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쓰는 나의 마음은 참담하다. 한 편의 논문이 내 삶과 인생과 학문에 대한 의욕을 그렇게 순식간에 변화시킬 수 있는지는 정말 몰랐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이제 그 일의 전말을 비교적 간략하고도 냉정하게 기술할 생각이다. 감정적으로 고조되어 논리적 일관성을 상실하거나 ‘팩트’를 훼손시킬 위험성을 사전에 제거시켜보자는 것이 그 의도임은 물론이다.
“내 인생과 학문적 의욕을 그렇게 순식간에 변화”시켰던 그 논문은 무엇일까? <타는 혀>(새움, 2000)에 수록된 '김윤식 비평에 나타난 ‘현해탄 콤플렉스’ 비판'이 그것이다. 이 논문은 내가 석사과정 2학기에 재학중이던 1997년 10월에, 서울시립대학교 대학원 중간논문 발표회장에서 발표하였다.
지식인에게 표절은 똘레랑스의 대상이 아니다
이 논문이 쓰여진 배경은 아주 간단하다. 비평가가 되길 꿈꾸던 학부 시절부터 나에게는 한 가지 소박한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김윤식 교수가 출간한 저작 전부를 읽어보겠다는 것이었다. 틈만 나면 나는 김윤식 교수의 저작을 읽었다. 사실 당시의 나에게는 소설보다도 그의 평론을 읽는 것이 더욱 즐거웠다. 어쩌면 당시의 나로서는 그의 평론집이나 연구서, 에세이집들을 읽어나가면서, 후일 나 자신이 기획하고 설계해나갈 비평가 혹은 학자로서의 꿈을 간접경험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독서목록 중에, 문제가 된 <한국 근대소설사 연구>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나는 이 책에서 김 교수가 제기하고 있는 논의들이 매우 흥미롭게 느껴졌다. ‘풍경’ ‘고백체’ ‘언문일치’ ‘내면’ 등의 개념을 중심으로, 한국의 근대문학을 종횡무진 분석하는 그의 태도가 낯설고도 매혹적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물론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이 번역되기 전까지는, 그 낯섦과 매혹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역시 김윤식 교수는 매우 상상력이 풍부하고 노력하는 학자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흘렀다. 대학원 석사과정에 진학하여 나름의 학문에 매진하고 있던 어느 날, 나는 영풍문고에서 우연히 당시 막 번역되었던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이라는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목차를 살펴보던 나는 그 즉시 매우 놀라운 느낌에 빠져들었다. 그것은 이 책의 목차에 나와 있는 용어들이 김윤식 교수의 위의 책에서 내가 매혹과 낯섦 속에서 감탄한 용어들과 정확히 일치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나는 그 즉시 책을 구입해 이 두 권의 책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검토의 결과는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김윤식 교수가 <한국 근대소설사 연구>에서 사용하고 있는 텍스트 분석의 방식이나 논리전개가 고진의 그것과 너무나 흡사했던 것이다. 특히 몇몇 부분은 고진의 논의를 완전히 베낀 것으로 드러났다. 논문에서는 그 일부만을 제시했지만, 정밀하게 대조해보면 매우 많은 부분에서 그의 표절현상이 발견된다. 일부 사람들은 겨우 문장 일곱 군데를 베낀 것을 두고 표절이라 하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하는 식의 동정론을 펴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문제는 내가 논문에서 적시한 것보다 더욱 광범위하게 표절의 양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며, 혹여 타인의 저작으로부터 극히 일부만을 표절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변명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표절은 일종의 지적 사기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김윤식 교수의 연구업적 전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가 국문학 연구에 쏟은 혼신의 열정과 그 업적들을 마음 깊이 존중한다. 그러나 그런 그가 어떤 저작의 표절을 당연시했다면, 그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지식인에게 표절은 똘레랑스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지적 사기일 뿐이다. 때문에 이로 인한 책임은 철저하게 김윤식 교수 자신이 짊어져야 한다.
