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숫자의 비밀
조용한 대학 도시 스탠퍼드는 오로지 공부만을 위해 전세계에
서 몰려든 학생들로 북적거리는 곳이다 좁은 도시이지만 답답
하다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는 것은 아름다운 해변과 캘리포니
아특유의 부드러운 잔디가 깔린 좋은 코스의 골프장이 있기 때
문이다.
스탠퍼드 대학에는 한국에서 유학온 학생들이 꽤 많은 편이
어서 유학생회는 그런대로 북적거렸다
수아의 컴퓨터 실력은 학교 전체에 정평이 나 있어서 유학생
들은 문제가 생기면 늘 그녀에게 찾아오곤 했다. 비교적 여유가
있는 유학생이 얻은 그리 작지 않은 아파트가 수아에게 컴퓨터
를 배우고자 하는 유학생들의 아지트였다. 그들은 한번 이 아지
트에 모이면 하룻밤을 새우는 것은 보통이고 햄버거, 피자, 콜라
따위로 끼니를 때우며 며칠씩 지내곤 했다.
이렇게 된 데는 수아가 워낙 남녀 가리지 않고 허물없이 모두
와 잘 어울려 지내는 이유도 있지만, 수아에게 환심을 사고 싶어
하는 남학생들이 좀처럼 그녀의 곁을 떠나려 하지 않기 때문이
기도 했다
수아, 오늘은 무엇을 가르쳐줄 거야? 체이스 맨해튼뱅크에 잔고 없이 계좌 트는 방
법이나 브라운 대학 여학생들의 비밀 대화
방에 들어가는 방법은 어떨까?'
안 돼, 오늘은 할 일이 있어.
하지만 뭐라도 배우고 싶어 죽겠다. 해킹에 한창 맛들이게 해
놓고 바쁘다고 하면 어떡해? 서울에 있는 미정이 ID 도용하는
방법이라도 가르쳐줘.
호호, 넌 머리가 나빠서 안 돼. 열흘은 꼬박 가르쳐야 겨우 미
정이 비밀 번호를 알까말까 할 정도야.
하하하.
자리에 모인 유학생들은 모두 웃었다.
그러면 오늘은 우리도 배울 게 없는 거야?'
오늘은 안 돼. 논문 계획서를 만들어야 돼. 그 대신 수수께끼
를 하나 내줄 테니 맞춰봐.
그래, 뭔데'
얼마 전 뉴욕에서 월리를 잡을 때 그의 컴퓨터에서 나왔는데
읜지 모르게 약간 범죄 냄새가 난단 말이야. 탈세 자료와 함께
극비 파일에 들어 있어 FBI의 수사관들이 탈세 쪽으로 추궁했는
데 그 회사는 단호히 부정했어. 아무런 연결 고리 없이 오직 숫
자의 상관 관계밖에는 단서가 없는데 어때, 한번 해볼래?'
맞추면 뭐가 있어?'
FBI에서 포상금이 나온대.
얼마나?~
글쎄, 모르기는 해도 한 학기 등록금은 해결될걸.
와아!
탈세범들은 보통 숫자를 크게 줄여 장부에 기록한다. 하지만
모든 숫자들 사이에는 상관 관계가 있게 마련이어서 FBI의 탈세
심리 수사관들 중에는 수학과 출신이나 심지어는 기호학이나 암
호 해독의 전문가들도 있다.
그들은 월리의 컴퓨터에 있던 숫자군이 한 금융 회사의 극비
파일 중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의심했지만 어떤 혐의도 찾아낼
수 없었다. 그들은 수감중인 월리를 추궁하고 수아에게도 의견
을 물어왔지만 그녀 역시 숫자 사이의 상관 관계를 찾아낼 수 없
어 포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 그럼 문제를 주겠어. 시간은 무한대, 단 외부에 알리는 것
은 안 돼. 한 가지 충고하자면 하루 만에 상관 관계를 못 찾으면
잊어버리는 게 좋을 거야. 다음 학기 등록금 공짜로 벌려다가 이
번 학기 학점 날려보내는 수가 있으니까.
