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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있는 소쇄원(瀟灑園)은
국가 지정문화재 사적 제304호이면서 명승 제40호이다.
정원 자체에 무궁무진한 내용이 함축되어 있다.
소쇄원은 자연과 인공을 조화시킨 조선중기의 대표적인 원림으로
우리나라 선비의 고고한 품성과 절의가 풍기는 아름다움이 있다.
조경·건축미가 뛰어난 정원 소쇄원이다.
풍수이론상으로도 봉황이 깊숙히 고개를 드밀고 있는 곳에 자리한다.
무등산 자락에 봉황이 세(勢)를 형성하면서 꿈틀거리면서 내닫고 있다.
그 계곡에 둥지를 튼 소쇄원이다.
장원봉 밑에 별뫼 성산(星山)이 우백호로 소쇄원을 감싸고 있고
까치봉에서 뻗어내린 게 좌청룡이 든든하게 받쳐 주고 있다.
풍수학자 장영훈은 그의 책 <서울풍수>에서 소쇄원의 풍수리지를
실감나게 풀이하고 있다.
그의 책 <서울풍수> 제10장 우면산계(강남구 서초구)에서
소쇄원 부문(책 392쪽~395쪽)만을 옮겨 살핀다.
가령 오늘날까지 조경건축의 1번지라고 할 수 있는 담양 소쇄원의 경우
2군데 관산점에서 풍수설명만 해주면 주요대목들은 다 풀려버린다.
제1관산점은 소쇄원 주차장에서 서쪽으로 500m가량 떨어져 있는 과수원 윗녘이다.
이곳에서 풍수 기초과정을 마친 제자들을 세워놓고 형국을 잡아보라고 하면,
목을 길게 늘어트리면서 날아노는 새를 연상하다가, 워낙 큰 광경 앞에서
대봉(大鳳)을 떠올리면서결국에는 이구동성으로 “봉황새요”한다.
이런 형국만 잡을 수 있으면, 이제부터는 형국론 강의 3시간만 들어도
자연적으로 알게 되는 풍수기초 공식에 걸어 일사천리로 풀려져 나간다.
봉황의 혈자리는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면 대답은 “날개 밑”이라고 배운대로 튀어나온다.
소쇄원 봉황의 왼쪽 날개와 오른쪽 날개 중 어느 쪽이 명당혈이냐고 물으면 헐렁하게
벌어진 오른쪽 날개보다는 둥지처럼 둥글게 감추는(藏風) 왼쪽날개를 가리킨다.
그것이 봉황의 둥지라는 봉소형(鳳巢形)이 소쇄원의 풍수형국이기 때문이다.
이는 500년 전 양산보(梁山甫)가 이곳에 터를 잡은 조건이기도 하다.
제1관산점에서 소쇄원이 봉소형이라는 안목을 갖고 소쇄원으로 들어가면
이곳저곳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대나무와 오동나무들이 이곳저곳에서 자라고 있는 소쇄원 조경에서 한번 터져나온다.
봉황은 오동나무 숲 속에 집을 짓고 대나무 열매를 먹는다는 풍수설과도 들어맞는
조경이기 때문이다.
건축자인 양산보(1503~1557년)는 그의 스승 조광조가 기묘사화(1519년)로
유배되자 세속의 뜻을 버리고 낙향하면서 은거하기 위해 조성한 곳으로 유명하다.
그의 아들 자징(子澂)과 손자인 천운(千運)까지 3대에 걸쳐 완성된 천혜의 계곡에 인공미를
더한 완벽한 조화미로 한국 최고의 정원으로 평가받는다.
소쇄원 한자를 풀이하면 '소(瀟)'는 강이름·맑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쇄(灑)’는 뿌리다·깨끗하다는 의미를 가진다.
소쇄원은 맑고 깨끗한 정원이란 뜻이다.
속세의 때 묻은 세상에서 티끌 하나 없는 맑고 깨끗한 세상으로 들어가 은거한다는 것이다.
스승 조광조가 유배 가서 사형당한 현장을 지켜본 제자 양산보의 당시 심경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당시 정국은 혼란의 시기였다.
1519년, 조정은 암울했다.
역사가 쓰인 이래 단 한 번도 원로 권귀들이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았음에도
이때는 여느 때보다 달랐다. 왕은 그를 왕으로 추대한 공신들 보다는 신진사대부인
정암 조광조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공신들은 실제 인원보다 부풀어져 있었고, 그들이 차지하고 휘둘러야 할 재산과
권력이 막강해서 어느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는 시기였다.
