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몇 년 동안에 기본소득 구상(Basic Income concept)은 위기에 직면한 사회를 개혁하기 위한 급진적이고 강력한 대안으로서 큰 주목을 받았다.
기본소득은 논자들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규정하고 있으나, 기본소득 구상을 가장 체계적으로 제시한 반 빠레이스(Philippe Van Parijs)의 규정이 표준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기본소득은 자산 조사나 근로조건 부과 없이 모든 구성원이 개인 단위로 국가로부터 지급받는 소득”이라고 정의했다. 이 규정에는 기본소득이 충족시켜
야 할 다섯 가지 규준들이 명료하게 제시되어 있다. 1)기본소득은 원칙적으로 현금으로 지불되고, 2)정치공동체에 의해 지불되고, 3)정치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에게 개인적으로 지불되고, 4)곤궁함에 대한 심사 없이 지불되고, 5)그 어떤 반대급부 없이 지불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규준들을 충족시키는 기본소득은 문자 그대로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이라고 할 수 있다. ‘무조건적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획기적인 소득분배 장치를 도입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인간의 존엄성에 부합하는 삶을 누리고, 자본이나 국가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자신의 발전과 참된 공동체 형성을 위해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현재 기본소득 정책을 도입하여 적극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나라는 브라질이다. 룰라 전 대통령은 2003년에 “빈곤층 생계수당 지급 프로그램”(Bolsa familia programme)을 도입하여 전 국민의 약 4분의 1에 기본소득을 지급하였으며, 2010년부터는 모든 국민에게 기본소득이 지급되는 것이 입법화 돼 단계적 시행을 앞두고 있다. 국민국가 차원이 아닌 마을 단위로 기본소득을 도입한 경우도 있다. 인구가 불과 1,200명에 불과한 나미비아의 오트지베로(Otjivero) 마을에서는 독일개신교협의회(EKD)의 지원으로 모든 사람이 월 8유로(약 11,600원)의 기본소득을 지급받아 생존의 기반을 마련하고 빈곤을 퇴치하고 있다.
기본소득 구상은 그것이 갖는 무조건성 때문에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기본소득 구상의 정당성과 필요성을 입증하기 위해 매우 다양한 논거들이 제시되고 있다. 한국교회도 우리나라의 사회복지 제도의 운영에 관심을 갖고 있고, 이 제도의 개혁과 맞물려서 현재 논의되고 있는 기본소득 구상에 대해 공적인 입장을 천명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신학적·윤리적 정당성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1)
이를 위해서는 먼저 ‘노동과 소득의 분리’를 신학적·윤리적으로 용인할 수 있는가를 살피고, 그다음에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에 대한 인의론(認義論)적 이해로부터 기본소득 구상의 정당성을 입증할 수 있는가를 밝히고, 끝으로 하느님의 정의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기본소득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1. 노동과 소득, 분리될 수 있는가
‘노동과 소득의 분리’는 개신교인들에게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이다.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창세기 3:19의 가르침이나 “일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는 데살로니가후서 3:10의 가르침이 엄중하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종교개혁 이래로 역사적 개신교에 깊이 뿌리 내린 직업윤리와 노동윤리의 영향이 크다. 그러나 이러한 성서의 가르침이나 개신교 직업윤리와 노동윤리에 기대어 ‘노동과 소득의 분리’를 거부하는 것은 졸속한 판단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노동과 소득의 결합’을 기본원리로 해서 하나의 경제체제가 전반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2세기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노동과 소득의 결합’에 바탕을 두고 운영되는 사회를 노동사회라고 한다면, 노동사회는 생계를 위해 노동을 하도록 국가가 강제하고 ‘노동이 토지나 화폐처럼 상품으로 팔릴 수 있다는 허구’가 자리를 잡기 시작한 근대세계에서 탄생했다. 한마디로 노동사회는 근대의 발명이다. 노동사회가 확립되면서 어떤 노동은 시장에서 그 업적을 인정받아 임금을 그 대가로 받았지만, 집에서 수행하는 돌봄 노동이나 살림 노동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돈벌이노동을 비롯해 이 모든 노동들은 모두 인간의 삶을 위해 인간이 수행하는 노동이지만, ‘노동과 소득의 결합’은 오직 돈벌이노동만을 노동으로 간주했다. 돈벌이노동을 제외한 삶을 위한 다양한 노동은 ‘삶을 위한 활동’으로 범주화될 수 있는데, 이런 활동은 근대 사회에서 애초부터 소득으로부터 분리된 노동이었다.
