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덩이로 공부한 '박영립' 변호사 “성공의 결과는 습관의 산물” 화장실·배달 갈 때도 책 놓지 않아 중·고교 과정 2년 만에 끝내
박영립(55·사진) 변호사는 눈물겨운 공부 경험을 갖고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중학교 진학을 포기한 채 노동판, 여관 조수, 버스승객 계수원, 전선회사 임시직공, 양복점 기술자로 전전했다. 스무 살이 돼서야 검정고시에 도전, 중·고교 과정을 마치고 대학에 진학해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현재 법무법인 화우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소록도 한센병 환자, 성매매 피해여성 등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은 이들을 돕고 있다.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패배의식이 인생의 제일 큰 장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들보다 가난해서 배우지 못했다는 핸디캡이 오히려 제겐 축복이라 생각했지요."
□ 공부, 공부, 공부… 20살에 중등 검정고시 도전
전남 담양 조그만 산골에서 태어난 박 변호사는 중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했지만 형편이 나빠 진학을 포기했다.“ 교복 입은 친구들을 보며 가슴 속 응어리가 지고 부모가 원망스럽기도 했다”고 한다. 그해 광주에 있는 조그만 사무실 사환으로 객지 생활을 시작했지만 형편은 더 나빠졌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마저 돌아가시자 이듬해 담양 대바구니 장꾼들을 따라 무작정 상경했다. “이대로 안 되겠다 싶어 서울행 완행열차를 타고 새벽녘 노량진역에 도착했지요. 금의환향을 꿈꾸며 상경했지만 현실은 그악했습니다. 마음 속으로 ‘죽어도 고향에 못 내려 간다’고 다짐하며 허드렛일부터 시작했지요. 초등학교 졸업장이 전부인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일자리를 구한답시고 남대문시장, 서울역 부근 일대를 돌아다녀도 헛수고인 날이 많았다. 양복기술을 배우고 싶어 양복점 시다로 취직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노동판, 신문보급소, 분식점 배달원, 동대문시장 이불집 등에서 닥치는 대로 일했다. “중학교 졸업장만 있어도 번듯한 직장에 이력서도 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던 시절이었어요. 어느 날 노점에서 파는 책을 사서 읽다가 그 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에 대한 글을 읽게 됐지요. 이런 말이 나왔어요.‘ 부자가 되려면 세(貰)를 살더라도 부자 동네에 살아라. 부자의 생활방식을 따르고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어요.”‘부자 따라하기’가 부자가 되는 비결이라는 구절을 읽은 뒤 박 변호사는 이불집 주인아저씨를 벤치마킹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동대문 상인들이 제일 질겁(?)하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세무서 직원이었다. 세무서에서 누가 나왔다고 하면 돈 많은 상인들도 허리 굽혀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일하던 이불집 주인만은 달랐다. 중국 텐진상고(商高) 출신인 주인은 장부를 허투루 작성하지 않아 세무서 직원을 겁내지 않았던 것이다. “주인아저씨를 보고 경리학원에 다녀야 겠다고 결심했어요. ‘경리를 잘하면 성공 할 수 있겠구나’생각하며 경리학원을 알아보고 다녔어요. 그러다 검정고시 학원광고를 보게 됐지요. 광고 문구에는‘9개월 단기 완성’이라 적혀있었어요.‘ 해낼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도 있었지만 지금 아니면 영영 공부할 수가 없을 것 같아 어머니께 말씀드렸죠.‘ 9개월이면 됩니다. 중학교 졸업장만 있으면 하늘이라도 훨훨 날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며 승낙을 얻어냈지요.” 당시 그의 나이 스무 살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지 8년, 동창들은 이미 대학교 2학년이었다. 늦었지만 ‘여기서 포기하면 아무 것도 안될 것 같아’미친 듯이 공부했다. 방정식을푸는데‘꼬부랑 글자’인 x, y도 몰랐지만 무조건 외웠다. “공부는 엉덩이로 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꿈과 희망이 있으면 행동이 나오고 그런 행동이 반복되면 습관이 자리잡게 됩니다. 모든 성공의 결과는 습관의 산물입니다. 꿈과 비전을 갖고 무언가를 이뤄내려는 행동이 습관화되면 틀림없이 좋은 결과를 가져다 준다고 생각합니다.” 박 변호사는 1973년 7월 중학교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천만다행으로 전국 최고 득점이었다. 덕분에 고등학교 과정은 학원에서 수업료를 면제해 줬다. 이듬해 고등학교 검정고시에도 합격했다. 남들이 6년 걸려배우는 중·고교 과정을 2년 만에 뚝딱 끝낸 것이다. “공부비결은 절박함이었어요. 집에서 도움을 전혀 기대하지 못했기 때문에‘이 공부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죠. 밤 10시쯤 일을 마치고 돌아와 방구석에다 밥상을 펴놓고 공부했어요. 사법시험 준비할 때보다 더 열심히 한 것 같아요. 화장실 갈 때나 물건을 배달할 때, 점포 손님이 없는 잠깐 동안에도 책을 놓지 않았어요.”
