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랫만에 제가 존경하는 스프링님과 중국통 여러분께 인사를 드립니다. 더구나 지난 2월 청도를 방문한 이래 언젠가는 아름다운 청도에 관한 이야기를 정리하고 싶었지만 특유의 게으름으로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습니다. 더구나 멀리서 찾은 저에게 분에 넘치는 환대를 해주셨던 지기 스프링님께 감사하다는 말조차 하지 못했고, 바쁜 중에서도 4일 동안이나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청도 곳곳을 안내해주신 자전거맨 수로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지금도 목이 메입니다. 그저 불민한 인간의 치졸함이라 여기시고 놀리 용서해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제가 청도를 찾는 말에 맞추어 중국통모임까지 열어 주신 청도에 계신 모든 형제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뒤늦게 드립니다. 멀리서 찾아주셨던 산동물통님! 아우가 주억주억 말대꾸를 해서 죄송합니다. 이놈봐라! 꽤 시건방지군!이라는 꾸지람을 해 주시는 것이 형님의 사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강녕하시고 용서바랍니다. 하도 반가워 그만 아우가 오버를 했습니다.
뒤늦은 인사로 제가 지난 번에 청도를 찾았을 때 기억을 더듬어 느낀 어줍쟎은 것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요즈음 때마침 청도시의 투자유치단에 근무하시는 중국여성이 저의 사무실을 자주 찾아 주시는(투자 때문이 아니라 단지 한국말을 배우겠다는 생각으로) 바람에 청도에 계신 스프링님과 수로님의 얼굴이 떠올라 목이 매였습니다. 생면부지의 인간들이 그저 몇 줄의 글로 정덤을 나누며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 인터넷문화가 가진 가장 긍정적인 측면이라는 걸 절절히 느꼈습니다.
그 사랑말고도 청도를 찾았을 때 느낀 몇가지의 단상이 있습니다. 태청궁을 찾았을 때 있었던 이야기를 드리겠습니다. 물론 그곳에서 어물거리다가 중요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 아픔이 있었지만. 그 아픔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에 드리겠습니다. 수로님과 함께 노산을 돌아서 시내로 오는 길에 태청궁을 들렀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태청궁은 도교의 중심사원이라 평소에 도교에 관한 관심이 높았던 제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중국도교는 지금부터 2,000년이 훨씬 넘는 한대에 형성이 됩니다. 잘 아시는 소설 삼국지가 장각이 일으킨 '황건적의 반란'에서 시작되는 것처럼 도교는 중국의 정치적변화를 초래하는 중요한 원인이었습니다. 중국민중이 권력에 대한 도전을 시작할 때 왜 항상 도교가 중심이 되었는가는 다른 기회에 말씀을 드리겠지습니다.
저의 사무실에는 중국의 법제일보 서울주재 특파원이 자주 들립니다. 저와 같은 '徐'가 성을 쓰는 30대 초반의 이 친구는 아주 유쾌한 하얼빈 출신으로 천진대학 한국어학과를 졸업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제가 우리식으로 어디 서씨요?라고 물었더니 대뜸 '달성서씨'입니다라고 대답하더군요. 가끔 이 친구와 격론을 벌이기도 하지만 대체로 쾌활한 이 청년과의 대화를 즐깁니다. 이 친구와 요즈음 주로 얼굴을 붉히고 다투는 것은 2가지입니다. 하나는 파륜공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요즈음 문제가 되는 고구려사에 관한 것입니다.
이 친구는 한국사람들이 파륜공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관한 초보적인 질문에서 시작하여 지금 한국에 얼마나 깊이 침투했는지 또는 중국정부의 파륜공에 관한 태도를 어떻게 보는지에 관한 꽤나 난감한 질문을 하더군요. 당란, 제가 한국인을 대표하는 사람도 또 그 문제에 전문가도 아니므로 외교적으로 민감한 문제를 거론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만은 고구려사에 관한 이야기와 덧붙여지면 가끔 제가 약을 올립니다. 아무튼 이 파륜공도 그 연원을 찾아 보면 이러한 중국도교의 정치성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반적으로 도교는 정치와 무관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도교가 가진 '無爲'라는 개념이 마치 현실적인 문제에서 벗어난 은자의 모습을 가진 것으로 오인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도교는 그리 만만하게만 볼 수 없는 강력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도교에 관한 문제는 다음 기회에 다시 조명을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태청궁 또는 상천궁과 노산이 오승은의 서유기와 깊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저의 호기심입니다. 태청궁에 도착하니 다소 속이 불편한 이상한 향내가 풍겼습니다. 그것은 냄새탓이기도 했지만 정문입구에 잔뜩 늘어선 소위 공인가이드들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각종 자기 프로필을 적어서 가슴앞에 걸고 안내를 자원하는 남녀들이 늘어선 모습은 특이하기도 했지만 거부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동행했던 수로님도 윤숙이도 태청궁에 관한 별다른 정보가 없는 것 같아서 그 중에서 조금 똑똑한 듯한 여성을 지목해서 안내를 부탁했습니다.