돈벌이노동과 삶을 위한 활동을 이원론적으로 분리하는 근대 사회의 원리는 종교개혁자들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예를 들면 마르틴 루터는 욥기 5:7(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 가는 것 같으니라)을 “사람은 일을 하기 위하여 태어났고 새들은 높이 떠서 날아간다”고 옮겨서 인간은 천부적으로 노동의 위임을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그가 생각한 노동은 근대 사회가 발명한 돈벌이노동이 아니었다. 루터에 따르면, 인간이 해야 할 일은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일이다. 이를 위해 인간은 다양한 직무를 수행하도록 하느님의 부름을 받지만, 그 직무가 높건 낮건, 그 직무 수행이 돈벌이노동이든 대가를 지불받지 못하는 가사노동이든 공동체를 위한 명예직 활동이든,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긴다는 점에서 모두 똑같이 존귀하다. 루터는 사람의 일을 “생산성이나 수확이나 소득이나 노동업적에 따라 평가”하지 않았고, 도리어 하느님과 이웃과 공동체를 위한 ‘노동의 봉사적 성격’을 강조했다. 루터가 강조한 직업이 돈벌이노동으로 굳어진 것은 근대 사회가 들어선 뒤의 일이다.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창세기 3:19의 말씀은 인간의 노동이 타락 이후에도 인간의 삶을 영위하는 방식으로 하느님에 의해 허락되었음을 뜻하며, 따라서 인간의 노동이 여전히 하느님의 축복 아래 있음을 강조하는 해석이라 할 수 있다. 그 노동은 삶을 위한 활동으로 넓게 해석해야지 근대적 의미의 돈벌이노동으로 해석할 수 없다.
“일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는 데살로니가후서 3:10의 말씀은 종말이 임박했다고 믿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종말론적 열정에 휩싸여 일상적인 활동이나 생업을 멀리하는 것을 경계하는 데 초점이 있다. 이 말씀을 옛 소련의 스탈린 헌법에서처럼 노동의 의무를 뒷받침하는 구호로 사용하거나 노동연계복지 모델에서처럼 돈벌이노동을 강제하기 위한 무기로 사용하는 것은 성서 메시지의 견강부회(牽强附會)이다.
이렇게 보면 개신교인들이 성서의 가르침이나 직업윤리와 노동윤리를 내세워 ‘노동과 소득의 분리’를 거부할 이유는 없다. 창세기 1:28의 가르침에 따라 노동이 삶을 위한 활동으로서 하느님의 축복 아래 있다고 생각하는 개신교인들은 도리어 ‘노동과 소득의 분리’를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 왜냐하면 ‘노동과 소득의 분리’는 삶을 위한 모든 활동을 돈벌이노동으로 축소하는 근대적 관점을 깨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2. 인간의 존엄성은 업적과 무관하다
인간의 존엄성은 신학적으로 여러 가지 논거에 의해 뒷받침되지만, 나는 ‘인의론’이 인간의 존엄성을 지지하는 가장 강력한 기반이라고 본다. 인간은 업적이 있든 없든 그것과 무관하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에게 받아들여지고 하느님 앞에 설 수 있게 된 존재이다. 이 인의를 통해 하느님의 정의가 드러나고, 인간의 존엄성이 확립된다. 인간의 존엄성은 그가 하느님 앞에 서 있다는 것,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에 의해 받아들여졌다는 것에 근거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바른 관계를 맺도록 해방된 인간은 자신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삶에 대한 권리를 의식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인의의 핵심적 메시지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것과 삶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동전의 양면이다. 삶에 대한 권리를 신학적으로 명석하게 규명한 신학자는 본회퍼(Dietrich Bonhoeffer)이다. 그는 인의론의 관점에서 ‘자연적인 삶’이라는 개념을 창안하였고, 이 ‘자연적인 삶’의 권리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본회퍼에게 “자연적인 것은 타락한 세계에서 하느님에 의해 보존되는 생명의 형태, 그리스도를 통한 인의와 구원과 갱신을 고대하는 생명의 형태이다.” 바로 이 생명의 형태가 ‘자연적인 삶’인데, 본회퍼는 이 ‘자연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육체적인 삶과 정신적인 삶으로 구별하고, 인간은 육체적인 삶뿐 아니라 정신적인 삶에서도 자기 목적으로 존재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육체는 그 무엇인가의 도구나 수단이 될 수 없고, 인간의 정신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오직 육체의 온전함이 유지되고, 정신의 자유가 보장될 때 실현된다.
