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빚진 자라
로마서 1:8-17
제가 아비지를 몇 번 업어드린 일이 있습니다. 몸이 너무 쇠약해서 스스로 자신의 몸을 이기지 못하실 때 병원에 가시기 위해 방에서 차에 태우는데 까지 업어드린 것 뿐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내 등에 업었을 때 속으로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많이 울었습니다. 아버지는 나를 얼마나 업어주셨는데 라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나를 업어주신 것 중에 잊어질 수 없는 것은 제가 열 살 때 장티푸스로 고생을 하다가 하루 저녁에 숨을 멈추고 죽었습니다. 당시 아버지는 함양읍에서 사업을 하시다가 부도로 쫄딱 망하고 살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최악의 흉년 마쳐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먼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가 팔아 생계를 유지할 정도였습니다.
그날도 아버지는 산에 가서 나무를 지고 밤중이나 되어야 집에 도착하신 것입니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나는 죽었다고 방구석으로 밀어 재춰났고 이웃집 사람들이 어머니를 위로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아버지는 도착하자마자 피곤도 배고픔도 다 잊고 죽은 나를 업고 약2km 정도 떨어져 있는 병원까지 달린 것입니다. 죽어도 주사라도 맞혀야 한다고 있는 힘을 다해 업고 달렸습니다. 병원은 이미 문을 닫고 의사도 다 잠들었습니다. 병원 문을 두드릴 때 나는 깨어나고 내 귀에 병원 문을 어머니와 함께 두드리며 사람 살려달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나를 업고 얼마나 빨리 달렸든지 아버지의 외투에 내 빰이 씻겨 따가울 정도였습니다. 아마 그래서 내가 다시 살아났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후로 회복되어 오늘까지 존재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 아버지가 저를 업고 그렇게 달리지 않으셨다면 공동묘지 한쪽에 이름 없이 묻히고 말았을 것이라고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나를 살리기 위해 있는 힘 다해 업고 달렸습니다. 저는 아버지와 어머니께 많은 빚을 졌습니다. 그러나 그 빚을 다 갚을 수 없습니다. 다만 아버지를 몇 번 업어드린 것 뿐 입니다. 모두 자기의 아버지를 존경하겠지만 저의 아버지는 어느 누구의 아버지들 보다 더 자식들을 위한 최고의 아버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 아버지께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자로 지금도 아버지를 생각할 뿐입니다.
인천 제일교회에 최태섭 장로님이 계셨는데 그분은 한국 유리 공장 사장입니다. 군선교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군인교회를 세우는 곳이라면 어디까지라도 가서 유리를 무상으로 지원해 주었다고 합니다. 최장노님의 간증은 젊었을 때 은행에 대출을 내어 사업을 하였을 때 6.25 전쟁이 터져 모두 피난 갈 때 은행에 찾아와서 어떻게 하든지 돈을 다 갚겠다고 말하니까, 은행창구 직원이 ‘ 이 난리 통에 그 돈을 어떻게 다 갚을 수가 있어요? 모두 피난가기 바쁜데 그만두고 피난이나 가세요’라고 하더랍니다. 그러나 최장노님은 ‘아닙니다. 내가 진 빚은 내가 꼭 갚겠습니다. 내가 가면 돌아 올수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노력해서라도 꼭 갚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은행을 나왔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 빚을 다 갚았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난 후 제주도까지 내려가서 생선 군납 사업을 하다가 자금이 필요해서 은행에 가서 ‘담보는 없지만 내가 꼭 갚을 터이니 돈을 빌려 달라’고 했을 때 은행장이 한마디 거절도 하지 않고 당시 2억이란 돈을 빌려 주더랍니다. 너무도 놀랄 일이라 살펴보니까, 그 은행장이 6.25때 은행창구에 그 사람이더랍니다. ‘최태섭 저 사람이라면 담보없어도 얼마든지 빌려주어도 된다’고 하며 성큼 융자를 내어 주어 그 돈으로 사업을 해서 우라나라에서 유일한 한국유리 공장으로 크게 성공하였다고 합니다.
미국에 거부인 바튼씨에게 한 젊은 사람이 찾아와서 ‘선생님 제겐 꿈과 용기와 젊음이 있습니다. 2000불만 빌려주시면 열심히 노력해서 꼭 갚겠습니다’ 라고 하길래 그 청년의 말을 믿고 빌려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젊은 사람은 열심히 노력해서 크게 성공을 했고 빌린 돈도 이자를 쳐서 꼬박 꼬박 다 갚았습니다. 10년이 지난 후 바튼씨가 사업이 망했을 때 그 젊은이가 찾아와서 ‘얼마나 빚을 졌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바튼씨는 7만5000불이나 된다고 했습니다. 그때 그 젊은이가 ‘그 돈 내가 다 갚아 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며 그 돈을 다 갚아 주었다고 합니다. 너무나 놀라서 ‘내가 자네에게 빌려 준 돈은 2000불이고 그 돈을 이자까지 내가 받았는데 어째서 이렇게 많은 돈을 갚아주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 젊은이는 ‘옳습니다. 제가 2000불을 빌려서 다 갚았지요, 그러나 그때 내게 베풀어주신 은덕은 평생 갚아도 갚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빚은 갚을 수 있지만 은덕은 갚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영원히 갚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인생을 세 가지로 부류를 할 수 있습니다. 유아독존형입니다. 나홀로형으로 받을 것도 없고 줄 것도 없다는 사람입니다. 누구에게 신세를 진 것도 신세를 입힌 것도 없다는 사람입니다. 다음으로 채권자형입니다. 받을 것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받을 것만 생각하다가 받지 못하게 되면 원망과 불평을 합니다. 수고에 대해 너무 적다고 불평합니다. 그리고 채무자형입니다. 한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고 은덕 속에 빚진 자로 사는 것입니다. 오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형에 속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보면 모든 인생은 채무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빚진 자라는 것을 알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느 누구로부터 도움을 받은 채무자입니다. 그중에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제일 클 것이고 또 은사나 친구나 아니면 이름 모를 어느 분으로부터 갚을 수 없는 은혜를 많이 받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빚진 자로서 채무자형이 될 때 감사할 줄도 알고 남을 돌보아 줄줄도 알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받은 것을 알지 못하고 마치 채권자처럼 달라고만 합니다. 그래서 감사를 모르고 언제나 불평과 불만으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유아독존형은 자신만을 위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은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받은 것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갚을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자기 것이 없으면 죽습니다.
