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분 류 : 시 유형문화재 제8호 * 소재지 : 대전광역시 대덕구 계족산로17번길 60(중리동 115) * 수 량 : 1동 * 구꽉조 : 정면3칸, 측면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집. * 재 료 : 목조 * 연 대 : 1639년(인조17) * 개 요 : 조선조 1633년(인조11)에 문과에 급제하고 효종 때는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김경여(金慶餘, 1597-1653)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호종하였다가 환도 후 비분강개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이 집을 짓고 거처하던 곳이다. 주변에 소나무가 많아서 당호를 송애당이라 하고, 자신의 호를 이때부터 송애당이라 하였다. ‘송애(松崖)’는 눈서리를 맞아도 변치않는 소나무의 곧은 절개와 높이 우뚝 선 절벽의 굳센 기상을 간직하겠다는 뜻으로, 김경여의 높은 기개와 충성심을 잘 표현하고 있다.
송애당 김경여는 송시열, 송준길과 함께 사계 김장생에게서 글을 배웠다. 이러한 관계로 송시열, 송준길과는 동학이며 항상 같은 계열로 정치적 관계를 맺어 왔다. 병자호란 후 효종은 은밀하게 북벌을 계획하고 있었다. 노론의 거두로서 정치적 입지가 막강했던 우암 송시열 또한 북벌에 관한 여러 가지 의견을 개진하였다. 우암은 북벌문제를 가깝게 지냈던 동춘당 송준길, 송애당 김경여와 심각하게 상의했음은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논의는 이 세사람의 고향에서도 나누었을 것이고, 그 장소 중의 하나가 바로 송애당이다. 따라서 송애당은 송시열과 함께 북벌계획을 논하던 역사적인 장소성을 지니고 있다.
건축사적으로는 기호지방 별당건축의 가장 전형적인 양식을 지니고 있으며 이 건물로 당시 사대부가의 생활상과 건축미학을 알 수 있기도 하다. 정침은 이미 오래 전에 없어지고 지금은 별당인 송애당만 남아있다. 주위는 담장이 송애당을 에워싸고 있다. 최근 택지개발을 하면서 대문 바로 앞에 조그만 잔디밭을 조성하고 나머지 부분은 모두 높은 건물들로 채워져 버렸다. 송애당은 인접해 있는 쌍청당, 동춘당과 같은 정면3칸, 측면2칸, 팔작지붕에 5량집 구조로 되어있다. 다만 대청의 위치와 온돌방의 위치가 앞서 두 건물과 바뀌었고 반침(상부반침 하부아궁이 함실)이 다른 별당에서는 반칸이 밖으로 튀어나온 데 반해 여기서는 반칸이 들어가 붙어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후면을 제외한 3면은 좁은 툇마루를 돌려 설치해 두었다. 대청마루의 창호는, 정면2칸을 4분합 띠살문 들어열개로 하고, 측면과 후면은 장판문 쌍여닫이로 하였다. 온돌방과의 사이는 3분합 맹장지 들어열개로 되어 있다. 온돌방 전면에는 머리중방 위에 쌍여닫이 띠살문, 측면은 외여닫이 띠살문으로 되어 있다. 가공석 2단으로 된 기단 위에 방형 주초석을 놓고 8치각 방주를 세웠다. 기둥머리에는 조각된 보받침인 양봉(梁棒)이 내외로 돌출 되어 있다. 세부적으로는 쌍청당보다 오히려 동춘당과 비슷한 구조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대청 천정은 연등천정인데 합각부분만 우물반자로 마감하였고 온돌방은 우물반자 위에 종이 바름을 하였다. 용마루 끝에 붙어있는 기와는 마치 잡귀라도 쫓을 듯 눈을 부라리고 있는 모습이 아주 재미있다. 적당히 퇴색된 목재의 색깔이 고건축의 운치를 더해 주고 있다.
대덕문화원-문화유산 참조
이하, 대전문화유산울림 사진자료 |
첫댓글 허혜경 선생, '송애당' 기사 잘 읽었습니다.
내용 중, "* 연 대 : 1640년(인조18)"는, <1639년(인조17)>입니다. 문화원의 자료가 오류입니다.
아래 이미지는 송애연보의 기록입니다.[기묘는 1639년, 12년은 명나라 연호로 12년에, 송애당을 지었다는 기록입니다.]
감사합니다. 문화재청 자료엔 처음 지은 연도는 안적혀 있길래 대덕문화원 내용 그대로 올렸더랬습니다. 감사 드립니다.
@허혜경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