논문 발표회장에서 벌어진 교수들의 난상토론
이제 이 논문을 발표하던 당시의 발표회장으로 시선을 옮겨보도록 하자. 나는 이 논문을 발표한 직후 벌어진 교수들의 난상토론을 매우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견해는 대략 세 가지로 갈렸다. 어학을 전공하는 한 젊은 교수는 이 논문을 읽은 직후 매우 흥분한 어조로, 국문학계의 원로교수가 이러한 문제를 범했다면 철저하게 학문적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표명하였다. 물론 이러한 견해는 이른바 소수의견으로 그쳤다. 다음의 경우는 김윤식 교수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분이었다. 그 교수는 당시 막 우리 대학에 부임했던 젊은 교수였는데, 나의 발표논문을 읽고는 매우 당황해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 교수는 김윤식 교수를 마치 자신의 부친처럼 존경한다는 뜻을 “우리 선생님“이라는 표현을 통해 거침없이 발성하곤 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의 옹호론은 매우 단순하고 간략한 것이었다. 김윤식 교수가 너무 많은 책을 읽고 썼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인용한 것이라는 견해가 그것이다. 마지막 견해는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비록 김윤식 교수가 표절을 한 것이 사실일지라도, 그것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런 견해를 지니셨던 한 교수는 논문 발표회가 끝난 후 나를 개인적으로 불러 조심스럽게 조언했다. “이런 글은 나중에 교수가 된 다음에나 발표하는 것이 낳을 것 같네.”
그리고 시간이 흘러갔다. 나는 석사 4학기가 되었고 '김현 문학비평 연구'라는 석사논문을 쓰는 데 집중하였다. 문제는 여기에도 있었다. 나는 이 논문의 한 장에서 김현의 비평을 비판적으로 독해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는데, 그게 그만 몇몇 심사위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는 것이다. 겨우 석사논문을 쓰면서 당대 제 일급의 비평가를 비판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특히 김윤식 교수를 지나치게 흠모하던 젊은 교수는 그것을 나의 성격과 관련지어 이해하기도 해 난감했다. 내 성격 자체가 직선적이고 과격하기 때문에 그런 연구나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심사대상 논문은 읽지도 않고, 목차나 읽으면서 이런저런 심사내용을 이야기하는 지적 불성실성이었다. 비판적 연구를 성격론 차원으로 환원시키는 지적 불철저함에 나는 무척 당황했다.
결국 나는 내 견해를 끝까지 관철시켰다. 논문 최종 제출시한을 넘긴 끝에 수정하지 않고 논문을 제출해버린 것이다. 이 사건은 그 교수에게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긴 듯했다. 일 년 후 역시 석사논문을 제출했던 대학원 후배에게 그 교수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이명원이가 박사과정에 왜 떨어진 줄 알아. 선생 말에 복종하지 않고 제 고집만 세웠기 때문이다. 너도 그렇게 될래?” 이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준 후배는 몹시 흥분하고 있었다. 그것은 쉽게 말해 제도적 폭력이었기 때문이다.
석사논문을 쓰면서 박사과정 시험을 보았지만, 나는 시험에서 탈락했다. 나는 그때 무척이나 많은 생각에 잠겼었다. 혹 내가 교수들에게 찍힌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이른바 ‘괘씸죄’가 적용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그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4명의 응시자 중 오직 나만이 탈락된 것은 기이한 일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일은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나에겐 중요한 일이 아니다.
석사논문을 제출하고 나서 나는 '김윤식 비평에 나타난 ‘현해탄 콤플렉스’ 비판'을 과내 학술지인 <전농어문연구> 제10집에 게재했다. 이 학술지의 게재 자격이 석사학위자 이상인지라 당시 학과장이던 모 교수에게 조교가 게재여부를 상의한 끝에 실리게 된 것이다. 나는 논문이 나온 직후 별쇄본을 몇 분의 교수들에게 우송했다. 이런 문제가 있는데 학자들이 침묵한다면, 그것은 ‘침묵의 카르텔’이 아니냐 하는 항의가 그 속에는 내포되어 있었다. 그러나 모두들 침묵했고, 오히려 엉뚱한 데서 일이 벌어졌다.
