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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십 대 중반 자신의 이름을 파라켈수스라고 바꾸었다. 파라켈수스란 ‘켈수스(Celsus)를 넘어선다’는 의미인데, 켈수스는 1세기 무렵에 활동한 로마의 명의였다.
의사이자 연금술사. 그러니까 마술과 과학의 경계선을 넘나들던 인물이자 의학과 화학이라는 학문의 기초를 닦은 인물 파라켈수스(Paracelsus, 1493~1541)는 스위스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의사였으나 집안은 가난했다. 사실 그의 아버지는 의대를 나오기는 했으나 마지막 학위를 받지 못했다. 공인된 의사가 아니었으니 가난할 수밖에.
그렇다면 왜 우리는 파라켈수스를 주목하는가? 수많은 과학자가 인류 문명사를 수놓고 있는데도 왜 이 인물을 지목해서 알아보고 있는가? 이는 그의 독특한 사고와 행동 때문이다. 우선 독특함은 그의 이름에서 드러난다. 사실 그의 본명은 필립푸스 오레올루스 테오프라스투스 봄바스트 폰 호헨하임이다. 좀 긴가? 그러나 그렇다면 왜 그는 히포크라테스 같은 인물을 제쳐 두고 켈수스를 뛰어넘겠다고 선언했을까? 켈수스는 1500년 전 인물임에도 파라켈수스가 활동하던 무렵 최고의 의학자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는 그가 남긴 《의학》이란 저작물이 그 무렵 막 보급되던 인쇄술에 의해 널리 읽혀졌고, 그 가운데는 상처의 소독과 방부제를 이용한 치료, 다른 피부를 이용한 성형수술 등의 놀라운 내용이 담겨 있었던 까닭에 ‘로마의 히포크라테스’라는 명성을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이런 오만무도한 선언을 하게 된 것은 또 왜일까? 열네 살 무렵 그는 아버지가 화학을 가르치던 학교에서 광물과 금속에 대한 수업을 마치고 유럽 전역의 대학들을 방랑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많은 젊은이들이 더 나은 스승, 더 나은 배움을 위해 이런 방랑길에 나섰는데, 그는 좀 심했다. 그 또한 연금술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지만 독일의 수많은 대학을 전전한 끝에 ‘대학은 바보를 만들어 내는 곳’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지식은 경험에서 비롯된다’는 신념 아래 수많은 사람들을 찾아 다니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는 길거리의 부랑자로부터 집시, 도둑, 마녀, 주술사 등 사회에서 버림받은 자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제도권 교육을 비판하고 대신 이런 자들을 찾아다니던 그가 환영받을 리는 없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그는 빈 대학교에서 의학사 학위를 받고, 후에 페라라 대학교에서 의사 자격을 취득했다(고 주장했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바꾼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다. 배울 만큼 배웠다는 의미이자 기존의 의학계를 넘어섰다는 선언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의사로서 활동했다. 그리고 그럴수록 그의 명성은 높아만 갔다. 그는 그 무렵 유럽에서 활용되던 전통적 치료법 외에 저잣거리에서 습득한 수많은 의술을 실천에 옮겼고, 그 결과는 놀라웠다. 서른세 살, 그러니까 의사 자격을 취득했다고 주장한 해로부터 10년 후, 그는 바젤 대학교의 의학 강사이자 시의(市醫)에 올랐다. 재야의 의사가 제도권마저 장악한 것이다.
