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이 살아온 지나간 세월들을 돌이켜볼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20년을 살았든, 50년이나 60, 70년을 살았든, 살아온 지난날들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파란만장한 지난날들을 단 몇 마디로 표현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창세기 47장에 보면, 야곱이 애굽 왕 바로 앞에 섰을 때 바로가 그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의 연세가 얼마나 됩니까?" 그러자 야곱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 47:9)
야곱은 130년 동안 살아온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면서 "우리 조상들에 비해서 많이 산 것은 아니지만 그 누구보다도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노라"고 대답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 가운데도 야곱과 같이 회상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야곱이나 다른 사람에 비해서 내가 많이 산 것은 아니지만, 참으로 힘든 세월들을 살아왔노라"고 말하고 싶은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살아온 세월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들이었다 하더라도, 그 시간들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신명기의 말씀에서 우리는 그런 우리의 지난날들 속에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들을 추억해 볼 수 있습니다.
신명기 32장의 말씀은 '모세의 노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40년의 기나긴 광야 생활을 마감 지을 순간을 맞았습니다. 지금 모압 평지에 머물러 있는데, 이제 눈앞에 보이는 요단강만 건너면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들은 지금 희망에 부풀어 있습니다. 40년의 광야 생활을 마감할 수 있다는 것도 큰 기쁨이지만, 지금까지 그들은 단 한 번도 자기들 소유의 땅을 가져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그 땅의 주인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살아온 지난 40년의 광야 생활을 되돌아보면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도 않을 길고도 험난한 세월이었습니다. 그런 험난한 세월을 겪었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지난날의 고생이 없었다면 오늘의 희망도 없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광야가 없어서 광야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잘 모릅니다. 저도 중동지역의 사막이나 광야에 가 본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막이 어떤 곳인지는 조금 느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지난 여름 미국에 갔을 때,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기 직전에 LA에 들린 적이 있습니다. LA에서 하루 반정도 관광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함께 갔던 목사님들이 LA보다는 도박의 도시라고 알려진 '라스베가스'를 관광하는 것이 미국을 알 수 있는 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LA의 관광 일정을 모두 포기하고 라스베가스를 방문했습니다. 물론 목사님들이 도박을 하기 위해서 라스베가스에 간 것은 아닙니다.
'라스베가스'(Las Vegas)라는 말은 스페인 말로 '목초지'(Meadow)라는 뜻입니다. 라스베가스가 목초지라는 뜻을 가진 도시라고 해서 살림이 울창하고 농작물이 잘 되는 곡창지대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라스베가스는 사막입니다. 사막 위에 세워진 도시입니다. LA에서 고속도로를 따라서 5시간이나 버스를 타고 가야 했는데, 가는 길이 전부 사막이었습니다. 일년에 강수량이 평균 100mm정도 밖에 되지 않는 곳입니다. 우리나라는 비가 조금만 많이 와도 하루에 100mm 이상이 오는데, 그곳은 일년 내내 가야 100mm정도 밖에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희가 라스베가스에 도착했을 때가 오후 6시쯤 되었습니다. 해가 질 무렵이었는데도 그 때의 기온이 섭씨 42도나 되었습니다. 낮에는 45도를 오르내리는 것은 보통이라고 합니다. LA와 라스베가스 중간쯤에 '바스토우'라는 작은 도시가 있는데 휴게소라고 말할 수 있는 곳은 그곳 밖에 없어서 잠시 들렸습니다. 물론 '바스토우'도 사막 위에 세워진 도시입니다. 차를 타고 올 때는 에어컨이 있어서 몰랐는데, 밖으로 나가보니 얼마나 더웁던지 2분 이상을 밖에 서 있을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아무리 그늘진 곳이라 하더라도 뜨거운 바람이 코 속으로 들어오면 숨이 막힐 정도가 아니라, 이러다가는 허파가 녹아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에어컨이 없으면 도저히 살수가 없는 곳이 사막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낮에는 땡볕이 내리쬐이는 광야에서 40년을 살았습니다. 물론 그들에게는 에어컨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그늘을 만들어 주셨지만, 그게 어디 에어컨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 40년은 정말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길이었습니다. 물도 마음껏 마실 수 없었습니다. 먹고 싶은 음식도 먹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지만, 40년 동안 그것만을 먹어야 했으니 얼마나 신물이 났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 만나를 먹었을 때에는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깟씨 같고도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다"(출 16:31)고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꿀 섞은 과자'처럼 맛있던 만나가 질리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에는 '만나만 먹어야 하느냐'고 불평했습니다. 민수기 11:5-6절에 보면 그들이 이렇게 불평합니다.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 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고기를 먹고 싶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메추라기도 금새 싫증나고 말았습니다.
