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은 1970년대를 두고 “노동자의 죽음으로 시작해 노동자의 죽음으로 닫힌 시대”라 말했다고 한다. 선생님께서 전자의 시작을 알린 노동자의 죽음은 전태일이고, 후자의 시대를 닫은 노동자의 죽음은 여공 김경숙임을 알려주셨다. 그리고 전태일의 죽음이 시대의 각성으로 나타났다면, 여공 김경숙의 죽음은 시대의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음을 설명하셨다. 한 노동자의 죽음은 한 사람의 죽음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며, 나보다 먼저 저 이가 죽었구나 하고 애도와 공감의 울림을 주었다는 것이다.
YH무역의 21세 여공 김경숙은 1979년 8월 11일, '숨진 채 발견'되었다. 이는 YH사건, 혹은 YH 무역 여공 농성 사건이다. Made in Korea 가운데 가장 먼저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한 품목은 가발이었다. 가발 산업은 수십만 가닥의 머리카락을 일일이 손으로 심어야 하는 ‘수작업’이었기에 부지런하고 손재주 좋은 노동자를 수백만 명 거느리고 있던 우리나라에서 성장하기에 가장 적합한 산업이었다고 한다. 그 중에 YH가 있었다. 그러나 YH는 한국인 업체끼리의 제 살 깎아먹기 경쟁과 경영 부실에 더해, 해외로 돈을 빼돌려 그곳 한인회장까지 해먹은 장용호와 그 매부라는 경영진의 숫자 놀음으로 마침내 YH에 폐업 공고가 내려졌다. 하루아침에 해고 위기에 놓인 여성노동자 187명은 당시 야당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벌였다. 중학교 대신 공장을 가야했던 1970년대의 가난한 여공들이다. 숨지기 넉 달 전 여공 김경숙은 동생에게 “네 학비는 계속 대줄테니 열심히 공부해 훌륭한 사람이 돼라.”라는 편지를 부쳤다고 한다. 이러한 일화들을 통해 김경숙 뿐만 아니라 농성에 참여한 187명의 여공들 모두가 가족을 위해 꽃다운 시간들을 바친 여공들이었음이 짐작되는 바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농성은 생존권 보장을 위한 저항의 몸짓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농성 이틀째 오전 2시 경찰 1200명이 들이닥쳐 ‘101 진압작전’이라는 경찰 2명이 1명씩 체포하는 작전을 펼쳤고 여공 김경숙은 투신자살했다고 말해졌다. 사건 직후 여공 김경숙에 대한 경찰의 발표가 “진압 전 손목 끊고 투신”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망 전 손과 머리에 이미 치명적 상처가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고 한다. 그 외에도 죽음을 덮고 있는 무수히 많은 의혹들이 발견되면서 이후 이 사건은 노동자와 보수야당이 결집하여 반유신투쟁과 민주화운동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박정희 정권에 반대하고 나섰던 당시 신민당 총재 김영삼 의원의 국회 징계동의안이 통과되어 10월 4일 의원직을 박탈당한 김영삼 총재 제명 파동이 발생하였고, 부마항쟁과 10ㆍ26사태로 이어지면서 유신체제 몰락의 한 원인이 되었다.
먹고 사는 문제. 그것은 어떤 시대이든 이 땅 위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해결해나갈 숙제일 것이다. 어떻게 살아가며 숙제를 해결해나갈지는 사람마다 다른 문제이겠지만 적어도 올바르지 못한 것에 타협하며 굴복하는 삶은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족을 위해 헌신하며 살아온 여공들은 최소한의 생존권마저 박탈당한 채 자본주의와 공권력의 횡포에 짓밟혀 스러져야 했다. 무고한 사람들의 안타까운 죽음이 있었기에 현대의 사회도 세워질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이 얻고자 노력해온 가치들은 현대의 사회에서도 계속 이어져나가야 할 것이다. 체제 아래 주어진 편안한 삶에 안주하지 않고 늘 반성하는 태도로, 신념을 지키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느꼈다.
첫댓글 황소현 학생, 조사하느라 수고 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