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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명품 베스트10'
동네방네
2005/10/26 07:36 http://blog.naver.com/yeegangsan/20018464417 |
중앙박물관 '명품 베스트10' 2005/10/24 14:00 | 추천 0 스크랩 9 |
10월 24일자로 발행된 '국립중앙박물관 개관특집 섹션'에 실렸던 글의, 신문에 싣기 전 원문입니다.
박물관은, 더구나 국립박물관은 한 나라의 문화를 상징하는 얼굴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박물관은 너무나 오래도록 많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협소한 공간 때문에 제대로 된 전시를 할 수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무려 일곱 번이나 15만점의 유물을 들고 대이동이라는 큰 일을 치러야 했습니다. 전시와 교육 기능보다는 이사 기능에 익숙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제 10월 28일, 우여곡절 끝에 용산에 큰 박물관이 문을 엽니다. 학창시절 때, 경복궁에 있을 때, 다 가 봤다고요? 아마도 제대로 본 분들은 드물 겁니다. 다시 가 보십시오. 한 번 관람료 단돈 2000원, 멀지도 않습니다. 서울 한복판 용산입니다. 가서 일부만 천천히 보고 언제든지 또 가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아무리 건물로 세계 6위의 큰 박물관이라 해도 사람들은 그대로입니다. 시설이 좋아졌다고 마인드가 갑자기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행여 찾아가서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겪으셨다고 해도 너무 언짢아하지 마십시오. 서서히 바뀌어 나가겠지요. -----------------------------------------
조선일보는 용산 새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시 유물 1만여점 중에서 ‘명품(名品) 중의 명품’을 골라 ‘베스트 10선(選)’을 선정했습니다. 선정 방법은 전문가 1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였습니다. 이 리스트는 독자 여러분의 관람에 하나의 참고가 되기 위한 것일 뿐, 결코 절대적인 기준은 될 수 없습니다. 진정한 감동은 유물과 그 유물을 관조하는 사람 사이의 들리지 않는 대화에서 비롯되는 것이니까요. ◆설문에 응답해 주신 분(가나다순)=강우방(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 김병종(화가·서울대 미대 교수), 김순응(K옥션 사장), 안휘준(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유홍준(문화재청장), 이주헌(미술평론가), 전영우(한국민족미술연구소장), 조유전(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지건길(전 국립중앙박물관장), 황평우(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
①반가사유상 金銅半跏思惟像 | 국보 83호 | 삼국시대(7세기 전반) 한 마디로 국립중앙박물관을 대표하는 걸작 중의 걸작! 완벽한 조형성과 철학적·종교적 깊이로 동양미술사의 기념비적 작품이라 평가 받는 이 불상은 독립된 방에 홀로 전시되는 호사를 누리게 된다. 미술사가 최순우는 이 불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슬픈 얼굴인가 하고 보면 그리 슬픈 것 같이 보이지도 않고, 미소 짓고 계신가 바라보면 준엄한 기운이 입가에 간신히 흐르는 미소를 누르고 있어서 형언할 수 없는 거룩함을 뼈저리게 해 준다.” 박물관의 유물 설명도 이례적으로 시적(詩的)이다. “입가에 머금은 생기 있는 미소, 살아 숨쉬는 듯한 얼굴 표정, 부드럽고 유려한 옷 주름, 상체와 하체의 완벽한 조화, 손과 발의 섬세하고 미묘한 움직임 모든 것들이 이상적으로 표현됐다.” 높이 90.9㎝의 이 금동미륵불은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에 걸치고(반가·半跏) 오른 무릎 위에 올려놓은 오른팔로 턱을 괸 채 깊은 생각(사유·思惟)에 잠겨 있다. 일본의 국보 1호인 교토 코류지(廣隆寺)의 목조 반가사유상과 꼭 닮아 고대 한국문화의 일본 전파를 입증하는 유물로 여겨져 왔다. 제작지가 백제인지 신라인지는 아직 결론 나지 않았다. 국보 78호인 다른 반가사유상과 쌍벽을 이루고 있으나 좀더 해맑은 미소와 꾸밈없는 소박함, 입체적 조형이라는 ‘작은 차이’가 이 불상을 먼저 꼽게끔 했다.