또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갈아입을 옷도 없이 단 한 벌만으로 살아야 했고, 새로운 신발을 신어볼 수도 없었습니다.
여러분, 한 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그들의 옷이 헤어지지 않게 하셨고, 신발이 닳지 않도록 하셨다고는 하지만, 같은 옷을 40년이나 입고 40년 동안 신발 한번 갈아 신지 않은 그들의 모습, 뜨거운 태양볕 아래서 힘들고 지친 모습으로 광야를 걸어간 그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다'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은 그렇게 광야 생활을 힘들게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가운데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었던 것과 같은 그런 고생을 하며 살아오신 분이 과연 몇 분이나 됩니까? 물론 세월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우리는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에 비하면 얼마나 여유롭고 풍요롭게 살아왔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불평하고 싶을지 모르지만, 가나안 땅을 얻겠다는 단 하나의 희망 때문에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해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 비하면, 우리의 불평은 사치일지 모릅니다.
40년의 광야 생활을 마감하면서 모세는 신명기 32장에서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도우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지나간 40년의 세월을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그 속에서 따뜻한 손길로 도우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7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
지난날을 돌이켜볼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자신들의 허물이었습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불평하고 원망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던 죄악된 모습이 먼저 생각납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백성들을 위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은혜와 도우심의 손길로 우리를 인도하셨지만, 어리석고 우둔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불평하며 원망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악을 행하여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요 자녀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모습뿐이었습니다. 5절에서 모세는 먼저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치부를 드러냅니다. "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는 사곡한 종류로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을 배반하고 악을 행하기를 밥먹듯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한 순간도 버리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모세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세 가지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가 '아버지'처럼 지켜주신 은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난날들을 회상하면서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라는 것입니다. 6절에서 말씀합니다. "우매무지한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너를 얻으신 너의 아버지가 아니시냐? 너를 지으시고 세우셨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고 사악한 말로 불평한 것은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도저히 해서는 안될 짓이었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그 택하신 백성들을 언제나 아버지처럼 자상하게 지켜주셨습니다.
아버지에게는 자식들을 지키고 양육할 책임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을 지으시고 자녀로 불러주신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을 그렇게 지키시고 양육시키셨습니다.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농사도 짓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배고프지 않게 넉넉하게 먹이셨습니다. 옷이 헤어지지 않게 하셨고, 신발이 낡아지지 않도록 돌보아주셨습니다.
세상에서 자기 자식을 미워하고 내팽개칠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종종 그런 못된 부모가 있습니다. 엊그제 뉴스를 보니까, 경주에서 30대 아버지가 2 살배기 딸을 때려 숨지게 했습니다. 선천적 지체장애아인 아이가 평소에 음식을 너무 많이 먹고 자주 울어서 못마땅해 하다가, 어느 날 그 아이가 욕실에서 넘어져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온 몸을 때려서 위장이 파열되어 그 아이는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세상에는 그런 못된 아버지도 간혹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찌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 세상에는 자기 배로 난 자식을 잊거나 버리는 못된 부모가 있을지라도,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한 순간도 잊지 않고 지켜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시 27:10)
여러분, 어떤 경우에도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도 않으시고 잊지도 않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임용만'이라는 아이가 유복한 가정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행복한 삶을 약속받은 환경 속에서 태어났지만, 어느 날 한 승려가 그의 부모에게 나타나 '아들에게 살이 끼었으니 아들을 죽이지 않으면 아버지가 죽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아버지는 자신이 살기 위해서 잠든 어린 아이를 목매달아 죽이려고 했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어머니가 6살된 아이를 서울역 대합실에 버리고 도망가버렸습니다.