□ “못 배우고 가난하다는 핸디캡이 오히려 축복”
박 변호사는“중졸 졸업장만 있으면 남들처럼 어깨 펴고 살 수 있겠다” 고 생각했지만 계속 공부를 하다 보니 대학까지 도전하게 됐다. 당시 전기 대학이었던 고려대 상대에 응시했다. 하지만 낙방, 후기였던 숭실대에 입학했다. 대학생이 된 사실이 믿기질 않아 대학 교복을 맞춰 입고 다녔다. 전공을 법학과로 택하고 2학년 때부터 사법시험에 도전했다. “지금 중도포기하면 다시는 공부할 수 없을 것이라는 자극이 저를 일으켰던 것 같아요.‘ 궁하면 통하게 마련’이라고 생각해요. 오늘은 어제보다 낫고,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을 것이란 믿음을 마음 속에 새겼지요.” ‘처음 중학교 과정을 도전할 때 다른 친구들보다 8년이나 늦었지 않았나.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 지금 이 순간부터 다시 시작하자’ 고 다짐했다. 결국 대학을 졸업하던1980년 사범시험 1차에 합격한 뒤 이듬해 2차에 합격했다. “다른 사람들의‘고시 합격기’를 읽어보니 하루 10시간씩 3년을 공부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저는 하루 15시간씩 3년을 하겠다고 결심했어요. 일기장에 하루 15시간을 공부하면 ‘○’, 공부량의 80%를 채우면‘△’, 50% 정도면‘×’를 썼지요. 처음엔 세모와 가위표가 많았지만 점점 동그라미가 많아지기 시작했지요. 작은 목표를 세워 하루하루 성취감을 높였습니다.” 박 변호사는 기계적으로 규칙적인 생활을 반복했다. “슬럼프니 매너리즘이니 하는 것은 만족할 만큼 공부를 못해서 오는 불안과 초조” 라고 생각했다. 하루하루를 무리하지 않고 규칙적으로 보내고 일주일에 한나절쯤 쉬어 몸의 피로를 극복했다. “공부가 잘 된다고 밤늦게까지 하면 다음날 영향을 미쳐 습관처럼 규칙적인 공부시간을 가졌다”고 했다. 그는 꿈에 그리던 변호사가 됐지만 정작 변호사가 된 뒤 더 많은 공부를 해야 했다. 하지만 어려운 시절, 초심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몇 해 전 서울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장을 맡아 구금시설 실태조사를 실시해 구치소, 유치장의 시설개선을 이끌었다. 대한변협 인권위원장이 된 뒤에는 성매매 피해 여성들과 소록도 한센병 환자를 위한 소송을 맡기도 했다. “인생은 마라톤입니다. 때를 놓쳤다면 만회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만회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못 배우고 가난하다는 핸디캡이 제겐 축복이었던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