이를 위해서는 육체적인 삶의 자연적 권리들과 정신적인 삶의 자연적 권리들이 보장되어야 한다. 육체적인 삶의 권리들은 자의적인 살해를 당하지 않을 권리, 생식의 권리, 강간?착취?고문?자의적 체포로부터 보호받을 권리 등이다. 정신적 삶의 자연적 권리들은 판단의 자유, 행동의 자유, 향유의 자유이다. 본회퍼의 권리 장전은 나치 독재가 판을 쳤던 어두운 시대의 산물이지만, 그의 인의론적 권리 이론의 관점과 방법을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사람은 ‘자연적 삶’의 권리를 심화하고 확대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과 같이 대량실업과 사회적 양극화가 심각한 상황에서 육체의 온전함과 정신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기본소득에 대한 인간의 권리를 권리장전에 추가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이 업적과 무관하게 확립된다는 인의론의 가르침은 사회적 인정과 복지의 향유를 업적에 직결시키는 이데올로기와 그 이데올로기를 체화한 업적사회를 넘어설 수 있는 안목을 열어준다. 물론 인간은, 가능한 한 공동체를 위해 업적을 이루어야 하고 그 능력을 갖추어야 하지만, 업적이 인간의 존엄성을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 진정으로 인간적인 사회는 업적 능력이 없는 사람도 업적 능력이 있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인간으로 인정받는 사회이다. 인간의 존엄성과 자연적 권리들을 존중하는 사회에서는 권리와 의무가 대칭을 이룰 수 없다. 인간의 존엄성에 부합하는 삶을 영위하는 것이 인간의 권리로 인정되는 사회에서는 복지를 향유할 권리의 보장을 노동 의무나 업적의 의무와 결부시킬 수 없다.
따라서 인의론의 지평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삶에 대한 권리를 옹호하는 신학적·윤리적 관점에서 볼 때, 기본소득 구상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3. 하느님의 정의와 기본소득 보장
기독교윤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하느님의 정의로부터 기본소득 구상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를 검토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성서에서 하느님의 정의는 어떤 개념이나 어떤 객관적인 척도로 주어져 있지 않다. 하느님의 정의는 오직 하느님의 구원과 해방의 행위로부터 인식되고, 그 인식은 하느님의 행위에 부합하는 인간의 응답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무리들 편에 서서 그들을 구원하고 해방하는 행위를 통해 자신이 야훼임을 알린 출애굽 사건 이래로 성서를 관통하는 기본 모티프이다. 하느님의 정의로운 행위를 통해 하느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들은 그들 사이에서도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서에서 정의는 관계론적 개념이다.