이때부터 수많은 학생과 환자들이 그를 좇아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그는 상처를 아물게 하기 위해서는 건조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이전의 치료법을 거부했고, 온갖 전통 약제들을 거부했다. 체액설 등 전통의학 대신 외부에서 병의 원인이 몸 안으로 침투한다는 그의 주장은 학생들에게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러한 근거 하에 수은화합물을 이용해 그 무렵 불치병으로 알려져 있던 매독 치료법을 주장하기도 했으며(1900년대 들어 그의 이론대로 매독은 비소화합물인 아르스페나민(상표명 살바르산)에 의한 치료법이 개발되었다), 그를 추종하는 자들은 도시에 페스트가 창궐할 때도 도망치는 의사들과는 달리 파라켈수스가 다양한 광물질을 합성하여 만든 화학적 약품들을 들고 환자들을 찾아다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납의 체내 축적이 결과적으로 종양을 가져온다는 이론을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혁명가는 어떤 분야에서건 환영받지 못하는 법. 그는 겨우 1년여의 제도권 생활 끝에 의사와 법관들의 공격을 받아 바젤 시에서 도망쳐야 했고, 이후 자신의 의학적 성과를 집필하는 데 몰두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책자가 《대외과서》다. 이 책은 파라켈수스의 옛 명성을 단번에 되찾아 주었고, 그는 다시 황제의 부름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명성이 돌아오자 그의 적들 또한 돌아왔다. 그는 다시 수많은 자들로부터 공격을 받았고, 1541년 대주교와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에서 마흔여덟의 한창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가 그저 죽었다고 믿는 사람은 썩 많지 않은데, 아마도 독살되었을 것이다.
사실 파라켈수스는 전통적인 연금술이나 점성술, 신비주의 등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질병에 대한 전혀 새로운 개념을 확립했다. 외부의 독성 물질로 인해 질병이 발생한다고 주장하고, 이러한 이론 하에 새로운 치료법 즉 무독성의 광물을 이용한 화학 요법을 창시하기도 했다. 따라서 그의 활동으로 인해 의학은 화학과 자매결연을 맺게 되었고, 정신과 치료를 비롯한 새로운 의학이 널리 발전하기 시작했으니 그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근대 의학의 개척자라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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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사 파라켈수스는 매우 유명한 인물이다. 영적인 존재를 나타내는 '염(소금)'에 관한 발상은 그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다. 만일 파라켈수스가 없었다면 연금술은 정령이나 신의 힘을 소환하는 마술이 아니라 사기꾼의 도구로서밖에 그 역할을 다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연금술을 최고 수준으로 올려놓은 것은 확실하다. 파라켈수스는 비술을 혼자 영유하지 않고, 그 기적의 힘으로 병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치료했다.
의사는 환자로부터 병에 관한 지식을 얻어 병에 대처했다. 그러나 파라켈수스는 '자연으로부터 배우지 않으면 병을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인간과는 관계없는 듯이 보이는 자연 현상에 눈을 돌려, 당시로서는 최고의 자연 과학이었던 연금술을 공부했다.
"그들은 무엇이 동(銅)을 생성하고, 무엇이 황산염을 합성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역시 무엇이 나병을 초래하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철을 녹슬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궤양을 치료하겠는가. 외부의 사상이 인간에게 장애를 일으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명시해야 한다. 인간이 스스로의 장애를 명시할 수는 없다."
연금술의 개념으로 생각하면 인간도 4대 정령(땅, 물, 불, 바람)의 원소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의사는 자연에 주목해야 하며 연금술사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다.
파라켈수스의 본명은 필리푸스 아우레올루스 테오플라스투스 봄바스투 폰 호엔하임이며, 1493년에 스위스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기사의 혈통을 강하게 이어받은 의사였고 어머니는 교회 관계자였다고 전해진다. 아버지의 영향이었는지 파라켈수스는 박사 학위를 따낸 후 유럽 각지를 방랑하며 의사로서의 기술을 높이고, 마침내는 바젤에서 대학 교수가 되었다. 파라켈수스는 서구를 여행하는 동안 의학과 함께 연금술을 공부해 그 기술을 마스터했던 것 같다.
파라켈수스는 연금술에 깊이 빠지면서 의사로서의 능력도 크게 향상되었다.1)그리고 자신의 주장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알고부터는 교회와 이에 지배된 사회를 통렬히 비판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마침 교회의 권위가 약해졌을 무렵이었다.
