 후 버스에 올랐다. 한 30분이 지났으나 주차장은 많이 비워져 있었다. 우리는 고속도로를 타고 진부에서 막국수로 저녁을 먹고, 장평을 거쳐 이번 여행을 마무리 지었다.
첫댓글 좋은사진과 훌륭한 기행문 감사합니다. 여행기를 읽으면서 다시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