노예와 빚진 자는 다릅니다. 노예는 자아를 상실했기에 자유의식이 없습니다. 그러나 빚진 자는 받은 것을 아는 자유인입니다. 노예는 생각의 자유가 없기 때문에 받을 것도 줄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빚진 자는 받은 것이 있고 빚진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갚아야 하는 마음을 가진 자입니다.
은혜는 은혜입니다. 은혜는 축복이고 동시에 빚입니다. 깊은 감사, 깊은 은혜에 대한 의무감을 가지고 사는 사랑의 노예입니다. 빚진 자이지만 행복합니다. 감사가 넘칩니다. 빚진 자는 자유의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내가 다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율법주의자가 됩니다. 갚아도 갚아도 다 갚을 수 없는 빚진 자인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누구에게 빚진 자라고 했습니까?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14)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무엇을 어떻게 해서 이들 모두에게 빚을 진자라고 말하는 것일까? 이 네 부류의 사람들은 유대인을 제외한 이방인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빚진 자라고 하였습니다.
‘빚진 자’란 채무자 또는 어떤 의무에 얽매인 사람이란 뜻으로 법정에서 시비를 가려야 할 성격이라기 보다 도덕적이며 인격적인 의무를 행할 자를 가리킵니다. 단번에 갚으면 끝나는 경제적 의미의 빚이라기 보다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청산이 불가능한 갚을 수 없는 부채를 의미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러한 철저한 사명감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는 전도자로서의 인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너무나도 크고 놀라운 축복이라는 것을 알고 갚을 수 없는 빚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스스로 돌이켜보면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엄청난 죄인 중에 죄인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불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주시고 영원한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에 갚을 수 없는 빚진 자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신앙고백을 로마서 5장에 하였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5:6)라고 말했습니다. ‘연약할 때’,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어린애 같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롬5:8)라고 말했습니다. 죄중에 묻혀 살고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롬5:10)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 자신이 예수님을 알지도 못했을 때뿐 아니라 예수 믿는 자들을 대적하고 죽이고 할 때 예수님은 사울 자신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바울은 지난 날에 사울로서 예루살렘에서 예수 믿는 자를 잔멸하려고까지 했습니다. 사울은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였습니다’.(행9:1), 다시 말하면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 살에 독기가 솟아날 정도로 미워했고 죽이고 싶어 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에게 가서 공식적으로 예수 믿는 자를 잡아다 가두고 죽이기로 작정하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주의 빛을 보고 꺼꾸러지고 땅에 엎드려져 일어나지를 못했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소리가 나기를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는 소리를 듣고 ‘주여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길로 예수님을 만나 완전히 변화되어 예수 믿는 자를 잔멸하려든 사울이 예수님을 믿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전하는 전도자 바울이 된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16)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복음’은 복된 소식이란 의미로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복된 구원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바울은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16)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이 깊은 진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 자신이 이 진리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이 진리를 전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가 죄인들의 구원의 방편이였습니다. 그러나 이 진리를 알지 못하는 유대인들에게는 저주의 상징물로 매우 꺼리는 것이였고 헬라인들에게는 매우 미련하게 보이는 것이였습니다. 그래서 세상적으로 보기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비이성적이요, 비상식적인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에는 신비한 진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죄인을 구원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진리를 알았습니다.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자랑으로 삼고 자기 생명까지 바쳤습니다.
바울은 인간적으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의 능력도 실력도 있었습니다. 신앙적으로도 자신 나름대로는 최고로 신앙이 좋다고 할 정도의 바리새파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진리를 알고부터는 예수님의 종이 되어 오직 예수님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의 복을 받은 성도는 복음의 빚진 자들입니다.
언젠가 TV를 통해서 본 일이 있습니다. 죽은 부친 묘 옆에 움막을 치고 3년을 이발도 하지 않고 묘를 지키며 시묘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이렇게 하느냐고 물었을 때 ‘나를 낳아 주시고 키워주신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한다’고 합니다. 부모님께 빚진 것을 갚을 것이라고 죽은 묘 옆에 움막을 치고 비바람을 맞으며 묘를 지키는 것으로 빚을 갚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돌아가신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빚은 갚을 수 없는 빚 입니다.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빚을 다 갚겠다고 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그렇다고 갚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소라도 갚기를 원한다면 자신이 빚진 자로 먼저 깨닫고 그 마음이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부모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복음에 빚진 자라고 해서 그 빚을 어떻게 갚겠습니까? 바울은 자신이 복음에 빚진 자로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래서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빚을 졌다고 한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곧 예수님의 뜻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빚진 자들입니다. 부끄러운 빚진 자가 아니라 영광스러운 빚진 자들입니다. 숨기고 싶은 빚진 자가 아니라 자랑스러운 빚을 진자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빚진 자들로서 예수님의 뜻을 잘 따르고 빚진 자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주님이 세운 교회를 사랑하고 열심히 복음을 전하므로 빚진 자로서 최선을 다 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