종전의 기법을 계속 사용한다고 해서 비판받던 의사들은 파라켈수스가 연금술(=마술)에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을 이유로 역습에 나섰다. 그러나 파라켈수스는 이런 비난에 굴한 적이 없었다. 그렇기는커녕 자신의 의술과 연금술에 받아들일 필요가 있으면 종교상 금기에 속하는 일이라 해도 전혀 개의치 않고 받아들였다. 파라켈수스에게 연금술은 신의 커다란 조화로서, 그 자신의 질서 속에 짜넣어져 있었다. 그렇지만 그가 사회의 이단자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때로는 압력에 굴복해 정착지에서 쫓겨난 일도 있었다. 더구나 파라켈수스는 대학 교수가 된 후에도 수상쩍은 약국에 빈번히 출입한 일로 추방 처분을 받은 적도 있었다.
교회를 비판하기는 했지만 파라켈수스는 평생 동안 가톨릭 교회에 충절을 지켰으며, 프로테스탄트에 몸을 던지는 일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신앙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주에 속하고, 주는 내게 속한다. 나는 내 직분 밖에서는 주에게 속하고, 주는 주의 직분 밖에서 내게 속한다."
그의 활력은 갈등에서 왔으며, 대립의 긴장을 게을리 하면 에너지를 가질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정한 연금술사가 되기 위해선 신앙심을 빠뜨릴 수 없었다. 제5원소=신의 기적을 소환하지 않고서는 '현자의 돌'을 창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파라켈수스에게 연금술은 금을 만들어내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완전한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이 목적이었으며, 그 때문에 연금술사가 되었던 것이다. 이 같은 파라켈수스의 꿈은 훗날 연금술사들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었다.
그는 연금술로 얻은 지식과 기술로 인조 인간 호문쿨루스를 만들고, 또 의술에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제 파라켈수스의 술자와 의사로서의 두 모습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파라켈수스는 마이크로코스모스의 연금술이라는 개념을 갖고 있었다. 인간의 몸은 우주와 자연에 대응해 있고, 자기 치유능력도 갖추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는 위가 그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아르카나를 조합했다. 아르카나란 액상비약(液狀秘藥) 비슷한 것을 말한다. 이것을 적절히 조합함으로써 몸 속에 있는 정령의 힘을 조정하고 병을 치료했다.
그중에서도 기묘한 약으로 알려져 있는 것이 발삼이다. 발삼은 '체내 액체 상태의 소금'이며, 무미아를 주성분으로 한다. 무미아란 중세 유럽에서 거래되었던 의약품이다. 또 이것의 정체는 이집트에서 발굴된 미라의 파편이라고 알려져 있다. 발삼은 소금 혼합물의 도움으로 사체를 부패하지 않도록 만들 수 있었다.
파라켈수스는 특히 중병의 환자를 현자의 돌을 사용해 치료했다. 즉, 그는 현자의 돌을 창조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는 그것을 자신의 검 자루에 넣고 다녔다고 한다.
호문쿨루스의 소환
파라켈수스뿐 아니라 고명한 연금술사들은 모두 완전한 생명의 창조를 목표로 삼았으며, 실제로 성공한 술자도 있었다. 호문쿨루스는 라틴어로, 직역하면 '작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파라켈수스의 저서 중에는 호문쿨루스 제조법이 기록되어 있다.
