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8월 14일(비)
아침에 일어나니 비가 내리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 달리기를 하는 동안에도 비가 내리지 않아 비가 오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기대가 앞선다. 오늘만은 일찍 출발하려고 아침부터 서둘렀지만 그리 효과가 없었다. 오늘의 답사는 어제 보기 위하여 절 앞에까지 갔다가 날씨가 허락치 않아 포기한 장육사와 화수루 그리고 유금사이다. 시간이 허락하면 불영사을 볼 예정이다. 장육사로 가는 동안 잠깐이나마 햇빛이 보이기도 하였다. 오늘은 오랜만에 가벼운 마음으로 답사를 할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도 잠시 곧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장육사는 어제 답사하였던 인량리에서 안으로 약 10km 정도 더 들어가면 있다. 장육사와 화수루는 지근간에 있다. 화수루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장륙사가 있어 장륙사를 보고 나오는 길에 화수루를 보기로 하였다.
한국사찰사전에 의하면 1355년(공민왕 4년)에 청수면 출신의 나옹 혜근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혜근의 행적을 살펴보면 1347년(충복왕 3년)에 중국으로 건너가 1358년(공민왕 7년)에 귀국하였다. 이것을 보면 혜근이 창건하였다는 것은 잘못되었거나 시기의 기록이 잘못 되었을 것이다. 이 절의 대웅전 안에 들어가 보면 대웅전 우측 후벽에 나무나옹선사(南撫瀨翁禪師)라는 위패를 모시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나옹선사가 창건한 것은 맞지만 창건시기를 잘못 오기하였을 것이다. 절로 들어가는 길은 새로 설치한 계단을 따라 올라가다 강당 건물인 흥원루를 밑을 지나 대웅전으로 들어가도록 되었다. 새로이 설치한 계단이 기계로 다듬은 티가 너무 강하여 오랜 된 흥원루와 대비되어 보이는 것이 아무래도 눈에 설익어 보인다. 답사여행의 길잡이라는 책에 의하면 흥원루는 다른 곳에서 이건하였다고 하는데 영덕의 문화재 담당관은 원래의 것이라고 한다. 어느 말이 맞는지는 자료를 더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집의 양식으로 보아 흥원루는 그리 오래된 집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대웅전과 비교하여 보아도 부재는 많이 상하였지만 공포 등의 수법이 오래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현재 흥원루는 매우 낡아서 손을 많이 보아야 할 것 같다. 곳곳이 썩어가고 있으며 기둥의 하부도 갈아 끼운 부분이 많은데, 이 부분 또한 쳐지고 있다. 맞배지붕인 흥원루의 옆으로 빠져 나온 도리 또한 많이 쳐져서 지붕선을 잃어버렸다. 이러한 처짐은 대웅전에서도 마찬가지여서 개보수 여부를 영덕의 문화재 담당관에게 물어보니 계획은 있다고 하였다. 어찌하였든 더 이상 방치하기에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문화재청 자료를 검색하여 보니 1987.10-1988.01에 걸쳐 수리가 있었다. 수리내용은 대웅전이 서까래 및 기와교체, 기단바닥 해체보수이고 흥원루가 지붕해체보수, 기둥 4개소 도리 1개소 및 서까래보수, 기와교체 등이었다. 영덕군청의 이야기로는 흥원루는 내년에 보수예정이라고 한다.)
흥원루와 대웅전(지방유형문화재 제 138호)은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 번째는 방풍벽을 설치할 때 일반적으로 도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데 이곳에서는 도리부분을 도려내어 도리가 외부로 노출되도록 하였다. 두 번째 특징은 화반(花盤)에 문양이 없고 사각형 판재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이것을 알 수 없었으나 대웅전을 보면서 화반에 용면(용의 정면관)이 그려져 있어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어서 자세히 보다보니 화반이 다른 곳과는 달리 사각형 판재로 되어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꽃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여 화반이라고 하는데 그러한 점에서 보면 화반이라고 불리는 것도 이상할 정도이다. 흥원루에는 단청이 없어 화반의 형태를 명확히 볼 수 있다. 대웅전은 정면과 측면이 각 3칸의 건물로서 맞배지붕으로 되어있다. 조선 후기의 건물이고 공포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주심포의 건물이다. 조선조 세종 때 불에 타서 중건한 것이 임진왜란 때 다시 훼손되었다가 중건한 것을 광무 4년(1900년)에 수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의 상태를 보면 1900년에 수리한 것은 수리라고 보기에는 중건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공포의 형식이 시대가 한참 아래로 내려온 듯하기 때문에 아마도 거의 중건에 가깝도록 대대적으로 손을 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대웅전에서 눈에 띠는 것은 단청이다. 단청의 색깔이 매우 화려하면서도 차분할 뿐만 아니라 선들이 정확하게 살아있어 매우 아름답게 보였다. 특히 기둥머리초가 아름다워 한참을 보았다. 누구의 솜씨인지 매우 궁금하여 절의 주지에게 물어보아도 자신은 작년에 온 터이라 절의 내력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한다고 하신다. 영덕군청에 문의하여 본 결과 자신이 이곳에 부임한지 10년이 넘었는데 그 이후로 단청을 손본 적이 없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수리부분에도 단청을 새로 하였다는 언급은 없는 것으로 보아 원래부터 있었던 단청에 필요한 부분만 보수한 것으로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 같다. 하여간 매우 인상적인 단청임에는 분명하다.
