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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론] 살사 음악 (4) - 역사 ㊤
6. 살사 음악의 역사
6.1. 살사 탄생 이전의 역사 : 1940~1970년대 뉴욕 시의 쿠바 댄스음악
'살사'는 1970년대 중반 뉴욕 시(New York City)에서 출현했고, 이후 라틴 아메리카(Latin American) 및 서반구(Western Hemisphere) 전역으로 퍼져나갔다.(주11) 그러나 "살사"(salsa)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수십년 전부터, 뉴욕에선 이 음악이 이미 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마치토(Machito: 1908[?]~1983)의 밴드 '아프로-큐반즈'(Afro-Cubans)가 기념비적 혁신을 통해 맘보(mambo)의 시대를 여는 데 기여한 1940년대부터 뉴욕은 쿠바 스타일 댄스뮤직의 중심지였다. 티토 푸엔테(Tito Puente: 1923~2000)도 자신의 성공적인 밴드를 결성하기 전에 잠시 동안 '아프로-큐반즈'에 몸을 담고 있기도 했다. 1950년대 초, 뉴욕에는 매우 인기 있는 3대 '맘보' 빅 밴드(big band)가 존재했다. 마치토와 '아프로-큐반즈', 티토 푸엔테, 티토 로드리궤스(Tito Rodríguez: 1923~1973)가 바로 그들이다. 몰론 다른 많은 밴드들도 활동했다.
뉴욕에서 '맘보'의 진원지는 무도장 '팔라디움 볼룸'(Palladium Ballroom:사진)이었다. '팔라디움 볼룸'은 그 전성기 시절 헐리웃(Hollywood)과 브로드웨이(Broadway)의 스타들을 끌어모았는데, 특히 수요일 밤에는 무료 댄스 교습도 제공됐다. '맘보' 음악 및 그것의 "종교적 사원"(temple)이었던 '팔라디움 볼룸'은 인종적, 민족적 통합 현상을 연출했다.
(동영상) 마치토와 '아프로-큐반즈'가 연주한 <맘보>. 재즈 섹소폰 주자 찰리 파커(Charlie Parker: 1920~1955)가 함께 한 연주이다.
'맘보'에 이어서 그 다음으로 미국을 강타한 쿠바 음악 "댄스 열풍"(dance craze)은 차차차(chachachá)였다. '차차차'는 쿠바의 차랑가(charanga: 현악기 기반 편성) 밴드들에서 시작됐지만, 뉴욕에선 관악기 기반 편성의 밴드들이 이 음악을 차용했다. 1960년대 뉴욕에는 몇몇 차랑가 밴드들이 있었고, 그 악단장들 중에는 훗날 '살사'의 아이콘이 될 조니 파치코(Johnny Pacheco: 1935년생), 찰리 팔미에리(Charlie Palmieri: 1927~1988), 레이 바레토(Ray Barretto: 1929~2006) 같은 인물들이 포함됐다. 몽고 산타마리아(Mongo Santamaría: 1917~2003)도 이 시기에 자신의 차랑가 밴드를 갖고 있었다.
'오르퀘스타 서브라임'(Orquesta Sublime)을 비롯한 여타 쿠바 차랑가 밴드들은 파창가(pachanga) 장르를 대중화시켰다. '파창가'는 뉴욕의 라틴 커뮤니티가 수입한 쿠바 대중 댄스로는 마지막 장르였다. 미국의 대-쿠바 금수조치는 쿠바와 미국 사이에 음악 및 뮤지션의 유입과 교류를 전면 중단시켰다(1962년).
쿠바 혁명(Cuban Revolution: 1953~1959) 이후 처음으로 탄생한 쿠바 댄스음악 장르는 모잠비크(mozambique)(1963년)였다. '모잠비크'는 단명했지만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모잠비크' 장르는 그 음악이나 댄스 모두 쿠바 바깥에서는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선 에디 팔미에리(Eddie Palmieri: 1936년생) 및 그의 밴드 '꼰훈또 라 뻬르뻭따'(Conjunto la Perfecta)의 멤버들은 단파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이 새로운 음악을 접했고, 마찬가지로 '모잠비크'라는 명칭으로 유사한 리듬을 만드는 데 영감을 제공했다. 쿠바의 '모잠비크' 리듬과 에디 팔미에리의 '모잠비크' 리듬은 공통점이 전혀 없었지만, 쿠바 망명자 중 일부 극우주의자들은 에디 팔미에리의 밴드가 동시대 쿠바 유행 음악을 연주한다고 생각하여 살해 위협을 하기도 했다.