②김홍도 풍속도첩 風俗圖帖 | 보물 527호 | 조선(18세기) 이 화첩의 그림들 중 낯익은 작품이 한 점도 없다면 아마도 거짓말일 것이다. 막 넘어뜨리려는 찰나의 팽팽한 긴장감이 표현된 ‘씨름’, 신분 차이와 노동의 미묘한 갈등이 오히려 해학적으로 표현된 ‘벼 타작’, 제자를 바라보는 스승의 따뜻한 마음이 우러나는 ‘서당’.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1745~?)의 이 작품들이 다 여기에 있다. 이 그림들을 실제로 본 사람들은 가로 22.7㎝, 세로 27㎝라는 의외로 작은 크기에 놀란다. 사실 여기에 그렇게도 많은 등장인물의 다양한 표정과 동작, 풍부한 정서와 흥취를 담아냈다는 것은 실로 경악스런 일이다. 18세기 조선, 서민들의 일상 생활을 디카로 찍어내듯 생생히 드러내면서도 구수한 한국적 감성을 물씬 살린 이 그림들에 그 시대의 사람들도 “너무나 현실과 비슷하면서도 재미있어 깔깔대며 웃었다”고 말했을 정도다. 심지어 ‘정조 임금에게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국정 보고서’였다는 설도 있다. 소설가 김훈이 ‘기와 올리기’를 보고 “먹줄 치는 목공의 자세는 나이테 동심원의 안쪽처럼 고요하다”며 거장(巨匠)의 세계를 이야기한 것처럼, 이 스물 다섯 점의 그림들은 또한 끊임없는 재해석과 영감의 원천이기도 하다.
③백제 금동대향로 百濟金銅大香爐 | 국보 287호 | 백제(6~7세기) 1993년 12월 12일, 충남 부여 능산리 절터의 물구덩이에서 이 엄청난 유물이 기적처럼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윤무병 문화재위원은 “지금까지 출토된 백제 유물 중 단연 최고”라고 말했고, 이규태 조선일보 논설고문은 “동서고금에 이보다 더 정교하고 섬세한 향로는 없을 것”이라고 썼다. 높이 61.8㎝나 되는 큰 향로는 유례가 없는데다, 촘촘히 표현된 74개의 산봉우리, 6그루의 나무, 12곳의 바위, 39마리의 동물, 16명의 인물상이 보는 이의 넋을 빼앗았던 것. 그저 멀리서 지켜만 봐도 이 향로는 감탄과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받침에선 다리 하나를 치켜들고 있는 용이 갓 피어나는 연꽃 봉오리를 입으로 받치면서 우아한 곡선을 만들어내고, 그 위 신산(神山) 꼭대기에는 봉황 한 마리가 날개를 활짝 펴고 서 있다. 향로의 연기는 봉황의 가슴과 뚜껑에 뚫린 12개의 구멍으로 피어 오르도록 고안됐다. 연꽃에 담긴 불교 사상과 삼라만상을 음양의 조화로 구현한 도교 사상을 함께 표현한 이 명품은, 아마도 백제 멸망 당시 누군가 급하게 땅 속에 파묻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1300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 녹슨 흔적 하나 없이 발견된 것이다.
④황남대총 금관 金冠 | 국보 191호 | 신라(5세기) 신라 ‘황금 문화’를 상징하는 데 금관만한 유물은 없을 것이다. 힘과 권위를 상징하는 그 화려함 때문일까, 함께 출토된 금제 허리띠와 함께 새 박물관 ‘독방’에서 전시된다. 다른 나라에서 결코 찾아볼 수 없는, 나뭇가지 모양과 사슴뿔 모양의 세움장식이 잘 드러난 신라 금관의 ‘표준형’. 곱은옥(曲玉)과 달개(瓔珞·둥글게 오려낸 금판을 금실에 꿴 것) 같은 장식품도 호화로운데, 바람이 불면 달개가 움직이면서 햇빛을 받아 찬연한 빛을 발하게 된다. 그렇다면 신라의 왕들은 정말로 이 금관을 썼을까? 실용품·장례용·의례용이라는 세 가지 설이 있지만 아직 의문은 남아 있다. 또 하나의 미스터리는 이 금관의 주인이 여성이었다는 것. 어느 왕비의 무덤으로 알려진 황남대총 ‘북분’에서 나왔다. 반면 내물왕이나 실성왕으로 추정되는 왕의 무덤 ‘남분’엔 금관이 없었다. 혹시 신라 여성들의 지위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높았던 것은 아닐까?