수아는 자신의 컴퓨터에 입력되어 있는 그 숫자군을 종이에
적었다.
U 750M -825,OOOM -1,155,OOOM -1,050M
U 7OOM -1,110,OOOM -1,554,OOOM -1.412M
F 750M -142,500M -199,500M -181M
J 37,500M -322,500M 451,500M -4IOM
H 2,250M -311,OOOM -441,OOOM -4OOM
정말 척 봐서는 탈세 자료 같아 보이네. 매출액 조작 같은 것
말이야. 왼쪽의 문자는 거래처고.
하지만 매출액 조작이라면 숫자들이 거꾸로 씌어 있어야 되
잖아. 축소돼야 하니까.
이런 바보, 그러니까 암호지. 전문가들은 일부러 거꾸로 하는
거 아냐.
그렇게 쉬운 게 아닐 거야, FBI의 전문가들이 못 찾았으면.
이건 수수께끼가 아니야. 누구도 이런 것을 가지고 상관 관계
를 알아낼 수는 없어 . 즉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는 거지.
모두들 한마디씩 하는 것을 듣고 있던 수아가 레이저프린터에
서 출력을 끝내고는 일어서며 말했다.
잘들 해봐, 나는 갈 테니. 등록금 벌려다가 학점이나 날리지
말고.
수아는 며칠 동안 논문 계획을 짜느라 집에 파묻혀 지냈다 국
내에서와 달리 외국에서 공부를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비용이
큰 문제여서 논문을 한번에 써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쫓길 수
밖에 없다.
벌써 몇 번째 울리는 호출기 소리에 수아는 짜증이 나서 일어
났다. 스위치를 아예 꺼버리려던 수아는 호출기에 찍힌 메시지
를 보고는 약간 놀랐다.
테드.
그는 학교에서 자주 마주치는 남학생 가운데 하나였지만 수아
와 친하게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는 강의실이건 식당이건,
콘서트홀이건 미팅 장소건 금방 자고 일어난 사람처럼 부스스한
머리에 구김이 잔뜩 간 옷을 입고 다녀 여학생들 사이에 얘깃거
리가 되곤 했다. 하지만 자기 할 일을 야무지고 똑떨어지게 해내
서 교수들 사이에서는 평판이 좋은 학생이었다.
지난번에 그는 처음으로 아지트에 나왔었는데 그날따라 수아
가 일찍 집에 와버려 별로 친해질 기회가 없었다.
수아는 상대의 전화 번호를 돌렸다.
풀었어요.
풀었다니까요.
무얼 말이에요?~
그제야 수아는 생각이 났다.
네? 풀었다구요, 그 수수께끼를 풀었다는 거예요?~
뭔가 잘못 이해한 거 아니에요?~
와서 보면 될 거 아닙니까.
상대의 불쾌감이 전화기를 타고 흘러왔다
지금 어디 있어요?~
학교에요.
그럼 지금 학생회관 휴게실로 갈게요.
수아는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우선 친하지도 않은 말
없는 남학생이 그 수수께끼를 풀려고 마음먹었다는 것이 이상
했고,다음으로는 그가 수수께끼를 풀었다는 사실이 믿기 힘들
었다
수아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FBi 전문가들도 손을
들고 자신도 일찌감치 기권해 버린 수수께끼를 그가 풀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그의 착각일 수밖
에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만약 착각이 아니라면, 그것은 그 학
생이 자기에게 관심이 있다는 얘기에 다름아니었다.
수아는 귀국하게 된 한 선배한테서 거저 얻다시피 한 낡은 자
동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백미러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았다. 무신경하게 입은 듯한 자신의 옷차림이 왠
지 마음에 걸렸다.
뭔가를 의욕적으로 해본다는 게 더 중요하죠. 전문가들도 못
풀었으니 틀려도 괜찮아요. 다만 그런 문제에 너무 매달리다 보
면 쓸데없는 시간 낭비가 될 수 있어요. 그러니 지나치게 마음쓰
지 말아요.