"······가장 아름다운 크리스털 글라스로 만든 크고 청결한 용기를 하나 준비하라. 그리고 그 안에 달이 초승달일 때 모은 가장 순결한 5월의 이슬을 한 되(약 1.8리터)가량 부어라. 그 다음엔 건강한 젊은이에게서 채취한 혈액을 두 되 분량 더 넣어라. 그런 다음 이 혼합물을 한 달 동안 방치하라. 그러면 맑은 물이 위로, 불그스름한 흙이 밑으로 분리될 것이다. 물을 다른 그릇에 옮겨 붓고, 거기에다 동물의 팅크를 1드램2)더하라. 최초의 용기에 남은 불그스름한 물질은 끊임없이 약한 열을 가하면서 또 한 달간을 방치하라. 그 물질에 점점 일종의 방광을 만들고, 미세한 혈관과 신경이 그 표면을 망처럼 덮도록 하라. 4주마다 제2의 그릇에서 액체를 가져다가 이것에 흩뿌려라. 4개월이 지나면 펄떡펄떡하는 소리와 생명의 움직임을 느끼게 될 것이다. 용기 속을 들여다보면 그야말로 아름다운 한 쌍의 소년소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한 쌍의 소년소녀가 바로 호문쿨루스다. 키는 6인치고 식욕은 적으며, 동물의 팅크를 한 달에 한 번 2그레임3)만 주면 6년 동안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그들은 한 살이 되면 자연계의 많은 비밀을 말해준다.
가짜 연금술사
연금술사 중에는 우아한 생활을 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이렇게 외치곤 했다.
"나는 금을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연구비가 필요하다."
유럽 각지의 귀족과 유복한 상인 중에는 이런 이야기에 현혹되어 연금술사의 후원자가 되는 사람들이 있었다. 교회 밖에서 마술을 실천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지만, 연구실을 지하에 만들어 모르게 하면 가능했다. 그러면서 연금술사는 연구 기간 동안 충분한 연구비를 얻어 쾌적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후원자가 재촉하면 가짜 연금술사는 대부분 "자금이 좀 더 있으면······" 하고 대답했다. 심한 경우엔 선조 때부터 물려받은 토지를 전부 팔고 무일푼이 되어버린 후원자도 있었다.
연금술사들은 말을 제멋대로 만들어냈다. 후세에 남겨진 전문서는 많지만 모두 불명확한 표현들이어서, 정작 그들이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파악하기는 힘들다. 술자들은 교회의 추궁을 피하거나 비밀을 숨기기 위해 이 같은 조치를 취했고, 결국 정확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가짜 연금술사가 얼마나 판쳤는지를 드러내는 증거기도 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파라켈수스 [Paracelsus] - 연금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진정한 인물 (소환사, 2000.6.5, 도서출판 들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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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사에서 파라켈수스(Paracelsus, 1493~1541)는 보통 중세 우상의 파괴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고대에서 중세로 이어진 그리스 의학의 전통을 전면 부정하고 새로운 의학의 전통을 세운 선각자다. 그는 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체액설에 근거한 정통의학의 상징인 이븐 시나의 『캐논』과 갈레노스의 글을 불태웠으며, 학문의 상징인 라틴어를 버리고 자신의 모국어인 독일어로 강의를 하고 책도 썼다.
당시 천대하던 이발사들의 영역인 외과술과 민간요법을 과감히 의학에 도입함으로써 손에 잡히지 않는 의학 이론을 눈에 보이는 경험과 접목했으며, 약물의 재료를 동·식물에서 광물질로 확대했다. 그의 의학 교과서는 히포크라테스나 갈레노스가 쓴 수많은 책들에 나오는 추상 이론이 아닌 자연 그 자체였다. 그는 수십 년에 걸친 방랑생활에서 얻은 경험을 천문학(점성술)과 연금술, 그리고 신학으로 해석해 독특한 자연철학을 세웠다.
1526년 유명한 출판업자 요하네스 프로벤의 병을 고친 공로로 스위스 바젤 시의 의사 겸 바젤대학의 의학교수로 임명된 그는, 대학교수의 권위를 상징하는 가운 대신 당시 연금술사들이 즐겨 입던 가죽 앞치마를 입고 강의를 했다. 이론만 요란하고 효과와 내용이 없는 고대의학과 위선에 찬 의사들을 향한 파라켈수스의 조롱과 독설의 표현이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목덜미에 난 한 올의 털이 모든 의학자들보다 더 많은 지식을 지녔으며, 자신의 신발에 채운 단추 한 개가 갈레노스나 이븐 시나보다 더 지혜롭다고 말했다. 결국 그는 대학에서 쫓겨났고 평생에 걸쳐 방랑을 한다.