대학원에서 ‘교수와 제자’의 관계는 ‘주인과 노예’
어느 날 한 원로교수가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부르셨다. 한마디도 보태지 말고 빠짐없이 실토하라는 명령조의 말과 함께. 서울대 국문과의 모 교수를 만났는데, 그 논문 이야기를 하더라는 것이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추궁했다. 도대체 그 논문이 어떻게 논문집에 실릴 수 있었는가라는 사실도. 솔직히 대답했다.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졌나보다 하는 직감이 들었지만, 그저 한 개의 논문에 불과한 것이 뭐 그리 큰 파장을 일으키겠는가 하는 생각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중앙일보 학술부 기자라는 분에게 전화가 왔다. 기사화를 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내 석사 때의 지도교수와 상의했다. 지도교수의 말씀이 학술적 토론이 없는 상태에서의 기사화는 좋지 않다는 견해였다.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야기였으므로 나는 그대로 실천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다른 교수들이 매우 격심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현대문학 전공교수들이 모여 이 사태를 두고 회의를 거듭하였고, 각각의 교수들이 연구실로 나를 불러 이런저런 훈계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적어도 일주일 동안 나는 조교실로 출근하자마자 교수들의 훈계를 듣는 것을 하루일과로 삼곤 했다. 그 중 가장 격렬한 반응을 보인 것은 역시 젊은 교수였다. 그는 하루에도 수차례 나를 불러 호통을 치곤 했다. 그 대화의 내용 중 일부를 아직도 나는 생생히 기억한다.
“자네가 기자들한테 논문을 돌렸다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사실인가?”
“그런 일 없습니다.”
“왜 그 따위 논문을 써서 제멋대로 발표하고 난린가?”
“그건 학술적 논의입니다. 비판적 문제제기라는 이야깁니다.”
“어떻게 자식이 아버지를 죽이려드나? 너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너무 강한 거 아냐?”
“김윤식 교수가 선생님에겐 아버집니까? 그렇다면 도대체 선생께서 누누이 주장하는 합리주의란 무엇입니까?”
“동양적 합리성이란 것도 있잖아.”
“권위에 대한 복종이 동양적 합리성입니까? 저는 그런 것 믿지 않습니다.”
“자네가 그런 식으로 나오면 나 역시 자네를 제도적으로 매장시킬 수밖에 없어.”
“좋도록 하십시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제 갈 길과 선생님의 갈 길은 다릅니다. 그것만 이해해주십시오.”
이런 대화를 하루에도 몇 번씩 그 교수와 하곤 하였다. 제도적 매장(!)이라는 교수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대학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당시 조교였던 나는 무단결근을 하고, 거의 일주일 동안을 거리에서 떠돌았다. 선배들과 후배들이 있었지만 누구도 이런 상황 앞에서 올바른 대안을 처방해주지는 못했다. 대학원에서의 교수``―``제자 관계란 것이 워낙 특이한 형식의 주인``―``노예 관계인지라, 함부로 자신의 견해를 제출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미래는 막혀 있었고, 현재는 고통으로 가득찬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나는 대학을 떠나지 못했다. 내가 다니던 대학과 학과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왜 서울시립대 출신인 내가 서울시립대를 떠나야 하는가?
지도교수: “난 복종하지 않는 제자는 원치 않아”
그러던 중에 또 한번 나를 실망시키는 일이 일어났다. 우연히 학교 앞 전철역에서 지금은 동국대 영화과 박사과정으로 적을 옮긴 전임조교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날 나는 종로의 술집에서 그 선배와 술을 마시면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교수 중의 한 분이 자신을 불러 나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묻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도 묻더란다. “혹시 너희 둘이 짜고 그 논문을 게재해서 교수 뒤통수 친 거 아니냐?” 물론 이 이야기는 절대 나에게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는 다짐도 받았다는 것이다. 나는 또 한번 실망했다. 교수``―``학생 관계가 아니라 이제 수사관``―``범죄자의 관계구나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나는 학교와 교수에 대한 모든 기대를 버렸다. 물론 나 자신의 미래에 대한 희망까지도.
부끄러운 일이지만 우리 학과의 교수들은 모두가 서울대 출신이다. 전임교수들이 모두 서울대 출신이기 때문에 학과의 강사들 역시 대부분이 서울대 출신이다. 나는 이러한 현실을 ‘서울대 식민지’라는 표현으로 정리하고 싶다. 이런 상황은 매우 많은 부분에서 이른바 ‘적서차별’의 현실을 만들어낸다.