보나 안 보나 당연히 틀렸을 것으로 생각하고 한껏 상냥한 목
소리로 위로의 분위기를 돋우려던 수아는 다음 순간 테드의 사
무적인 목소리에 맥이 풀려버렸다
별로 어렵지 않게 풀리던데요.
테드는 여유 있는 표정으로 싱긋이 웃었다.
네? 믿어지지 않아요.
설명할까요?'
아니, 잠깐만요. 먼저 전화를 하구요.
어디에 전화를 해요?'
FBI에요.
왜요?~
풀었다고 해야죠.
그래요.
이제 수아는 완전히 놀라고 말았다. FBi에 먼저 전화를 하겠
다고 하면 놀랄 줄 알았는데 테드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자
신이 있다는 얘기였다. 수아는 신중해졌다.
설명해 보세요.
왼쪽 문자는 각 나라의 영어 이니셜이에요. 처음의 u는 미
국 그 밑의 U는 영국, 는 프랑스, j는 일본, H는 홍콩이에요.
그런가요?~
수아는 반신반의하면서 속으로 맞춰보았다. 유나이티드 스테
이츠,유나이티드 킹덤,프랑스, 저팬, 홍콩 다 맞았다. 테드는
수아가 속으로 맞춰보는 것을 아는지 웃으며 기다렸다.
숫자는 무슨 의미죠?'
왼쪽의 첫 번째 숫자는 각각 그 나라의 화폐로 표시한 금액이
에요. 달러, 파운드, 프랑, 엔, 홍콩달러죠.
그 다음은요?~
그것은 이 금액을 어느 나라의 화폐 단위로 환산한 거예요.
어느 나라죠?'
어느 나라일 것 같아요?'
글쎄요.
그대의 조국인데요.
내 조국이요? 어머, 한국 말이에요?'
네, 바로 우리 나라의 원화로 환산한 금액이에요.
그렇다면 세 번째 숫자는요?'
원화에 40퍼센트씩을 곱한 액수죠.
마지 막은요?'
그것을 다시 달러로 환산한 거예요.
모든 화폐 단위를 달러로 환산한 거란 말이죠?'
그래요.
수아는 잠시 테드가 말한 것을 점검했다. 과연 틀림없었다.
이게, 이게 말이 되나요? 이런 것을 어떻게 맞출 수 있단 말
이죠? 혹시 귀신이 아닌가요?'
의외로 간단했어요.
간단했다구요? 믿어지지 않는군요. 나도 이 수수께끼를 풀어
보려고 모든 방법을 썼지만 그런 건 생각도 못했어요.
세상엔 우연의 일치라는 게 있잖아요.
무슨 뜻이죠?~
나는 그 다섯 개의 숫자열 앞에 있는 문자와 숫자와의 관계에
주목했어요. J 옆에 있는 숫자는 다른 숫자에 비해 월등히 커요.
다른 숫자가 백 단위 혹은 천 단위인 데 비해 J 옆에 있는 숫자만
그렇게 큰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했지요. 거의 백 배가 넘는 큰
숫자라 나는 그 라는 문자의 이니셜에 집중했죠.뭐가 떠올랐
는지 알겠어요?'
저 팬?'
그래요. 마침 서울에서 누나가 다니러 왔어요. 신문을 가지고
왔길래 거기에 있는 환율 조회표와 맞추었죠. 딱 맞더군요.
테드는 수아에게 문제를 풀게 된 경위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지트에서 돌아온 테드는 며칠 동안 수아가 제시한 괴상한
숫자들을 앞에 놓고 끙끙댔다. 그는 수아에게 해답을 들이밀고
싶은 일념으로 숫자 풀이에 의욕적으로 매달렸다. 그러나 해답
은커녕 조그만 단서조차 찾을 수 없었다
도대체 하나의 문자와 그에 따른 네 개씩의 숫자들만으로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지만
오기로 대했다. 천재라고 소문난 수아가 풀지 못한 문제의
해답을그녀 앞에 자신 있게 내밀고 싶었다. 그녀로부터 칭찬을
듣고 싶었다.