제가 그토록 궁금했던 중국도교의 본산은 생각만큼 장엄하거나 신비하지는 앟았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눈에 확 띄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요재지이'라는 신비소설을 쓴 포송령이 앉아 있었다는 넝쿨나무밑과 신농씨의 영정, 그리고 손오공이었습니다. 손오공이라! 손오공이라! 몇 번 고개를 갸웃거리던 저는 궁금증을 참지 못해 가이드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손오공이 왜 여기에 있는가? 그러나 가이드는 입을 다물고 말더군요. 마침 검은 옷을 입고 상투를 튼 젊은 도사가 오락가락 하기에 그를 불러서 물어보았습니다. 실망스럽게도 그 도사도 만족할 만한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을 통해 만족할 만한 정보를 얻기는 틀린 일이었습니다. 수로님께서 저의 궁금증을 풀어주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지만 역시 부질없는 노력이었을 뿐입니다. 저녁에 康有爲의 故宅에 계신 분들과 식사약속을 했기 때문에 조급했지만 도저히 궁금증을 남기고 갈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 정문에 있는 기념품가게를 들렀다가 저는 아하!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쳐지났습니다. 기념품가게의 청년은 그가 손오공이 아니라 唐나라 때 三太子라고 불렀던 李靖이며, 태상노군인 태을진인의 제자라고 했습니다. 漢의 乾元元年에 華辛丑樂山居士 張鹿이 건립한 곳이라는 비석이 서 있던 그곳을 蒲松齡과 吳承恩이라는 걸출한 문인들이 머물거나 지나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포송령은 도교에 우호적이었던 반면에 오승은은 상당한 악감정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서유기 첫머리는 손오공이 행패가 심해서 간신히 달래 태상노군의 복숭아밭을 관리하는 책임자로 임명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복숭아라면 청도가 유명한 산지라는 걸 들어서 알고 있던 저는 그렇구나! 오승은은 서유기에 관한 많은 소재를 바로 이곳 청도와 노산, 그리고 태청궁과 상청궁 등의 도교사원에서 얻었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손오공이 돌에서 태어나는 것과 나중에 석가모니의 손바닥에서 잡혀 다시 돌산에 갖히는 것은 모두 오승은이 노산의 수 많은 돌들을 바라보고 얻은 아이디어일 것입니다. 서유기를 쓴 오승은이 청도 부근 어디에서 살았다는 기억이 스치면서 저의 상상력은 날개를 달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봄 날 오승은이 태청궁을 찾아갔다가 복숭아를 몰래 따먹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도사에게 걸려서 무지하게 두들겨 맞았을 것이다. 복숭아 몇 개 따먹었다고 나를 그렇게 때리다니! 분개한 오승은은 서유기를 쓰면서 손오공에게 박살이 나는 태청궁과 상청궁 그리고 손오공의 만행을 말리지 못해 옥황상제에게 찾아가 하소연하는 태상노군의 한심한 모습을 그렸던 것입니다. 태상노군은 옥황상제와 석가모니를 모시고 파티를 할 때 준비한 천도복숭아를 손오공이 빼앗아 먹고, 그것도 모자라 복숭아밭으로 달려가 다 따먹고 태청궁에 있던 도사들을 마구 때리고 있었습니다. 옥황상제는 웃으며 마침 옆에 계셨던 석가모니께 손오공을 혼내주라고 합니다. 손오공이 부처님 손바닥에서 잡힌 것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일 것입니다. 천도복숭아를 따먹은 손오공은 불사신이 되었습니다.
노산의 수많은 돌과 태청궁, 청도의 맛있는 복숭아와 오승은의 서유기가 이렇게 연결되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그만 약속시간이 지나고 말았습니다. 강유위의 고택에 근무하는 분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했던 저는 다음날 아침에 귀국하기 전 스프링님과 좀 더 많은 시간을 가지고 싶은 마음을 참고 사죄인사를 드리러 가야 했습니다. 노산에서 있었던 다른 이야기는 다시 드리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첫댓글 아, 정말 재미있네요.. 기대가 큽니다. 글샘이 마르는 일 없이 늘 흘러넘쳐 이곳 청도땅도 넉넉히 적셔주실 수 있기를... 제가 좋아하는 생활칼럼방이 풍성해질 것 같은 즐거운 예감!!
묵계님 지송해서 우째요.. 게시판 글은 지우겠습니다.. 다시한번 죄송 ^J^
이렇게 칭찬받으면 기분 째지는건 무슨 병에 해당될까요?수로님은 몇달간 소식이 없네요.카페도 폐쇄한것 같고,사업장에서는 전화받는 사람도 없고,,뭔 일이 있는지..묵계님이 오시니까 이야기방이 꽉 찬 느낌입니다.재미있는 고사를 많이 듣게되어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우~아 정말재미있다 내가 청도카페 회윈되길 잘했지, 이런 서유기 스토리착상에 관한연구발표문도 다읽고 하루가 다르게 중국에관한 지식이 차곡차곡 사이는것 같습니다.
청도땅 "노산" 태청궁에 이런스토리가.?????십여년전의 태청궁은 볼품이 없었읍니다. 건물은 부서지다 말았고, 그귀한 유적들이 문화 대혁명때 마구잡이로..... 지금의 검정옷 도인들은 동네 사람들이 월급 받으며 일하는 모습이니 건물이야 복원하겠지만,역사를 알수야 있겠나요?. 다음얘기 기다려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