이런 행동으로 그에게 '의학계의 루터' '의학의 이단자' '의학의 프로테스탄트(medical protestant)'라는 별명이 붙었다. 실제로 그의 행동은 종교개혁가 루터와 비슷한 면이 많다. 종교의 상징인 로마 교황청의 문서를 불쏘시개로 써 버린 루터처럼 파라켈수스는 의학의 상징인 갈레노스의 교과서를 불태웠다. 또한 면죄부를 팔아 배를 불리던 성직자에 대항해 오직 성서의 복음을 호소한 루터처럼 그는 오직 경험에 따라 질병을 치료했다. 루터가 교회의 면죄부 판매 등을 비판한 95개항을 비텐베르크의 만인성자교회의 문에 붙이고 주교들에게 이를 알린 10년 뒤인 1527년에 파라켈수스는 기존의 의학을 통렬히 비판한 팜플렛 형태의 「통보 Intimatio」를 의학교수들에게 보냈다. 이 문서는 고대 자연의학의 문을 연 히포크라테스의 선서처럼 근대 경험의학의 문을 연 선언으로 보아도 손색이 없다.
우리는 의학이 심한 오류에서 벗어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옛 사람들의 규칙에 휘둘리지 말고, 사물의 본성에 대해 오래 고민하고 여러 실습을 통해 경험을 얻어야 합니다. (중략) 의사가 지녀야 하는 것은 학위, 능변, 언어, 많은 지식이 아니라 오직, 다른 모든 것들을 능가하는 자연의 비밀에 대한 깊은 지식뿐입니다. (중략) 권위에 의존하는 대신 경험과 각자의 의견을 펼칠 때입니다.1)
이러한 주장에 걸맞게 그는 질병을 체액의 균형이라는 모호한 이론에서 해방시켰다. 그의 질병관은 근대 사유체계의 바탕이라고 할 수 있는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 그는 대기 가운데 광물이나 별에서 나오는 독성물질이 자신의 규칙을 우리 몸에 강요해 질병이 생긴다고 설명했다. 질병의 원인을 별과 광물질에서 구한 점에서 그는 점성술사인 동시에 연금술사였다. 이후, 점성술은 과학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해 버려지는 신세로 전락하지만 광물질을 포함한 다양한 자연물에서 약물의 재료를 구한 파라켈수스는 근대 화학요법의 선구자로 남는다.
이처럼 파라켈수스가 의학에서 과감한 주장을 한 배경에는 절대 권위에 도전한 종교개혁의 거대한 흐름이 있었다. 이밖에도 르네상스와 휴머니즘,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발견한 대륙과 인쇄술의 발명이 이단아를 탄생시킨 든든한 시대 배경이 되었다. 르네상스와 휴머니즘은 권위에 대한 대결을 정당화했고, 새 대륙의 발견에 따른 경제 성장은 이러한 활동에 물질의 토대를 제공했으며, 인쇄술의 발명은 새로운 사상을 널리 퍼뜨릴 수 있도록 해 주었다.
파라켈수스는 종교개혁과 르네상스 같은 사회·문화·종교의 변화 속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쳐나간 시대의 이단자였지만, 시대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이는, 그렇게도 기존의 권위를 미워하던 그가 결코 가톨릭을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의학에서는 프로테스탄트였지만 종교는 여전히 가톨릭이었던 것이다. 그는 평생 유럽 전체를 떠돌아다닌 방랑자였을 뿐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끊임없이 오간 시대의 방랑자이기도 했다.