하느님의 정의의 요구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처절한 삶과 그 종살이로부터 해방시킨 하느님의 위대한 구원 행위를 기억하는 데서 출발한다. 계약법전에서 강조하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의 책임은 바로 이와 같은 역사적 회상에 터를 잡고 있다. “너희는 너희에게 몸붙여 사는 사람을 구박하거나 학대하지 말아라.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몸 붙여 살지 않았느냐?”(출 22:20, 공동번역) 이와 같은 약자 배려의 정신은 과부와 고아에 대한 보호(출 22:21f.), 떠돌이꾼에 대한 보호(레 25:35) 등으로 이어지며, 타작이나 수확을 할 때 이삭을 남겨 두거나 열매를 남겨 두어 “가난한 자와 몸붙여 사는 외국인이 따 먹도록 남겨 놓으라”는 분부로 나타난다.
출애굽 전승의 핵을 이루는 약자 배려의 정신은 사회기금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십일조 제도(신 14:28-29)로 발전되었으며, 예언자들에게도 계승된다. 예언자들에게 하느님의 정의에 대한 지식과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하는 것은 둘이 아니라 같은 동전의 양면이었다.(렘 9:23f.; 렘 22:15; 사 58:10 등) 이러한 예언자 정신은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 하느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는 예수의 선언으로 이어진다.(눅 6:20-21)
이처럼 하느님의 정의를 가난한 사람들의 배려와 보호에 직결시키는 성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생존에 필요한 소득에 대한 권리가 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여러 모티프를 제공한다. 만나 이야기(출 16:1-36), 주기도문(마 6:11; 눅 11:3 병행), 포도원 주인의 비유(마 20:1-16), 최후심판의 비유(마 25:31-46)가 그것이다. (지면 관계상 이 성서 모티프들에 대한 상세한 주석은 생략한다.)
이중 특별히 만나 이야기는 이집트에서 탈출한 출애굽 공동체가 이집트의 축적 경제에 대항하여 추구해야 했던 대안적인 삶의 상징으로 새길 수 있을 것이다. 출애굽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기본 욕구를 충족시킬 자원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하느님이 아무런 전제 없이 제공한 ‘일용할 양식’을 받았다. 그들은 ‘일용할 양식’이 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 없이 배분되어야 하고, ‘일용할 양식’보다 더 많은 것을 챙겨서 축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워야 했고,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정의임을 인식해야 했다.
‘만나’ 모티프는 주기도문 제2항목 첫째 기원(“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십시오.”)에 다시 등장한다. ‘일용할 양식’에 대한 마르틴 루터의 해석은 매우 중요하다. 그에 따르면 ‘일용할 양식’은 “삶을 위한 양식과 필수품에 속하는 모든 것, 먹는 것, 마시는 것, 옷, 신발, 집, 정원, 경작지, 가축, 현금, 순수하고 선한 배우자, 순박한 아이들, 착한 고용인, 순수하고 신뢰할 수 있는 통치자, 선한 정부, 좋은 날씨, 평화, 건강, 교육, 명예, 좋은 친구, 신용 있는 이웃 등”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인간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기본 욕구를 충족시키는 모든 것이다.
이 ‘일용할 양식’은 나 혼자 차지해서는 안 되고, ‘우리’ 모두에게 허락되어야 한다. ‘우리’가 모두 “똑같은 기본적 필요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을 인식한다면, 레오나르도 보프(Leonardo Boff)가 말한 바 “그 필요를 집단적으로 충족시킬 때 우리는 형제자매가 된다”는 의미도 자명해진다. 곧 ‘일용할 양식’의 문제는 사회정의와 직결된 문제임을 뜻한다. 로호만(J. M. Lochman)은 하느님이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햇빛을 비추고 비를 내리는 것처럼 이 “양식은 수고하는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허락된다”고 주장한다. “하느님의 의는 그 근본에서 효용성이라든가 이윤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은혜 충만한 공의이다. 이 점을 주목할 가치가 있다 - 사회적 결과를 지향한다는 점에 이르기까지 그렇다.”