그 때부터 그는 6년 동안이나 엄마를 찾아 전국을 누비다가 12살 때 '불량 청소년 단속'에 걸려 서해 어느 외딴 섬에 있는 '선감원'이란 보호시설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6번이나 탈출을 시도해 보았지만 그 때마다 탈출에 실패했고, 그에게 따라온 것은 심한 매질과 고문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그는 부모에 대한 원망과 증오 때문에 부모에게 복수를 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그의 정신은 망가지고 영혼은 황폐해져 버렸습니다. 이 세상에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그는 인생을 포기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다가, 문득 언젠가 들었던 예수님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 길로 교회에 찾아갔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가슴 깊이에 응어리져 있던 원한과 복수심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녹아내리기 시작했고,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부모님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을 찾아가서 용서를 빌고, 지금은 신학을 공부하고 하나님을 위해 목회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하나님의 귀한 종이 되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한번도 잊으신 적이 없는 분입니다. 혹 우리의 부모는 우리를 잊고, 우리를 버리고, 때로는 우리를 미워할지라도 하나님은 한번도 우리를 미워하시거나 잊으신 적이 없으십니다.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더욱 넘치도록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여러분, 지난날들을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외로이 홀로 고통스런 문제 앞에서 눈물을 흘릴 때에, 아무도 내 옆에 있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 곁에 계셨고, 우리의 눈물을 보셨고, 우리가 눈물을 흐릴 때에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우리와 함께 눈물을 흘리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느끼지도 못한 방법으로 우리를 지키셨고 도와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때로 힘들고 외로울 때, 지난날 힘들었을 때 내 곁에서 나를 지켜주시고 나를 보호하셨던 하나님 아버지가 계셨음을 추억하고, 그 아버지가 오늘도 나를 지켜주시고 도우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눈동자처럼' 아끼시고 보호해주셨습니다. 40년의 광야 생활은 정말 힘들었습니다. 숱한 위험이 그들을 힘들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눈동자같이 아껴주시고 보호해 주셨습니다. 본문 10절에서 모세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우리 신체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 가운데 하나가 눈입니다. 눈이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실 때에 아주 특별한 자리를 만들어놓으셨습니다. 웬만한 충격으로는 잘 부셔지지 않는 두개골에 큰 굴을 파서 그 속에다 눈동자를 안전하게 간직해 놓으셨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눈꺼풀이라는 방어벽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 신체 중에서 가장 빨리 위험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것이 눈입니다. 비올 때에는 빗물이 흘러 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눈썹을 만들어 놓으셨고, 갑자기 뭔가 눈에 들어오려고 하면 즉시 눈꺼플이 내려와서 눈을 감아 눈동자를 보호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 뭔가 이물질이 눈 속으로 들어오면 눈물샘에서 눈물을 흘려 보내서 깨끗하게 소독을 합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눈 아래에는 하수도가 있어서 눈 속에 들어온 이물질을 그 하수도를 통해서 코로 배출을 합니다. 얼마나 신비하게 창조되어졌는지 모릅니다. 아주 완벽하게 눈동자를 보호하도록 만들어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눈동자처럼 지키셨다"는 말씀은 완벽하게 지켜주셨다는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과 다양한 은혜로 지켜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백성들을 완벽하게 지켜주십니까? 그건 우리가 너무도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눈은 신체 가운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연약한 부위입니다. 연약하기 때문에 철저한 보호가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말로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아무리 '나는 강하다'고 외쳐보지만, 우리는 너무나도 연약한 존재들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없다면 한 순간도 우리 스스로를 지켜낼 수 없습니다.
더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맹수를 만나고, 또 맹수보다도 사나운 이방민족들의 칼날을 만나야 했던 것처럼, 또 낮에는 태양볕의 뜨거움과 밤에는 몰아치는 추위, 그리고 때때로 불어오는 사막의 모래바람 등을 겪어내야 했던 것처럼, 우리도 끊임없이 우리를 위협하는 악한 무리들의 공격을 받아야 합니다. 그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사실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눈동자같이 지키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없다면 우리는 늘 실패하고 깨어지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 무리를 눈동자같이 지켜주셨습니다. 수없이 많은 위험의 순간들 속에서 우리를 지켜 오늘 여기에까지 이르게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지난날들을 돌이켜보면서, 연약한 우리를 눈동자같이 지켜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금 우리의 가슴 속 깊이에서 확인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하신 백성들을 독수리처럼 연단하신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본문 11-12절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하나님께서 지난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광야생활을 하게 하신 것은 '독수리가 그 새끼를 연단한 것같은' 연단의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시간들이 너무 힘들었다고 불평할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너무 고된 생활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한번도 전쟁을 해보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너자마자 아말렉과 전쟁을 해야 했습니다. 그 40년의 생활은 정말 힘든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40년을 연단의 기회로 만드셨습니다. 마치 독수리가 그 새끼를 연단한 것같이 말입니다.