'살사'가 출현하기 이전의 뉴욕에서는 라틴 음악 장르의 시대가 한번 더 있었다. 그 장르는 라틴 부갈루(boogaloo 혹은 boogalú)로서, 미국 내에서 자생적으로 출현한 [문화적] 혼성 음악이었다. 1960년대 중반 무렵에는 혼성적 성격을 지닌 '뉴요리칸'(Nuyorican: 뉴욕의 푸에르토리코인)이란 문화적 정체성이 출현했다. '뉴요리칸'은 주로 [미국령] 푸에르토리코(Puerto Rico) 출신 사람들이었지만, 여러 다양한 라틴 문화의 영향을 받은 동시에 아프라카계 미국인(African Americans: 미국 흑인) 공동체와도 밀접한 접촉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다.(주80) '부갈루'는 진정한 '뉴요리칸'의 음악으로서, 알앤비(R&B, RnB)와 쿠바 리듬이 섞이고 [영어와 스페인어가 섞인] 2중 언어적 혼성이었다. 1963년에 '부갈루' 장르는 두 곡의 히트곡을 빌보드 차트(Billboard charts) 탑20 내에 진입시켰다. 하나는 [1962년에 발표됐던] 허비 행콕(Herbie Hancock: 1940년생)의 곡 <워터멜론 맨>(Watermelon Man)을 이듬해 몽고 산타마리아가 재편곡해서 발표한 곡이었고, 다른 하나는 레이 바레토의 <엘 와투시>(El Watusi)였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 곡들은 '부갈루'의 기본 형식을 만든 음악이라고도 볼 수 있다. "부갈루"라는 말의 창시자는 아마도 1966년 무렵 리치 래이(Richie Ray: 1945년생)와 바비 크루즈(Bobby Cruz: 1937년생)일 것이다. 1960년대 '부갈루' 장르 최대 히트곡은 조 큐바(Joe Cuba: 1931~2009)가 자신의 밴드 '조 큐바 6중주단'(Joe Cuba Sextet)과 함께 발표한 <뱅뱅>(Bang Bang)이었다. 이 곡은 1966년 100만장 이상이 팔리면서 미국 라틴 음악으로선 전례없는 성공을 거뒀다. 이 인기 있던 캄보[밴드](combo)가 발표한 또 다른 히트곡으로는 <엘 피토>(El Pito)(1965년)가 있다. 그 밖의 히트곡으로는 조니 콜론(Johnny Colón: 1942년생)의 <부갈루 블루스>(Boogaloo Blues), 피트 로드리궤스(Pete Rodriguez: 1932년생)의 <아이 라익 잇 라익 댓>(I Like It like That), 헥터 리버라(Hector Rivera)의 <엣 더 파티>(At the Party) 같은 곡들이 있다. 조 바탄(Joe Bataan: 1942년생)과 르브론 브라더스(Lebron Brothers)도 '부갈루' 장르의 중요한 아티스트들이다.
(동영상) 몽고 산타마리아의 <워터멜론 맨>
조 큐바가 성공을 거뒀던 1966년 '팔라디움 볼룸'이 문을 닫았는데, 이유는 주류 취급 면허를 상실했기 때문이었다.(주81) '맘보'는 사라져갔고, 새로운 세대가 '부갈루', '잘라 잘라'(jala-jala), '싱어링'(shing-a-ling) 같은 자신들 고유의 장르를 들고 출현했다.(주81) 티토 푸엔테, 에디 팔미에리, 심지어는 마치토와 아르세니오 로드리게스(Arsenio Rodríguez: 1911~1970) 같이 좀 더 나이가 많았던 세대의 기성 악단장들은 '부갈루' 레코딩 시장 진출을 시도했다.(주82) 하지만 이들 기성세대는 반응을 얻지 못했다. 푸엔테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는때가 묻었었다. 시류를 좆아 '부갈루' 음악을 녹음했던 것이다."(주83)
젊고 시건방진 '부갈루' 세대가 늙은 경쟁자들을 압도했다. 조니 콜론은 <부갈루 블루스>가 미국 국내에서만 400만장 이상 팔렸다고 주장하기도 했다.(주84) 그렇지만 1960년대 말에 이르면, 기성 라틴음악 제도권에서 더 이상 '부갈루'를 방송하지 않으면서, '부갈루'는 사그라들었다.(주84) 윌리 콜론(Willie Colón: 1950년생)처럼 일부 젊은 '부갈루' 아티스트들은 그 다음 국면인 '살사' 시대로 이동했다.
