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보고서4
콩나물 국밥은 있고 모주는 없다.
물은 생명이다. 물 없이는 단 몇 시간을 버티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물을 찻아 삶터를 정했다. 원정리는 먼물이다. 마을에서 우물이 멀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바닷가엔 물이 멀 수밖에 없다. 택리지에 보면 사람이 제일 살기 좋은 곳은 바닷가라 하고 그 다음이 강가라 하고, 냇가는 박하여 살기가 어렵다고 했다. 그래선가, 바닷가에는 패총으로 이름지어진 조개무덤들이 있다. 필시 사람들이 가장 손쉽게 채취할 수 있던 것이 조개류 였고 그 조개를 양식으로 삶았을 것이다. 여기서 자손을 퍼트리고 부족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원정리엔 구석기와 신석기 청동기가 혼재한 유물이 확인된 ‘멍거니산’이 있던 곳이다. 지금은 경기도 박물관에 그 흔적이 보관돼있을 뿐 공장과 물류창고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멍거니산’을 보호해야한다는 시민들의 염원은 자본의 논리에 묻히고 말았다.
원정리엔 수도사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몇 안되는 사찰음식의 요람이 된지 오래인 이 절에서 연자죽 맛을 본 것은 행운이었다. 보살님의 보살핌으로 잔칫상 물린 자리에서 숭늉이나 한 그릇 얻어 마시려 했는데 보살님이 죽이라도 한 숟가락 뜨고 가시라는 배려에 처음으로 연자죽을 먹어본 터였다. 10년 가까이 된 일이다. 그러기 전에 이곳은 의상과 원효의 전설을 말해주는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수도사를 뒤로하고 해군기지 철책옆으로 난 산길을 걷는다. 너무나도 유명한 해골물을 마신 원효가 중국유학을 포기하고 이 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을까? 해골에 든 물을 어젯밤에는 달게 마시고 오늘아침 해골에 든 물이란 것을 알았을 때 욕지기가 치밀어 오른 것은 무엇대문인가? 어제 밤의 나와 지금의 나는 무엇이 다른가? 불가에서는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라는 도를 깨우치는 방법이 있다. 돈오돈수는 단박에 깨우침에 이른다는 것인데 원효는 돈오돈수로 어제 밤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름이 오로지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오랫동안의 수련도 중요하지만 당장 눈 앞에 중생들과 동고동락 하는 것이 부처의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경주로 향하는 원효의 걸음은 빨라졌을 것이다.
내가 걷는 이 길은 나보다 먼저 누군가가 걸었을 길이다. 원효처럼 구도의 길이기도 했고 누군가는 희망을 찻아 나선 길이기도 했을 터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밤봇짐 싸들고 도망치듯 걸어간 길이기도 했을 터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걷고 걸어서 대로가 된 길도 있을 터이고 아직도 오솔길이 유지되는 길도 있을 터이고, 이젠 사람의 발길이 뜸해 길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길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길에는 역사가 있다. 늘 사람이 왕래해서 이웃과 이웃을 연결하고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는 그래서 지금까지 이어지는 길은 분명 역사의 길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수도사로 가는 길은 잊혀진 길이다. 사람들의 왕래가 끊어지고 밤짐승들이 나들이 하는 길이 돼 버렸다. 과히 설화의 길인 것이다. 역사의 길은 역사의 길 대로 설화의 길은 설화의 길 대로 사람들의 삶이 스며들어 이야기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고 있다.
원정리는 1리에서 8리까지로 엄청나게 큰 동네이다. 남양호변의 늘어진 평야에 발목을 담그고 살아온 사람들이 모여 살고, 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던 사람들도 살았다. 1991년경부터 포승국가공단과 해군기지, 평택항이 들어서면서 상황은 반전되었다. 지역경제의 중심축으로 이 지역이 등장한 가운데 사람들의 삶의 모습도 많이 달라졌다. 고기를 잡던 사람들이 포크레인이나 중장비를 운전하고, 땅을 갈아 붙이던 사람들이 부동산중개업자가 되어 살아간다. 누구는 부동산 임대업자가 되고 누구는 조그마한 밥집을 운영하며 사라아간다. 물론 아직도 주변의 농토를 굳건히 지키면서 살아가는 농투산이들이 많이 남아있다. 하지만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또, 개발과정에서 이 땅을 떠나야 했던 많은 사람들의 삶 또한 그리 녹녹치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토지보상금은 촌사람들을 경악하게 했다. 많고 적고 간에 평생 손에 쥐어보지 못할 금액을 손에 쥐고 그것을 재생산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기술이 부족해 패가망신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원정리 초등학교를 돌아 큰길을 건너면 바로 포승국가공단으로 들어선다. 큰길은 위험한 길이다. 사람들이 자칫 다칠 수 있는 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큰길을 좋아한다. 큰길은 욕망의 길이다. 38번국도가 내기리에서 한쪽은 만호리로 가고 한쪽은 원정리에 와서 남양호 방조제를 건넌다. 국도 제38번은 바다 건너 서산시 대산읍 독곶리 독곶1 교차로에서 강원도 동해시 북평동 단봉삼거리를 연결하는 도로이다. 그러나 실제 38번 국도는 내기리에서 끝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1980년대에 38호선 국도는 비포장 좁은 길이었다. 그러던 것이 포승국가공단과 함께 폭을 넓히고 포장을 했다. 결국은 인간의 욕망과 함께 길은 넓어지고 빠르게 갈 수 있는 길로 변했다. 38국도가 넓어졌지만 이는 인간의 욕망을 해소하지 못했다. 결국 40번 고속도로가 이를 대처했다. 어디 그뿐인가. 동서남북으로 고속도로가 인간의 욕망을 대변해준다. 결국 고속전철도 평택이라는 욕망의 도시에 또아리를 튼다고 하지 않는가.