흔히 독수리를 '새의 왕'이라고 말합니다. 독수리가 새들의 왕이 될 수 있는 것은 가혹할 정도로 철저한 훈련 때문입니다. 알에서 금방 부화한 새끼 독수리는 병아리나 꿩 새끼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미의 철저한 훈련과 연단을 통해서 새들의 왕으로 자라가게 됩니다.
처음에 어미 독수리는 둥지 안의 새끼들에게 먹이를 줍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는 둥지를 흔들어서 새끼를 땅으로 떨어뜨립니다. 이 때 위기를 느낀 새끼들은 둥지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면 어미 독수리는 자기 날개로 새끼들을 밀쳐서 둥지에서 떨어져 땅으로 곤두박질치게 만듭니다. 둥지에서 떨어진 새끼 독수리들이 땅에 부딪힐 것같은 순간에 어미 독수리는 자신의 날개로 새끼를 받아서 다시금 둥지 안으로 올려놓습니다. 그런 일들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어미 독수리를 계속 반복해서 새끼 독수리를 둥지에서 떨어뜨리고는 자신의 날개로 받아서 다시금 둥지 안으로 안전하게 올려놓습니다.
만일 어미 독수리의 깊은 속뜻을 알지 못한 다른 짐승들이 보면, "저 어미 독수리는 심술이 났든지, 정신이 돌았다"고 수군거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연약한 새끼 독수리를 강한 독수리를 만드는 훈련의 방법입니다.
지난 해 '2002년 한일 월드컵' 때에 가장 놀라운 뉴스 꺼리는 우리나라가 4강에까지 올라갔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축구를 세계 4강까지 올려놓은 데에는 히딩크 감독의 독특한 훈련 방법이 큰 몫을 차지했습니다. 히딩크 감독이 월드컵 대표팀의 감독을 맡고 난 후 우리나라는 프랑스에 5:0으로 지는 등 창피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히딩크 감독은 국내 여론의 질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방법대로 선수들을 훈련시켰습니다. 그 대표적인 훈련방법이 체력훈련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선수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건장한 서구 선수들과 몸싸움을 해도 밀리지 않는 체력을 갖추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훈련 덕분에 우리나라 축구가 세계 4강까지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 동안 그렇게 훈련시키셨던 것입니다. 노예근성에 빠져서 유약하기 짝이 없는 그들을 강한 하나님의 군대로 훈련시키려는데 40년이나 걸렸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까지 가는 길이 그렇게 멀지는 않았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사는 곳을 통과해서 가면 불과 1-2주면 가나안 땅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찌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출 13:17) 아직도 그들에게는 연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연단의 기회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우리에게도 이런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우리를 연단시키시기 위해서 고난이라는 방법을 쓰시기도 합니다. 오랜 시간 참고 견뎌내야 하는 인내의 방법을 통해서 우리를 연단하시기도 하십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신앙생활해 오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은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나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실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택하신 백성들이 힘들어 신음할 때에 모른척 하셨겠습니까? 열심히 신앙생활하려는 데 왜 자꾸만 어려운 일이 우리를 힘들게 만듭니까? 열심히 기도하는데 왜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때론 문제가 더 복잡해집니까?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불평하는 말을 하기 전에 '하나님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를 잠잠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수많은 경우에 우리의 고난은 우리를 더욱 강한 믿음의 용사로 키우시기 위해서 우리를 높은 곳에서 떨어뜨리는 훈련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때로는 그런 시련이 너무나도 감당하기 힘들 때도 있습니다. 내 인내와 능력의 한계점에 다다른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가 바로 나를 다루고 계신 하나님의 손길 안에 내가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음 없는 눈으로 우리의 지난날들을 회상한다면 우리의 마음에는 불평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지난날들을 돌이켜보면, 지난날들이 힘들고 어려운 순간들이 많았을지라도, 그 안에서 우리를 보살피시고 계신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고, 우리를 연단시켜 오늘이 이르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지난날을 아버지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눈동자처럼 지켜주신 은혜의 사건들을 돌이켜보면서, 오늘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이나 고난이 있다 하더라도 절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믿음으로 오늘의 당면한 현실을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