1960년대 말에는 백인 젊은이들이 정치적 행동주의와 깊은 연관을 지닌 반[反]-문화(counter-culture) 운동에 합류하는 현상이 나타났고, 반면 흑인 젊은이들은 '흑표범당'(Black Panther Party: BPP) 같이 [흑인 민족주의(black nationalism: BN)에 기반한] 급진적 조직들을 결성했다. 이러한 운동들에 자극받아, 뉴욕의 라티노(Latino)들은 '영 로즈'(Young Lords: 최초에는 갱단이었으나, 극좌파 민권운동 및 인권운동 단체로 변신)를 조직했다. 이들은 흡수, 동화를 거부하고, "군사적 확신과 예술적 창의력으로 가득찬 구역(barrio)을 조성"했다.(주85) 이러한 사회적 변화의 음악적 측면은 쿠바의 손(son) 음악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손' 음악은 오랜 기간 푸에르토리코와 뉴욕의 도시인들에게 인기 있던 음악 형식이었다.(주86)
맨하탄(Manhattan)에 본사를 둔 '파니아 레코드사'(Fania Records)는 '살사' 제1세대의 여러 가수들과 뮤지션들을 세계에 소개했다. '파니아 레코드사'를 설립한 것은 도미니카 공화국(Dominican Republic) 출신 연주자 겸 악단장 조니 파치코(Johnny Pacheco: 1935년생)와 공연단장 제리 마수찌(Jerry Masucci: 1934~1997)였다. 1967년 '파니아'는 윌리 콜론(당시 17세)과 헥터 라보에(Héctor Lavoe: 1946~1993)의 <엘 말로>(El Malo)를 발매했다. 이후 보다 세련된 손 몬뚜노(son montuno) 장르 및 플레나(plena) 장르 음반들을 발매했는데, 1973년 무렵에 이르면 이런 음악들이 '살사'로 진화했다. 파치코는 자신의 팀을 조직했다. 여기에는 퍼커션 주자 루이 라미레스(Louie Ramirez: 1938~1993), 베이시스트 바비 발렌틴(Bobby Valentín: 1941년생), 편곡자 래리 할로우(Larry Harlow: 1939년생) 등이 포함됐다. 파니아 팀은 대부분 '손'과 '플레나' 장르에 속하는 일련의 히트곡들을 발매했고, 1968년 밴드 '파니아 올스타즈'(Fania All-Stars)가 결성된 후부터는 라이브로 공연도 했다.
(동영상) 윌리 콜론의 데뷔 곡 <엘 말로>.
주80: Steward (2000), p. 489.
주81: Steward, Sue (1999). Salsa: the musical heartbeat of Latin America. Thames & Hudson, London. p. 60.
주82: Boggs, Vernon W., ed. (1991). Salsiology: Afro-Cuban Music and the Evolution of Salsa in New York City. Westport, Connecticut: Greenwood Press. p. 247.
주83: Boggs (1991) p. 246에 인용된 티토 푸엔테의 말.
주84: Boggs (1991) p. 270.
주85: Manuel, Peter (2006). Caribbean Currents: Caribbean Music from Rumba to Reggae (2nd ed.). Philadelphia: Temple University Press, p. 90.
주86: Manuel, Peter (1995). Caribbean Currents: Caribbean Music from Rumba to Reggae. Philadelphia: Temple University Press, p. 73.
6.2. 1970년대 : '살사'의 성립과 외연 확장
1971년 '파니아 올스타즈'의 양키 스타디움(Yankee Stadium) 공연이 매진됐다.(주87) 1970년대 초 '살사' 음악의 중심지가 맨하턴 지역과 클럽 '치타'(Cheetah)로 옮겨갔다. 이곳에서 프로모터 랠프 메르카도(Ralph Mercado: 1941~2009)가 장차 '살사'의 스타가 될 많은 푸에르토리코인들을 지속적으로 증가 중이던 다양한 라티노 청중들에게 소개했다.