대웅전 안에는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이 중에서 좌협시 보살이 보물로 지정된 건칠불이다. 건칠불은 종이로 만든 불상으로 문화재로 등재된 것이 기림사건칠불(보물 제415호)와 전라남도 심향사의 아미타여래좌상(유형문화재 제99호)과 장륙사보살좌상까지 세 구 밖에 없어 희귀성으로 주목받는 불상이다. 특히 불상 안에서 발원문과 개금묵서명(改金墨書銘)이 나와 태조 4년(1395년) 영해부의 관리들과 마을사람들의 시주로 만들었고 태종 7년(1407년) 개금하였음이 밝혀졌다. 문화재청 자료에 의하면 개금기에 '위장사(葦長寺) 선당(禪堂)의 관음보살을 개금한다.'라고 적혀있어 원래는 영해도호부 용두산 위장사에 봉안된 보살이었던 것을 언젠가 이곳으로 옮겨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상호를 보면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철불의 얼굴의 흔적을 읽을 수 있어 시대의 조류를 읽을 수 있었다. 수인은 아미타인으로서 중품중생의 수인을 하고 있다. 자료에 의하면 이 불상은 이 지역에서 후대에 만들어진 대구 파계사 목조관음보살상(1447년), 영천 은해사 운부암 청동보살좌상(1516년)과 연계하여 볼 필요가 있다고 한다. 보살상을 자세히 보면 개금이 너무 두껍게 되어있어 원래의 선들이 살아나고 있지 못함을 느낄 수 있었다. 최근에 개금한 것인지 또는 원래의 개금 상태인지는 모르겠지만 개금의 솜씨가 그리 좋지는 않아 보인다.
장륙사의 답사를 마치고 조금 아래에 있는 화수루(花樹樓:지방유형문화재 28호)로 향하였다. 화수루는 전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2층의 누각건물이다. 옆의 방풍널은 장륙사처럼 도리부분이 노출되어 있다. 화수루는 어제 들렸던 인량리에 정착한 3문중 하나인 안동 권씨의 재실(齋室)로 쓰인 건물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문중의 공부방이었다. 이 건물은 명종 8년(1553년)에 권희원이 지었다고 한다.(화수루문화재수리보고서,1988.) 권희원은 조선 단종 폐위 때 단종의 외조부인 화산부원군 권전의 일가 중 유일하게 살아남아 13세에 이곳으로 귀양온 종손 권오봉의 증손자이다. 화수루는 ㅁ자 건물로서 앞에는 누각이 뒤쪽에는 방으로 구성되어있다. 앞에서 볼 때 좌측에는 창고와 부엌이 있고 우측은 방과 고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창고는 현재 구획이 없으나 자세히 보면 다락을 들였던 흔적이 보인다. 진입은 누하진입을 하여야 하는데 매우 낮아 키가 큰 사람은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우리 막내와 비교하여 보니 2층 바닥까지의 높이가 2m 정도 밖에 안되는 것 같다. 우물마루의 동귀틀의 두께를 제외하면 1.8m도 채 안되어 보인다. 강당은 누각 2층에 있고 5칸 건물에 가운데 세 칸은 우물마루이고 좌우측으로 전면 1칸 깊이로 2칸의 온돌방이 있다. 방의 상부에는 횟대가 걸려있고 책상이 몇 개 남아 있다. 2층의 온돌방은 중정에서 불을 지피게 되어있고 굴뚝은 전면 쪽으로 노출되어 있다. 현재는 굴뚝 상부가 없으나 그런 대로 어울리는 모습을 하고 있다.