포승국가공단은 사실상 걸어서가는 섶길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대로를 함부로 달리는 자동차들이 사람의 정신을 혼란케한다. 자본이 인간 정신을 지배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아닌가는 논외로 치자. 그렇다하더라도 공단도 사람이 사는 곳이고 또 공단에 일터를 꾸리고 있는 사람들의 휴식과 재생산을 위해서라도 새로운 삶터를 만들어 낼 필요가 있다. 이미 평택에서조차 문제가 되고 있는 오래된 공단들에서 나오는 매연이나 환경쓰레기들은 사람들의 삶의 질을 현저히 떨어뜨리는 것이 사실이다. 생산을 위한 수단은 직접생산수단과 간접생산수단이 있다. 간접생산수단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은 생산의 질을 높이는 것과 맥을 같이 하는 일이다. 지역에서는 조례로 이를 제어하고 관리 할 수 있어야 하고 포승국가 공단은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공단과 항만이 어우러져 사람들에게, 혹은 보여주기도 하고, 혹은 가르치기도 하는 역사와 문화의 맥을 연결하는 모습이 있다면 자본과 사회의 순연적 관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지금까지 우리는 자본의 확대를 위하여 우리의 삶을 너무 싸구려로 만들어 왔다. 우리의 삶이 궁핍했을지언정 싸구려는 아니었다. 또 우리가 빌려 쓴다고 생각하는 자연을 너무 혹사했다. 어린 날 물장구치며 놀던 냇갈이 공장의 폐수로 오염된 것 만 해도 자본 확장은 우리 삶을 갉아 먹고 자란 것이란 말이다.
공단을 피해 도곡리 옛길과 만호리 옛길을 연결해 보려 했으나 허사였다. 큰길에 막히고 논뚝에 막혀 더 이상 나갈 수 없다. 포승국가공단의 끝머리는 평택의 최대 포구였던 만호리다. 옛 이름은‘대진(大津)’이라고 했다. 지금도 만호리 뱃터머리엔 소나무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하지만 이곳도 개발의 바람은 곧 불어 닥칠 것으로 보인다. 예전의 시장터와 음식점들의 간판들이 퇴색된 채 걸려있는 을씨년스러운 모습이다. 삼국시대부터 평택 서부지역의 물산이 모여드는 안중장과 충청도 서부지역을 연결하는 나루며 항구였다. 이 나루를 통하여 새우젓충청도의 농사용 소, 아산만의 꽃게나 강다리, 황석어젓과 밴댕이젓이 오갔다. 때로는 나루터에서도 거래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나루 주변에는 여각도 들어섰고, 해방 전후에는 기생을 둔 술집도 여럿 있었다고 한다.
서해대교 위를 지니다보면 만호리 앞바다를 메운 평택항에 수출선적용자동차가 늘어선 것을 볼 수 있다. 옛 이름이 大津 인지 지금 이름이 大津인지 헷갈린다. 땅이름에도 팔자가 있다더니 이를 두고 이른 것이 아닌가.
그래도 나그네는 옛날의 영화가 그리워지는 법이다. 항구의 선술집에서 막걸리 한잔 따라놓고 늙수구레한 주모와 수작을 나누는 그 모습이 그리워지는 법이다. 다행히 지금도 근처의 일터에서 밥을 대먹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콩나물 국밥집이 있어 허기진 길손의 뱃속을 채우기엔 제격이다. 모주라도 한 잔 들이키면 좋으련만 콩나물 국밥은 있고 모주는 없다.
길은 사람들의 삶을 이어내는 것이다. 그 길들은 한사람이 걸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 한사람이 먼저 걸었고 누군가가 그 길을 따라 걸으며 생겨나는 것이다. 앞서간 사람의 발자국을 따라 걷는 것은 공간의 이동뿐 아니라 시간의 이동 속에도 이어지는 것이다. 그길 속에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있다. 오래전 맨발로 걸었던 사람들과 그 뒤를 따라 짚신을 신고 걸었던 사람들, 그리고 지금 편안한 등산화를 싣고 걷는 나에게로 연결되는 시간과 공간의 연속에서 내 삶을 반추해본다.
평택의 둘레길을 만드는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항상 내가 걷는 이 긿을 누군가 앞서서 걸었을 것을 생각한다. 맨 처음 걸었던 사람은 얼마나 외로운 길을 걸었을까. 누군가는 더 빠른 길을 선택 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좀 더 편한 길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 길이 서로 연결 되고, 연결된 길들을 통해 삶이 서로 연결되어 우리는 ‘우리’가 되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만들고 길에는 역사가 쌓여간다. 또 역사는 언젠가 묻혀진 발걸음으로 설화를 만들어 낼 것이다. 그 길을 오늘도 우리는 걸어간다. 아! 나는 오늘 이 길을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인가.
서산대사의 시구절이 생각난다.
踏 雪 野 中 去 / 不 須 湖 亂 行 / 今 日 俄 行 跡 / 燧 作 後 人 程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행여 발걸음 하나라도 어지럽게 가지 말라
오늘 내가 걸어가는 이 발자취는
반드시 후인들의 길잡이가 되리니'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