1975년 뉴욕에선 DJ 겸 콩가(congas) 연주자였던 로저 도슨(Roger Dawson: 1940년생, 우측사진)이 WRVR FM(현 WLTW) 라디오에서 "선데이 살사 쇼"(Sunday Salsa Show)라는 프로그램을 개설했다. 이 라디오 쇼는 최고 청취율 방송 중 하나였고, 아비트론 라디오 청취율(Arbitron Radio Ratings)에 따르면 매주 일요일마다 25만명 이상이 청취하는 것으로 보고됐다. 아이러니한 일은 당시 뉴욕의 히스패닉(Hispanic) 인구가 이미 2백만명을 넘어서고 있었지만, 히스패닉을 위한 상업 FM 방송은 없었다. 로저 도슨은 '살사' 부문에선 프랭키 단테(Frankie Dante)의 밴드 '오르퀘스타 플램보이얀'(Orquesta Flamboyan) 단원으로 활동한 바 있고, 재즈(jazz) 부문에선 섹소폰 연주자 아치 셉(Archie Shepp: 1937년생)과 함께 한 경력의 소지자였다. 그는 자신이 지닌 '재즈'와 '살사' 장르의 연주 경험과 지식을 이용하여 "살사가 재즈를 만나다"(Salsa Meets Jazz)라는 제목으로 빌리지 게이트(Village Gate) 재즈 클럽에 주례 콘서트를 개최했는데, 이 이벤트는 장기간 존속했다. 이 공연에서는 재즈 뮤지션들이 유명 '살사' 밴드와 협연했다. 예를 들면 재즈 섹소폰 주자 덱스터 고든(Dexter Gordon: 1923~1990)이 마치토의 '아프로-큐반즈'와 함께 잼세션을 펼치는 방식이었다. 로저 도슨은 뉴욕의 '살사' 청중 확산에 기여했고, 당시 히스패닉 AM 방송에선 들어볼 수 없던 '앤젤 커날스'(Angel Canales) 같은 2중 언어 구사자인 새로운 아티스트들을 소개했다. 도슨의 방송은 이찌 사나브리아(Izzy Sanabria)의 <살사 매가진>(Salsa Magazine)이나 <라틴 뉴욕>(Latin New York) 같은 잡지사들에서 여러 상도 받았고, '비아콤'(Viacom) 사가 WRVR의 포맷을 컨트리 뮤직(country music)으로 바꾸기 전인 1980년대 말까지 존속했다.(주88)
'살사'는 뉴욕에서 출발하여 푸에르토리코, 도미니카 공화국, 콜롬비아(Colombia), 니콰라과(Nicaragua), 베네수엘라(Venezuela) 및 여타 라틴 아메리카(Latin American) 국가들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살사'를 다루는 라디오 방송국과 레코드 회사들이 증가하면서, 뉴욕 및 여타 도시들에서 '살사' 밴드들의 수도 엄청나게 급증했다.
(사진) 전통 현악기 푸에르토리코 콰트로. '콰트로'(4중)란 명칭은 이 악기의 초창기에 4현 악기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지만, 현재는 4현부터 시작해서 5열 15현 형태까지 다양하다. 사진 속의 콰트로는 비교적 대중적인 5열 10현 콰트로이다. 푸에르토리코 콰트로 외에도 베네수엘라 콰트로와 쿠바 콰트로가 있다.
1970년대에는 '살사' 뮤지션 사이에서 음악적 혁신도 많이 일어났다. 윌리 콜론은 푸에르토리코의 시골에서 사용하던 발현악기(plucked string instrument, 撥絃樂器)인 콰트로(cuatro)를 '살사' 음악에 도입했고, '재즈'와 '락'(rock)의 일부 곡들, 그리고 파나마 음악과 브라질 음악의 요소들까지 도입했다.(주89)
셀리아 크루즈(Celia Cruz: 1925~2003)는 이미 쿠바에서 성공한 가수였지만, 미국으로 건너와 '살사' 장르에도 잘 적응했다. 그녀는 '살사의 여왕'(Queen of Salsa)이란 별명을 얻었다.
(동영상) 셀리아 크루즈와 '파니아 올스타즈'의 아프리카 자이레(현 콩고 민주공화국) 공연(1974년).
그녀의 대표곡 중 하나가 된 노래 <뀜바라>(Quimbara).
'파니아 레코드사' 소속의 밴드 리더 겸 편곡자였던 래리 할로우는 일렉트릭 피아노(electric piano)를 도입해 '살사'를 현대화시켰다. 또한 그는 '살사'의 전형적인 도식을 탈피하여 야심찬 오페라 앨범 <홈미>(Hommy)(1973년)를 발표했다. 이 오페라는 락 밴드 '더 후'(the Who)의 락 오페라(rock opera) <톰미>(Tommy)에 영감을 얻은 작품으로서, 조기 은퇴했던 셀리아 크루즈의 복귀에 맞춰 제작한 것이었다. 1979년, 할로우는 자신의 경력에서 결정적인 극찬을 받은 앨범 <라 라사 라티나, 살사 모음곡>(La raza latina, a Salsa Suite)을 발표했다.
(동영상) 2010년 7월 16일 뉴욕 '링컨 센터'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래리 할로우가 자신의 히트곡 <라 라사 라티나>를 공연했다.