그는 부랑인, 백정, 농부, 이발사처럼 천하고 무식한 자들에게 배우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알아낸 사실과 현상 뒤에는 반드시 어떤 영의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그가 주장하는 '경험과 고유한 숙고'의 방법이었는데, 경험을 중시한 점에서는 근대에 들어맞지만 고유한 숙고의 방식은 무척 신비로운 것이었다. 그는 요정과 신령들에 대한 농부들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치면서도, 한편으로는 모든 물질을 유황, 수은, 소금으로 분류하는 화학의 자연철학을 제시한다. 여기에 나오는 유황, 수은, 소금 등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물질이 아닌 신비로운 힘을 지닌 '원리'이다. 이처럼, 파라켈수스는 신비주의와 합리주의를 묘하게 결합한 야누스의 얼굴을 지닌 의학자이며 철학자다.
그가 모든 질병에는 고유한 외부의 원인이 있다고 본 점을 생각하면 근대의학의 선구자지만, 사람의 몸을 열어 그 생김새를 관찰하는 해부학에 적대감을 드러낸 점을 보면 여전히 중세의 신비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연금술사로서 근대 화학의 바탕을 쌓은 점은 훌륭하나, 원소를 물질이 아닌 영의 원리로 파악하거나 순수한 경험이 아닌 사유에 토대를 둔 이론체계를 세웠다는 점은 근대 과학과 거리가 멀다.
그러나 혹시 근대 합리성이라는 사상의 덫에 갇힌 우리들이 지닌 편견 때문에 이런 평가를 내리는 것은 아닐까? 근대 과학은 무조건 옳으며 이전의 논의들은 여기에 이르는 과정일 뿐이라는 생각은 과연 정당한가? 모든 것을 신과 영의 힘으로 파악하는 중세의 직관과 몸과 마음, 물질과 정신의 세계를 분리해 전혀 다른 범주에 두는 근대의 직관은 옳고 그름의 문제인가, 아니면 단순한 '다름'의 문제인가?
우리는 아직 이 물음에 대답할 준비가 안 되어 있다. 다만 파라켈수스에 이르러 중세의 상식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관찰을 중시하는 근대 사유양식이 싹텄지만 중세 사유의 찌꺼기를 말끔히 털어내지는 못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점성술과 연금술, 그리고 자연현상에 대한 신학의 해석이 바로 중세의 찌꺼기들이다. 그러나 이것들을 순전히 털어내야 할 중세의 미신으로만 볼 수도 없다. 많은 과학사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점성술과 연금술은 근대 천문학과 화학에 연결되며, 자연현상을 신학으로 해석하는 것은 근대의 합리론에 대응하는 나름의 형이상학이지 근대의 체계에 비해 열등하거나 잘못된 체계는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튼 파라켈수스가 중세와 근대의 사유형태를 혼합한 독특한 의학 사상가였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생각이 어떻게 근대 의학사상에 흘러들어 지금 상식으로 여겨지는 몸의 개념을 만들어 냈는가에 대해서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근대 의학사상의 흐름은 몸에서 초월의 요소가 사라지면서 단순한 기계로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중세 유럽의 의학사상이 목적을 중심으로 세계의 질서를 끼워 맞추는 '목적의 형이상학'이었다면, 파라켈수스의 의학사상은 현실과 경험이 중심이지만 여전히 현실과 거리가 먼 사유를 중시하는 '신비로운 경험론'이라고 할 수 있다. 데카르트에 이르면 신비요소와 경험요소가 함께 사라진 '기계 합리론'이 주류를 이루게 되며 프로이트에 이르면 몸에서 떨어져 나온 마음마저도 기계 합리론에 근거한 추론의 대상이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파라켈수스, 두 시대 사이의 방랑자 (몸의 역사-의학은 몸을 어떻게 바라보았나, 2007.1.25, ㈜살림출판사)
첫댓글 개인적으로 위의 호문쿨루스 제조법이라는 것은 수련 방편에 대한 시적인 표현으로 여겨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