하지만 정암은 달랐다. 원칙으로 무장하고 자기중심을 잡은 세계관은 거침이 없어서
사특한 무리들이 함부로 대적하기 힘들 정도였다.
가파른 위기의 시대, 정암은 개혁만이 살길임을 강조하고 왕이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점을 들어 왕의 도리를 강요했다.
혁명의 시기, 구태의 시대를 떠받들던 패러다임을 접고 새로운 국면을 통해
백성과 닿을 수 있어야만 진정한 왕도정치이며 혁명이라고 주장했던 정암 조광조였다
.하지만 정암의 그 뜻은 오래 가지 못했다. 위훈삭제를 당한 원로들의 잔꾀 앞에서
하염없이 무너지고 만다. 정암이 죽임을 당한 것은 사약이었지만 그 죽음에는
왕과 신하의 싸움이 아니라,정암 또한 새로운 왕조를 만들려고 한다는 벌레를 이용한
공작에 의해 죽고 만 것이다.
권귀들이 저지른 죄악은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꿀을 바르고
이를 벌레들이 갉아 먹게 만든 것이었으며 그것은 왕의 절대권력을 부정하는
새로운 대항기제로서 정암을 들여 놓아 왕과 신진사대부 정암의 대립구도를 만들어
권신들이 빠져나기가 위한 수단이었다.
그렇게 기묘사화는 일어났고 젊은 정암은 유폐되어 화순 능주 적소에서
사약을 받고 세상을 하직한다.
그런 정암을 따르는 제자 중에는 이제 갓 열일곱을 먹은 양산보가 속해 있었다.
전라도 땅에서 열다섯에 스승을 찾아 한양으로 올랐던 이가 바로 오늘 소쇄원의 주인 양산보였다.
서슬 퍼런 권력의 싸움 앞에서도 한 치의 물러섬 없었던 스승을 바라보는 청년 양산보는
그 누구보다 그를 존경했다.
결국 왕을 바로 세우고자 하는 신하의 의지가 사악한 권귀들의 의도 하에
왕대 정암이 아니라 왕 대 왕이 되려고 했다고 꾸미는 구도로 변형되면서 개혁의 정치는
사사 되는 과정을 목도하게 된 것이다.
현명한 군주를 만들고자 버둥거렸던 스승을 보필하던 양산보는 일말의 정치에 대한 기대를
거두고 향리로 돌아온다. 벼슬 한번 해 보지 않고 벼슬의 무거움과 무상함을 깨달아버린 청년,
양산보. 권좌가 스스로의 자리만을 구축하는 것이 아닌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의 순리,
비워있으면 채워내고 가는 덕성, 더러움이 있으면 깨끗하게 만들어가는 정화, 막혀있으면
돌아가는 지혜, 만 갈래의 분쟁이 있어도 오직 하나로 모아 낼 수 있는 조정력이 요구되는
자리임을 이미 열일곱에 깨달아 버린 그였다.정쟁의 무거움을 알아버린
그가 택한 것은 산수 간에 은거를 택하고 세상의 잡사에 물들지 않으며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것이었다. 소쇄원은 그렇게 탄생했다.
소쇄원은 도로 옆이 입구이며 바깥에서는 소쇄원이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대나무숲에 가려져 있다. 풍수적으로 양(陽)에서 음(陰)으로 들어가는 구조다.
길 옆 도로는 원래 냇물이 흐르던 자리를 복개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일종의 새로운 세상, 다른 세상으로 들어간다는 의미다. 왕궁의 금천교나 불교 사찰의
일주문을 지나 극락교나 연화교와 같은 상징적인 의미와 일맥상통한다.
물길을 건너면 성스러운 곳이거나 극락정토로 연결되는 것이다.
소쇄원에서는 무릉도원으로 들어간다고 볼 수 있다.
다시 장영훈의 책 <서울풍수>로 들어간다.담양 소쇄원을 찾는 탐방객의
두 번째 탄성을 자아내는 곳이라고 한다.
두 번째 탄성은 소쇄원 첫머리에 붙여놓은 정자문패에 내지르게 된다.
“대봉대(待鳳臺)”
봉황을 기다리는 텃자리라는 것이다.
이쯤되면 “벽오등 심은 뜻은 봉황을 보자코저……”라는 노래 가사를 흥얼거리는
풍수제자들로 인해 남도풍류 여행쯤으로 흥이 오른다.