좌측의 부엌은 외양간과 연결되어 있는데 중정으로 면한 모서리에는 코쿨이 있어 중정에 빛이 비추도록 되어 있다. 화수루의 중정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로서 이지만 측면의 경우 한칸은 반칸의 규모이고 칸의 넓이도 좁아 2칸 정도의 폭 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다. 밖에서 보는 건물의 규모에 비하여 중정이 작아 매우 답답하게 느껴진다. 뒤쪽에는 2칸의 고방이 있는데 고방의 창이 특이하다. 문의 크기가 매우 작고 창살은 나무가지를 다듬지 않고 자연상태의 나무가지를 적당히 다듬어 만들어 놓았다.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형식이다. 고방의 중정 쪽은 반칸 안으로 들여 밀어 퇴로 만들었다. 누마루로 올라가는 계단이 우리네의 텁텁함이 배어 느껴지도록 맛깔스럽게 만들어졌다. 2개의 통나무를 한 몸으로 만들어 굵기를 키워 놓고 이를 거칠게 가공하여 계단으로 만들었다. 병산서원의 만대루를 올라가는 계단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 놓았다. 매우 간결하면서도 기능적인 모습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누각의 방과 마루사이 그리고 아래층 온돌방에는 언제 본 만괴당의 사랑채처럼 조그만 창을 상부에 만들어 놓았다. 이 역시 이곳만의 특징인가 싶다. 화수루의 2층에 설치된 판장문에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특징이 있다. 문짝이 만나는 가운데 부분에 문선이 서있어 문틀을 둘로 나누고 있다. 이것은 고식으로 이러한 양식은 임진란 전까지 주로 사용하던 기법이라고 한다. 답사여행의 길잡이(경북북부)에서 화수루를 1676년에 창건하였다가 화재로 전소되자 1693(숙종 19년)화수루를 다시 지은 것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문틀의 기법을 보면 아마도 처음 만들어진 것은 앞서 소개한 대로 명종 8년에 만들어졌다는 것이 맞을 것 같다.
현재 화수루의 관리상태는 너무 부실하여 목조 부재 곳곳이 썩어가고 있다. 중정 부엌 쪽의 지붕일부는 석까래가 썩어 무너져 내렸다. 이것은 ㅁ자 구조로 되어 있는 집임에도 불구하고 환기를 시키지 않아 제습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고 있었다면 들고나며 자연스럽게 환기가 됐을 터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아 문을 꼭 걸어 잠가 두었으니 환기는 꿈도 못꾼다. 환기가 되지 않으니 습기가 차게 되고 당연히 나무의 보존상태가 좋을 수 없다. 이층 누마루의 바닥도 너무 썩어가고 있다. 가끔 환기만 시켜도 이렇지는 않을 터 너무 외진 곳이라 관심조차 두지 못하는 것 같다. 또한 집의 벽체 몇 곳도 흙이 흘러내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시급한 보수가 필요한 상태이다. (집으로 돌아와 영덕군청에 확인한 결과 금년 말에 수리 예정이라고 한다. 옆에 있는 까치구멍집은 내년에 보수계획이라고 한다.) 화수루의 답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옛날 이곳으로 공부하러 오는 마음을 어떠하였을까 생각하여 보았다. 화수루는 계곡의 물을 바라보면서 서있다. 이곳까지 들어오는 경치는 아주 빼어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런 대로 아름다움을 가지고있는 곳이다. 그러나 화수루를 들어서는 순간 답답함에 가슴이 꽉 막혀버리는 것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곳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생각하여 본 것이다. 혹시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을까. 