그것이 다른 남학생들처럼 그녀 주변을 맴도는 것보다 남자답
고 품위 있게 그녀의 마음을 끌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
각되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그것은 훌륭한 결정이었다.
테드는숫자풀이에 매달렸다 그는숫자 풀이의 단서는 절대
적으로 각 숫자열 사이의 상관 관계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상관 관계는 그렇게 쉽사리 드러나지 않았다.
겨우 밝혀낸 것이라고는 각 숫자열의 세 번째 숫자는 두 번째
숫자의 1.4배가 된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두 개의 1)자 중에서
처음의 U자가 붙은 숫자만이 나중의 숫자도 처음 숫자의 1.4배
가 된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것으로 미루어볼 때 숫자군에는 반드시 어떤 규칙성이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이 외에 수학적으로 드러나는 통일
적 관계는 더 이상 찾아낼 수 없었다
'어째서 만 이렇게 큰 숫자일까?'
하룻밤을 꼬박 샌 다음 테드가 주목한 것은 라는 문자였다.
다른 문자가 붙어 있는 숫자보다 가 붙은 숫자는 월등히 크다
는 사실에 주목한 그는 의 의미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아, 혹시?'
그때였다.
'딩동 딩동 딩동 "
한창 생각에 빠져 있던 테드의 귀에 기다리다 지쳤는지 초인
종이 계속 울어댔다. 그러나 그는 초인종이 몇 번이나 울리도록
문을 열 생각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베란다에 쌓아
둔 폐지 꾸러미를 헤집으며 뒤졌다.
'딩동 딩동 딩동 "
누구요?'
테드는 있는 대로 짜증을 부리며 문을 열었다. 뜻밖에도 한국
에서 온 누나가 서 있었다.
어, 누나. 웬일이야? 그런데 혹시 한국 신문 있어?'
잘 있었니? 안에 있으면서 왜 그렇게 문을 안 열어?'
신문 있냐니까?'
그래 있어 .
테드는 누나의 가방 옆에 비쭉 나와 있는 한국 신문을 가로채
서는 황급히 넘겼다
그래, 이거야!
신문의 한 면과 숫자를 맞춰보던 테드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
를 질렀다. 곧바로 수아를 호출한 테드는 이것저것 묻는 누나에
게 건성으로 대답하며 전화를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수아의 전화
를 받자마자 누나가 부르는 소리를 뒤로하고 학생회관으로 달려
왔던 것이다
아, 역시 역사는 우연히 이루어지네요.
그런데 이까짓 게 뭐 중요하다고 그래요?'
결코 쉽게 볼 일이 아녜요. 암호란 건 늘 비밀을 간직하고 있
잖아요. 상대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도 모르죠.
그런 일에 신경을 쓰는 건 시간 낭비예요. 할 사람들이 따로
있잖아요. FHI에 알려주기만 하면 일은 끝나잖아요.
하긴 그렇네요. 바로 FBI에 알려주죠. 성과가 있으면 연락이
오겠죠.
성과가 있으면요?'
아무래도 뭔가 범죄의 냄새가 나는 자료 같아요.
내가 헛수고를 한 건 아니겠지요? 분명히 풀기만 하면 등록
금이 나온다고 했지요?'
테드는 수아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데 대해 다소 화가
났다. 그는 숫자 풀이에 며칠 밤낮을 바치고 문제를 푼 것이 너
무 기뻐 유레카를 외치며 허겁지겁 달려왔는데, 수아가 너무 성
의 없이 대답해 자존심이 상했다
아참, 그랬던가요? 네, 아마 그게 그러니까
확실히 해요.
사실 누군가 이걸 풀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거든요. 솔
직히 무슨 의미가 있을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구요.
그럼 빈말이었어요?~
아녜요, 제 얘기는 시간이 약간 걸릴지도 모른다는 그런 뜻이
에요.
그럼 연락 줘요.
간단한 인사와 함께 다소 냉랭한 표정으로 일어서는 테드의
뒷모습을 보면서 수아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