⑤말 탄 사람 토기 騎馬人物形土器 | 국보 91호 | 신라(5~6세기) 얼핏 보아 장난감처럼 소박하게 생긴 이 토기는 고대인들의 기마 풍습과 복식, 무기, 마구(馬具), 공예의장을 연구하는 데 무척 중요한 자료가 되는 유물이다. 자세히 보면 안장과 재갈, 삼각모와 갑옷·발걸이 같은 세부 표현이 상당히 정교하다. 그러니까 삼국시대가 배경인 사극을 고증할 때 이 유물을 보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말 앞가슴에 튀어나온 대롱으로 볼 때 주전자이며, 경북 경주 금령총에서 나온 것으로 볼 때 죽은 사람의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해 주는 의식용 그릇으로 볼 수 있다. 돈키호테와 산초의 모습이 이랬을까? 주인과 하인으로 생각되는 두 기마인물의 토기가 한 쌍을 이루고 있다. 높이는 주인상 23.4㎝, 하인상 21.3㎝다. 머리엔 수건을 동여맨 채 손에 방울을 들고 등에는 짐을 멘 하인은 먼 길을 떠나는 주인의 길 안내를 맡은 듯하다. 그런데 도대체 어디로 떠나고 있기에 사람도 말도 이렇게 느긋한 걸까?
⑥경천사 십층석탑 敬天寺十層石塔 | 국보 86호 | 고려(1348년) 그것은 실로 비운(悲運)의 ‘떠돌이 탑’이자 우리 문화재 수난사의 상징이었다. 1909년 일본인에 의해 제멋대로 분해돼 불법 반출된 뒤 10년 만에 다시 돌아왔지만 이후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방치돼 있었다. 1960년 경복궁 뜰에 세워졌으나 1995년 다시 해체돼 10년 동안 210군데를 손질하는 ‘대수술’을 겪었다. 그리고 지난 8월 새 박물관 1층 복도 끝에 안치돼 유랑의 세월을 끝냈다. 대리석 재질, 높이 13.5m, 무게 110t의 그 위용은 이곳에서 비로소 빛을 발한다. 당대 최고 수준의 건축과 공예 기술이 집약된 이 탑은 전체에 빈틈없이 새겨진 정교한 조각상이 가까이서 본 관람객들을 경탄케 한다. 목조 건축의 형식을 돌 위에 표현한 지붕의 자태는 무척 도도하고, 아(亞)자형 평면 위에 복잡하게 펼친 구조는 현란하다. ‘라마탑의 영향’이라는 통설과는 달리 최근엔 우리 고유의 미적 감각을 재현한 걸작이라 평가된다.
⑦반가사유상 金銅半跏思惟像 | 국보 78호 | 삼국시대(6세기 후반) 살포시 눈을 감고 깊은 철학적 명상에 빠진 모습이 국보 83호 반가사유상과 닮았지만, 그 표정은 훨씬 성숙해 보이면서 깨달음의 경지에 가까이 다가간 느낌을 준다. 태양과 초승달을 결합한 장식이 솟아 있는 화려한 보관(寶冠), 가느다란 듯 힘이 넘치는 신체의 곡선, 천의(天衣) 자락과 허리띠의 율동적인 흐름, 높이가 82.9㎝나 되는데도 두께를 2~4㎜로 유지한 고도의 주조 기술. 미술사학자 강우방은 “언뜻 고요해 보이지만 위대한 보살 정신의 생명력을 역동적으로 표현한 기념비적 작품”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불상을 고구려에서 만든 것으로 보지만 백제설·신라설도 여전히 엇갈리고 있다. 양쪽 치마 끝자락 일부는 안타깝게도 파손된 상태다. 이 명품은 박물관 개관 직후엔 볼 수 없다. 독방 전시실에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이 먼저 전시되고, 그 자리에 ‘더블 캐스팅’된 이 78호 불상은 6개월 뒤에 교체돼 관람객과 만난다.