아니면 이곳에 들어온다는 것 자체가 문중에서 선택받았다는 의미가 있으므로 자부심을 가지고 공부하였을까. 집의 구조를 보면 공부시키기 위하여 만든 유배지와 같다는 느낌이 든다. 이곳의 분위기를 아는 사람은 마치 감옥으로 끌려가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혈기왕성한 시절에 이곳에서 공부하려면 웬만한 참을성 아니면 공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화수루 옆에는 화수루를 관리하던 사람이 기거하던 까치구멍집(지방민속자료 제 2호)이 있다. 집은 겹집의 구조를 하고 있으며 봉당에 외양간을 들인 구조이다. 그간 까치구멍집을 자료로서는 많이 접하였지만 직접 본 것은 강원도 고성의 어명기가옥과 이 집뿐이다. 까치구멍이라는 것은 온기를 활용하기 위하여 별도로 굴뚝을 만들지 않고 지붕에 조그마한 구멍을 내어 배기하도록 되어 있는 집이다. 구멍이 그리 크지 않고 조그마한 새가 드나들 만한 정도의 구멍이 나있어 까치가 드나드는 구멍이라는 뜻의 까치구멍집이라고 불린다. 집의 구조는 田자 구조의 겹집이다. 앞서 말한 어명기 가옥도 겹집의 구조로 되어 있다. 까치구멍집의 평면은 밭 田자를 두 개 붙여 놓은 형태인데 한쪽 田는 방과 마루가 들여져있는데 입구 쪽 모서리 부분을 마루로 만들고 나머지 3칸을 방을 들였다. 뒷편의 구석은 고방으로 사용하는데 안방에서만 들어갈 수 있다. 앞쪽 마루 옆에는 봉당을 붙여 놓았고 봉당 바로 옆에 외양간을 집안으로 들여놓았다. 봉당과 외양간 뒷편에 2칸의 부엌이 붙어 있다. 이러한 집이 구조를 겹집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겹집은 강원도 산골과 함경도 지역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이러한 구조는 추위에 견디기 위하여 집의 표면적을 최소한으로 줄이려는 지혜에서 나온 구조이다. 남쪽으로 한참 내려온 영덕까지 이러한 집의 구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산곡에 위치한 이곳의 겨울 날씨도 그리 만만하지 않은 것 같다. 부엌의 모서리에는 아까 화수루에서 본 것과 같은 코쿨을 만들어 놓았다. 집안에서 본 까치구멍은 밖에서 본 것처럼 깨끗하게 마무리되어 있지 않았다. 아마도 개보수할 때 참여하였던 기능공의 솜씨가 예전과 같지 않아 까치구멍을 잘 만들 수 없었나 보다. 이 집도 옆의 화수루 만큼은 아니지만 많이 손을 보아야 할 것 같다. 역시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수명을 보장할 수 없다. 사람이 살면서 불도 지피고 손때도 묻히고 하여야 집도 숨을 쉬는데 그렇지 않으니 쉽게 망가지고 있다.
까치구멍집의 답사를 마치고 다음 답사지인 유금사(有金寺)로 향하였다. 영덕에서 울진으로 가다 보면 울진군과 경계지점에 거의 다 와서 좌측으로 접어들어 가는 길에 돌로 만들어놓은 유금사 표지판이 있다. 이 표지판은 아까 울진에서 영덕으로 올 때 보아두어 길을 찾는데 그리 어렵지 않았다. 유금사로 가는 길은 편한 길이 아니었다. 지금의 길은 산림을 관리하기 위해서 만든 비포장인 임도(林道)이다. 이 길을 따라 약 3㎞정도를 가면 유금사에 이른다. 옛날에는 계곡을 따라 올라왔을 것이다. 꽤나 깊이 들어가서 이런 곳에 절이 있을까 싶었는데 찾아 들어가 보니 오히려 큰 마을이 있었다. 지금은 폐교가 되었지만 규모가 제법 되는 학교 건물도 보이는 것으로 보아 한때는 꽤 큰 마을이었던 것 같다. 유금사는 마을 뒷 쪽 언덕에 있다. 사찰사전에 의하면 유금사는 637년(선덕여왕 6년)에 왕명으로 자장(慈藏)율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조선중기까지도 대웅전, 종각, 장화부인신령각 등을 갖추고 있었고 승려도 수십에 이르렀다고 한다. 수해로 폐사된 후 중건되었으나 소실되었고 1627년(인조 5년)다시 중창하였다고 한다. 그후 1858년에 중수하였다가 1908년 법당만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다고 한다.