포도원 주인의 비유는 ‘업적에 따른 정확한 분배’를 뒤집어엎는 ‘하느님의 기이한 의’를 묘사한다. 하느님의 정의는 노동의 업적과 무관하게 삶의 필요에 따라 재화를 나누어 주는 행위를 통해 드러난다. 업적과 보상을 서로 분리하고, 보상과 삶의 필요를 직결시키는 것이 하느님의 정의이다. 그것이 기이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업적과 보상을 서로 결합하는 일이 마치 하늘이 정한 법인 양 생각하는 통념이 그만큼 강하게 자리를 잡은 탓이다. 이러한 통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노동할 기회가 전혀 없거나 노동 업적이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필요에 따른 분배에 참여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분개할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궁핍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최후심판의 비유는, 하느님의 정의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기본 욕구를 충족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연대해야 함을 전율적으로 증언한다. 최후의 심판자가 의로운 사람들에게 한 말은 의미심장하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 25: 35-36, 공동번역) 의로운 사람들이 의아한 마음으로 최후의 심판자에게 그들이 언제 그렇게 하였느냐고 묻자 그는 “네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의로운 사람들이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은, 울리히 두흐로(Ulrich Duchrow)와 게르하르트 리트케(Gerhard Liedke)가 잘 요약한 바와 같이, “양식, 주거, 의복, 건강, 자유(존엄성)”와 같이 “인간의 경제적·정치적 기본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필요한 자원을 제공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이웃의 기본 욕구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에 따라 우리와 하느님의 관계가 결정되고 우리의 미래의 삶이 결정된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하느님의 정의는,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아무런 전제 없이 ‘일용할 양식’을 부여할 것을 요구한다. 루터가 해석한 ‘일용할 양식’의 내용은 오늘 우리가 말하는 ‘기본소득’과 맥이 통한다. 수고한 사람이나 수고하지 않은 사람 모두에게 ‘기본소득’을 주어 그들이 인간의 존엄성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갈 기회를 주는 것은 하느님의 구원하고 해방하시는 정의에 부합하는 일이다.
기본소득 구상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그 구상이 과연 실현 가능성이 있을까 하고 의문을 품을 때가 많다. 소득분배 측면에서 보면, 기본소득은 국민소득 가운데서 미래를 위한 저축을 뺀 나머지 부분을 자본소득과 노동소득으로 나누고, 노동소득을 다시 임금소득과 기본소득으로 나누면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그 성립은 이론적으로 명확하다. 소득재분배 차원에서 보면, 자본소득과 노동소득 가운데서 일부를 조세로 떼어낸 다음에 이를 기본소득의 재원으로 삼으면 되므로 그 또한 이론적으로 문제가 없다. 독일의 기본소득 이론가들 가운데에는 소비세(부가가치세)를 현재의 15퍼센트에서 50퍼센트로 올리면 모든 독일 사람들이 한 달에 1,800유로(약 260만원)의 기본소득을 받을 수 있다고 계산했다.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구상이다.
기본소득 구상은 실현 가능하다. 문제는 기본소득 구상의 도입을 가로막는 업적주의나 노동연계복지 같은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비판적으로 극복하는가, 노동과 소득의 연계를 완강하게 주장하는 교회의 업적주의 멘탈리티를 어떻게 해소하는가이다. 교회는 그 자신과 우리 사회가 이러한 이데올로기와 멘탈리티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계몽활동을 펼쳐야 할 것이고, 기본소득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애쓰는 시민사회와 사회세력의 노력을 지지해야 한다. 그러한 교회는 기본소득 구상의 도입을 위한 사회적 합의와 정치적 합의를 촉진하게 될 것이며, 이를 통하여 사회적 신인도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복음과상황 2014년 3월호
강원돈
한신대 신학과와 동 대학원 신학과에서 기독교윤리학을 공부했다. 독일 함부르크 대학교, 보훔의 루르대학교 개신교신학부에서 기독교 사회이론과 사회윤리를 전공하고 <생태학적 노동 개념을 정립하여 경제윤리의 근거를 새롭게 설정하기>라는 논문으로 신학박사 학위(Dr.theol.)를 받았다. 현재 한신대 신학과 교수이며, 저서로는 《지구화 시대의 사회윤리》 《인간과 노동》 등이 있다.