⑧‘연가칠년’이 새겨진 부처 延嘉七年銘金銅佛立像 | 국보 119호 | 고구려(서기 539년) 이 고구려 불상은 흥미롭게도 1963년 경남 의령에서 발견됐다. 처음엔 ‘6·25 전쟁 때 집에서 호신불을 가져온 북한군이 파묻었을 것’이란 추측도 있었지만 높이 16.2㎝의 작은 불상이라 삼국시대 당시에 신라 땅으로 전파됐을 수 있다. 뒷면의 명문을 해석하면 539년(안원왕 9년) 평양의 동사(東寺)에서 만든 천불(千佛) 중에서 29번째 부처로 보인다. 살짝 숙인 고개, 도톰한 연꽃대좌와 타오르는 듯한 광배의 불꽃 무늬가 고구려 불상의 특징을 보여준다. 1967년 덕수궁미술관 전시 당시 감쪽같이 도둑맞았다가 한강 철교 아래서 되찾은 일화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연가’란 무엇일까? 그것이 기록에 남아있지 않은 고구려의 연호라면 고구려가 독자적인 천하관(天下觀)을 가진 나라였다는 방증이 된다. 불상의 모호한 미소 속에 중국의 역사 왜곡에 대한 준엄한 꾸짖음이 담겨 있다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⑨산수무늬 벽돌 山水文塼 | 보물 343호 | 백제(7세기) 상상이 가는가? 옛날 백제인들이 이런 벽돌을 왕궁이나 절 바닥에 보도블록처럼 깔아 밟고 다니며 살았다니! 산봉우리는 구름인 듯 첩첩이 둥글둥글하게 솟아 있고, 흐르는 물과 소나무들은 질박하면서도 포근한 선경(仙境)을 이루고 있다. 충남 부여군 규암면 옛 절터에서 출토된 이 벽돌은 당시 백제에서 풍미하던 도교 사상을 표현한 것임이 확실해 보인다. 하지만 어찌 그것이 그저 이상향일 뿐이겠는가. 옛 백제 땅을 발굴하던 한 고고학자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여기선 바람도 물도 나무도... 꼭 산수문전 같아요.” 이 벽돌과 함께 보물로 일괄 지정된 다른 7점의 벽돌들도 잔잔한 감흥을 자아낸다. 힘찬 봉황과 기암절벽이 그려진 산수봉황무늬 벽돌, 도깨비로 잘못 알려졌던 짐승얼굴무늬 벽돌들은 백제 미술이 얼마나 우수한 것이었는지를 조용히 웅변하는 흔적들이다. 사람이 가고 사직이 망한 뒤에도 벽돌 몇 조각이 쓸쓸히 남아 가버린 시절의 영화를 말해주나니.
⑩청자 음각 연꽃넝쿨무늬 매병 靑磁陰刻蓮唐草文梅甁 | 국보 97호 | 고려(12세기) 청자 어룡모양 주전자(국보 61호), 청자 참외모양 병(국보 94호), 청자 칠보무늬 향로(국보 95호) 등 다른 청자들로 추천이 분산돼 10위에 그쳤지만, 사실 높이 43.9㎝의 이 대형 매병이야말로 고려청자 특유의 곡선미와 세련되고 은은한 비색(翡色)의 자태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명품이다. 부드러우면서도 풍만한 어깨, 유연한 허리, 좁아지다 살짝 벌어지며 안정감을 주는 곡선은 그 자체로 시각적 쾌감을 준다. ‘음각’이란 조각칼과 같은 도구로 그릇 표면에 홈을 내어 무늬를 새기는 방식. 이 청자에선 조각칼을 옆으로 뉘어 새겨 선이 굵어지고 반쯤 양각된 것처럼 보이는 11세기 중엽 이후의 기교가 잘 드러나 있다. 대범하게 그어진 넝쿨 무늬는 연꽃을 감싸면서 병이 이루는 곡선을 거스르지 않는 기막힌 조화를 이룬다. 2차원이 아니라 3차원 위에 새긴 무늬인 것이다. [출처] 중앙박물관 '명품 베스트10'|작성자 바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