가령 전공강의 배정에 있어서의 차별은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른바 관례화된 학과내규에 따르면 전공강의는 박사학위 소지자를 원칙으로 한다. 물론 이 원칙은 고무줄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1999년 1학기 어학 전공과목 중 한 과목의 강사가 부족했다. 당시 학내에는 해당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선배가 있었다. 난 당연히 그 선배가 강의를 할 줄 알았다. 그런데 결과는 영 딴판이었다. 강사추천을 하라고 올라온 명단을 확인해보니, 그 강의에 배정된 강사는 당시 서울대 국문과 조교로 박사과정을 막 수료한 사람이었다. 어이없어 한숨도 안 나왔다.
원칙이라면 최소한의 공명정대함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나? 그러나 아무도 항의하지 않았다. 항의해봐야 우리만 손해라는 패배주의가 지배적이었다. 2000년 2학기의 전공강사 역시 마찬가지다. 어학과목의 전공담당 시간강사의 경우 대부분이 박사학위 소지자가 아니다. 물론 모두 서울대 출신이다. 이게 소위 강사임용의 원칙이라는 것이다. 제 멋대로의 고무줄 원칙.
다시 논문 이야기로 돌아가자. 그 논문이 문제가 되고 나서, 나는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한 교수는 내가 사무실에서 글을 쓰고 있을 때면, 한참 동안 모니터를 쳐다보다가 “또 그런 식의 글을 쓸래. 그러지 않는다고 약속했지?”라고 말하곤 했다. 진중권이 ‘마이크로 파시즘’이라고 한 행태들이 일상 속에서 미세하게 관철되었다. 혼란 끝에 박사과정의 지도교수가 된 한 젊은 교수는 나에게 이런 말도 했다. “교수가 제자 눈치나 보고 살아야 되나? 난 복종하지 않는 제자는 원치 않아. 알겠나?” 나는 알겠다고 했다. 작은 일로 소모적인 싸움을 하지 않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원로교수: “왜 그렇게 성급해? 밖에서 널 ‘저격수’라 그러더라”
박사과정에 다니면서도 나는 사실 대학에 대한 희망 같은 것은 없었다. 어차피 연구야 자신이 하는 것이고, 이런 상황이라면 박사논문을 쓸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조교직도 그만두었다. 사소한 일상까지 간섭받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돈보다는 자유가 더욱 절실했다. 거리를 두고 내가 계획한 연구와 평론활동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비평과 전망>을 출간하고, 한편에서 <타는 혀>와 같은 저서를 출간한 것은 이러한 결심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이 책을 출간하고 나서 나는 또 한번의 시련을 겪게 된다.
<말>지에 김윤식 교수와 관련한 내 논문이 기사화되고 며칠 안 지나, 한 선배비평가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 선배비평가는 내 박사과정 지도교수와 같은 잡지의 편집위원을 맡고 있었는데, 편집회의 도중 지도교수가 나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더라는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너무 걱정스러워서 전화를 해보았다고 한다. 물론 자신은 그러한 내용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괜한 일에 편들어주는 인상을 주었다가는 내 입장만 더욱 난처해질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걱정하시지 말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똑같은 일이 반복되는구나 싶었다.
그리고 <타는 혀>가 출간되었다. 이 책이 출간된 직후에 박사과정 수업이 있었다. 그런데 마침 그날이
예비군 훈련인 관계로 나는 수업에 불참할 수밖에 없었다. 예비군 훈련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나는 박사과정에 재학중인 한 선배의 전화를 받았다. 그 선배는 다소 곤혹스런 목소리로 만나자고 했다. 나는 사태를 직감했다. 또 무슨 일이 있었구나 하는. 선배는 한 원로교수가 자신을 따로 불러 해준 이야기를 내게 털어놨다. 물론 철저하게 비밀에 부치라는 이야기도 있었단다. 원로교수는 나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물어보았다고 한다. 요즘 대학원생들의 분위기가 이상한데, 혹시 이명원이 다른 대학원생들과 집단적으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명원이 학부생들을 충돌질해 학생과 교수 사이를 벌려놓고 있는 것은 아닌지 등등의 어이없는 이야기들이었다. 갈수록 태산이었다. 나는 또 한번 절망했다.