'파니아 사운드'(Fania sound)는 대단히 세련되고 섬세하게 가공돼서 어떤 측면에선 지나치게 예측 가능한 포맷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에디 팔미에리의 밴드나 매니 오퀜도(Manny Oquendo: 1931~2009)의 밴드 '꼰훈또 리브레'(Conjunto Libre) 같은 보다 모험적인 푸에르토리코계 밴드들이 활동할 틈새가 존재했다. 이들 두 밴드는 뉴욕 스타일 '모잠비크'의 대표자들이 됐고, 쿠바의 고전적 음악이나 아프로-큐반 민속 리듬에서 영감을 차용했다. 그리고 '살사'의 한계점을 더욱 밀어부쳐 '재즈'의 요소와도 결합시켰다. 이들은 또한 최고의 트롬본 솔로 주자들을 '살사' 씬에 등장시키기도 했다. 그 중 몇몇은 쿠바 '티피코 스타일'(típico style)을 연마한 "앵글로"(Anglo: 백인) 재즈 뮤지션들이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배리 로저스(Barry Rogers: 1935~1991)였다. '리브레' 밴드에선 제리 곤잘레스(Jerry González: 1949년생)와 앤디 곤잘레스(Andy González: 1951년생) 형제가 각각 콩가와 베이스를 담당했다. 두 형제는 '리브레' 활동 이전에 가장 실험적이었던 에디 팔미에리의 밴드에서도 활동했었다. 앤디 곤잘레스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우리는 [재즈 씬에서] 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 1926~1991)가 하던 방식처럼 즉흥연주를 했다. 테마를 연주하고, 그 테마들을 즉흥적으로 변주해나갔다. 곡 전체를 통해 연주를 멈추는 일이 없었다."(주90)
곤잘레스 형제는 팔미에리의 밴드에 있는 동안(1974~1976), [재즈 및 블루스 전문잡지] <다운비트>(DownBeat)의 독자투표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에디 팔미에리와 '리브레'는 재즈 평론가들의 주목을 받았고, '살사' 문화의 필수적 요소가 아닌 음악감상 전문 청중들도 확보했다.
1970년대 말 무렵에는 '티에이치 로드벤'(TH-Rodven)과 RMM 같은 레코드사들이 설립되면서, '살사' 분야에서 '파니아 레코드사'가 오랜 기간 유지했던 지도적 위상이 약화됐다.
(동영상) 매니 오퀜도와 '꼰훈또 리브레'의 연주.
주87: Steward (2000), pp. 488–489.
주88: Manuel (1990), p. 48.
주89: Leymarie, Isabelle (2002). Cuban Fire: The Story of salsa and Latin jazz. New York: Continuum, pp. 272–273, 이 책에서 레이마리는 1971년에 발매된 크리스마스 더블 앨범 <아살또 나비데뇨>(Asalto navideño)를 거론하면서, "그것(콰트로)과 푸에르토리코 민속음악이 '살사'에 등장한 것은 이 앨범이 최초"라고 말했다.
주90: Boggs (1992) p. 290에 인용된 앤디 곤잘레스의 말.
* 시리즈물 바로가기 :
- "[개론] 살사 음악 (1) - 뉴욕에서 탄생한 범-라틴 문화권의 음악"
- "[개론] 살사 음악 (4) - 역사 ㊤ (1940~1970년대)"
- "[개론] 살사 음악 (5) - 역사 ㊥ (1980년대: 쿠바음악과의 이별과 재회)"
- "[개론] 살사 음악 (6) - 역사 ㊦ (아프리카 살사, 최근의 동향)"
- "[개론] '클라베' 패턴 : 아프로-큐반 음악의 핵심 리듬 개념 (1)"
- "[개론] '클라베' 패턴 : 아프로-큐반 음악의 핵심 리듬 개념 (2)"
- "[개론] '클라베' 패턴 : 아프로-큐반 음악의 핵심 리듬 개념 (3)"
- "[개론] '클라베' 패턴 : 아프로-큐반 음악의 핵심 리듬 개념 (4)"
* 상위화면 바로가기 : "[목록] 21세기 대중음악 사전 색인"
첫댓글 이 게시물이 스팸이나 여타 문제로 규제대상에 올랐다고 DAUM에서 통보가 왔네요..
아니 지들 멋대로 규제대상으로 정하고,
한달간 소명을 안 하면 지우겠다니(실제로 오늘 한시간 정도 안 보였음),
뭐 이런 개떡 같은 경우가 있는지 모르겠군요.. 참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