소쇄원 담장 왼쪽으로 들어서면 내부동선이 시작된다. 몇 걸음 옮기면 대봉대(待鳳臺)가 나온다.
'대봉대(待鳳臺)' 봉황을 기다리는 텃자리다.봉황을 기다리는 정자다. 봉황은 풍수에서 전형적인
길조의 상징이다. 왕궁에는 봉황의 그림이나 알이 반드시 나온다. 봉황은 오동나무에 깃들어 산다.
대봉대 옆에 오동나무 한 그루가 있다.
봉황이 날아와서 알을 품고 지내라는 의미로 심었다고 전한다.
대나무와 오동나무들이 이곳저곳에서 자라고 있다.
봉황은 오동나무 숲 속에 집을 짓고 대나무 열매를 먹는다는 풍수설과도
들어맞는 조경이기 때문이다. 소쇄원 초입의 대봉대는 봉황새라는 상상속의 새,
어진 왕이 다스리는 태평한 세월이 이뤄진 후에 나타난다는 점을 앞세우고 있다.
그 새 앉으라고 벽오동나무를 심고, 먹이를 취하라고 대나무 성성하고,
동쪽에는 단물나는 샘 예천을 조성해 두었다.
권력에 눈먼 중종 같은 이가 아니라 신하와 백성을 하늘 같이 존중할 줄 아는
그런 왕을 기다렸거나 그런 왕을 만들고자했던 정암 조광조의 제자 양산보의 소망이
거기 대봉대라는 초가 정자에 직유와 은유를 통해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또다시 장영훈의 책 <서울풍수>로 돌아간다.물길 계곡 위에 자연스럽게 설치한 담장이야기이다.
조경의 기법으로 담장을 그곳에 설치한 것이 아니라 황천살(黃泉殺)을 막아 보려는 방책에서 나온 것이란다.
제2관산점은 소쇄원의 본당이며, 풍수 중심이 되는 제월당(濟月堂)앞에 서서, 패철을 꺼내어
풍수 황천살(黃泉殺)을 쓰여져 있는 그대로 읽게 하면, 정남쪽[午]과 동남쪽[乙]방향을 가리킨다.
집을 지을 때 본채에서 측정한 황천살 방향에는 문구멍을 내거나 물줄기가 보여서는 안 된다.
이를 어겼을 경우는 황천살을 맞게 된다.
소쇄원의 경우 황천살에 해당되는 두 방향 모두 물줄기가 들어오고, 문을 낼 수 밖에 없는
지리적 조건을 갖고 있다. 그곳을 살펴보면 이상한 담들이 똑같이 발견된다.
그러나 제자들은 별 대수롭지 않게 지나쳐 버린다.
그것은 강의시간에 동궐도에 그려진 황천살 담들을 패철로서 수차례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소쇄원의 내원과 외원을 구분짓는 오곡문. 외원의 계곡이 내원으로 바로 연결되는 문이다.
이어 애양단(愛陽壇)이다. 소쇄원은 담이 있되 담이 없는 공간이다.
사람과 바람이 넘나들어 안과 밖의 경계를 나누지 않게 했다.
애양단의 담은 그가 어머니에 대한 효심을 잊지 않기 위해 조성되고,
그 담장은 음과 양의 이치에 따라 세워진다.
한편으로 그 담은 주인의 뜻을 이해하는 당대의 시인묵객들이 헛된 발걸음이
아닌 지고지순한 양산보의 의리 정신에 동의하는 시구로 넘실대는 전시의 공간이기도 했다.
소쇄원의 맞은 편 마을에 당뫼라고 부르는 닭뫼 마을이 있다.
고암산지세가 왕성한 힘을 지닌 지네혈에 해당되기 때문에 이를 경계하는 닭을
배치한 의도라 하는데 애양단의 담은 또 한편으로 지네의 요추에 해당된다.
강성한 힘의 지네는 허리를 제압하는 것만이 주변과 조화를 이룰 수 있기 때문에
만들어진 장치이다.
소쇄원의 대표적인 양(陽)의 자리다.
따뜻한 햇빛이 들어오는 자리에 마당같이 흙으로 다져 놓았다.
실제로 애양단은 따뜻했다. 바로 오곡문(五曲門)으로 연결된다.
구곡(九曲) 중 정중앙에 있다고 해서 오곡(五曲)이다.