절 앞에 차를 주차시키고 돌아보니 절이 매우 깨끗하고 정갈하였다. 아마도 비구니 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알아보니 비구니 절이라고 한다. 절을 돌아보면 비구의 절과 비구니의 절이 현격하게 차이가 난다. 비구니의 절은 깨끗하고 주변이 잘 정리되어 차분한 느낌이 가득하다. 이에 비하여 비구의 절은 심하게 말하면 홀아비집을 들어가는 느낌이다. 여성의 섬세함이 절 집에서도 사라지지 않는가 보다. 새로 만든 일주문은 영 격에 어울리지 않는다. 기분 같아서는 부셔버리고 다시 만들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유금사삼층석탑(보물 제 674호)은 대웅전 뒤쪽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는 대웅전 앞에 있었던 것을 대웅전 뒤쪽으로 옮긴 것이라고 한다. 옮긴 시기는 여러 자료를 찾아보아도 명확하게 나와 있지 않다. 탑은 전형적인 신라의 석탑형식을 보여 준다. 다만 탑 전체의 크기가 그리 크지 않고 지붕돌 받침이 4단으로 줄어들고 지붕돌의 반전이 있는 것과 2층 기단의 갑석이 많이 돌출된 점들이 보아 신라시대 하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 같다. 갑석의 상황으로만 본다면 고려시대 초까지 시대를 낮추어 볼 수 있으나 앞의 배례석을 볼 때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문화재청 자료에도 신라시대 말에 만든 탑이라고 한다. 다른 탑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특징 중하나가 탑신석에 체감이 있는 것이다. 탑신석에도 체감을 주어 상승감을 보다 강조하고 있다. 전반적인 비례감이 훌륭한 탑이다.
탑을 둘러보니 많이 주저 않았다. 특히 초층기단이 많이 주저앉아 보이고 2층 기단의 면석이 많이 기울어져 보수가 시급하게 보인다. 돌아 문화재청 자료를 보니 유금사 삼층석탑의 보수라는 명목으로 두 권의 보고서가 보인다. 한번은 1991년 8월에 시행된 해체보수이고 두 번째의 것은 97년도에 시행한 보고서인데 이 보고서는 유금사의 삼층석탑의 주변환경을 개선한다는 명목으로 요사채 개축한 것이다. 두 번째의 경우는 석탑과는 관계없는 것이니 실제적으로 삼층석탑을 보수한 것 1991년이다. 돌아와서 문화재청의 홈페이지의 사진자료와 내가 찍은 사진을 비교하여 보니 기단부의 상태는 예전의 것과 비슷한데 2층 면석은 더 많이 기울어져 있는 것 같았다. 1991년도의 개략 보고서에 의하면 석탑을 해체 보수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보수한지 10년 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상태가 나아진 것 같지 않으니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이러한 식으로 문화재를 보수할 것이면 차라리 보수하지 않는 것이 나을 것이다. 문화재환경을 보전한다는 미명하에 절의 요사채를 신축하는데 국가의 예산을 낭비하면서 정작 문화재는 이렇게 망가져 가고 있는 현실이 개탄스럽기만 하다.
아쉬움만이 가득하였던 유금사의 답사를 마치고 불영사로 향하였다. 불영사계곡은 명승 6호로 지정된 곳이다. 운전하면서 보아도 그야말로 명승이라고 할 만하였다. 불영사 앞에 도착하니 비가 더욱 세차게 내린다. 내려서도 꽤 걸어가야 한다고 하여 할 수 없이 내일을 기약하고 발길을 돌렸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불영사 계곡입구에 있는 성류굴이나 볼까하고 들렸더니 이곳도 그간의 비로 굴 내부에 물이 차서 관람이 어렵다고 하였다. 그냥 숙소로 가기는 무엇하여 근처에 바닷가에 있는 망양정(望洋亭)으로 향하였다. 망양정의 풍광은 관동팔경 중 하나라고 하고 송강 정철(松江 鄭澈:1536-1593)이 쓴 관동팔경에도 이곳이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송강의 망양정과 지금의 망양정은 위치가 다르다. 원래 이곳에서 15㎞ 남쪽인 기성면 망양리 현종산 기슭에 있었던 것을 1858년 울진 현령 이희호가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아마도 현감이 아래까지 가기가 힘들기 때문에 읍내에 가까운 이곳으로 옮긴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현재의 건물은 1958년에 짓고 1979년에 보수한 것이라고 한다. 망양정 바로 아래쪽에도 횟집이 잔뜩 들어서 있고 멀리 보이는 풍광도 횟집일색이니 이곳에서 송강이 읊었던 시(詩)의 느낌이 들기는 힘들 것이다. 이렇다 하여도 망양정에서 보는 풍광은 넓은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것이 가슴속까지 시원하게 느껴진다. 날이 화창하였더라면 더욱 시원함을 깊게 느꼈을 터이나 잔뜩 찌푸린 하늘 때문에 더 이상의 감흥을 느낄 수 없다. 하여간 이번의 답사는 무엇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다. 어쩔 수 없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숙소로 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