그리고 10월 초의 어느 토요일 오후 나는 그 원로교수를 교정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원로교수와 나는 2시간 정도를 교정에 앉아 이야기했다. 그 대화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왜 그렇게 성급해? 밖에서 너를 ‘저격수’라 그러더라. 그런 꼬리표를 달아서 어떻게 하려고 그래?”
“성급하다니요, 책은 낼 만한 거니까 낸 것입니다. ‘저격수’요? 그 사람들은 연구와 비평이 사격술인 줄 아나보는 군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너 때문에 학부 후배들까지 나쁜 영향 받는 거 아니냐? 너 왜 그러니?”
“저와 학부생은 아무런 관련도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만나는 친구도 없구요.”
교수는 나와 내 후배 평론가가 최근에 참여했던 이른바 ‘문학권력 논쟁’을 폄하하고 있었다. 나는 ‘큰 저격수’, 내 후배는 ‘꼬마 저격수’라고 표현할 정도로 뿌리 깊은 반감이 있는 듯했다.
“네 지도교수도 너에게 무척이나 화가 나 있더라. 너 때문에 교수들 입장이 엉망이 돼버렸어. 도대체 왜 그러는 거니?”
“그 책은 학문적으로 토론할 사항이지, 그런 식의 잡음을 일으킬 일이 아닙니다.”
“왜 본질적인 부분은 안 건드리고 변죽만 울리는 거냐?”
“비평사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 논쟁사라는 것 모르십니까?”
이런 이야기를 2시간여에 걸쳐 하다보니 해가 다 저물었다. 나는 무척이나 지쳐 있었다. 모교 교수들까지도 학문적 의욕을 인정하지 않고, 비난하는 분위기인 바에야 어디서도 희망은 찾을 수 없었다. 문제는 모두들 책은 읽어보지도 않고, 저널의 기사만을 읽고 나서 자신의 견해를 손쉽게 판단한다는 것이었다.
‘억압의 가능성’ 포기하고 ‘자유의 고난’ 선택할 터
나는 오랜 고민 끝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지금 재학중인 대학원에 자퇴서를 내겠다는 것이 그것이다. 미안하게도 적어도 나 자신의 연구방향과 관련하여 내 모교에는 희망이 없다는 판단이 든다. 학과 교수들과의 소모적인 싸움에도 지쳤다. 정당한 문제를 제기해도 이미 나는 ‘왕따’다. 금기를 건드린 자는 그 자신이 금기가 된다는 말을 폴 리쾨르는 <악의 상징>에서 적어놓은 바가 있다. 내가 바로 그 금기가 된 셈이다. 나는 이 현실이 비단 내가 소속되어 있는 대학만의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에서 파생된 하위모순이다. 구조와 맞서 고립된 한 개인이 싸울 때 그에게 주어지는 것은 ‘희생양’의 딱지일 확률이 높다. 나 자신의 삶이 그것을 증거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연구나 비평을 포기하겠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물론 나와 내 모교의 관계는 회복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내 삶의 가능성의 일부를 자진 반납함으로써, 더 큰 자유를 찾고 싶다. 학문과 사상의 자유라는 것은 그렇게 거창한 차원의 문제만은 아니다. 자신의 내면 속에 있는 견해를 자유롭게 표출하고 그것을 합리적으로 토론할 수 있는 조건``―``그것이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구조화하는 가장 기본적인 토대이다. 가슴 아픈 점은, 과연 우리의 대학원 사회가 진정으로 자유로운 지식인들의 공동체인가 하는 점이다. 내가 다닌 대학의 학과만을 리트머스 시험지 삼아 말하자면, 그 기본적인 토대마저도 왜곡되어 있는 곳이 한국의 대학원 사회다.
나는 이런 구조를 변화시킬 프로그램을 혼자서는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깨달았다. 나는 평범한 대학원생일 뿐이다. 그러나 평범한 대학원생도 자기 인격의 엄숙함과 존엄성을 능동적으로 보존할 의무와 권리는 있다. 누구도 그것을 침해할 수는 없다. 그것이 최소한의 인간에 대한 예의라는 것이다. <체 게바라 평전>에는 생전에 그가 말했다는 다음과 같은 발언이 적혀 있다. “꿇고 사느니, 서서 죽겠다.” 나는 이 말이 내 마음속에 불러일으킨 날카로운 파문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첫댓글 멋있당~~ 크캬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