소쇄원 바깥 계곡에 사곡이 있고 안으로 들어와서 다시 사곡이
이어지는 중심 문이라 해서 이름 붙여졌다.
오곡담 밑으로 계곡물이 흘러들어온다.
소쇄원 안쪽 계곡으로 다시 사곡이 이어진다.
제월당(霽月堂)은 양을 받아들이는 전형적인 음(陰)의 공간이다.
제월(霽月)은 ‘비 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는 뜻이다.
주인이 거처하면서 학문에 몰두하는 곳이다.
바깥의 양의 세상에서 소쇄원에 진입하면서 다시 음으로 전환한다.
제월당은 바로 아래 있는 광풍각(光風閣)과도 대비된다.
광풍각은 ‘비 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이란 뜻으로
손님을 위한 사랑방 역할을 했다. 계곡 바로 위에 자리 잡고 있다.
낙향한 호남의 사림, 즉 시인묵객들이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음풍농월 하면서 자연을 즐기던 장소다.
광풍제월은 중국 북송시대 시인이었던 황정견과 주돈이에서 유래했다.
주돈이는 성리학의 기초를 닦은 유학자로 조선 성리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광풍제월은 황정견이 주돈이의 인품을 평가한 글 ‘人品甚高 胸懷灑落 如光風霽月
(인품심고 흉회쇄락 여광풍제월: 인품은 대단히 고상하며, 가슴에 품은 생각은 개운하고
깨끗했으며, 마치 비가 그치고 맑게 갠 날씨에 부는 바람과 밝은 달과 같다)’에서
나온 고사성어다.
음양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볕이 잘 드는 주인장의 서재겸 사랑채에는
제월당이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음습한 계류의 손님에게 내어준 공간에는 빛광자의
광풍각이라 명명하며 빛의 양기를 넣어 주었다.
이처럼 세세한 곳에 나무와 꽃들도 각각의 의미를 담아 식재했다.
제월당이 음의 공간인 반면 광풍각(光風閣)은 양(陽)의 공간이다.
다시 음에서 양으로 바뀐다. 바로 아래 있는 계곡은 음이다.
음에서 양, 양에서 음으로 계속 순환되는 구조다.
풍수에서는 계곡 물 소리를 오래 들으면 정신착란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실제 정신분석학자들도 물소리를 오래 들으면 좋지 않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차분한 물소리는 명상할 때 가끔 사용된다.
그 이유는 순간 집중에 도움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소쇄원에서의 주거공간인 제월당은 계곡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시인묵객들이 음풍농월하는 정자인 광풍각은 계곡 바로 위에 자리 잡은 이유도
이 때문으로 판단된다.
광풍각 아래 계곡에는 대나무로 만든 다리가 걸쳐 있다.
투죽위교(透竹危橋) 이 다리를 건너려면 몸과 마음이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계곡을 건너면 '상지(上池)'와 '하지(下池)', 두 개의 네모난 연못이 보인다.
계곡물을 나무 홈과 바위 홈으로 끌어왔다.
옛날에는 두 연못 사이에 물레방아가 있었다고 한다.
하단의 두 개의 연못에는 순채라는 식물을 심어두었다고 한다.
평소 도연명을 흠모했던 양산보는 그의 귀거래사를 늘 상 곁에 두고 살았다.
순채는 그런 귀거래사에 걸맞은 식물이다.
옛적 중국에 동진이라는 나라에 장한이라는 이가 낙양에서 벼슬을 하고 살았단다.
지리멸렬한 벼슬살이 중에 가을바람이 소슬하게 불어오니 오중이라는 자기 고향의 순채와
농어회 생각이 간절하여 수레를 돌려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벼슬을 그만둘 정도의 맛인지, 고향의 향수를 빗댄 것인지 모르지만
적어도 도연명이 밭이랑 갈며 국화주를 취하고자 하는 것 보다 앞선 시대의 일이었다.
소쇄원은 무등산에서 발원하여 창평천, 영산강 합류하는 증암천 동쪽편에 위치하고 있다.
정자는 넓은 들판이 내려다 보이는 작은 동산이나 강,개천 등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세워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소쇄원은 작은 계곡을 정원처럼 사용하고 있다.
소쇄원 앞 들판. 아주 넓은 평야는 아니지만, 경제적으로 소쇄원을 뒷받침할 정도의
충분한 농토가 있는 것 같다. 무등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어 물이 풍부하여 옛날에
농사짓기에 편해 양반들이 선호했던 지역의 조건을 잘 갖추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