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시국 신도에 아사자 속출
동아일보 1929년 7월 26일자 기사

[원문] 소위 대시국 새대궐의 터, 정읍군 입암면 접지리에는 아직도 그 교도가 4백여호에 5천여명이 남아있다는데 그들은 모두 경상도와 평안도와 황해도 사람들이 대부분인바 그 가운데 4천여명은 먹고자하나 먹을 것이 없으며 입고자하나 입을 것이 없어서 모두 빈사의 지경에 빠져있어 그 참상은 참으로 눈있는자로 하여금 차마 볼수없다는바 요사이에 이르러서는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하여 수일전에는 한집안 식구 세사람이 모조리 굶어죽은 일이 있고 앞으로도 또한 이같은 사실이 끊임없이 발생하리라는데 부근 공동묘지에는 이름도 알 수 없고 임자도 없는 시체를 흙으로 묻지도 아니하고 거저 풀밭에 내던져둔 것이 이곳저곳에 있어 까마귀와 까치의 밥이 되고 있다는데 아직도 살아있는 빈민들은 그래도 아쉬운 목숨을 살리고자하여 이름도 모르는 풀을 뜯어다가 그것을 먹고 겨우 연명을 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술찌갬이를 사다가 그것으로 연명을 하는 사람들도 있어 그 참경은 실로 형언키어려운바 그들은 자기의 전재산을 방매하여가지고 무슨 수나 있을듯이 모여들은 무리에 눈물과 한숨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다더라.
[해설] 정읍은 조선후기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이기도 하지만, 동학의 정신을 계승한 증산교와 보천교의 발상지로서도 의미를 갖는다. 두 종교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데, 증산교의 명맥이 보천교로 이어졌다고 보면 될 것이다. 정읍시 입암면 접지리(흔히 대흥리라 함)에 살던 동학의 지도자 차치구(동학농민혁명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어 흥덕관아에서 처형당함)의 아들 차경석은 어렸을때부터 아버지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동학교도가 되었고 제2의 동학농민혁명이라 할 수 있는 1898년 흥덕항쟁에도 가담한 사실도 있었다. 그후 정읍시 덕천면 출신인 강일순이 창시한 증산교에 들어갔다가 1909년 증산이 사망하자 증산의 부인(차경석의 소개로 재가를 하여 증산의 부인이 됨)이자 차경석의 이종사촌 누이인 고판례로부터 증산교의 교권을 넘겨받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보화교 또는 보천교라 불리는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게 된다.
보천교는 일제강점기에 최전성기에는 600만이 넘는 신도수를 자랑하기도 하였다고 전해지는데, 당시 한반도 전체 인구가 1600만임을 고려한다면 상당히 과장된 숫자인 것 같고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대체로 100만명이 넘는 당시 최대의 민족종교였다고 한다. 차경석과 보천교에 관한 인터넷자료를 참고로 덧붙여본다.
차경석은 자신이 동방의 맹주가 될 것이며, 조선은 세계통일의 주역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1920년에는 교단조직을 60방주(方主)로 재편하고 55만 7,700명에 달하는 간부를 임명했다. 1921년에는 경상남도 함양군 황석산(黃石山)에서 대규모의 천제(天祭)를 올렸다. 이 천제는 일본 경찰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행해졌으며, 국호를 시국(時國), 교명을 보천교(普天敎)라고 제정했다. 이 천제를 기화로 하여 차경석은 천자(天子)로 등극할 것이라는 소문이 팽배해졌고, 차천자로 불렸다. 1922년 〈보광 普光〉을 발행했고, 1925년에는 최남선이 경영하던 〈시대일보 時代日報〉를 인수·경영했다. 그후 일제의 종교탄압이 강화되자 차경석은 종교활동의 자유를 보장받기 위하여 조선총독부에 친일사절단을 파견했으며, 또 시국대동단(時局大同團)을 만들어 전국을 순회하는 등 친일활동을 했다. 1926년에는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로(齋藤實)와 1928년 경무국장 아사요시(淺利)가 정읍의 교본소를 방문하였다. 그러나 경무국장의 잦은 차경석과의 면담 등은 보천교운동을 민중과 괴리시키려는 일제의 고단위 책략임이 밝혀졌다. 이후 교단 내에서 그의 친일활동을 반대하는 세력들이 탈퇴하여 각기 새로운 교단을 세우게 되었다. 1936년 차경석이 죽고 일제의 '유사종교해산령'으로 인해 보천교는 해체되었다. 차경석의 타계 즉시 당대 최고라는 교본소의 십일전(十一殿)을 비롯한 50여 채의 군소 건축물들을 일제는 전면 해체시켜버렸다.
당시 조선 최대의 종교단체가 공개단체도 아닌 비밀단체인데다 여타의 종교처럼 친일적이지도 않고 오히려 가장 큰 독립운동 자금원인 것을 알고 있는 일제로서는 이 비밀 단체를 어떻게 취급해야 할지 내심 고민하고 있는 중이었다. 일제는 종교단체와 사상단체 관리를 위한 방편 상, 끊임없는 회유와 협박에 의해 비밀교단의 모습을 공개하도록 유도했으며,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간부 이상호에 의해 <보천교>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자 이를 계기로 민족종교 탄압책의 일환으로 당시 친일 언론이었던 조선, 동아를 무기 삼아 보천교의 어두운 면만 집중적으로 부각시켜 유사종교화 내지 사이비 종교화 했다.
위 글을 종합해볼 때 보천교라는 종교는 동학의 정신을 이어받은 민족종교로서 식민치하에서 국권회복운동과 새로운 시대를 제시함으로써 핍박받던 민중들로부터 환호를 받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외피는 종교지만 내부적으로는 독립운동에 자금을 대고 물산장려운동을 펼치는 등 국권회복운동에도 적극적 활동을 하였기에 조선총독부로부터 탄압의 대상이 되고 급기야는 차경석 사후에 일제의 치밀한 종교 탄압정책에 의해 보천교는 강제로 해산되었다.
위 신문기사는 1929년에 쓰인 기사로서 1926년 사이토총독의 정읍방문 이후 노골화된 종교탄압정책의 일면을 느끼게 한다. 보천교 발상지를 대시국 신도라 표현하였는데 '시국'은 차경석이 붙인 이름으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한다는 의미로서 민중들에게는 희망을 줄 수있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한 시국의 새도시 즉 대흥리에서는 민중들의 기대와 달리 당시 5천명 정도의 거주민중에 4천명 정도가 기아에 시달리며 아사자가 속출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이것을 어디까지 진실로 보아야할지 모르겠지만 실제보다는 더 과장된 측면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전국각지에서 모여든 신도들로 인해 당시 신도들은 의식주 해결에 커다란 어려움을 느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래서 나름대로 의식주 해결방안을 생각했을 것이고 지금의 대흥리에 있는 직물공장도 그런 차원에서 도입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결과적으로 동아일보는 조선총독부의 민족종교 탄압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보천교를 비롯한 민족종교의 어두운 면을 부각시키는 기사를 반복해서 썼을 것이고 이는 항일의식이 강했던 민족종교를 사이비 종교(당시는 유사종교라 함)로 매도하려는 의도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